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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우드-105화 (105/275)

105화

미로스가 카루토스와의 싸움에서 벗어나 지휘에 집중한 지 얼마나 지났을까.

카루토스 타카운이 주먹을 휘둘러 나를 튕겨냈다. 바닥에 착지한 나는 욱신거리는 몸의 통증을 무시하고 다시 녀석에게 달려들며 분신을 쏟아냈다. 카루토스 타카운의 손에 들린 무기가 긴 봉으로 변하더니 사방을 내려찍는다.

두두두두, 하는 소리와 함께 검 위로 휘둘러진 연격.

“이…….”

무릎이 순간적으로 휘청이는 순간, 봉이 브레이서로 만들어낸 방어벽을 뚫고 내 가슴을 때렸다. 뒤로 밀려나 바닥을 몇 번 구른 나는 입으로 피를 토하고 몸을 한 번 떨었다.

― 이기고 싶거든, 더 나은 재주를 한 번 부려 보거라.

“……마력이 부족해.”

쌓아놓은 마력이 똑 떨어졌다. 더 필요하다. 마지막 분신은 심지어 평균 유지시간인 1.5초도 유지되지 못하고 사라진다.

“아.”

마력이 싹 털려 나간 다음 핑 하고 덮쳐온 현기증에 나는 털썩 무릎을 꿇었다.

그 모습을 확인한 카루토스가 순간 멈칫하더니 이내 혀를 차는 소리를 냈다.

― 거기까지인 모양이구나. 썩 괜찮은 싸움이었다. 네 이름을 말하라. 기억해주마.

말을 마친 카루토스 타카운의 손에 끝이 뭉툭한, 처형용 대검이 들린다. 나는 가만히 그 처형용 대검을 바라봤다.

그래. 간단하게 생각해보면, 부족한 마력을 채우면 될 일이다.

지금 마력을 모으면 된다. 나는 정신을 집중하고 마력을 모으기 시작했다.

“이름이 궁금하냐? 나는 마틴 레드우드.”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고 휘둘러진 카루토스 타카운의 검을 몸을 굴러 피했다.

“그리고 싸움 아직 안 끝났어. 개새끼야.”

누구 멋대로 내 동의 없이 문을 닫으려 들어.

“마틴 님, 지금…….”

내가 하는 짓거리를 눈치챈 건지, 클로에가 눈을 크게 뜨고 나를 바라봤다.

“안돼요, 그러다가 조금이라도 정신이 흐트러지면 심장이……!”

“그럼 저거에 죽을까?”

똑같아. 변하는 거 없어.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카루토스를 바라봤다. 녀석의 입에 너덜거리는 미소가 걸려있다.

― 너는 미친놈이구나. 오랜 세월 쌓인 지혜가 그 행위를 금지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는 법이다.

“새삼스럽게. 안 미쳤으면 여기에 왔겠냐.”

그나마, 나는 심장의 이물감과 통증은 없는 몸이다. 따라서 전투를 지속하며 마력을 모으는 행위에서 유일하게 방해되는 점은 하나다. 집중력의 유지와 끌어모으는 마력 양의 조절.

― …….

카루토스 타카운이 나를 향해 창을 내지른다. 나는 계속 마력을 모으는 데 집중하며, 내질러진 창을 막아냈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몸을 타고 전해지는 충격. 여기에 정신이 팔리면 심장마비다.

조금이나마 다시 모인 마력으로 카루토스 앞에 허상을 만들고 몸을 팍 아래로 숙여 다리를 향해 검을 휘두른다. 카루토스 타카운이 내 공격을 막아내고 다시금 반격한다.

방어와 공격, 공격과 방어. 쉬지 않고 이어지는 공방 속에서 억지로 머릿속을 차분하게 만들고, 집중력을 유지한다. 주변의 마력을 느끼고 심장으로 끌어들인다. 그리고, 모인 마력은 육체를 강화하고, 분신과 허상을 만들어내는 데 사용한다.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보던 클로에가 침을 삼키고 한마디 한다.

“벌써 5분째…….”

내가 전투 와중에 마력을 모으기 시작한 지 5분이 지난 모양이다. 클로에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 나를 도와 카루토스 타카운을 공격한다. 심장이 터지거나, 저 검에 죽거나. 둘 중 하나라고 하는 지극히 위험한 선택지 안에서 머릿속이 기괴할 정도로 차갑게 가라앉는다.

계속해서 마력을 쌓는 동안, 내가 허상과 분신을 만들어내기 위해 사용했던 마력도 다시금 몸으로 돌아오기 시작한다.

― 으, 하하하하하하하!

“크……흡.”

카루토스 타카운이 폭소를 터뜨리며 나를 향해 철퇴를 내려찍는다. 피하자, 충격파가 땅을 타고 번지며 내 몸을 뒤흔든다. 순간적으로 흐트러진 집중력과 함께 심장에 격통이 달린다. 나도 모르게 가슴 언저리로 손이 올라갔다.

“괜찮아, 괜찮아.”

나는 다시 가슴을 가린 손을 내렸다. 무시하자. 지금 무시하지 않으면 이 통증은 단순한 통증에서 멈추지 않을 거야. 계속해서 마력을 모아야 한다.

그 사이, 다시 내 몸으로 돌아온 에린실의 마력이 손상된 심장을 회복시킨다. 심장을 달리던 통증이 서서히 완화된다. 좋아, 모으던 마력의 통제에 실패해 심장에 손상이 생겨도, 심각한 수준이 아니라면 에렌실의 마력이 도와줄 것이다.

― 내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군. 전투 중에 마력을 모으다니. 감탄했다. 이 정도로 놀란 건 처음이니, 자랑스러워 하거라.

“그래.”

평상시라면 뭐라고 한 번 쏘아붙여 주겠지만 지금은 마음에 여유가 없다. 건조한 대답을 돌려준 나는 검을 꽉 쥐고 다시 한번 카루토스와 격돌했다. 녀석의 무기가 쉬지 않고 온갖 둔기로 변하며 내 검과 격돌한다.

녀석이 노리는 건 치명상이 아니다. 둔기를 휘둘러 충격량을 증대시키고, 그걸로 내 집중력이 흐트러지는 걸 노리고 있다.

카루토스의 눈이 불타는 것처럼 나를 응시하고 있다. 녀석은 이미 눈앞에 서 있는 나에게 완전히 집중해 있다. 전쟁 같은 건 눈에도 들어오지 않는 모양이다.

― 더 보여라. 더!

카루토스의 공격은 처음부터 끝까지 자비 같은 건 없었다. 무기를 휘두를 때마다 그 안에 담긴 살기가 느껴진다. 대체, 내가 어떻게 이 공격들을 막아내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두개골을 열어 뇌수에 얼음을 쏟아 넣은 것 같다. 심장에 흘러들어오는 마력의 양이 점점 더 증가한다. 그만큼, 분신과 허상을 만들어내는 주기도 빨라진다. 흘러들어오는 마력의 양이 많아지자, 서서히 통제를 벗어나 심장을 파괴한다. 그럴 때마다 에린실의 마력이 다시금 파괴된 심장을 복구한다.

“카루토스 타카운, 너는 패배했다.”

미로스의 목소리. 도대체 얼마나 시간이 지난 거지. 퍼뜩 정신을 차린 나는 신음을 흘리며 가슴에 손을 가져갔다. 외면하고 있던 고통이 밀려온다.

“크허, 흐어…….”

바닥에 무릎을 꿇은 나는 몸을 부르르 떨며 피가 섞인 침을 주룩 흘렸다. 돌아버릴 정도로 아프다. 어떻게 이런 상태로 검을 들고 휘둘렀지, 트랜스 상태라도 되었던 건가?

“이게.”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고 주변을 살폈다. 오후가 지나 석양이 찾아오고, 그 석양마저 끝물로 달려가고 있는 이른 밤이다. 얼굴을 구긴 채 주변을 둘러보니, 언데드는 거의 다 사라졌고, 아군 병력이 카루토스 타카운을 포위하고 있었다.

― 아, 그런가. 그래. 결국 이렇게 되었군. 저자에게 정신을 팔렸을 때부터 본능적으로 일어날 거라 생각했던 상황이로다.

카루토스도 그제야 주변을 확인한 모양이다.

― 5분을 유지했을 때도 눈을 믿을 수 없었건만. 한나절이 넘게 그 상태로 싸우다니.

그렇게 중얼거린 카루토스 타카운이 허리춤에 달린 호리병을 손으로 집었다. 그의 손에 들려있던 무기가 다시금 액체로 변해, 호리병 안으로 밀려들어 간다. 병사들이 무기를 들고 카루토스 타카운 쪽으로 슬금슬금 다가간다.

― 아니!

무기를 거둔 카루토스 타카운의 외침은 여전히 우렁찼다. 그의 외침에 다가가던 병력들이 멈칫한다. 카루토스 타카운이 손을 들어 나를 가리켰다.

― 마틴 레드우드, 카루토스 타카운의 끝은 네 칼 아래에서 맺어진다.

“소원이라면야.”

그 대답을 들은 나는 검을 짚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깐 비틀거렸지만, 내 앞에 선 카루토스 타카운은 가만히 그런 나를 바라보다가 자신의 갑옷을 벗어 던졌다. 부서진 밀랍이 엉겨 붙은 썩은 몸뚱어리가 드러난다.

“뭐, 술이라도 한 병 줄까?”

내 말에 카루토스 타카운이 웃음을 터뜨렸다.

― 이 망할 것아. 이 몸으로는 술을 먹어도 맛을 느끼지 못한다. 길게 끌지 마라.

말을 마친 카루토스는 턱 하니 바닥에 양반다리로 앉더니 그대로 눈을 감았다.

“잘 가라. 카루토스 타카운.”

― 가기 전에 좋은 걸 봤다.

말을 마친 나는 검을 들어 녀석의 심장을 찔렀다. 칼은 녀석의 몸을 뚫고 등 뒤로 튀어나온다. 그 상태로 힘을 주자, 칼이 녀석의 몸을 가르며 밖으로 빠져나왔다. 썩은 피와 체액을 흘리던 녀석의 몸이 이내 삐쩍 마르고 부스러져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그리고, 나는 정신을 잃었다.

“…….”

다시 눈을 뜨니, 나는 텐트 안에 누워있었다.

“정신 차린 것 같아요.”

“그러게.”

옆에는 클로에와 엘렌이 앉아 있었다.

“외간 남자 방에 멋대로 들어오다니.”

내 말에 엘렌이 조용한 어조로 대답했다.

“상태를 살펴보는 중이었어. 좀 어때?”

나는 그 말에 내 몸을 한번 살폈다. 트럭이 받아버린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안 아픈 곳이 없다. 심장의 마력은…… 나는 입을 헤 벌리고 멍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이게 뭐야.”

오늘 아침 기준으로 내 몸에 쌓여 있던 마력과 비교해서, 지금의 마력은 거의 70% 정도 늘어난 것 같다.

마력을 모으며 카루토스 타카운과 치고받은 반나절 사이에, 그만큼의 마력이 내 몸에 쌓였다는 뜻이다. 평상시처럼 쌓았다면 올해 봄이 와도 이 만큼 쌓을 수는 없었을 텐데. 이건 마력을 모은 게 아니라 먹어 치운 수준인데. 어떻게 살아있는 거지.

“저도 주무시는 동안 살짝 확인해 봤어요. 어디 가서 기사단장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몸에 쌓인 마력이 확 늘었어요.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그 말에 퍼뜩 정신을 차리고 클로에와 엘렌을 바라봤다.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옷에 묻어 있는 회색의 먼지와 머리카락에 엉겨 붙은 약간의 거미줄. 두 사람을 훑어본 나는 이내 후우, 하고 숨을 내쉬었다.

“카루토스 타카운의 무덤, 이미 조사한 모양이네.”

내 말에 클로에가 고개를 끄덕였다.

“올리비에 황녀가 원했던 것으로 보이는 책도 이미 확보했어요.”

“세자 저하의 명령이라고 말한 다음, 내가 품에 보관하고 있었어.”

말을 마친 엘렌이 자신의 배낭을 열어 책을 보여주었다. 얇게 깎은 에메랄드와 금으로 장식된 두꺼운 책이었다.

“내용은 알겠어?”

내 말에 엘렌이 으음, 하는 소리를 낸 다음 고개를 저었다.

“이 책은 수천 년 전에 쓰이던 문자로 적혀있어. 해석하기 위해서는 왕도에 돌아가서 서적을 참고해야 할 거야.”

그렇겠지. 훈민정음 언해본도 한글로 되어있지만 현대인들이 번역본이나 관련 서적 하나 없이 그 책만 보고 뜻을 이해하는 건 힘들잖아.

“왕도로 돌아가야겠네.”

내 말에 엘렌이 고개를 끄덕였다.

“유적 아래에 있던 유물들은 미로스 기사단장의 보호 아래에 발굴되는 중이야. 베로나 제국에서 소유권을 주장하기는 힘들걸.”

그런 건 어찌 되어도 상관없다. 우리는 올리비에가 노리고 있던 물건을 확보하는 데 성공했으니까. 그 미친 여자의 속셈이 뭔지 확실하지는 않지만, 제대로 훼방 놓았다는 점만큼은 확실하다. 마음이 좀 놓이네.

나는 시선을 돌려 클로에를 바라봤다.

“사람이 싸우면 좀 도와주지 그랬냐.”

내 말에 클로에가 세상 억울함은 다 끌어모은 표정을 짓고 나를 바라봤다.

“네?! 도와드리려고 했는데, 방해되니까 여기서 빵뎅이 씰룩거리지 말고 다른 곳으로 가라는 막말과 함께 화를 쏟아내셨잖아요!”

“내가?”

클로에가 으어어, 하는 소리를 내고 나를 바라봤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카루토스 타카운과 마틴 님을 두고 다른 곳으로 향했는데!”

멍하니 그 이야기를 듣고 난 다음,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하나밖에 없었다.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정치인들이 청문회 끌려가서 하는 그런 면피성 개소리가 아니다. 이건 진짜야! 그런 말을 한 기억이 없다. 애초에, 그냥 정신 차려 보니 이른 밤이었으니까.

“그래도 그런 소리를 했다면 미안하다.”

내 말에 클로에가 후우, 하고 숨을 내쉰 다음 고개를 저었다.

“상황이 상황이었잖아요. 막말 정도야 뭐. 게다가, 결과적으로 마틴 님이 한 말이 맞았어요. 제가 다른 곳에 합류한 덕분에 상황이 더 빨리 정리되었거든요. 일단, 일어나셨으니 식사를 좀 챙겨 올게요.”

말을 마친 클로에가 자리를 비웠다가 잠시 뒤 돌아왔다. 식사를 마치자 곧장 엘렌이 입을 열었다.

“롱리버 요새로 복귀해서, 휴식을 취하며 세자 저하에게 연락을 취하자.”

“그래야지.”

해낸 일도 보고하고, 그 대가로 나에게 떨어질 이득에 대해서도 의논을 해봐야 한다.

“바로 이동하지.”

어차피 여기는 미로스를 포함한 왕국의 군대가 알아서 통제할 것이다.

“발굴한 유물을 롱리버 요새 쪽으로 운반 예정이에요. 그들과 합류해서 이동하면 될 것 같지만, 더 쉬지 않으셔도 괜찮겠어요?”

“괜찮아. 조금 더 고생하더라도 지붕 있는 곳에서 뜨신 물에 몸 담그고 쉬는 편이 훨씬 좋지.”

대화를 마친 우리는 바로 짐을 싸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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