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드우드-102화 (102/275)

102화

안개가 거두어진 덕분에 맑아진 시야로 주변을 살피던 나는 히죽 웃었다.

“좋아, 성공했다.”

스콜은 언제나 몰아치는 바람과 함께 시작된다. 이제 곧이다.

하늘에 짙게 깔린 먹구름은 물을 흠뻑 먹은 솜처럼 무거워 보인다. 물을 잔뜩 머금은 구름이 우르릉, 크르릉 하는 소리를 낸다.

“아.”

그리고, 마침내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이건 장마철 내리는 비와는 다르다. 정글의 소나기는 투툭, 투툭. 하면서 몇 방울의 비가 떨어지는 식으로 시작되지 않았다.

구멍이라도 뚫린 것 같다. 이건 구름이 비를 쏟아낸다는 것보다는, 차라리 비를 토해내고 있다는 표현이 더 어울린다. 강풍을 동반한 막대한 양의 비가 하늘에서 땅으로 쏟아져 내리기 시작한다.

“효과 죽이네.”

― 끄어어어어어어어!

사람들에게는 어떤 피해도 없었다. 하지만, 언데드들은 쏟아지는 빗속에서 뭘 해보기도 전에 이전처럼 새하얀 화염이 엉겨 붙은 채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래, 마치 언데드를 상대하기 위해 특별히 만든 소이폭탄이라도 떨어진 것 같은 풍경이다.

“도대체 얼마나 많이 여기에 몰려 있었던 거야!?”

한 병사의 기겁한 것 같은 외침. 카루토스 타카운은 여기에서 우리를 끝장낼 생각이었던 게 확실하다.

“크흐. 눈이 아플 지경이네.”

어두컴컴하던 정글이, 무수히 많은 언데드가 쏟아지는 비를 맞고 뿜어내는 백색의 화염 덕분에 대낮처럼 밝아진다. 너무 밝아서 눈을 가려야 할 정도다.

소나기는 15분 정도 지속되었다. 하지만, 그사이 대지를 때린 비의 양은 장담하는데 몇 시간 동안 내린 소나기와 비교해도 크게 차이가 없을 것이다.

몰아친 질풍으로 걷어낸 안개 속에서, 힘을 잃고 불타며 무너지는 언데드들의 형상이 보인다. 어디를 봐도 바닥에 널브러진 채 하얗게 불타는 시체들뿐이다.

“이게 전부 우리를 포위하고 있었던 거라니.”

클로에는 눈을 크게 뜨고 바닥에 쌓여있는 시체와 뼈를 바라봤다.

“비가 오지 않았으면, 1년을 버텨도 소용 없었을 거야.”

― 네 녀석들이…….

수도꼭지를 틀어놓은 것처럼 쏟아진 빗속에서 어떻게든 목숨을 유지하는 데 성공한 언데드들이 몇 마리 보인다. 딱 봐도 범상치 않게 생긴 녀석들이다.

저 친구들도 그냥 마주쳤으면 자랑스럽게 자기가 카루토스의 몇 번째 창이니 어쩌니 하면서 떠들고는 막대한 무력을 선보이며 아군을 곤란하게 했겠지.

하지만 백색의 화염이 엉겨 붙어 맹렬히 타오르고 있어서 상태가 좋아 보이지는 않는다.

사실, 서 있는 거 자체가 용한 수준이다.

“남은 언데드를 정리해라!”

쏟아진 빗속에서 언데드가 불타오르는 장면은 아군의 사기를 치솟게 하는 데 탁월한 효과가 있었다. 잔뜩 오른 사기와, 들뜬 분위기는 병사들이 무기를 들고 녀석들에게 달려드는 용기의 원동력이 되었다.

하늘에서 쏟아진 비를 맞고, 헤로스의 흉터로 힘까지 제약된 잔여 언데드들을 정리하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 비겁한 자식들!

검을 얻어맞고 죽어가는 언데드가 나를 향해 외친 단말마였다. 쓰러진 시체에서 검을 뽑아낸 나는 엉겨 붙은 오물을 털어내며 중얼거렸다.

“얼씨구, 쌈박질에 비겁한 게 어디 있어.”

세상 순진하기는, IS한테 잡혀가서는 제네바 협약을 지키라고 할 놈이구나. 잔여 언데드를 정리하는 데 성공한 미로스가 병력들을 향해 외쳤다.

“아직 승리한 게 아니다, 서둘러야 한다!”

우리는 남은 병력들을 재편성하고, 식사와 함께 잠깐의 휴식을 취한 다음 유적을 향해 정글을 해치고 나아가기 시작했다.

“녀석들이 유적의 책을 원하는 이유가 뭘까.”

앞으로 나아가면서 엘렌이 던진 질문이었다. 나는 얼굴을 구긴 채 썩은 피와 살점이 엉겨 붙은 덩굴을 자르며 대답했다.

“쿠르스트 산맥.”

내 말에 엘렌이 나를 바라봤다.

“난데없이 그 지역 이름이 왜 튀어나와.”

“어차피 확실한 건 아니야.”

책을 찾아내서 그 내용을 파악한 다음에는 확실해지겠지. 엘렌이 내 말을 듣고는 목소리를 낮춘 채 입을 열었다.

“일단 말해봐, 한번 들어보게.”

“쿠르스트 산맥에는 하이랜더의 무덤이 있고, 녀석들의 원래 계획은 그 무덤에 잠들어 있는 하이랜더의 시체들을 싹 다 일으켜 세우는 거였지.”

그린모스 늪지대에는 되살아난 시체들이 드글거리고, 심지어 지금 문제가 된 유적에서는 몇천 년 동안 잠들어 있던 대왕의 시체가 일어나 언데드를 부리고 있다.

옆에서 이야기를 듣고 있던 클로에가 질문을 던졌다.

“하지만, 녀석들은 입구를 못 찾았잖아요?”

“시체 살려서 언데드로 만드는 책이라면, 굳이 하이랜더의 시체를 사용하지 않아도 유용하게 쓸 수 있을걸.”

원래 계획과는 달라졌지만, 일단 얻어두면 어디에고 유용하게 쓸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전제는 아까 말했지만.”

“유적에 잠들어 있는 책의 내용이 언데드 제작에 관련되어있어야 그 추측이 맞아떨어진다는 거지? 알겠어.”

말을 마친 우리는 다시금 침묵 속에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그 뒤로 약 며칠 동안, 우리는 안개가 낀 그린모스 늪지대를 통과하는 중이었다. 정글에 창궐한 온갖 날벌레들이 몸을 괴롭힌다. 한때 우리를 도와줬던 폭우도 하루가 멀다고 쏟아져 물자를 몇 번이나 비에서 보호해야 했다.

쓸어낸 언데드의 숫자 때문에 카루토스 타카운은 더 이상 롱리버 요새의 전선을 유지할 수 없다고 판단한 모양이다. 롱리버 요새 앞에 있던 언데드가 사라진 덕분에 우리는 롱리버 요새로부터 보급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물론 넉넉하지는 않았다. 물자를 보급해주는 병력들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정글의 질퍽한 땅과 씨름해야 하니까. 오는 와중에 손실된 물자도 상당했다.

“그나저나, 언데드가 너무 없는데.”

한 번도 마주치지 못하다니. 심지어, 전선에서 후퇴한 언데드가 뒤를 덮치는 경우도 없었다. 내 말에 클로에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아무리 성역화를 통한 소나기로 막대한 수의 언데드를 쓸어냈다고 하지만…….”

한 마리도 마주치지 않고 있는 건 확실히 이상한 상황이다. 나는 걸음을 늦춰 미로스에게로 향했다.

“언데드가 너무 없군. 그렇지?”

미로스도 같은 생각을 한 모양이다.

“아무래도 유적 근처에 방어선을 형성한 것 같습니다.”

내 말에 미로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유적과의 거리가 가까워졌으니, 안전한 범위 안에서 휴식을 취하도록 하지.”

상대가 대비하고 있다면, 우리도 휴식을 취해야 한다. 군대의 사기는 중요하지만, 결국 사기라는 것도 감정일 뿐이다. 시간이 지나면 바짝 올랐던 사기가 무뎌지고, 감정의 고양 때문에 잊고 있었던 피로가 몰려올 것이다.

병력은 행군을 중단하고, 임시로 숙영지를 만든 다음 만약에 있을 기습을 대비한 채 휴식하기 시작했다.

텐트에 주저앉은 나는 엘렌에게 말을 걸었다.

“베로나 제국 쪽에서 얼마나 빠른 속도로 진격하고 있느냐가 걱정인데. 세자 저하에게 연락을 할 수는 없나?”

물론 롱리버 요새를 통해서 정보를 전해 받을 수는 있지만, 그건 따끈따끈한 정보가 아니다. 며칠 전의 소식이고, 그 소식을 듣고 지금쯤이면 베로나 제국군이 어디까지 나아갔을지를 짐작해야 한다. 추측의 신뢰도는 높지 않다.

내 말에 엘렌이 대답했다.

“여기에서는 수정구로 통신이 안 될 거야. 설사 연결이 된다고 해도 서로 뭐라고 하는지 알아들을 수도 없을걸.”

이쯤 오면 아예 통신이 안되는 거리인 모양이다. 첩보국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베로나 제국의 정보를 알아내는 건 가능하다고 쳐도 여기까지 어떻게 전달할 건데. 애초에 지금 그린모스 정글은 소수의 인원이 발을 디딜 수 없는 지역이다.

“물론, 베로나 제국군에 연결된 수정구를 통해 직접 이야기를 들을 수는 있겠지만.”

저쪽에서 퍽이나 제대로 된 대답이 나오겠다. 솔직히 알려주면 그게 군대냐? 유치원이지. 나는 고개를 저었다.

“의미 없어.”

지금 와서는 그냥 우리가 확보할 수 있는 며칠 전의 정보를 통해 베로나 제국군의 위치를 추정하면서, 부지런히 움직이는 거 말고는 방법이 없다.

“그나마 다행인 건 저쪽에서도 지금 우리의 위치를 정확히 가늠할 수는 없을 거라는 점이야.”

“제국의 정보처는 지금 바쁘니까, 맞지?”

나는 엘렌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정보처는 지금 파이크 왕국 세자의 청혼 때문에 정신이 없을 거다. 이쪽을 신경 쓰지 못하겠지.

“돌아가면 하루 종일 물속에서 살 거예요.”

동감이다. 정글은 개 같다. 일을 다 정리하고 나서 돌아가면 이쪽으로는 오줌도 싸지 않을 거다.

여긴 위험해서 피하고 싶은 장소가 아니라, 개 같아서 피하고 싶은 곳이다.

식사를 하던 엘렌이 숟가락을 내려놓고 입을 열었다.

“카루토스 타카운을 적으로 상대해야 한다니.”

“강한 모양이네. 왕이라고 하길래 쌈박질이랑은 영 인연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내 말에 엘렌이 손에 들고 있던 훈제 청어를 이빨로 뜯어 씹으며 대답했다.

“그 시대에 왕이라고 한다면, 그 나라에서 가장 강한 전사를 뜻하는 거야. 카루토스 타카운은 가장 큰 땅을 차지한 왕이었으니.”

그 당시 대륙 최강이다 뭐 그런 건가.

“뭐 유명한 일화 같은 건 없고?”

솔방울을 던졌더니 수류탄이 되었다던가, 장군님이 축지법을 쓰신다든가 하는 머저리 같은 소리들 있잖아.

“카루토스 타카운은 젊은 미망인이 검은 재규어와 하룻밤을 보내고 낳은 자식이라는 설화가 있어.”

나는 그 말에 이야, 하는 소리를 냈다. 재규어와 사람 사이에서 나온 자식이라. 그거 특이한 성벽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들으면 환장할 만한 이야기로군.

“미망인이 새 남편을 찾아 새살림 차린 걸 참 화려하게 표현했네.”

졸지에 재규어 취급받게 된 남자의 입장도 들어봐야 하지 않을까. 그 이야기를 듣고 내가 내릴 수 있는 결론은 저거다.

“뭐, 대부분 그런 식으로 해석하고 있지. 하지만 사용했던 무기만큼은 진짜라는 게 학계의 정설이야.”

사용했던 무기? 그건 좀 알아두고 싶은데.

“더 말해줘.”

“티른다라는 뱀의 타액이 담겨 있는 호리병이야.”

“타액…… 그러니까 침을 담았다고?”

침이 어떻게 무기가 될 수 있는 거지? 내 표정을 보던 엘렌이 입을 열었다.

“다른 왕들이 카루토스 타카운을 무시하며 붙인 별명이 가래침 왕이었지. 시간이 흐르고 난 다음, 그 단어를 입에 담은 자들 중 살아남은 자는 없었고.”

말 한마디 잘못했다고 죽여버리다니, 우리가 상대할 녀석은 성미가 썩 부드럽지는 않은 모양이다.

“어쨌든, 그 호리병 안에 담겨 있는 액체는 카루토스 타카운의 의지에 따라 서른한 가지의 무기로 변할 수 있었다고 전해져.”

31가지라. 무슨 아이스크림 체인점이냐? 엄마는 외계인이 참 맛있었는데.

“그렇게 많은 무기라면 한 사람이 다 통달하는 것도 힘들 것 같은데.”

제대로 사용할 줄도 모르면서 그저 무기만 많은 머저리였다면 카루토스 타카운이 당대 최고의 전사라는 식의 평가를 받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고민하는 나를 보고 있던 클로에가 훈제 청어 한 마리를 내 쪽으로 건네주며 말했다.

“우선은 식사에 집중하시는 편이 좋을 것 같아요.”

그래, 머릿속으로 이리저리 생각해봤자 무슨 의미가 있겠냐. 일단은 배를 채우고 쉬는 데 집중하자. 어차피 그 잘나신 카루토스 타카운을 만나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을 테니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