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화
다음 날 아침 일찍 일어나 천막을 걷은 우리는 다시금 정글 속을 걸어 목적한 유적지를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고, 마침내 이 모든 사태의 원흉이라고 할 수 있는 유적의 거대한 돌탑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언데드들도.
“정예다 그건가.”
유적의 정체는 굳이 조사를 할 필요도 없이 카루토스 타카운의 무덤이다. 무수한 언데드들 사이에 드문드문 반짝일 정도로 상태가 좋은 장비를 챙겨 들고 있는 언데드들이 눈에 보인다.
굳이 비율을 따지면 콩밥에 들어있는 콩 정도의 비율이 아닐까 싶은데. 물론, 장비의 상태가 좋은 만큼이나 녀석들의 모습은 꿈속에서 튀어나왔다간 그대로 이불에 오줌을 지릴 정도로 살벌하다.
“도대체 지 무덤을 수호할 병사로 뭘 집어넣은 거야.”
머리통에 입, 귀, 코는 없이 눈깔만 수십 개 박혀 있는 정신병자 같은 녀석도 보이고, 하반신에 붙어있어야 할 다리가 팔에 붙어있는 녀석도 보인다.
……그 두 마리가 차라리 멀쩡해 보이는 모습이다.
“전원!”
미로스의 외침 한마디로도 충분했다. 언데드라고 하면 롱리버 요새에서도 상대했고, 정글 안에서도 상대해봤다. 병력들은 자신이 해야 하는 일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다.
그리고, 정글에서 진행되었던 소나기 작전의 승리로 올랐던 사기의 편린도 아직 심장에 남아있다. 눈앞에 보이는 끔찍한 모습의 시체들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정신으로 창칼을 치켜든 병력이 명령을 기다리기 시작한다.
“……저게.”
그때였다. 시체들이 양옆으로 갈라지고, 바닥에 낡고 좀먹어 형체만 간신히 남은 양탄자가 깔렸다. 그리고, 시체 한 구가 일꾼 여덟이 받쳐 든 가마 위에 올려진 옥좌에 앉은 채 천천히 앞으로 나온다.
“저 녀석이군.”
한눈에 알 수 있었다. 머리에 왕관을 쓴 시체였다. 부패를 막기 위해 온몸에 발라놓았던 것으로 보이는 밀랍의 깨진 틈으로, 썩은 육신의 역겨운 즙이 흘러내리고 있다. 허리춤에는 작은 호리병을 하나 차고, 손에는 권위를 상징하는 녹슨 왕홀이 쥐어있다.
등장한 것만으로 몸이 억눌리는 기분이다. 시체의 입이 살짝 열렸다.
― 산 자의 지휘관이여. 그대의 병력에 휴식이 필요하다면 기탄없이 말하라.
우리는 그 말에 순간적으로 움찔했다. 저게 지금 무슨 소리지?
“무슨 뜻이냐.”
미로스의 외침에 카루토스 타카운이 낮은 웃음을 흘리며 손에 쥐고 있던 왕홀로 스스로의 손바닥을 가볍게 쳤다.
― 왕의 아량이다. 그대의 병력들이 지쳤다면 충분한 휴식을 취하고, 배를 불리라는 뜻이다. 카루토스 타카운의 이름으로 말하니, 그대들이 싸울 준비가 되기 전에 공격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우리를 훑어보던 카루토스 타카운의 목소리가 가라앉았다.
― 허나, 나의 아량을 틈타 등을 보이고 도망치려 하는 순간. 아량은 진노가 되어 그대들을 덮친다. 너희는 이를 헤아려 처신하도록 하라.
휴식이 필요하다면 쉰 다음 싸워도 좋다. 하지만 후퇴는 용납하지 않는다. 카루토스 타카운의 말은 그런 뜻이다.
“그런 배려를 하는 이유를 알고 싶은데.”
내 말에 카루토스 타카운의 시선이 나에게로 향했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씨가 꽤나 부드럽다.
― 아, 전신의 인정을 받은 전사로구나. 나의 가장 날카로운 창 둘을 꺾었지? 그대의 질문이라면 내가 대답해주지 않을 수 없겠군.
여전히 부드러운 음색을 유지한 채로 말을 이었다.
― 내 심장이 뛰고 뜨거운 피가 흐를 때조차 손에 무기를 쥐고 나의 궁에 당도한 것들은 없었다. 내가 사랑하는 이들 중 으뜸은 전사이니. 그대들은 이 자리에 무기를 들고 이 자리에 서 있다는 것만으로도 나를 만족시키고 있음이라.
문드러진 살점 사이로 뼈가 보이는 손으로, 녀석은 주먹을 꽉 쥐었다.
― 만전을 기하라. 그대들의 눈앞에 서 있는 이 카루토스 타카운은 이 땅에서 뜻을 세우고, 동서의 바다는 물론이고, 더 나아가 북쪽 산맥까지 이어지는 땅을 소유했다.
“북쪽 산맥이라. 하이랜더들이 자리 잡은 쿠르스트 산맥을 말하는 건가?”
내 말에 카루토스 타카운이 굉장히 협조적인 태도로 대답했다.
― 전사여, 그대가 말하는 산맥이 내가 알고 있는 북의 산맥이 맞는지는 모르겠구나. 허나, 그 산맥에 자리 잡은 야만인들만큼은 참으로 강건했지. 싸움다운 싸움이었고, 용맹을 잃지 않는 자들이었다. 머리가 날아가도 잠깐이나마 달려들던 강인한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씨파…… 하이랜더 맞네. 이 새끼, 안 싸워본 녀석이 없구나. 왕이라기보다는 그냥 온 천지를 쏘다니며 시비를 걸던 양아치 새끼 아니야 이거.
“이겼나?”
내 말에 카루토스 타카운이 웃음을 터뜨렸다.
― 그들은 내 기억에 남을 정도로 강렬한 전투를 선사해주었지. 그 투지를 높이 사, 뛰어난 신관들을 시켜 그들을 위한 무덤을 만들어 주었다.
나는 그 말에 눈썹을 살짝 모았다. 하이랜더의 무덤?
“구체적으로 어떤 무덤인데.”
둘 중 하나다. 카루토스 타카운이 쿠르스트 산맥까지 가서 하이랜더들과 싸울 때는 그들의 시체가 사라지는 경우가 없었거나, 아니면…….
지금 하이랜더가 죽으면 시체조차 남지 않고 사라지는 원흉이 바로 저 녀석이 만들어둔 무덤 때문이거나.
― 신하들 중 몇이 간청하기를, 그들의 근골이 강건하고 가죽이 튼튼하니 이를 벗겨 장병들의 장비로 만들자 하더군.
말을 마친 카루토스 타카운이 다소 격양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 전사의 죽음 끝에 기다리고 있는 것은 격렬했던 투쟁만큼이나 평온한 안식이어야 한다. 나는 그 신하 놈들의 뼈에서 살을 뜯어내고 가죽을 벗겨 처형한 다음, 그와 같은 생각을 하는 자들이 있을까 걱정해 그들의 무덤을 감춰두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건 좀 심하지 않냐? 저 정도 되면 카루토스 타카운이 전사를 좋아하는 건지, 아니면 전사 빼고 나머지를 다 혐오하는 건지 헷갈릴 지경인데. 어쨌든, 저 발언은 결국 한 가지 결론을 말해준다.
“그 무덤, 네가 만든 거였냐.”
무슨 망할 놈의 마법인지는 모르겠지만 거의 사천 년이 되어가도록 멀쩡히 작동하고 있는 걸 보면 하이랜더의 무덤을 만든 신관이라는 녀석들의 실력도 보통이 아니긴 했던 모양이다.
이야기를 듣고 있던 엘렌이 내 옆에서 작게 중얼거렸다.
“최소한, 올리비에가 이 유적을 노렸던 이유는 대충이나마 윤곽이 잡히는 것 같은데.”
“그러게.”
안티온 대도서관에서 하이랜더의 무덤과 관련된 카루토스의 일화를 찾아낸 것이다. 대도서관 자체가 카루토스 타카운에 의해 만들어졌으니, 건립자의 업적에 대해 기록해 놓은 책은 있었을 것이다.
다만, 하이랜더의 무덤을 찾겠답시고 카루토스 타카운의 무덤을 건드려서 저 녀석을 깨워 전쟁을 벌이는 건 손해가 큰 일이니. 일단 우연으로나마 가본 적이 있는 도리안을 노렸을 것이다.
결국 쿠르스트 산맥에서의 계획이 마음먹은 것처럼 진행되지 않자, 카루토스 타카운의 무덤을 건드리기로 한 거다.
“심지어 지들이 건드리기로 한 것도 아니고.”
파이크 왕국이 건드리게 한 다음 날름 집어먹으려 들었지. 저 무덤 안에 들어있는 책에는 하이랜더의 무덤이 만들어진 과정과, 그 문을 여는 법 따위가 적혀 있을 공산이 크다.
얻게 되면 하이랜더의 무덤으로 가는 길이 열리고, 언데드가 된 하이랜더들이 한 번 무너져 복구공사가 한창인 쿠르스트 산맥의 방어선으로 덮쳐든다. 수비대가 견디지 못하고 무너지는 건 순식간일 것이다.
“좋아, 대충 알아야 할 건 다 안 것 같은데.”
내 말에 옥좌에 앉아있던 카루토스가 웃었다.
― 그렇다니 기쁘군. 휴식을 원치 않는다면, 그대들이 나에게 선사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모습을 보이도록 전열을 가다듬어라.
미로스가 그 대답을 듣고 나서 병력들을 한 번 훑어본 다음 외쳤다.
“전 병력, 내 지시에 따라 지정된 장소에 위치하고 보고해라!”
아군의 병력이 배치된 자리를 확인하고 보고를 시작한다. 그 사이, 카루토스 타카운은 옥좌 위에서 한 손으로 턱을 괸 채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 끝난 것 같군. 그럼 시작하지. 오늘 이 자리에서 그대들과 나, 둘 중 하나는 내일의 태양을 보지 못할 것이다.
말을 마친 카루토스 타카운이 한 손을 들어 올렸다. 동시에, 우리와 대치하고 있던 언데드의 무리가 하나의 몸이라도 된 것처럼 움직이기 시작했다.
“완전히 다르잖아.”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고 검을 꽉 쥐었다. 이전까지 싸우던 언데드도 지휘관들의 통제를 받아 움직이고 있었지만, 카루토스의 지휘를 받아 움직이는 언데드들은 차원이 다르다.
이전까지 마주쳤던 언데드가 억지로 붙들어 놓은 미친개와 같았다면, 이 언데드들의 움직임은 군견과도 같다.
클로에와 엘렌이 머리를 돌려 나를 바라봤다. 엘렌이 나에게 질문을 던졌다.
“헤로스의 머리통은?”
나는 차분한 어조로 대답했다.
“카루토스 타카운이 말하는 사이, 헤로스의 머리통은 세 번 위치를 바꿨어.”
괘종시계 불알처럼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는 꼴이 굉장히 짜증난다.
아주 작은 차이로 계속해서 이 싸움이 누구의 승리로 끝날지가 변동하고 있다는 증거다. 이 싸움의 승패는 어쩌면 화살 한 발, 칼질 한 번으로 결정 날 수도 있다.
“이 도움 안 되는 해골 대가리 같으니라고.”
클로에가 작게 중얼거린 다음 검을 뽑아 들었다. 이런 상황에서는 최선을 다하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다.
“진격!”
싸움은 시작되었다. 들어 올린 방패가 벽이 되고, 그 사이로 틈틈이 창이 내밀어진다. 북소리에 맞춰, 병력들은 하, 하! 하는 소리를 복창하며 발을 맞춰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언데드가 쏘아낸 화살과 아군이 쏘아낸 화살이 허공에서 교차한 다음 서로의 목표를 향해 날아간다.
허공에 뜬 채 조용히 부유하던 무수한 유령들이 닭 피를 바르거나 순철 화살촉을 박아넣은 화살에 맞아 고통에 찬 비명을 질러가며 방패를 추켜올린 병사들을 노리고 날아든다.
“자유 시전, 날아드는 부유령의 요격에 집중해라!”
그런 외침과 함께 마법사들이 뿜어낸 마법들이 날아드는 유령들을 향해 쏟아졌다.
― 으아아아아아아! 좋군! 이 몸에 흐르는 피가 아직도 뜨거웠다면, 분명히 용암처럼 끓어오르고 있었을 것이다!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카루토스 타카운이 몸을 한 번 부르르 떨더니 호리병을 막고 있던 뚜껑을 뽑아냈다. 넘실거리는 투명한 액체가 호리병에서 쏟아져 나와, 타카운의 몸 주변에 몰아친다. 녀석이 손을 뻗자, 주변에 휘몰아치던 투명한 액체가 그 손으로 빨려들어 한 자루의 글레이브가 되었다.
“뱀이 엄청 컸던 모양이네.”
무슨 침을 저렇게 많이 흘린 거지. 카루토스 타카운이 그 액체로 빚어낸 글레이브를 손에 쥔 채 전장에 뛰어들었다.
쿠쿵, 하는 소리와 함께 방패를 든 병사 열댓 명이 박살 난 방패와 함께 뒤로 날아간다. 그 광경을 보던 카루토스 타카운이 웃음을 터뜨리며 글레이브를 머리 위로 들어 올린 채 풍차처럼 돌린다.
― 이 썩어버린 육신이 피와 전쟁을 갈망한다, 너희 중에 가장 뛰어난 전사는 나에게로 오라! 한 명도 좋고, 두 명은 더 좋다. 많을수록 좋으니 이리와 나에게 그 무엄한 날붙이를 한번 들이밀어 보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