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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우드-96화 (96/275)

096화

세자와 이야기를 마쳤다. 우리는 이 전선에 남아서 롱리버 요새의 병력들과 함께 정글까지 치고 올라가야 할 것 같다. 이야기를 들은 에단은 귀에 입이 걸렸다.

“세자 저하께서 영명하신 결정을 내리셨군! 방어전에서 자네들이 보여준 공적을 생각해본다면,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뜻밖의 증원군이 합류한 기분이야!”

그렇게 말해주니 다행이긴 하네. 어쨌든, 언데드에 대항하는 에단의 능력은 훌륭했으니까. 쿠르스트 산맥에서 봤던 원균과 비교하면 그것 자체로도 모욕인 친구다.

“앞으로 잘 부탁하겠습니다.”

말을 마친 우리는 곧바로 이후 작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진군하기 시작하면 우리는 결국 그린모스 늪지대 안으로 진입하게 됩니다.”

“그래, 정글로 진입한 이후에는 피할 수 없는 난전을 수행해야겠지.”

정글에서의 싸움이 무서운 건 습도와 온도가 아니다. 제대로 확보되지 않은 시야와 수많은 장애물 때문에 발생하는 필연적인 난전이다.

군대가 서로 합을 맞출 수 없게 되면 그 전력은 온전히 발휘되지 않는다.

“빠르게 치고 나가야 합니다. 세자 저하께서는 베로나 제국의 군대가 유적에 도착하기 전에 아군이 유적에 도착하기를 원하십니다.”

“유적에서 구할 수 있는 유물은 그것 자체로도 국가 발전에 기여할 테니까.”

이 세상에서 땅을 파 나온 유적은 역사적인 가치뿐 아니라, 마법사들의 연구에도 도움이 된다. 수천 년 전의 유물을 연구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재야에서 굴러다니던 마법사들이 파이크 왕국에 소속되기를 원할 것이다. 고민하던 에단이 입을 열었다.

“기병은 의미가 없어.”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정글에서 말을 타고 달리는 건 미친 짓이고,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일이다.

“병력의 무장도 가볍게 하는 편이 좋을 겁니다.”

언데드들이 사용하는 마법은 갑옷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 물리적인 공격을 가하는 언데드들의 무기는, 까놓고 말해서 상태가 그렇게 좋은 편이 아니다. 무장을 가볍게 해도 괜찮다. 오히려, 습하고 더운 정글에서 강철 갑빠에 두툼한 방패를 들고 갔다가는 언데드가 아니라 더위 먹어 뒈질 거다.

“그렇다고 정예병으로 적군의 전선을 뚫고 들어가는 것도 의미가 없지.”

보급이 필요 없고, 전선에 혼란 같은 것도 모르는 언데드다. 정예병으로 전선에 구멍을 뚫고 들어가 후방을 휘저어도 아무 의미 없다.

“정석적인 소모전 말고는 답이 없어 보이네요.”

클로에의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문제는 소모전을 해서 앞으로 나아가는 상황이 우리에게는 썩 달갑지 않다는 점이다. 베로나 제국군이 유적에 도착하기 전에 우리가 먼저 도착해야 한다.

그림 자체는 베로나 제국군과 파이크 왕국군이 서로 연합해서 언데드를 두들기는 그림이지만, 실제로는 삼파전이니까. 먼저 도착하지 않으면 언데드를 격멸하는 데 성공해도 우리는 베로나 제국군에게 진 거다.

“뭔가 뾰족한 방법이 필요할 것 같은데.”

에단이 시선을 엘렌에게 던졌다.

“성역화 마법을 다시 성공시킨다면 전황이 훨씬 유리해질 거라고 생각하네.”

에단의 말에 엘렌이 고개를 저었다.

“죄송하지만 그린모스 늪지대의 땅은 오랜 세월에 걸쳐 언데드의 기운이 쌓였어요. 그 일대를 성역화하는 건 불가능해요.”

엘렌의 말에 에단이 끄응, 하는 소리를 냈다. 전문가가 불가능하다고 하면 그런 거다. 토를 달 여지는 없다.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고민하다가 요상한 생각 하나를 떠올리고 입을 열었다.

“성역화는 땅 말고 다른 곳에는 시전할 수 없는 건가?”

내 말에 엘렌이 나를 바라봤다.

“무슨 뜻인지 모르겠는데.”

“예를 들면 하늘.”

땅이 오랜 세월 언데드의 기운에 오염되어서 성역화가 불가능하다지만, 하늘은 그렇지 않을 거 아니야. 내 말에 엘렌이 기괴한 표정을 지었다.

“그게 무슨 의미가 있어. 언데드는 어차피 땅 위를 걸어 다니는데. 설사 허공을 떠다니는 부유령이라고 해도 그렇게 높은 고도를 비행하지는 않아. 그냥 마력 낭비일 뿐이야.”

나는 그 말에 고개를 저었다.

“정글은 소나기가 자주 오잖아.”

스콜이라고 하던가. 열대 지역에서 짧은 시간 동안 미친 듯이 쏟아지는 폭우를 의미하는 단어다. 내 말에 엘렌이 순간적으로 움찔했다.

“하늘이 성역화된다면, 쏟아지는 비도 분명히 언데드를 물리치는 힘이 있을 것 같은데.”

내 말에 엘렌이 잠깐 자기 얼굴을 가리고 벅벅 비비기 시작했다.

“성역화된 하늘을 벗어나 땅에 닿게 된다면 몇 초 지나지 않아 언데드를 물리치는 힘은 사라질 거야. 그린모스 늪지대는 이미 언데드의 기운이 잠식했으니까.”

“근데, 사실 그 몇 초로도 충분하잖아. 열대우림의 소나기가 내리는 시간이 짧다고 하지만 그래도 몇 분은 내릴 테고, 양도 엄청날 텐데.”

쉽게 말해서, 하늘에서 성수가 폭우처럼 쏟아지는 거다. 그런 상황이 닥쳐오면 비를 맞는 언데드들이 너무 좋아서 비명을 지르며 네 살짜리 아이처럼 춤출걸.

아예 불가능한 건가? 그럼 어쩔 수 없지. 내가 마법에 대해서는 영 제반 지식이 빈약해서.

“생각을 좀 해볼게. 성역화 마법을 뜯어고친다면 가능할 것 같은데.”

말을 마친 엘렌이 자리에서 일어나 에단에게 인사를 했다.

“저는 다른 마법사들과 관련 이야기를 좀 나눠봐야겠어요. 마틴 레드우드의 말이 완전히 헛소리는 아닌 것 같거든요.”

“알겠네, 필요한 게 있으면 말하게.”

말을 마친 엘렌이 문을 나섰다.

“만약 그게 가능하다면 베로나 제국군보다 훨씬 더 빠른 속도로 진격할 수 있어. 꼭 좀 좋은 소식이 돌아왔으면 좋겠군.”

에단이 손을 비비면서 침을 삼켰다.

“일단, 지원군이 오기 전까지는 요새 안의 병력으로는 진군에 한계가 있다는 것이 내 판단이네.”

“동감합니다. 엘렌 리버플로우 양의 대답도 기다려야 하니까요.”

엘렌의 대답이 오기 전까지 그냥 있을 수는 없기에, 우리는 며칠에 걸쳐 요새의 방어를 유지하며 클로에와 함께 대련을 하고, 미리 세운 작전을 가다듬으며 물자를 준비했다.

그렇게 이틀이 지나고 나서, 엘렌이 팍 하고 지휘부의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뭐야. 이 걸어 다니는 시체는.”

엘렌의 모습은 비참했다. 며칠 동안 씻지도 않고, 잠도 자지 않은 모양이다. 머리는 떡져 있고, 눈에는 눈곱이 붙어있다.

눈에 다크서클은 흘러내릴 지경에, 입고 있는 옷은 이틀 전 지휘부를 박차고 나갈 때 입었던 옷 그대로다.

장담하는데, 지금 엘렌의 입에 키스를 해줄 사람이 있다면, 엘렌이 그 인간과 결혼하면 평생 후회하지는 않을 거다. 어중간한 사랑 정도로는 절대 시도도 할 수 없는 일이니까.

“그린모스 늪지대의 하늘은 성역화가 가능해. 뜯어고치는 데 성공했어.”

그 대답을 들은 에단이 좋아! 하는 소리를 내고 엘렌을 바라봤다. 에단의 눈에는 희망이 불꽃처럼 번들거리고 있었다.

“정말인가?”

엘렌이 에단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어렵지만, 불가능한 건 아니었어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될 것 같다고 생각하기는 했는데, 예상보다 더 시간이 걸렸네요.”

말을 마친 엘렌이 잠깐 비틀거린 다음 의자에 털썩 앉아서 숨을 한 번 크게 몰아쉬었다.

“요새 안에 있는 마법사들과 함께 이틀 밤을 새워서 뜯어고친 거야. 지독하게 어려운 마법이지만, 지원군과 함께 오는 마법사들까지 총동원해서 마력을 공급하고, 함께 마력을 통제하면 하늘을 성역화시킬 수 있다는 결론을 내렸어.”

하늘에서 성수가 비처럼 쏟아지게 된다. 그 순간을 노려서 병력이 밀고 들어가면 언데드는 큰 피해를 입고 후퇴할 수밖에 없다.

“그럼 일이 쉬워지겠군요.”

내 말에 엘렌이 고개를 저었다.

“한 번이야. 마법사들 사이에서는 이 마법이 제대로 먹히는 건 한 번뿐이라는 결론이 나왔어.”

“이유가?”

내 말에 엘렌이 물을 벌컥벌컥 들이켠 다음 입가를 닦으며 대답했다.

“마법 자체가 지독하게 불안정해. 땅에 시전하는 성역화는 오랜 시간 가다듬어져 어지간한 방해는 어렵지 않게 견디지만…….”

하늘을 성역화하는 마법은 그렇지 못한 모양이다.

“왕궁에 굴러다니는 수준의 마법사가 마음먹고 방해하려고 해도 마법은 바로 시전이 취소될 거야. 많은 숫자도 필요 없어, 한 명이면 취소시킬 수 있어.”

나는 그 말에 인상을 썼다.

“그런 마법이 어떻게 한 번은 통한다고 확신하는데?”

내 말에 엘렌이 대답했다.

“마법을 너무 심하게 뜯어고쳐서, 이 마법을 처음 경험하는 다른 마법사들은 성역화 마법이라는 걸 절대 눈치채지 못할 테니까. 아니, 애초에 마법을 시전하고 있는 건지도 모를걸.”

그리고 그건 언데드도 예외가 아닌 모양이다.

“하지만 한 번 당하고 나면 다음은 없어. 두 번째부터는 시도만 해도 바로 방해가 들어올 거야.”

꼭 필요한 순간에 딱 한 번 사용할 수 있는 수단이다. 나 이런 거 알아. 날빌이라고 하는 거잖아.

“오랜 세월 동안 유능한 마법사들이 충분한 연구를 통해 계속해서 개선해나간다면 나중에는 완전한 하나의 마법으로서 독립할 수 있겠지만…… 지금은 아니야. 함께 시간을 투자한 마법사들은 이걸 마법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을 정도니까.”

그 친구들이 뭐라고 생각하건 상관없다.

“그걸로 충분해.”

전장에서 필요한 건 완벽한 마법이 아니라 먹히는 마법이니까. 마법이 아니라고? 어쩌라고. 엿이나 먹어.

“그렇다면 한 번에 최대한 많은 언데드를 효과 범위 안에 넣어야겠군.”

이제부터는 그 방법을 강구해야 한다.

“정예병을 끌어모아 전선의 한쪽을 뚫고 들어가죠. 그리고 전선에 뚫린 구멍을 통해 후속 병력을 듬뿍 쏟아 넣는 겁니다.”

내 말에 에단이 나를 바라봤다.

“의미 없다고 결론 내리지 않았나. 언데드는 그런 걸로 당황하지 않아. 오히려 그런 짓을 했다가는 전선을 유지하고 있던 언데드들이 퇴로를 차단하고, 병력을 싸 먹으려 들 거야.”

“퇴로를 차단하게 두면 됩니다. 오히려 그래야 합니다.”

에단이 내 말을 듣고 나서 작게 감탄사를 흘린 다음 침묵했다. 대충 의도를 알아챈 모양이다.

“진입한 아군의 퇴로를 막기 위해 막대한 양의 언데드가 몰릴 겁니다. 남김없이 싸 먹어야 하니까.”

의도적으로 고립된 상태에서 마법사들이 하늘에 성역화 마법을 걸 때까지 버티면 된다. 퇴로를 자르기 위해 언데드 병력이 두텁게 형성되면, 그 위로 성역화의 영향을 받은 소나기를 쏟아낸다.

“일리가 있어. 자연스럽게 퇴로도 확보될 테고, 언데드는 큰 피해를 입겠지.”

이후, 뒤편에 남아있던 병력이 퇴로에 몰린 언데드를 공격하게 되면 막대한 숫자의 언데드를 쓸어 담을 수 있을 거다.

큰 피해를 입었으니 언데드들은 뒤로 물러날 수밖에 없고, 물러난다고 해도 숫자가 많이 줄어든 이상 유적까지 나아가는 건 크게 힘들지 않다.

최소한, 베로나 제국군보다는 먼저 유적에 도착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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