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화
롱리버 요새로 다시 돌아오게 된 우리는 사람들의 축하 인사도 건성으로 받아주면서 곧바로 목욕재계를 시작했다.
“이게 물이야 아메리카노야?”
처음 들어갔던 물은 석유와 같은 진한 색깔로 변해 있었다. 2-3시간에 이르는 장구한 목욕 끝에 나는 마침내 육신의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
수건으로 머리를 닦은 나는 검을 챙겨서 클로에에게 향했다.
“아…….”
이제 막 목욕을 마친 모양인지 머리를 수건으로 가려놓은 클로에가 내 복장을 보고 너무나도 슬픈 표정을 지었다.
칼을 차고 지금 방문했다는 건, 그 의미가 너무나도 빤히 보이는 행위였으니까.
“뭐 좀 확인해보고 싶어서 그래, 잠깐 도와줘.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야.”
내 말에 클로에가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에서 일어나 레이피어를 챙겼다. 공터에 자리 잡은 나와 클로에는 무기를 들고 서로를 겨눴다.
“…….”
가능한 정신을 집중하고, 나는 마력을 끌어모으기 시작했다. 클로에는 그런 나를 보고 눈을 가늘게 떴다.
“다시 봐도 믿을 수가 없네요.”
마력을 모으면서 싸운다. 먹으면서 싸는 행위와 크게 다르지 않다. 물론, 잘못하면 심장이 터진다는 리스크가 있다는 점에서 차이점을 보이긴 하지만.
클로에가 먼저 앞으로 나오며 나를 향해 레이피어를 내지른다. 검을 휘둘러 레이피어를 후려치자, 클로에는 그 충격을 흡수해 곧바로 다시 내뿜는다.
몸을 타고 퍼지는 충격 속에서도, 나는 계속해서 마력을 모으기 시작했다.
“역시, 많이 모이지는 않네.”
집중력을 유지한다고 해도, 결국 심장에 모이는 마력의 양은 그렇게 많지 않았다.
무리해서 조금 더 모으려고 하자 곧바로 모으는 데 성공한 마력이 통제를 벗어나 심장에 손상을 입힌다. 에린실의 마력이 곧바로 손상된 심장을 회복시키기 시작하지만, 격통 때문에 치료가 끝나는 동안은 마력을 다시 모으기 시작할 엄두가 나지 않는다.
“이 정도면 될 것 같아. 마음처럼 되지는 않네.”
말을 마친 나는 클로에와의 대련을 마치고 검을 집어넣었다. 아마, 카루토스와 싸울 때 내 심장은 손상되고 회복되기를 무수히 반복했겠지.
그 당시 심장의 고통을 느끼지 못한 건 카루토스 타카운과의 싸움에서 위기감 속에서 끌어올린 집중력이 덕분에 일종의 황홀경에 빠졌기 때문이 아닐까.
뭔가 엄청난 걸 주워 먹거나 오래된 검술 서적 같은 걸 찾아내는 것만 기연이라고 할 수 있는 건 아니잖아.
카루토스 타카운과의 싸움에서 이기는 데 성공했고, 심장에 모인 마력의 양도 확 늘었다. 이런 것도 기연이라고 하면 기연이겠지.
그냥, 일종의 럭키 스트라이크였다. 비슷한 상황 속에서 다시 시도한다고 해도 지금과 같은 결과로 이어질 확률은 한없이 낮다.
“고생했다. 오늘은 다시 부를 일 없으니 돌아가서 쉬어도 괜찮아.”
클로에는 인사를 하고 돌아갔다. 대련을 마친 나는 검을 밀어 넣고 물을 한 모금 마셨다.
“청혼 정도는 어렵지 않게 막아냈겠지.”
문제는 어떻게 막아냈느냐다. 그냥 거절하는 것 정도로 끝낼 만한 여자는 아니다. 뭔 개수작을 부려도 단단히 부리겠지. 그리고 그 개수작은 반드시 우리가 카루토스 타카운의 무덤에서 확보한 책을 빼돌리는 데에 집중되어 있을 거다.
그때, 저 멀리에서 에단이 내 쪽으로 달려오는 게 보였다. 손에 들려있는 수정구를 보니 아무래도 세자에게서 연락이 온 모양이다.
“세자 저하로부터 연락이 왔다.”
에단이 내민 수정구를 받아들자, 곧바로 에단이 자리를 비켜준다. 공터에 앉은 나는 가만히 수정구를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마틴 레드우드입니다.”
― 그린모스 늪지대에 대한 보고는 받았다. 고생이 많았겠군.
그런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수정구로 연락한 게 아닐 것 같은데.
“올리비에 황녀가 무슨 일을 벌였습니까?”
― 그래.
세자는 이후 베로나 제국이 돌려준 대답을 나에게 말해주었다. 순간적으로 나는 허, 하는 소리를 냈다.
“거절하지 않았다고요?”
― 그래. 오히려 긍정적으로 검토하고 있는 중이라 하더군. 거기에 더해 베로나 제국에서는 한 가지 제안을 더 추가했어.
베로나 제국의 제안을 들은 나는 입맛을 한 번 다셨다.
“테네스 공국에서의 만남이라니.”
제국에서 테네스 공국에서의 만남을 요청한 이유는 듣고 있으면 어딘지 모르게 황당했다.
황녀는 세자를 잘 모르고, 세자 또한 황녀를 잘 모르니 서로 일정 시간 이상의 교류가 필요하다. 허나, 이를 위해 어느 한쪽이 상대방의 국가에 일정 기간 이상 머무르는 것은 문제가 일어날 소지가 있으니 양국의 이해관계와는 큰 관련이 없는 테네스 공국의 협조를 받아 공국의 수도에 머무르며 교류를 하자.
뭐 이런 이야기였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이건 왕족과 황족 사이에 이루어지는 혼사다. 서로에 대해서 알 필요가 뭐 있어. 지금 연애하냐? 뭐 소개팅 나가?
세자와 황녀 사이의 결혼은 국익에 따라 움직이는 거다. 세자와 황녀가 서로에 대해서 알아가는 시간 같은 게 왜 필요해.
“거절하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내 말에 세자가 대답했다.
― 성사된다면 양국의 결연이 더 단단해질 수도 있는 사안인 만큼, 요청을 받아들인다면 해당 사안에 집중하라는 의미에서 올해 베로나 제국으로 보내야 하는 파이크 왕국의 사절단과 공물은 전부 취소할 예정이라 하더군.
나는 그 말에 눈가를 꾹꾹 눌렀다. 이러면 파이크 왕국에서는 또 말이 많아질 수밖에 없다. 파이크 왕국에서 거절이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지 못하도록 올리비에가 굉장히 매력적인 미끼를 걸어두었다.
― 쿠르스트 산맥의 관문 보수로 인해 국고에 타격이 있고, 그린모스 늪지대의 언데드 대량 발생으로 인해 해당 지역 일대의 농민들이 피난을 떠난 상황이야. 베로나 제국으로 넘겨야 하는 1년 치 공물이 전부 없던 일이 된다면…….
여러 가지 사태로 인해 위태로워지던 파이크 왕국의 재정 부담이 확 트이게 되는 거다.
“신하들 반응은 어떻습니까.”
― 그들의 반응 같은 건 아무래도 좋네. 이 나라의 세자인 나로서는 이 제안을 무시하기 힘들어.
나는 그 말에 끄으, 하는 소리를 냈다.
“올리비에 황녀는 독사 같은 여자입니다. 게다가, 테네스 공국에도 칠색 내각의 입김은 들어가 있을 겁니다.”
테네스 공국은 중립국이 아니다. 올리비에 황녀의 입김이 미치는 장소다. 적지라고.
― 그래서 자네가 동행해야 하는 거야. 독사를 상대하기 위해서는 뱀꾼이 필요한 법이지. 그대가 내 뱀꾼이 되어줘야겠어.
결국 이런 식으로 이야기가 전개될 것 같았다. 테네스 공국이라니. 그 여자는 나 또한 테네스 공국으로 향할 거라고 확신하고 있을 거다.
“……그 여자가 노리는 건 카루토스 타카운의 무덤에서 찾아낸 책입니다.”
내가 테네스 공국으로 향하게 된다면, 그 무덤에서 찾아낸 책을 파이크 왕국의 왕도에 두고 갈 수는 없다. 무슨 일이 일어날 줄 알고 그걸 그냥 두고 가. 검은사자 기사단장이었던 엔더슨의 말에 따르면 파이크 왕국에는 칠색 내각의 머리 중 하나가 아직 남아있다.
“제가 책을 지니고 테네스 공국으로 가지 않으면, 올리비에는 왕국에 남아있는 칠색 내각의 머리를 움직여 그 책을 빼돌리려 들 겁니다.”
따라서, 결국 챙겨가야 하는데…… 그러면 올리비에 황녀가 원하는 물건을 가지고 그녀와 테네스 공국에서 만난다고 하는 짜증 나는 전개로 이어진다.
― 왕국에 남아있는 칠색 내각의 머리를 정리하고 간다면…….
“그렇게 둘리가 없습니다. 재촉할 겁니다.”
걸어둔 미끼에 시간제한을 걸어버리면 된다. 아직 답이 없으니, 앞으로 며칠 안에 확답을 주지 않는다면 모두 없던 일로 하겠다. 뭐 그런 식으로. 그것만으로도 똥줄이 타게 되는 건 파이크 왕국이다.
이야기를 나누던 나는 세자의 양해를 구하고 잠깐 연락을 중단한 다음 엘렌과 클로에를 내 방으로 불렀다.
“무슨 일이야?”
“엘렌, 카루토스 타카운에게서 확보한 책의 조사는 테네스 공국에서는 할 수 없는 거야?”
내 말에 엘렌이 고개를 갸웃했다.
“못할 건 없지. 안티온 대도서관 정도가 아니라면 파이크 왕국의 왕도나 테네스 공국의 수도나 확보할 수 있는 자료의 양과 질은 비슷한 수준이니까. 근데, 갑자기 그건 왜 물어보는 거야?”
약 10분 정도 시간을 들여 세자의 청혼에 대해 올리비에가 어떻게 대응했는지 설명하고 나자, 엘렌과 클로에의 표정이 진지하게 변했다.
“대충 상황을 이해했지? 그럼 세자 저하와 연락을 재개한다.”
수정구를 손에 들자, 몇 초 지나지 않아 세자의 목소리가 귀를 때렸다.
― 화장실이라도 갔다 온 건가? 변비가 있는 모양인데, 유제품을 많이 먹도록.
“건강까지 신경 써 주시다니, 하해와 같은 배려에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엘렌 리버플로우 양과 이야기를 해봤는데, 책의 내용을 해석하는 건 테네스 공국에서도 가능할 것 같습니다.”
― 그럼, 그렇게 해야겠군. 엘렌 리버플로우는 책이 절도당하는 일이 없도록 마법을 걸어두도록. 가능하겠지?
엘렌이 순간적으로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죄송합니다, 세자 저하. 이미 이 책은 보존 마법이 한계까지 걸려 있기 때문에…… 이 이상은 마법을 걸어 둘 수 없습니다.”
― 기가 막힐 노릇이군. 책을 보관하는 케이스에 마법을 걸어놓을 수는 있을 텐데.
엘렌이 으음, 하는 소리를 냈다.
“가능합니다. 사실, 마법을 걸어두는 게 일반적인 잠금장치 같은 것보다는 신뢰할 수 있겠지만…… 상대가 상대인 만큼, 그것만 믿고 왕도에 방치하는 건 위험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 알았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복귀하면 바로 테네스 공국으로 향할 준비를 하도록. 이상.
책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 마법을 걸 수도 없는 건가. 엘렌은 하늘에 성역화 마법을 거는 건 어때? 라는 간단한 제안을 듣고 그걸 실현시킬 정도의 마법사다. 그녀가 못한다고 하면 사실상 왕국에서 우리가 도움을 받을 수 있는 마법사 중에서는 책에 추가로 마법을 걸 수 있는 사람은 없다고 봐야겠지.
세자와의 연락을 마친 다음, 클로에가 입을 열었다.
“그래도 빼앗길 가능성이 높지는 않을 것 같은데요.”
나는 그 말에 이마를 짚었다.
“애초에 그 여자는 빼앗을 생각도 없을걸. 책을 한 번이라도 훑어보게 되면 그걸로 끝이니까.”
책의 내용은 올리비에 황녀의 머릿속에 박히게 될 거다. 내용을 이해하고 이해하지 못하고는 상관없다. 한 번 훑어보고 나면 10년이 지난 다음에도 마침표 하나 안 틀리고 그대로 베껴 낼 수 있을 거다.
“책을 계속 지니고 다녀야 한다는 소리지만, 그럴 수 없는 상황을 만들어 두겠지.”
이야기를 듣고 있던 클로에가 몸을 한 번 부르르 떨고는 책을 집어 들었다.
“아, 좋아요! 그럼 이 책 그냥 박살 내면 끝인 거죠?! 어렵게 생각할 필요도 없네요!”
빼앗길 확률도 높고, 우리가 가지고 있어 봤자 도움이 되는 책도 아니다. 고로 이 세상에서 지워버리자. 말을 마친 클로에가 그대로 책을 집어서 촛불로 그슬기 시작했다.
“어……?”
클로에의 과감한 행동에도 불구하고, 책은 전혀 손상되지 않고 있다. 엘렌이 그 광경을 보고 쓴웃음을 지었다.
“클로에 양, 보존 마법이 걸려있다고 했잖아요.”
그것도, 더 이상 마법을 걸 수가 없을 정도로 한계까지 걸어놓은 보존 마법이다.
“저 책은 용암에 던져 넣어도 멀쩡할 거예요.”
엘렌의 의견을 들은 클로에가 하아, 하는 소리를 내고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풀 수는 없어?”
“지금 사용되는 마법과는 너무 다르고, 걸어놓은 마법사의 실력도 굉장해요. 당시 마법에 대한 자료가 있다면 모를까, 아무 지식 없이 시도한다면 6개월 정도는 걸릴 것 같은데.”
6개월이라. 보존 마법을 해제하고 파괴를 시도하려고 해도, 꼼짝없이 이 책을 들고 테네스 공국을 가야 한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엘렌은 테네스 공국에 도착하게 되면 저 책의 해석에 집중해줘.”
만에 하나 올리비에 황녀가 저 책의 내용을 알게 된다면, 우리도 알고 있어야 한다. 그래야 올리비에가 저 책의 내용을 알게 되어도 대응할 수 있다.
“내일 아침 일찍 왕도로 출발하자. 필요한 준비는 에단이 해주겠지. 내가 바로 요청해둘게.”
“아, 그건 제가 가서 말할게요.”
그 말을 끝으로 엘렌과 클로에가 방을 떠났다. 나는 테이블 위에 놓인 책을 바라보다가 혀를 한 번 차고 품에 안은 채 침대에 누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