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드우드-97화 (97/275)

097화

“향후 작전 방침은 그쪽으로 가닥을 잡으면 되겠어. 증원군에게 해당 작전의 내용을 알리고, 충분히 숙지할 수 있도록 하겠네.”

말을 마친 에단이 자기 뺨을 한 번 쫙 때린 다음 엘렌을 바라봤다.

“엘렌 리버플로우 양은 돌아가서 좀 쉬도록 하게. 이제부터는 우리가 밤을 새워야 할 상황이니. 병사들로 하여금 영양가가 있는 음식을 좀 준비하도록 하겠네.”

엘렌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제공하기 위해 날밤을 깠다. 이 이후로는 작전의 청사진을 구체화시키기 위해 우리가 개고생을 해야 할 시간이다.

“알겠습니다. 그 뭐냐. 저는 씻고 조금 자야겠어요. 모두 고생하세요.”

말을 마친 엘렌은 비척비척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아무래도 오늘 하루는 아무것도 안 할 생각인 모양이다.

“제안 자체는 긍정적이지만, 전선을 뚫고 들어가는 병력은 지금 동원할 수 있는 사람들 중 최고가 필요하네.”

에단이 진입할 수는 없다. 그는 지휘를 해야 하니까.

“저와 클로에 로니세라 경도 적의 전선을 뚫는 정예병에 포함됩니다.”

언데드와 교전하면서 시간을 버는 데 헤로스가 남긴 흉터만 한 게 또 없다. 그걸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대부분의 언데드가 뒤로 물러나고, 강한 언데드들도 움직임에 큰 제한을 받으니까.

내가 거기 참가하지 않으면 누가 참가하겠어. 그리고, 내가 해당 부대의 구성원으로 들어간다면 당연히 클로에도 포함된다.

“고맙네. 듣는 것만으로도 힘이 나는군.”

“아닙니다. 저는 잠깐 바람을 쐬고 오겠습니다. 금방 돌아오겠습니다.”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클로에도 자리에서 일어나 함께 문을 나섰다. 밖으로 나온 나는 하늘을 보고 히죽 웃었다.

“좋았어.”

내 말에 클로에가 나를 바라봤다.

“뭐가 좋아요?”

“헤로스의 머리통이.”

내 말에 클로에가 나를 바라봤다.

“혹시 저리로 가 붙었나요?”

“그럼 우리 머리 위에 떠 있는데 내가 좋아하겠냐?”

엘렌이 계획을 완성시키고, 작전의 청사진을 짜는데 성공하자 헤로스의 머리통은 요새 위의 하늘에서, 언데드의 군세 쪽으로 위치를 바꿨다. 이 계획이 통할 것이라는 꽤 신빙성 있는 지표다.

“문제는, 저게 언데드와의 싸움에서 승리한다는 증거라는 거지.”

베로나 제국과는 동맹이지만 적이다. 헤로스의 해골은 거기까지 가늠해서 승패를 알려주는 게 아니다. 우리가 언데드와 싸운다면 이긴다는 걸 알려줄 뿐이지, 베로나 제국과의 속도전에서의 승리는 누구의 손에 들어갈지 알 수 없다.

“그나마 다행인 건, 올리비에가 더 이상 수작을 부리기는 어렵다는 점이네.”

세자의 청혼 소식이 올리비에의 귀에 들어가면 올리비에는 거기에 난 불부터 우선적으로 꺼야 한다. 아마, 그린모스 늪지대에서 일어나는 일련의 사건은 뒤로 미루어 둘 확률이 높다.

* * *

벽난로의 장작이 타오르는 화려하기 짝이 없는 베로나 제국의 황궁. 올리비에는 그 안에 있는 자신의 거처에 앉아 다리를 까딱까딱 흔드는 중이었다.

그러던 그녀가 입을 열었다.

“셋, 둘, 하나.”

올리비에는 테이블을 똑똑똑 두들기고는 건조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올리비에 황녀님, 식사 준비가 끝났습니다.”

그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문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올리비에 황녀님, 식사 준비가 끝났습니다.”

그녀가 작게 중얼거렸던 말이 문 너머에서 들렸다.

식사 메뉴는 닭고기를 넣은 샐러드와 요구르트, 와플이다.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그래, 들어오렴.”

부드러운 어조로 말하자. 문이 열리고 트레이에 올려진 식사가 안으로 들어왔다. 그녀가 생각하던 것과 조금의 차이도 없는 메뉴다.

어떻게 이 메뉴가 올 것을 알았냐고 하면 설명할 수 없다. 그냥, 보고 듣는 과정에서 딱히 생각을 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일이잖아.

“날씨가 많이 추워졌구나.”

올리비에가 입을 열자. 음식 시중을 들던 하인이 고개를 숙인 채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잠깐 식사를 하던 올리비에는 포크와 나이프를 내려놓고 입을 열었다.

“이 정도로 추우면 정원의 호수도 얼었겠지. 어렸을 적에는 스케이트를 타곤 했었는데.”

“준비할까요?”

올리비에는 그 말에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그냥 옛날 생각을 했을 뿐이란다.”

대답을 마친 올리비에가 식사를 마치고, 옆에 고개를 숙인 채 서 있던 하인이 식사를 마친 그릇을 챙겨 나간다.

“고생하렴.”

올리비에는 돌아가는 하인에게 웃으며 말을 건넸다. 문이 닫히자, 그녀의 얼굴에 띄워져 있던 웃음은 다시 거짓말처럼 지워졌다.

밖에는 눈이 쌓여있었다. 식사 시중을 마친 하인은 눈을 치우러 가겠지. 하지만 눈은 4-5시간 정도 지난 다음 다시 내릴 것이다. 의미 없는 일이다.

산다는 건 그런 의미 없는 일의 반복이다. 지독할 정도로 지루하고, 짜증 날 정도로 반복된다. 아무것도 모른다면 매일 일어나는 사건들에 희로애락을 느낄 수 있지만, 그녀는 그럴 수가 없다.

그렇게 되어 먹은 인간이니까. 그녀는 어머니의 몸에서 나와, 자색으로 물들인 포대에 감겼을 당시의 감촉까지도 방금 일어난 일처럼 기억하고 있다. 이 머리는 당최, 뭘 잊거나 까먹지 못한다.

식사를 마친 올리비에는 방 안에서 멍하니 타오르는 벽난로의 장작을 바라보았다.

“아, 틀렸다.”

다소 기쁘다는 듯이 중얼거린 올리비에는 후식 겸으로 준비된 차를 한 모금 마셨다.

타오르는 장작에서 튀어 오를 불똥의 궤적을 예상하는 건 그녀에게 있어서 그럭저럭 할 만한 시간 죽이기였다. 아직도 일할 오푼 정도는 실패하곤 하니까.

언제 튀어 오를지, 어떤 궤적을 그릴지. 완벽하게 맞출 수는 없지만 장작에서 튀어 오르는 불똥은 구경하고 있다 보면 점점 정확도가 높아진다.

그래서 슬프다. 성공은 지루하고 실패는 재미있다.

굳이 따지자면 그녀는 실패 중독이 아닐까. 일을 벌여놓고는, 일부러 빈틈을 살짝 만들어 놓고 기다린다.

무언가 그 틈을 눈치챈 다음, 망쳐주기를 기도하면서.

“뭐 하고 있는 거야. 마틴 레드우드, 아무것도 안 하고 있는 건 아니잖아. 벽난로를 구경하는 것도 한계가 있어. 빨리 움직여줘. 날 놀라게 해봐.”

이 시간 죽이기마저도 그녀의 지루함을 완전히 덜어내 주지는 못하고 있었다. 마틴 레드우드가 뭔가 행동을 보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잠잠하다.

롱리버 요새의 방어가 성공했다는 이야기는 들었다. 그렇게 될 일이 일어난 것이기 때문에 대단할 것도 없고, 흥미로울 것도 없다.

제국에서는 슬슬 마틴 레드우드에 대한 이야기가 가끔 오르내리는 상황이다. 아직 제국에 있어서 마틴 레드우드라고 하는 존재는 딱 그 정도의 적은 관심을 받고 있었다.

“하지만, 조금 더 시간이 지나면 그렇지 않을걸.”

마틴 레드우드는 파이크 왕국을 넘어 베로나 제국에서도 이름이 오갈 정도의 위치에 오를 것이다.

“올리비에 황녀님, 안에 계십니까.”

올리비에는 눈을 가늘게 뜬 채 문을 바라보다가 부드러운 미소를 뒤집어썼다.

“그래, 들어오렴.”

문이 열리고, 남자 한 명이 당황한 표정으로 들어왔다.

“파이크 왕국에서 공식 서한을 보냈습니다. 아무래도 알고 계셔야 할 것 같아서.”

“무슨 일일까?”

파이크 왕국의 공식 서한이라. 남자는 올리비에 황녀의 앞에 조심스럽게 서류를 내려놓았다. 그녀는 서류를 휘리릭 넘긴 다음 책상 위에 다시 서류를 내려놓고 남자를 향해 웃어주었다.

“생각보다 페이지가 많구나. 고맙다, 읽어보도록 할게.”

남자가 인사를 하고 돌아가자, 올리비에는 자리에서 팍 하고 일어났다. 이미 서류는 다 읽었고, 내용도 완벽하게 알고 있다.

“좋아, 마틴 레드우드. 잘했어!”

말을 마친 올리비에는 벽에 기댄 채 웃음을 터뜨렸다. 의도는 뻔하다. 그린모스 정글에 올리비에가 신경을 쓰기 힘들게 묶어놓는 거다. 덤으로, 제국의 정보처도 이 일의 조사 때문에 바빠지겠지.

올리비에가 큰 사건 하나를 터뜨리면서 첩보부의 행동을 다 멈춰놓았던 것처럼, 마틴도 올리비에에게 큰 사건 하나를 던져서 정보처의 움직임을 묶어놓았다.

“당한 걸 갚아주려고 하다니. 예의도 바르지.”

올리비에는 그렇게 중얼거리고 가슴 위로 손을 올렸다. 재미있는 곳을 쑤시고 들어왔다. 그래서, 이 다음에 뭘 하면 좋을까? 어떻게 처리해야 할까? 이걸 막아내고 반격하면 상대는 어떻게 나올까?

심장이 뛰는 게 느껴진다. 이 심장도 맥박이 상승하고, 혈압이 오를 수 있었구나.

흥분, 즐거움. 이런 걸 원해서 일부러 파이크 왕국에서 자신의 정체를 밝혔던 거다.

“역시 그린모스 정글을 처리할 생각이구나. 그렇지?”

그걸 위해서 그녀와 제국 정보처의 눈길을 돌린 거다. 다른 가능성은 없다.

올리비에 입장에서는 뻔히 알고 있는 수작이지만, 무시할 수도 없는 일이다. 어떤 식으로든 제대로 된 조치를 취해야 한다. 가만히 있다가는 왕국으로 시집갈 수도 있다. 그건 안될 일이지. 분명히 피하고 싶은 일이다. 마틴 레드우드가 맥을 잘 짚었다.

이러면 천상 그린모스 늪지대에서는 손을 빼야 할 것 같은데. 거기에까지 신경을 쓸 여력이 없다. 지금까지 안배해 둔 것만 하더라도 보통이라면 간단하게 목표를 달성할 수 있었겠지만…….

“마틴 레드우드가 거기에서 수작을 부리려 든다면, 추가적으로 손을 쓸 수 없는 현 상황에서는 안배해둔 계획은 사실상 실패한다 봐야겠는걸.”

실패, 그 단어를 입에 올리자마자 온몸이 짜릿하다. 그린모스 늪지대에 벌인 일에 자원과 시간을 쏟아 넣으면 파이크 왕국 세자의 청혼에 대한 대응이 둔해진다. 버려야 한다.

“내 시녀가 놀라서 달려오겠네.”

지금이면 정원에 있을 것이다. 이 이야기를 전달받는데 앞으로 2분 23초 정도가 필요하겠지. 레티시아라면 이 이야기를 듣고 잠깐 멍해질 것이다. 정신을 차린 다음에는 올리비에를 찾아오기 전에 은잔을 통해 자색에게 연락할 것이다.

10분 11초에서 23초 정도가 지나고 나면 은잔에 신호가 오겠지. 은잔을 통해 보고를 마치고 나면 바로 올리비에 황녀의 거처로 향할 것이다.

“나에게 오는 시간은 17분 42초에서 18분 3초 사이.”

그렇게 중얼거린 올리비에는 콧노래를 부르면서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세자에게는 이미 나를 찍어눌러 어떻게 해볼 생각은 하지 말라고 경고했을 거야. 설마 그 정도도 안 했을 리가 없어. 그렇지?”

설마 사람을 여기까지 기대시켜 놓고 그 정도도 하지 않았을 리는 없다. 만약에 세자에게 경고를 하지 않았다면 눈물 나게 아쉬울 것 같다. 모처럼 재미가 좀 있을 것 같은데, 그 김이 팍 새버리는 거니까.

올리비에는 은잔을 꺼내 손으로 쓰다듬으며 웃었다.

“계속하고 싶어, 그러니까 앞으로도 잘 해줘. 마틴 레드우드. 나랑 더 놀아줘.”

그렇게 중얼거린 올리비에는 의자에 쓰러지듯 앉았다. 방금까지의 건조하기 짝이 없던 표정은 그대로였지만, 눈에서는 희미하게 흥미가 반짝이고 있었다.

“그래도 그 책은 가지고 싶어. 지금은 그냥 놓아주지만, 결국 내 손에 들어올 거야.”

말을 마친 올리비에는 은잔을 통해 레티시아에게 지시를 내린 다음, 은잔을 숨기고 레티시아가 오는 걸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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