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8화
롱리버 요새 일대의 성역화에 성공했다고 해도, 긴장을 완전히 늦출 수는 없는 상황이다. 여기는 언데드의 공세로부터 어느 정도 안정성을 보장받았지만, 다른 방식으로 표현하면 안전이 보장된 곳은 요새 일대뿐이라는 뜻이다.
당연하다는 듯이 녀석들은 성역화 마법이 걸린 땅을 우회하려 들었고, 요새를 지키고 있는 우리 입장에서는 당연히 그런 움직임에 대응해야 했다. 그냥 버려둘 수는 없잖아. 성역화를 해서 여기를 지키고 있는 이유가 뭔데.
“녀석들이 뒤로 물러난다. 얼마 안 남았어, 밀어붙여!”
두개골이 절반 정도 드러난 시체의 머리통을 손으로 쥐어 터뜨린 다음, 나는 주변을 둘러보며 외쳤다.
“으아아아아아아!”
병사들이 비명인지 고함인지 모를 악을 바락바락 써가며 무기를 거머쥐고 시체에게 달려든다.
오늘까지만 버티면 저녁 중으로 지원군이 롱리버 요새에 도착한다. 애초에 세자가 약속했던 것처럼 큰울림 기사단과 흔들바람 기사단을 포함한 지원군이다. 이미 우리가 세워놓은 계획은 안전한 경로를 통해 두 기사단장에게 전달되었을 것이다.
“문제는 그 친구들이 순순히 우리가 짠 계획에 따라주느냐인데.”
비척비척 물러나는 언데드를 바라보고 있던 나는 검을 땅에 박아넣은 채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서열 문제가 있으니까요.”
군대에서 소대장이라고 다 같은 소대장이 아니고, 중대장이라도 다 같은 중대장은 아니다. 짬은 얼마나 먹었는지, 장교는 어떻게 되었는지와 같은 식의 구분으로 인해 같은 종류의 보직에 있더라도 그 목소리의 위력이 달라지기 마련이잖아.
“문제가 생기더라도 지금은 아닐 거야. 나중에 생기겠지.”
내분은 대부분 경쟁상대로부터 승기를 잡고 난 다음에, 나눠 먹을 파이가 어느 정도 구체화되었을 때 서로의 몫을 더 챙기려는 과정에서 생기는 법이다. 시체들이 내장과 눈깔 따위를 덜렁거리면서 밀려오는 중이고, 베로나 제국이 유적을 향해 밀려오는 중이다.
아직 내분에 대한 걱정은 할 필요 없다.
“그런가요. 마틴 님이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그게 맞겠죠.”
그거 상당히 부담되는 신뢰라니까.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검을 검집에 밀어 넣고 다시 롱리버 요새로 돌아가는 걸음을 서둘렀다.
“저기 몰려오는 중이군.”
돌아가서 물을 좀 마시고 땀을 닦으며 쉬고 있으려니, 에단이 한시름 놓은 목소리와 함께 요새의 뒤편을 가리켰다. 저 멀리에서 몰려오는 지원군의 행렬이 보인다. 도착까지는 아직 시간이 좀 남았겠는걸.
“거참, 원래 저런 지원군은 긴박한 순간에 나팔 불면서 쫙 하고 등장해야 멋있는 법인데.”
내 말에 에단이 쓰게 웃었다.
“우리는 지원군을 기다리는 입장 아닌가. 긴박한 순간에 처해서 버텨야 하는 상황 자체가 썩 마음에 들지는 않는데.”
나는 그 말에 어깨를 으쓱했다.
“엘렌은?”
내 말에 에단이 대답했다.
“성역화 마법을 점검하고 있는 중이네. 이미 안정화가 끝났지만, 주기적으로 확인해야 만약의 사태를 대비할 수 있지 않겠나.”
돌아와서도 바쁘군그래. 몸을 씻고 식사를 하고 있으려니 주변이 소란스러워졌다. 요새의 성벽 위로 올라가자, 요새 앞에 병력이 모여 있는 광경이 눈에 들어온다.
“롱리버 요새의 지원 및 그린모스 늪지대의 언데드 토벌을 위해 파견된 지원군 사령관이자, 큰울림 기사단장 미로스 제커빌이다!”
아하, 그 퍼시발 스트리트의 카페 중독자! 제대로 얼굴을 본 기억은 없지만 그래도 대충이나마 알고 있는 녀석이다. 흔들바람 기사단도 오는 걸로 알고 있었는데, 그 기사단은 아무래도 증원이 더 필요할 때 여기로 향할 모양이다.
“환영합니다, 현재 전선을 유지하고 있는 롱리버 요새 사령관 에단 딘버스입니다!”
성벽 위에서 병력들을 내려다보고 있던 에단이 병사들을 시켜 성문을 열게 했다. 몰려온 병력들 대부분은 일단 성역화된 롱리버 요새 인근에 주둔하고, 지휘부라고 할 수 있는 핵심 인물들만이 요새로 발을 내디뎠다.
“환영합니다, 함께 할 수 있어서 영광입니다.”
미로스에게 에단이 인사를 하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마찬가지로 함께 하게 되어서 영광이군. 요새의 격전에 대해서는 이미 보고를 받았다. 제군들의 분투와 용맹함에 경의를 보낸다.”
말을 마친 미로스가 슥 나를 보고는 입을 열었다.
“그리고, 자네가 우리 영감님이 물건이라고 평가했던 마틴 레드우드겠지.”
“영감님이라 하심은…….”
내 말에 그가 대답했다.
“왕실 기사단장님. 이미 한 번 만나보지 않았나?”
나는 그 말에 아, 하는 소리를 냈다.
“모리스 핀들턴 경 말씀이십니까. 잘 지내고 계시는지요.”
내 말에 미로스가 코웃음을 한 번 쳤다.
“그분이야 뭐, 중풍에 걸려도 다음 날 일어나서 고기를 씹어도 놀랄 사람이 없을 정도로 정정하지.”
말을 마친 그는 클로에와 엘렌에게 시선을 던졌다.
“옆의 여자가 이번에 약식 절차로 기사로 임명된 클로에 로니세라 경이고, 옆의 마법사는 관련 업계에서는 소문이 자자한 엘렌 리버플로우 양이겠군.”
말을 마친 그가 손을 내밀어 두 사람과 간단하게 인사를 했다.
“지휘부로 향하지. 세워놓은 작전의 요체는 이해했지만, 조금 더 자세하게 알아두어야 할 필요가 있다.”
말을 마친 그는 앞장서서 롱리버 요새의 지휘부로 향했다.
“여색을 밝히는 거치고는 의외로 말짱해 보이네요.”
클로에의 속삭임이 내 귀를 간지럽혔다.
“여색과 능력은 별개로 판단해야 하는 법이지.”
조조는 아내가 둘에 첩이 열 명이 넘었고, 심지어 유부녀 취향이었잖아? 여자를 밝히는 게 개인의 처신 문제가 될 수는 있어도, 그게 개인의 능력을 평가하는 지표가 될 수는 없다.
소고기 품질 평가할 때 당도계를 들이미는 병신은 없잖아.
대화를 나누면서, 우리는 지휘부 안에 마련된 자리에 앉았다.
“요점은 이해했다. 정예병이라. 구체적으로 구성은 어떻게 할 생각이지?”
에단이 그 말에 큼, 하는 소리를 내고 대답했다.
“이 일대를 수비하고 있던 기사단의 병력과, 왕도 기사단을 중심으로 편성할 생각입니다.”
“부대 간의 상호 연락은?”
미로스가 질문하고, 에단이 대답한다. 미로스의 질문은 군더더기 없이 깔끔했고, 에단 또한 미로스의 질문에 막힘 없이 대답을 돌려주고 있었다.
“좋아. 롱리버 요새의 사령관이 꽤나 정성 들여 준비했군그래.”
지휘부에 놓인 지도를 다시 한번 살펴본 미로스가 팔을 꼰 채 뭔가 고민하나 싶더니 입을 열었다.
“이대로 진행하지. 날씨에 의존해야 한다는 점이 마음에 걸리기는 하는데.”
말을 마친 미로스가 엘렌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엘렌 리버플로우 양, 일반적으로 이 정도 온도와 습도면 소나기가 굉장히 자주 오는 걸로 알고 있는데. 맞나?”
“맞아요. 그린모스 늪지대 같은 경우 사실상 하루에 한 번…… 아무리 늦어도 이틀에 한 번꼴로 폭우가 쏟아져요.”
미로스가 턱을 쓰다듬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주기는 일정하지만, 시간도 일정한지?”
“거의 예외 없이, 오후에 옵니다.”
시간대가 정해져 있는 이유는 그때 가장 대기가 불안정하기 때문이라는 엘렌의 설명이 이어졌다. 미로스가 지도를 살피다가 입을 열었다.
“그럼 내일 새벽 중으로 작전 준비를 마치고 임무 수행에 들어가는 편이 좋을 것 같군.”
새벽은 좋은 시간이다. 언데드의 군세를 뚫어 구멍을 내는 건 라면 끓이는 일이 아니다. 몇 시간이 소요될 수도 있으니, 새벽에 들이닥쳐서 전선에 구멍을 내고, 안에 들어가서 포위당한 상태로 성역화를 마치고, 비가 오기까지 버텨야 한다.
물론, 포위당한 상태에서 버텨야 하는 우리들 입장에서는 죽을 맛이겠지만…… 지금으로서는 이 방법이 최선이다.
“괜찮겠습니까? 병력들이 먼 길을 행군했습니다.”
에단의 지적에 미로스가 고개를 저었다.
“롱리버 요새의 방어가 성공했다는 소식을 전해 받았을 때, 급하게 지원해야 할 필요는 없다고 판단했다.”
이후 즉시 행군 속도를 줄이고 병력들에게 충분한 휴식 여건을 마련해가며 이동한 모양이다. 덕분에 도착하는데 약간 시간이 걸리기는 했지만, 도착한 병사들의 상태는 쌩쌩하다.
“알겠습니다. 바로 수행 준비를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그걸로 오늘의 회의는 끝났다. 간부들은 바로 새벽에 진행될 작전을 위해 병력들을 통솔해 짐을 옮기고 장비를 정비하기 시작했다.
“그나마 다행이네.”
나와 클로에는 공식적으로 파이크 왕국의 군인이 아니다. 나는 이미 쿠르스트 산맥에서의 군역을 마친 상황이고, 클로에는 내가 아래에 두고 있는 기사일 뿐이니까.
일반적으로 작전을 수행하기 전에 간부로서 해야 하는 역할까지 담당하지는 않게 되었다.
“다른 사람들은 전부 굉장히 바쁘네요.”
간부들은 무기의 상태를 확인하고, 군장 안의 물품들을 점검하느라 굉장히 분주하다. 어차피 롱리버 요새 방어를 진행하는 동안 에단이 틈틈이 병력을 운용해 물자를 파악하고 분류했기 때문에 새로 뭔가 일을 벌인다는 느낌보다는, 정리된 일을 다시 한번 점검하는 정도에 불과했지만.
그것도 부지런히 진행하지 않으면 오늘 밤이 되기 전에는 끝내기 힘들 수도 있다. 나와 엘렌, 클로에는 서로 모여서 간단한 먹거리로 저녁을 때우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파악된 적의 전력이…….”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고 끄응, 하는 소리를 냈다. 지금 당장 확인된 숫자만 해도 거의 10만에 도달한 것 같다.
“무덤 안에서 시체끼리 짝을 맞춰 번식이라도 한 건가?”
저게 다 무덤 아래에서 기어 올라온 시체라고 생각하면, 도대체 유적 아래의 지하가 어떻게 생겨 먹었을지는 감도 잡히지 않는다.
“전부 무덤에서 올라온 건 아니야.”
“확실해?”
내 말에 엘렌이 고개를 끄덕였다.
“약한 언데드들 중 상당수는 최근에 만들어졌어. 무덤에서 올라온 언데드에게 희생당한 사람들, 또는 늪 속으로 가라앉아 썩지 않고 있던 시체들이라고 추측되는데.”
나는 그 말에 턱을 쓰다듬었다. 하긴, 저 언데드들, 약한 것들은 어마어마하게 약하고 강한 녀석들은 또 언데드답지 않게 강했으니까.
“소나기가 한번 쓸고 가면 강한 녀석들만 남겠지.”
그걸 정리하는 건 병사들이 아니라 나와 클로에를 포함한 기사들, 그리고 엘렌을 포함한 마법사들이 될 것이다.
“마틴 레드우드 님, 큰울림 기사단장님께서 찾으십니다.”
“나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병사가 와서 전한 말에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병사를 따라갔다.
“아, 왔나.”
미로스는 의자에 앉아서 버디슈의 날을 숫돌로 갈고 있었다.
“그렇습니다. 무슨 일로 부르신 건지 알 수 있겠습니까.”
내 말에 미로스가 자리에서 일어나 뭔가를 꺼내 조심스럽게 테이블 위에 올렸다.
“폐하께서 내리신 선물이다. 엔더슨의 갑옷을 재료로 사용해 만들었지.”
나는 그 말에 눈을 가늘게 뜨고 그 장비를 바라봤다. 브레이서라고 하던가. 금속으로 만들어져 팔뚝을 보호하는 장비다. 아무래도 갑옷을 전부 녹여서 방패로 만들어 낸 건 아닌 모양이다.
“갑옷의 구성 물질 중 상당수는 무너진 쿠르스트 산맥의 방벽 개보수에 사용되었다. 때문에, 이 녀석은 엔더슨의 갑옷 정도로 마력 저항이 압도적이지는 않다. 대신…….”
말을 마친 미로스는 손에 쥐고 있던 버디슈를 크게 휘둘러 브레이서를 내려찍었다. 쩌정, 하는 소리가 방 안을 휩쓸었다.
“내구도를 높였지.”
브레이서에는 별다른 손상이 보이지 않았다.
“우리 영감이 아주 자네에게 꼭 하사해야 한다고 강권을 하더군.”
영감이라. 나는 그 말에 미로스를 바라봤다.
“혹시 모리스 핀들턴 경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내 말에 미로스가 픽 웃었다.
“그럼 달리 누가 폐하에게 그런 진언을 올릴 수 있다고 생각하나?”
말을 마친 그는 브레이서를 슥 훑어보고는 말했다.
“그리고, 마력 저항이 낮아진 만큼 사용자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서 왕궁의 마법사들이 약간의 개선을 가한 모양이더군.”
말을 마친 그가 브레이서를 집어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