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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우드-94화 (94/275)

094화

내 분신을 지우고 날아가며 멀어졌던 차크람의 파공음이 다시 가까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본능적으로 뒤를 돌아보니, 저 멀리 날아갔던 차크람이 궤도를 뒤틀어 내 쪽으로 돌아오는 중이었다.

뭐야, 자석이라도 붙여놓은 거냐?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황급하게 몸을 피했고, 거기에 맞춰 다시 차크람이 궤도를 바꾼다.

“크.”

차크람이 뺨을 스치고 다시 적의 손등에 걸린다. 낮은 웃음소리와 함께 녀석이 손목에 걸린 차크람을 빙글빙글 돌렸다.

― 피라. 산 자의 육신은 나약한 법이지.

굉장히 기분이 좋아진 것 같은 목소리를 들은 나는 퉁명스럽게 쏘아붙였다.

“옘병, 누가 들으면 팔이라도 잘라낸 줄 알겠다, 찐따 같은 새끼.”

뺨에 생채기 하나 내고는 산 자의 육신이 나약하단다. 상처 하나 더 입히면 너무 좋아서 선 채로 오줌을 지릴 기세군.

갑자기 서너 개의 차크람이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날아온 것을 보면, 내 말이 녀석의 마음에는 썩 들지 않았던 모양이다.

“좋아, 한번 해보자고.”

그 이후로 싸움은 참 기묘한 방식으로 진행되기 시작했다.

나는 눈앞의 가면 쓴 시체와 싸우는 게 아니라 녀석이 던진 차크람과 싸우는 중이다. 그리고 내 적은 나와 싸우는 대신 내가 만들어내는 분신과 싸우는 중이다.

둘 중 하나라도 여유가 있다면 남은 한쪽이 굉장히 힘든 싸움을 이어 가야 하는 상황이지만, 서로 신경 쓸 것이 있어서 그러지 못하고 싸움은 평행선을 달리는 중이었다.

― 우리의 숫자는 끝이 없고, 죽지 않고 다시 일어난다. 이는 곧 네놈들의 패퇴를 의미하니.

말이 많네. 여유가 있는 건가.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머리통을 썰어내기 위해 쇄도하는 차크람을 튕겨냈다.

“시간이 없다라.”

그럼 만들어야겠지.

하나…… 둘……. 둘 반.

다른 것들을 튕겨내며 시간을 재는 사이 다시금 내가 튕겨냈던 차크람이 다시 나를 노리고 돌아온다. 힘을 적절하게 조절해서 튕겨낸다면, 차크람이 다시 날아오는 시간을 어느 정도 조절할 수 있다.

강하게 튕겨내면 최대 3까지도 숫자를 셀 수 있다. 약하게 튕겨내면 1을 세기 전에 도착한다. 굳이 표현하자면 반 정도라고 해야 하나.

튕겨내는 힘을 조절해서, 지금 내 주변의 대기를 가르며 날아다니는 차크람들이 한 번에 나를 노리고 밀려들도록 해야 한다. 그걸 다 있는 힘껏 튕겨내면, 3을 셀 정도의 여유를 확보할 수 있다.

“좋아.”

그 정도 시간을 벌 수 있다면 달려들어 저 녀석에게 치명상을 줄 수 있겠지. 계획은 세웠으니, 이제는 단순 계산으로 머리가 아파질 시간이다.

“죽을 맛이네.”

당장 이리저리 흔들리는 도마뱀의 거체 위에서 눈앞으로 달려드는 차크람을 튕겨내고 피하면서 계산하고 있으려니, 어떻게 보면 별거 아닌 계산인데도 머리가 다 지끈거릴 지경이다.

마치 헤비메탈 콘서트에서 수능을 보는 기분이라고 해야 하나.

“……으아아아!”

그렇게 5분 정도 뒤, 마침내 나는 내 몸을 노리고 일제히 날아드는 차크람의 군세를 맞이하게 되었다. 그동안 아끼고 있던 마력을 한 번에 뿜어내며 크게 검을 휘두르자 까가가가강, 하는 소리와 함께 차크람들이 일제히 튕겨져 나간다.

“죽어.”

올라타 있는 도마뱀의 등짝을 있는 힘껏 밟고 튀어 나가자 귀를 타고 쒜에에엑 하는 바람 가르는 소리가 들린다. 내가 돌격하는 사이, 녀석은 분신의 공격을 막아내고 있는 중이었다.

― 이……놈이!

녀석은 자신을 향해 급하게 달려드는 나를 향해 검을 휘두를 준비를 한다.

자, 셋 중에 하나 골라. 하나는 니 정면에서 허리를 숙인 다음 검을 올려붙일 거고, 하나는 뛰어올라서 검을 내려찍을 거야. 그리고 마지막 하나는 네 뒤로 돌아갈 거다.

하나는 나고, 하나는 분신이고, 다른 하나는 허상이야.

“가위바위보 한다 생각하고 찍어봐. 이 씹새야!”

잘못 찍으면 죽을걸.

― 나를 바보로 보는 거냐!

녀석은 360도로 검을 휘둘러 뒤로 돌아간 형상을 베어 넘기고, 그 기세를 타 정면에서 허리를 숙인 채 검을 올려붙이는 형상을 주먹으로 내려찍었다.

뻐걱, 하는 소리와 함께 내 오른 어깨 위로 녀석의 주먹이 내려 찍히고, 내 몸에서 나는 소리라고 믿기 힘든 참 기괴한 소리가 울려 퍼진다.

나는 녀석을 보고 멀쩡한 다른 손으로 엿을 먹였다.

“븅신, 바보 맞네.”

진짜는 맞췄지만, 분신은 못 맞췄다. 분신이 뛰어올라 내려찍은 검이 녀석의 골통을 빠개버린다. 오른 어깨가 작살난 나는 왼손으로 검을 꼬나쥐고 녀석의 가슴팍에 칼을 박아넣었다.

녀석의 썩은 육신이 마침내 그 공격을 끝으로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한다.

― 이대로 끝나지는 않겠다!

무너지기 시작한 육신이 나에게 달려들어 그대로 나를 확 끌어안으려 든다. 코를 타고 밀려오는 썩은 내와, 역겨운 살점의 형체보다 더 무서운 건, 지금 바로 뒤에서 나를 향해 날아오고 있을 차크람들이다.

“크…….”

이러면 차라리 녀석을 끌어안은 채 드러누워야 한다. 어차피 이 자식의 몸은 무너지는 중이니까.

“우아아아아악!”

몸을 움직이려고 했지만, 곧바로 박살 난 어깨를 타고 격통이 치민다. 나는 이를 갈면서 억지로 몸을 뒤틀었다. 할 수 있다. 강철같은 정신은 육체의 고통을 초월하는 법이라고들 하잖아.

“초월은 개애뿌울!”

억지로 몸을 뒤로 젖혀 녀석과 함께 바닥에 엎어진 나는 오른쪽 어깨를 타고 전달되는 참으로 신비한 통증과 함께 몸을 떨었다.

고통을 이겨내느라 번쩍이는 머리 위로 차크람들이 씽씽 하는 소리를 내며 스쳐 지나간다. 마침내 나를 끌어안고 있던 시체가 완전히 무너져 내리고, 흉악한 소리를 내며 날아다니던 차크람도 그 힘을 잃고 바닥에 떨어졌다.

“시체랑 허그한 채 죽을 뻔했네.”

세상에 사람이 죽는 이유가 참 많다지만 그딴 사인으로 죽을 수는 없지.

“으윽?!”

주인이 죽자 통제력이 약해진 건지 뭔지, 나름대로 얌전히 있던 도마뱀이 갑자기 몸을 뒤틀며 날뛰기 시작한다. 왼손으로 검을 박아넣어 억지로 몸을 고정시킨 나는 도마뱀의 등짝을 한 번 툭 찼다.

“자식이, 주인이 죽었으면 곱게 따라가야 할 거 아니야.”

안 간 걸 보니 충성심이 개만도 못하군. 안 따라갈 거면 내가 보내주마. 내가 아무리 오른 어깨가 작살났어도 이성도 없이 날뛰는 짐승 정도는 잡을 수 있다.

상의를 벗어 던진 나는 오른팔 대신 분신을 이용해 작살난 어깨에 붕대를 감은 다음, 도마뱀의 등줄기를 타고 거대한 머리통 쪽으로 주르르 미끄러졌다.

“하나…… 둘……!”

팍, 하고 도마뱀이 몸을 뒤트는 순간에 맞춰 뛰어오른 내 몸을 다시 중력이 붙잡아 아래로 끌어당긴다. 떨어질 위치는 정확히 도마뱀의 정수리다.

“죽어.”

철벅, 하는 느낌과 함께 정수리에 박힌 검 사이로 고름이 흘러나온다. 뼈는 못 뚫었네.

이 시체 도마뱀의 골통이 하이랜더의 두개골보다 튼튼하려나.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분신을 만들어 살점에 박힌 검을 발로 힘껏 내려찍게 했다. 빠각, 하는 소리와 함께 칼끝이 두개골을 뚫었다.

손잡이를 잡고 이리저리 휘젓자, 썩은 체액과 살점이 사방팔방 튀며 도마뱀이 아까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격렬하게 몸을 뒤튼다. 그 힘을 이겨내지 못하고 검이 뽑혀 나가고, 나는 허공에 떠올랐다.

“마틴 님!”

내가 도마뱀 위에서 싸우는 사이, 다른 시체들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땅에서 분투하고 있던 클로에가 뛰어올라 추락하는 나를 양손으로 안아 들고, 땅으로 착지했다.

그녀의 능력 덕분인지, 착지할 때의 충격은 전혀 없었다.

“오, 나의 공주님. 와주실 거라 믿고 있었어요.”

“…….”

너무 무반응인데. 조금 더 해볼까. 나는 픽 웃고는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키스해주세요.”

나를 안아 든 클로에의 표정이 상당히 애매하게 변한 채 나를 내려놓고 한마디 한다.

“헛소리를 하시는 걸 보니 몸은 괜찮으신 것 같네요.”

대답을 들은 나는 정색을 한 채 대꾸했다.

“헛소리라니, 말이 너무 심하다. 어쨌든, 이걸로 대충 정리된 것 같은데.”

가장 큰 위협이던 거대 도마뱀은 이리저리 날뛰며 같은 편인 시체들을 짓밟으며 발광하다 이내 구슬픈 단말마와 함께 쿵, 하고 바닥에 쓰러졌다.

“지휘관도 죽었고, 거대 병기도 죽었고.”

통솔을 받고 있던 언데드들이 마침내 본능에 따라 원시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 사이, 하늘에 드리워져 있던 오로라가 점점 늘어지더니, 마침내 땅에 닿았다.

― 고생하셨습니다, 성역화가 끝났어요!

마법으로 증폭된 엘렌의 외침에 에단이 주변을 향해 외쳤다.

“퇴각한다, 나팔을 울려라!”

부우우우, 하는 나팔 소리가 전장에 울려 퍼지고, 병사들은 이 순간만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후퇴하기 시작한다.

언데드의 무리가 후퇴하는 병력을 공격하기 위해 뒤쫓았지만, 성역화가 진행된 장소 앞에서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한 채 멈췄다.

이따금, 억지로 경계선을 뚫고 들어오려고 발악하는 녀석들이 있었지만 백열의 화염에 휘감겨 한 줌의 재로 변하는 결과만을 맞이할 뿐이었다.

“정말 고생 많았네. 이번 일에 자네들이 세운 공에 대해서는 절대로 잊지 않겠네.”

“잊어도 괜찮습니다. 세운 공에 대한 적절한 보상만 있다면야.”

내 말에 에단이 웃으면서 내 등을 팍 하고 쳤다. 농담인 줄 아는 모양인데.

“자네들이 구한 사람이 수만이 넘을 거야! 함께 싸울 수 있었다는 게 영광스럽군.”

영광은 무슨. 빨리 씻고 자고 싶다. 마지막에 그 석고 가면 언데드가 포옹을 해주는 바람에 온몸에서 시체 냄새가 풍기는 중이다.

“사령관도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간단하게 인사를 건넨 나는 엘렌을 바라봤다. 이야, 얼마 지난 것 같지도 않은데 얼굴은 새하얗게 질리고 눈가에는 다크서클이 흘러내리는 모습이 마치 한 마리 판다 같군. 심지어, 그녀의 양손에 박혀있는 보석을 중심으로 이전처럼 핏줄이 꿈틀거리는 중이다.

“이제 성역화에는 네가 따로 신경 쓸 일이 없는 거지?”

내 말에 엘렌이 고개를 끄덕였다.

“안정화는 끝났어. 앞으로는 대기 중의 마력을 빨아들여서 스스로 유지될 거야.”

“이전처럼 도마뱀이나 언데드들이 지휘를 받아 일제히 저 오로라의 경계선을 때린다면?”

내 말에 엘렌이 작게 한숨을 쉬었다.

“성역화를 유지하는 장벽이 부서지더라도 복구되는데 필요한 시간만 주어진다면 이내 다시 복구될 거야. 성역화의 복구에 필요한 시간을 버는 건, 요새의 사령관님과 병사들이 노력해야겠지.”

지원군이 오는데 필요한 시간은 충분히 벌어 줬으니, 우리는 이제 휴식을 취한 다음 이곳을 떠날 계획이다.

“조금 더 머무르며 요새의 방어를 도와줄 수는 없는가?”

그 말에 난감한 표정을 짓고 입을 열려고 하는데, 엘렌이 차분한 어조로 먼저 대답했다.

“죄송해요. 사령관님, 저희는 여기에 세자 저하의 명을 받고 왔답니다. 전황이 바람 앞의 등불 같아서 드릴 수 있는 최대한의 도움을 드렸지만, 이후의 방침에 대해서는 세자 저하께서 따로 말씀을 내려주지 않으시는 한 힘들 것 같아요.”

엘렌의 말에 에단이 으음, 하는 소리를 내고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네. 일단은 그렇게 알고 있도록 하지. 혹시, 방침이 바뀌게 된다면 언제든지 말해주게.”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인사를 마친 우리는 에단과 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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