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드우드-95화 (95/275)

095화

헤어져서 숙소로 향하던 나는 엘렌에게 말을 걸었다.

“꽤 차갑게 거절하던데. 이럴 때 쓰기 위해서 마법을 배웠다고 외치던 사람이 아닌 것 같았어.”

“방금 전의 요청은 정말 도움이 필요해서라기보다는, 심적으로 기댈 곳이 필요해서 한 요청이야. 도움이 필요한 것과, 도움이 필요하다고 느끼는 건 구분해야지.”

성역화의 보호가 있으면, 요새를 지키는 병력과 지금까지 해둔 준비로도 충분히 지원군이 도착하기 전까지 버틸 수 있을 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단이 머물러 달라고 한 이유는 간단하다.

불안하니까. 그런 점에서 엘렌의 말은 일리가 있다.

“나는 요새 사령관이 부탁을 해서 도와준 게 아니야. 이 사람들이 도움이 필요할 것 같다고 내가 판단해서 저지른 일이지. 도움은 내가 주는 거니, 판단도 내가 하는 게 당연하잖아?”

말을 마친 엘렌이 나와 클로에를 향해 살짝 고개를 숙여 보인다.

“두 사람이 기꺼이 협조해줘서 정말 고마워. 불만을 말하고 싶었다면 충분히 그럴 수도 있었을 텐데.”

“저 시체들의 숫자를 줄이지 않고 우회하려고 들었다가는 더 난감한 상황에 부딪힐 수도 있어.”

나도 필요성을 느꼈기에 별다른 말을 안 한 거다. 게다가, 전후 결과만 두고 보자면 나쁘지 않은 것도 사실이잖아.

“저야 뭐, 마틴 님이 시키신 일은 군말 없이 하니까요.

클로에와 내 대답을 들은 엘렌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은 푹 쉬자. 아마 별다른 일은 없을 거야.”

엘렌의 말대로 우리는 각자의 숙소로 돌아가서 휴식을 취했다.

“거 참, 빨리 붙어서 좋다.”

작살났던 어깨는 지금도 여전히 욱신거리지만, 그래도 굉장히 빠르게 회복되는 중이었다. 이 정도 회복 속도라면 내일 아침이 되면 완전히 나을 것 같은데.

뭐, 선지가 튀어나오고 눈깔이 툭 하고 빠지는 식의 상처는 입어 본 적이 없어서 모르겠지만, 회복 속도만 생각해본다면 그런 상처도 어떻게든 숨만 붙어 있다면 회복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다.

그렇게 해가 저물고 나서, 갑자기 마법사 한 명이 나를 찾아왔다.

“마틴 님, 세자 저하로부터 연락이 왔습니다.”

말을 마친 그는 수정구를 하나 들고 있었다. 뭐야, 어떻게 해야 하는 건데.

― 전달했는가?

“그렇습니다. 세자 저하.”

수정구에서 목소리가 들리고, 곧바로 마법사가 고개를 깊게 숙이며 대답했다. 목소리 자체는 여기와 왕성 사이의 거리가 멀어서 그런지 잡음이 굉장히 많이 섞여 있었다.

그래, 칠색 의회에서 멀쩡한 사람 성대를 뜯어내고 아기 피를 뽑아냈던 이유가 이거였군.

다행히도, 완전히 못 알아들을 정도는 아니었다.

― 좋아. 긴밀히 나눠야 하는 이야기니 너는 돌아가서 기다려라.

마법사가 돌아가고, 나는 수정구를 챙겨서 방으로 들어갔다.

“무슨 일이 있는지 여쭈어봐도 괜찮겠습니까?”

― 베로나 제국에서 병력을 파견했다.

나는 그 말에 허, 하는 소리를 냈다.

“그린모스 늪지대로 말씀이십니까?”

― 그럼 왕도로 보내겠나? 자신들의 잘못도 있고, 언데드의 창궐을 그대로 두고 볼 수는 없다는 식의 말과 함께 그린모스 늪지대로 병력을 보냈어.

그린모스 늪지대는 제국의 남쪽과 왕국의 남쪽 경계를 공유한다. 따라서, 병력을 파견한 목적도 어느 정도는 짐작이 된다. 베로나 제국에서 보낸 병력은 그린모스 정글로 약 12-14일 후 도착할 예정이다.

“우리가 여기에 붙들려 있는 사이 병력을 몰고 유적까지 치고 들어갈 모양 같습니다.”

― 뭔지는 모르겠지만, 겸사겸사 유적에서 목표로 했던 물건도 확보할 요량이겠지.

나는 그 말에 잠깐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혹시, 노리고 있는 물건이 뭔지는 짐작 가시는 것이 전혀 없습니까.”

설마 내가 여기에서 어깨가 작살나 가면서 몰려오는 시체 끌어안고 비명 지르는 동안 왕도에서 놀자판을 열고 있었던 건 아니겠지.

― 책이더군. 하지만, 어떤 용도로 쓰는지는 아직 모른다. 죽은 녀석들을 이끄는 게 그 유명한 카루토스 타카운인 걸 보니, 안티온 대도서관에서 관련 자료를 찾아냈던 모양인데…… 첩보국에서 관련 조사에 착수했으니, 조만간 대답을 들을 수 있겠지.

첩보국이라. 왕도에서 만날 때마다 바쁘다고 죽는 소리를 내던 알버트는 잘 지내고 있는지 모르겠네.

올리비에 황녀는 자신이 찾고 있는 물건이 어떤 용도로 쓰는 건지 확실하게 알고 있을 테니까. 첩보국에서 열심히 노력해 준다면 어렴풋이나마 녀석들이 찾고 있는 책의 정체를 알 수 있을지도 모른다.

― 안티온 대도서관에 그런 자료가 있으면 진작에 움직일 것이지. 왜 이제 와서 저 지랄들인지.

세자의 말에 나는 희미하게 웃음을 흘렸다. 아마 최근에 복원에 성공했을 것이다. 안티온 대도서관의 역사는 카루토스 타카운과 같잖아.

그렇게 긴 시간 동안 보관되었다면, 아무리 잘 보관하더라도 손상이 없을 수는 없다. 아마 조각난 종이 쪼가리 모아놓고 퍼즐 맞추기 놀이를 몇 년은 해야 했을걸.

― 우리더러 전선을 유지하며 정글까지 밀고 올라오라고 하더군, 그 사이 자신들이 뒤를 치겠다고.

“전략 자체는 이상적이네요.”

몰려오는 언데드의 군세는 지금 파이크 왕국을 노리고 있다. 제국에서 뒤를 친다면 카루토스 타카운이라고 하는 시체왕은 두 개의 전선을 유지해야 한다. 제아무리 언데드라 해도 부담이 안 될 수가 없지.

― 이상적인 전략이라서 우리로서는 거절할 명분이 마땅치 않아. 하지만 녀석들이 노리는 물건은 확실하지.

“속도전이 되겠군요.”

내 말에 세자가 수긍했다.

― 그래, 제국 놈들의 병력과 아군 중 누가 먼저 유적에 도달하느냐의 싸움이 될 거다. 필요한 지원이 있다면 말하도록, 가능한 선에서는 지원해줄 테니.

나는 그 말에 약간 조심스러운 어조로 입을 열었다.

“이런 말씀을 올리면 세자 저하를 모독하는 말이 될까 두렵습니다만…….”

― 내 면상에 칼을 들이밀겠다는 소리가 아니라면 넘어가 줄 테니 말해봐.

그래? 그렇게까지 말한다면야. 나는 그 말에 으음, 하는 소리를 낸 다음 입을 열었다.

“연회 자리에 세자비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 ……자네, 설마.

나는 세자의 말에 급하게 대답했다.

“세자 저하께 칼을 들이밀지는 않았습니다.”

설마, 세자씩이나 되어서 3초 전에 말한 약속을 취소하지는 않겠지.

― 이 망할 새끼. 나보고 그 황년과 혼사라도 치르라는 건가?

나는 그 말에 대답했다.

“시도는 해볼 수 있지 않겠습니까? 어차피 올리비에 황녀는 제국을 계승할 황족은 아닌 걸로 압니다.”

제아무리 제1황녀라고 해도 제국을 계승할 것이 아닌 이상 제국의 입장에서도 나쁘지만은 않은 거래일 것이다. 왕국 세자의 아내로 들어간다면 파이크 왕국에 대한 베로나 제국의 영향력은 훨씬 커지게 되니까.

제국의 황태자는 따로 있을 것이다. 올리비에 황녀가 제국을 이어받을 후계자였다면 파이크 왕국 신년 행사에 머리통을 들이밀지는 않았겠지.

물론, 그 여자라면 황태자도 구워삶아서 자기 아래로 깔아뭉개 놓았겠지만.

― 성공할 가능성은 크지 않아.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제국의 대신들 입장에서는 나쁘지 않은 거래라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올리비에 황녀가 자긴 애비 찾아가서 '팔려가고 싶지 않아요 잉잉' 이 지랄을 하면 딸만 보면 맛탱이가 가는 걸로 유명한 베로나 제국의 황제는 신하들의 입을 다물게 한 다음 거절할 거다.

“나중에는 오히려 세자 저하께서 거절해야 하실 겁니다.”

제아무리 세자가 대단하다고 해도 올리비에 같은 괴물을 곁에 두었다간 정신 차려보니 왕권을 전부 털려버릴 가능성이 높다.

“어디까지나, 신경 쓸 일을 만들어서 귀찮게 하자는 겁니다. 그린모스 늪지대에 신경을 쓸 수 없을 테니, 이 전장에서 제가 활동하는 게 훨씬 쉬워집니다.”

― 왕국 세자의 혼사를 이용해서 시선을 끌겠다니. 네가 지금까지 해낸 일이 없었다면 지금 바로 왕도로 잡아들여 목을 친 다음 저잣거리에 걸어놓았을 거다.

나는 그 말에 차분한 대답을 돌려주었다.

“제 능력뿐 아니라, 사안의 심각성 또한 고려하셔야 합니다.”

― 그래서 넘어가 주는 거다. 확실히…… 나쁜 시도는 아닐 수도 있겠군.

그 대답을 들은 나는 잠깐의 침묵 끝에 입을 열었다.

“혹시라도, 올리비에 황녀를 찍어 누를 수 있다고 생각하시지 않길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 설마 내 능력이 부족하다는 건가?

그래, 듣기에 따라서는 기분 나쁜 말이라는 건 십분 이해한다. 하지만, 나는 세자의 말에 곧장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불가능할 겁니다.”

내 대답을 들은 세자가 기가 막히다는 어투로 말했다.

― 네 녀석은 면상에 칼 들이미는 행위를 제외한 다른 무례는 전부 범할 생각이구나.

괜찮다고 말한 건 너잖아 인마. 후회하기라도 하는 거냐?

설마하니 왕국의 세자씩이나 되는 놈이 지금 와서 딴말하지는 않겠지. 사람은 원래 말을 조심해야 하는 거야.

속으로는 이런 불순한 생각을 하면서도 내 입에서는 공손하기 짝이 없는 소리가 나왔다. 그야, 사람은 원래 말을 조심해야 하는 거잖아.

“방금 질문만큼은 돌려서 말할 만한 이야기가 아니었습니다. 기분이 나쁘셨다면 죄송합니다.”

내 말에 대답하지 않고 있던 세자가 끄응, 하는 소리를 냈다. 나는 그 틈을 타 말을 더 보탰다.

“세자 저하, 세자 저하께서는 올리비에 황녀와 같은 나이에 칠색 내각과 같은 조직을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고 만들 수 있으셨겠습니까?”

내 말을 들은 세자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 시도할 엄두도 나지 않는군. 좋아. 네 충언의 요지는 이해했다. 마음 깊숙이 새겨두도록 하지.

그렇지? 그건 사람이 할 만한 일이 아니야. 올리비에 황녀의 나이가 얼마나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정도 규모의 조직을 굴리기 위해서는 개인의 능력만큼이나 시간의 흐름이 중요하다.

아무리 적게 잡아도 13-14세 사이에 올리비에는 벌써 칠색 내각을 굴릴 계획을 짜고 착실히 실행하고 있었다는 거다.

그 나이에 다른 사람들 머리 위에서 노는 일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젠장, 그게 어딜 봐서 사람이야.

세자의 능력이 얼마나 뛰어난지는 모르겠지만, 올리비에만큼 뛰어날 수는 없다.

― 해야 할 말은 다 전했군. 특이상황이 발생하면 다시 연락하도록 하지. 아, 수정구는 만약을 대비해서 챙겨두게. 추가로 자네가 인지해야 하는 사항이 있으면 연락하지.

“그러겠습니다.”

그걸로 일단 나와 세자의 대화는 끝났다. 나는 수정구를 가방 안에 챙겨 넣은 다음 기지개를 한 번 쭉 켰다.

“어디, 올리비에가 이걸 어떻게 처리하나 한번 보자고.”

너도 한번 엿 먹어봐. 뭐였지, 이런 상황에서 사용하는 적절한 단어가 그거 아닐까. 고백해서 혼내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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