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9화
들어올린 브레이서가 희미하게 빛을 발하더니, 이내 미로스의 몸을 감싸는 방울 모양의 보호막이 만들어졌다.
“미스릴을 섞어 넣고 마법을 걸어두었다. 마력을 불어넣으면 어지간한 힘으로 쏘아붙이는 화살 정도는 어렵지 않게 방어할 거야.”
마법을 사용해 발동하는 도구들은 필연적으로 이런 금속을 사용해야 한다. 원래 마력을 모을 수 없는 것들이 마력을 저장할 수 있도록 한다는 점에서는 구심점과 원리가 같다.
“유용하게 쓰겠습니다.”
미로스에게 인사를 한 나는 양팔에 브레이서를 끼고, 끈을 이용해 사이즈를 조절했다. 잠깐 그런 나를 보고 있던 미로스가 입을 열었다.
“엔더슨은 좋은 녀석이었다. 최소한, 내가 알고 있는 엔더슨은 그랬지.”
나는 브레이서의 끈을 조절하다가 동작을 멈추고 무거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저로서는 어쩔 수 없었습니다.”
내 말에 미로스가 손을 휘휘 저었다.
“질책을 하겠다는 게 아니야. 오히려, 전우이자 왕국을 지탱하는 검이었던 자의 변절을 알아차리지 못한 우리의 부족함이 드러난 것뿐이지.”
말을 마친 미로스는 잠깐 테이블을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신년 행사가 끝나고 나서, 대중들에게 공개하지 않은 채 처형이 진행되었다. 나도 그 자리에 있었지.”
말을 마친 미로스가 자신의 목에 걸려 있는 브로치를 만지작거렸다.
“술만 퍼먹으면 전장에서 적의 칼에 맞아 죽고 싶다고 하던 녀석이, 사지가 꽁꽁 묶여서 머리 위로 떨어지는 처형검을 기다리고 있었어.”
미로스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건 그냥 그 자식의 목이 떨어진 게 아니야. 이 왕국을 지탱하고 있다 믿었던 기둥 중 하나가 썩어있었다는 증명이고, 이 나라에 새로운 기둥이 필요하다는 의미지.”
말을 마친 미로스는 나를 응시했다.
“영감님은 네가 그 기둥이 될 수 있다고 믿고 있다. 나는 아직 잘 모르겠다. 하지만, 이번 기회에 알게 되겠지.”
“실망시키지 않겠습니다.”
내 말에 미로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고양이나 호랑이나, 새끼일 적에는 그냥 다 귀여울 뿐이야. 두 동물의 차이는 다 크고 나서야 알 수 있어.”
가만히 말을 듣고 있는 나를 보던 녀석이 픽 웃고는 내 등을 한 번 퍽 쳤다.
“혹시 지인 중에 쓸 만한 녀석 있으면 말하라고. 나도 조금 더 늙으면 이 짓거리 때려치우고 은퇴해서 여자나 끼고 놀고 싶으니. 엔더슨은 전장에서 적의 검에 맞아 죽고 싶다고 했지만, 나는 복상사로 죽는 게 꿈이거든.”
말을 마친 미로스가 내 어깨를 몇 번 두들겼다.
“그럼, 돌아가서 준비를 마치도록. 기대하고 있겠다.”
“알겠습니다. 편안한 밤 보내시길 바랍니다.”
나는 그 길로 미로스의 방을 나서 다시 내 거처로 돌아왔다.
“나쁘지 않네.”
내 팔뚝을 감싼 브레이서를 보고, 엘렌이 눈을 가늘게 떴다.
“누구 작품인지는 알 것 같은데.”
“뭐, 이상한 수작이 걸려 있는 건 아니지?”
내 말에 엘렌이 고개를 저었다.
“그런 건 없어.”
말을 마친 엘렌이 브레이서를 손으로 한 번 쓰다듬고는 말을 이었다.
“약간 아쉽긴 하지만. 어쩔 수 없지. 나도 지금 이 브레이서에 사용된 재료만을 쓴다면, 이상으로 뜯어고칠 수는 없겠는걸.”
“재료가 더 있다면 가능하다는 말로 들리는데.”
“그런 셈이지.”
엘렌의 표정을 보니 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는 아닌 모양이다.
“뭐가 필요한데?”
“딱 집어 말할 수는 없어. 이 세상에 이런 장비에 사용할 만한 재료가 한두 가지도 아니고.”
나는 그 말에 어깨를 으쓱했다.
“뭐, 재수 좋으면 구하게 되겠지. 이 상황에 내가 재료 구하겠답시고 이 요새를 떠날 수는 없는 노릇이잖아.”
내 말에 엘렌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인연이 닿으면 구하겠지.”
말을 마친 엘렌이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했다.
“그럼, 준비는 대충 끝난 것 같으니 두 사람 모두 내일 새벽에 보자. 푹 쉬어둬.”
클로에와 엘렌이 돌아가고 나서, 나는 침대에 누워 마력을 모으다가 그대로 잠들었다.
다음 날 새벽이 되었다. 전선을 뚫는 역할을 담당하는 우리는 필요한 짐을 챙겨 성문 앞에 서 있다. 말 위에 탄 미로스가 굳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긴말하지 않겠다. 우리는 해야 할 준비를 마쳤고, 모두가 해야 하는 일을 숙지하고 있다. 그러니, 성문을 열어라.”
연설을 좋아하는 성격은 아닌 모양이지. 짤막한 말을 끝으로 둔중한 소리를 내며 성벽이 열리기 시작한다.
“바로 대응하는군.”
성문이 열리기 시작하자, 바로 저 멀리에 드글드글하게 몰려 있는 언데드의 군세가 움직이는 게 보인다.
“먹지도 않고 자지도 않고 쉬지도 않는다라.”
대한민국이 원하는 모범적인 인재상이 바로 언데드 아닐까. 종일 회사에 쑤셔 넣고 산 채로 갈아버릴 수 있잖아. 아, 언데드니까 죽은 채로 갈아버리는 건가?
녀석들이 진형을 갖추는 것이 보인다.
“최우선 목표는 돌파다.”
그리고 포위된 채로 버티는 거지. 가능한 깊게 쑤시고 들어가서, 최대한 많은 언데드가 우리를 포위하도록 해야 한다.
“진군!”
나팔 소리와 북소리, 사람들의 고함이 서로 뒤엉켜 날뛴다. 성문을 뛰쳐나간 우리는 성역화 된 요새 인근에 주둔하고 있던 병력들과 함께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정말로 말 타고 싸워보신 적이 없어요?”
말을 타고 옆에 서 있는 클로에의 말에 나는 얼굴을 구겼다.
“열일곱 먹고 검 배운 지 1년도 지나지 않은 놈이 말 타고 싸우는 법을 언제 배웠겠어.”
말을 타는 거랑 그 위에서 칼질하는 건 엄청나게 다르잖아. 내 말에 클로에가 저런, 하는 소리를 냈다.
“그렇게 어렵지는 않아요. 전방에 창을 겨눈 채, 말 타고 달리다가 마주치는 녀석에게 박아넣고, 그다음에는 발아래에 걸리적거리는 걸 죄다 쓸어내면서 계속 앞으로 나아가면 끝이에요.”
“별로 위안이 되지는 않는 이야기인데.”
그런 식으로 말하면 세상에 어려운 게 뭐가 있겠어. 로켓도 연료 넣고 꽁무니에 불붙여서 날리는 거잖아. 별로 대단할 것도 없네.
나팔이 다시 한번 크게 울려 퍼진다. 그 신호와 동시에 우리는 말을 타고 시체들을 향해 질주하기 시작했다말이 한 번 크게 투레질 친 다음, 축축하게 질퍽이는 땅을 말발굽으로 밀어낸다. 저 멀리 꾸물거리고 있던 시체들의 모습이 점점 더 커지고, 선명해진다.
일자로 나아가던 병력들이 서서히 속도를 조절하며 돌격을 위한 삼각 대형을 갖춘다.
반쯤 박살 난 방패가 땅에 박혀 임시로 장벽을 형성하고, 그 위에 녹슨 창이 고슴도치처럼 추켜올려진다.
“야, 미안하다.”
아무리 봐도 지금 내가 타고 달리는 이 말이 살아남을 확률이 그렇게 높지는 않을 것 같은데. 이제, 예정된 충돌이 코앞까지 다가왔다.
살이 뭉개지고 뼈가 부서진다. 돌격하는 말의 속도를 그대로 받아낸 시체가 창에 꿰뚫린 채 허공을 날아 저 멀리 처박힌다. 녹슬고 무뎌진 창이 말의 몸통에 박힌 채 부러진다.
“으아아아아아아!”
우리가 불타오르는 것 같은 소음 속에 나아가고 있다면, 언데드는 그 불타오르는 분노를 침묵으로 대항하고 있었다.
쉬지 않고 앞으로 달리며, 나는 클로에의 조언을 따르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창을 쑤셔 넣고, 검을 뽑아 들고 근처에 있는 녀석들의 머리통을 수확 철 사과 따듯이 잘라낸다.
“으……아아아아!”
갑자기 말을 타고 옆을 달리던 병사들 15명 정도가 퍼퍼퍽, 하는 소리와 함께 낙마한다. 하나같이 가슴팍에 거대한 구멍이 뚫린 모습이다. 그리고, 낙마한 병사의 뒤쪽 땅에 흙기둥이 치솟으며 거대한 크레이터가 만들어진다. 지름이 2-3m는 될 것 같은데.
― 우둔한 것들. 산 자들의 전술이 죽은 자에게 통할성싶으냐.
저 멀리, 대들보만 한 활을 짊어진 채 시퍼런 안광을 흘리고 있는 황금 해골이 보인다.
뼈에 금박이라도 입혀놓은 건가? 작열하는 정글의 태양을 받아, 해골의 뼈다귀는 황금색으로 번쩍번쩍 빛나고 있었다.
그 해골의 뒤편에는 낡아빠진 깃대가 세워져 있고, 그 위에는 마빡에 화살이 박힌 인간의 머리통이 포도송이처럼 주렁주렁 달려있다.
그 모습을 마치 자랑이라도 하는 것처럼 실오라기 하나도 걸치지 않은 해골의 모습은, 문자 그대로 완벽한 알몸이었다.
“세상에, 뼈까지 보이는 누드라니. 남사스럽기도 하지.”
저 친구를 담당할 수 있는 사람이…….
“나 말고는 없어 보이는군. 행복해라.”
말고삐를 잡아챈 나는 녀석을 향해 말을 타고 달려나갔다. 녀석의 퍼런 안광이 나를 향하고, 동시에 활시위를 팽팽하게 당겼고, 나는 그런 녀석을 향해 들고 있던 창을 집어 던졌다.
날아가던 창이 녀석이 쏘아낸 화살에 부딪혀 힘을 잃고 바닥에 떨어진다. 그래도 창인데 화살에 밀리다니, 라는 생각은 할 수가 없었다.
창이 날아가는 사이에 저 황금 해골은 화살 다섯 발을 날아가는 창에 박아넣었으니까. 제아무리 창이라도 날아가는 동안 대가리를 다섯 방이나 후려 맞으면 힘을 잃고 바닥에 떨어질 수밖에 없다.
새끼 저거 혹시 알 까고 태어난 거 아니야? 무슨 놈의 활을 저렇게 귀신같이 잘 쏘냐.
하지만, 덕분에 틈을 만드는 데에는 성공했고, 나는 말을 타고 녀석의 앞까지 도착하는 데 성공했다.
“옷은 좀 입고 다녀라.”
인사말을 해주면서 휘두른 검은 녀석이 들어 올린 활에 막혔다.
― 그래, 이야기는 들었다. 전신 헤로스의 인정을 받은 자가 있다지?
나를 바라보며 이글거리던 녀석의 푸른 안광이 서서히 가라앉는다. 어느 순간 화살을 손에 쥔 녀석이 그 화살촉으로 내 머리통을 찍어버리려고 들었다. 팔을 들어 막자, 화살촉이 브레이서에 부딪쳐 카가각, 하는 소리를 낸다.
― 안 그래도 전차에 달아둘 새 머리가 필요했는데. 네 놈의 머리통이 딱이겠구나.
“난 돈이 부족했는데, 니 뼈다귀에 붙은 금박 떼어내서 팔아치우면 딱이겠구나.”
공중으로 뛰어오른 녀석이 나를 노리고 화살을 쏟아내기 시작한다. 검으로 막아내자 쿵, 하는 충격과 함께 내 몸이 뒤로 밀려난다.
“카루토스 타카운의 다섯 번째 창, 울단이 너에게 전쟁노래를 연주할 것이다!”
그 말과 함께, 나를 노리고 밀려들던 강력한 언데드들이 걸음을 멈추고 다른 곳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일기토 같은 걸 하자는 뜻인가.
“마틴 님, 도울게요!”
내 쪽으로 다가오는 클로에를 향해 나는 고개를 저으며 외쳤다.
“아니, 넌 가서 다른 곳을 도와!”
여기에서 내가 클로에의 도움을 받게 되면, 그 순간 뒤로 물러났던 언데드들이 다시 나를 노리고 움직일 것이다. 이 상황에서는 저 녀석을 내가 붙들어 두고, 그사이 다른 아군들은 자기 볼일을 보는 편이 좋다.
― 머지않아 죽을 넋이 그래도 명예라는 단어는 가슴에 간직하고 있구나.
명예 같은 소리 하네.
― 이름을 말해라.
“마틴 레드우드.”
내 말에 녀석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웃음을 터뜨렸다.
― 좋다, 마틴 레드우드! 지금부터 울려 퍼질 내 노래를 들어라!
염병하고 자빠졌네, 노래를 듣기는 무슨 망할 놈의 노래를 들어. 니가 무슨 가수냐? 지금 데뷔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