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화
롱리버 요새를 떠나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우리가 탄 마차는 왕도에 도착했다. 엘렌이 성문을 한 번 확인하고는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
“아, 저기 왕도가 보이네요.”
“레드우드 부인이잖아.”
성문 앞에 호위를 거느리고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로델린이다. 마차가 성문 앞에 멈추고, 검문을 진행하는 동안 나는 마차에서 잠깐 내렸다.
“어머니, 저택에서 기다리시지.”
내 말에 로델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린모스 정글에서 있었던 이야기는 어렴풋이나마 들었다.”
이야기를 나누고 있으려니, 마차를 확인하던 병사가 이내 흠칫하고는 곧바로 나를 바라봤다.
“마틴 레드우드 님, 죄송합니다. 바로 통과시켜드리겠습니다. 도착하는 즉시 왕궁으로 향하라는 폐하의 지시가 있었습니다.”
그 말을 들은 로델린이 내 어깨를 잠깐 쓸어내리고는 말했다.
“갔다 오거라.”
말을 마친 로델린이 나에게 인사를 건네고 곧바로 다시 저택으로 향했다. 나는 잠깐 그런 로델린으르 보고 있다가 바로 왕궁으로 향했다.
“큰일을 해냈다고 들었다. 세자가 너를 판단함에 틀림이 없었다는 뜻이리.”
늙은 왕은 부복해 있는 나를 향해 차분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부족한 실력이지만 왕국에 도움이 될 수 있어서 다행입니다.”
그래서, 뭐 줄 건 없냐? 왕씩이나 되어서 그냥 감사 인사로 퉁치지는 않겠지.
“너의 공로에 대해 어떤 보상을 내려야 할지 고민했다.”
말을 마치자 누군가 문을 열고 들어와 쟁반을 내 쪽으로 내밀었다. 쟁반 위에는 옥으로 만들어진 열쇠가 들어있다. 살펴보니, 이건 열쇠가 아니라 가슴에 다는 브로치 같은 거다.
“이건.”
내 말에 왕이 대답했다.
“왕궁을 네 집처럼 여기거라. 언제나 너를 위해 마련된 방이 내궁에 있을 것이며 궁의 시설은 왕족의 출입만이 가능한 시설을 제외하고, 전부 사용해도 좋다. 용무 없이 왕궁을 사사로이 출입해도 치죄하지 않을 것이며, 공식 석상이 아니라면 궁 안에서 과인과 왕족들을 마주쳤을 때, 필요 최소한의 예의만 갖추어도 문제 삼지 않으리.”
왕의 말은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었다.
“또한, 원한다면 언제든지 나랏일을 논하는 자리에 참석해 의견을 개진할 수 있으며, 왕궁에서는 네 생활과 품위 유지에 필요한 예산을 따로 편성할 것이다.”
집 열쇠 같은 거구나. 심지어, 마련된 방도 귀빈궁 같은 외부의 사람을 받아 머무르게 하는 장소가 아니다. 왕족들이 머무르는 장소인 내궁에 숙소를 마련해 놓는다고 했다.
일종의 유사 가족 같은 형태라고 해야 하나.
“뭇 신하들 사이에서 이런저런 말이 나왔을 것으로 사료됩니다. 저 같은 자가 받을 만한 영광이 아니라 생각됩니다.”
“이미 결정 난 사안이다.”
쿠르스트 산맥에서의 방어전 때, 아무것도 받지 않았기 때문에, 거기에 대한 포상도 이번 기회에 같이 받게 되는 모양이다.
“궁으로의 사사로운 출입은, 오직 저만이 허락되는 것입니까.”
내 말에 왕의 입에서 흠, 하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클로에 로니세라 경과 백작부인 로델린 레드우드에게는 입퇴궐 시 간단한 절차를 거친다는 전제하에, 귀빈궁에 얼마든지 머무를 수 있다.”
나와 완전히 같은 권한을 주지는 못하는 모양이군. 하긴, 아무리 왕권이 강해도 거기까지 해주는 건 조금 무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뭐, 알버트의 저택을 나와서 따로 거처를 구할 필요가 없어졌으니, 그걸로도 충분히 만족할 수 있다.
게다가, 저택의 경비를 아무리 삼엄하게 한다고 해도 왕궁만큼 철저할 수는 없다.
“세자가 너를 기다리는 중이니, 너는 지체 없이 가보도록 하라.”
왕과의 만남을 마친 나는 곧바로 세자에게 향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세자가 나를 보고 히죽 웃었다. 손에는 술과 얼음이 담긴 잔에 하나 들려있다.
“그 열쇠는 어떻게, 마음에 드나?”
“감사할 따름입니다. 다만, 궁에 머무를 때 왕족분들에게 지켜야 하는 필요 최소한의 예의라고 하는 것이 뭔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내 말에 세자가 픽 웃었다.
“내궁에서 폐하나 다른 왕족들과 마주치면 인사말 정도 건네라는 거다. 그렇게 대단한 걸 하라는 뜻은 아니다.”
“신하들의 반대가 엄청나지 않았습니까?”
내 말에 세자가 술을 한 모금 마시고 잔을 내려놓고 눈을 가늘게 떴다.
“이봐, 신하가 왕의 눈치를 봐야지. 그 반대가 되면 쓰나.”
짤그락, 하고 얼음이 잔에서 서로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어차피 당장 머무를 수는 없을 거야.”
“그렇게 생각합니다. 테네스 공국으로 바로 가실 겁니까?”
내 말에 세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야겠지. 테네스 공국이라.”
“그렇게 큰 나라는 아니라고 알고 있습니다.”
베로나 제국이나 왕국과 비교하자면 상당히 귀여운 크기의 나라다. 내 말에 세자가 대답했다.
“그리고 그 작은 나라가 굴리는 자금의 양이 베로나 제국과 거의 동급이지.”
나는 그 말에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나를 보고 있던 세자가 다리를 꼰 채 말했다.
“그 공국 놈들이 작은 국가임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파이크 왕국이나 베로나 제국에서 잡아먹지 못하고 있는 이유는 순전히 그 녀석들이 손에 쥐고 있는 돈주머니 때문이야.”
말을 마친 세자가 작게 한숨을 쉬고 간단하게 설명했다.
은행, 주식회사, 보험회사, 선물거래와 어음…… 모든 것이 테네스 공국의 수도인 글림하트에서 최초로 만들어졌다.
돈 만지는데 조금이라도 관련이 있는 분야라면 글림하트에서 모두 등장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대단하군요.”
그건 더 이상 상업의 영역이 아닌데. 극한까지 발달한 상업이 마침내 금융업으로의 도약까지 이뤄내고 있는 중이다. 세자는 안타까운 탄식을 섞어서 한마디 했다.
“흥미로운 제도와 시도가 굉장히 많이 일어나고 있어. 왕국에서도 시도해보고 싶은 것들도 많지만, 테네스 공국처럼 좁은 곳에 막대한 돈이 밀집되지 않는다면 시도하기도 힘든 것들뿐이지.”
“뭐, 금광이라도 몇십 개 가지고 있는 겁니까?”
내 말에 세자가 고개를 저었다.
“테네스 공국에는 오랜 세월 이어져 온 안전한 해상 교역로와 노하우…… 그리고 무엇보다, 바다 너머의 사업 동반자들이 있지. 파다 보면 고갈되는 금광 따위에 비할 바가 아니야.”
바다 너머에 있는 온갖 진귀한 물건들이 테네스 공국을 통해 들어온다. 또한, 베로나 제국이나 파이크 왕국에서 생산되는 특산품도 테네스 공국을 통해 바다 너머로 향한다.
“베로나 제국이나 파이크 왕국이 테네스 공국을 고립시키면 어떻게 됩니까?”
내 말에 세자가 어깨를 으쓱했다.
“바다 너머의 세력들은 테네스 공국을 제외한 다른 나라의 배를 받아들이지 않고 있네. 테네스 공국과 몇백 년이 넘도록 교류해왔고, 충분히 만족할 만한 결과를 내고 있거든. 심지어 바다 너머의 세력 중 상당수는 공왕의 자제들과 결혼한 경우도 심심찮게 있어.”
테네스 공국이 습격받는다면 결혼한 바다 너머의 세력에서 지원군을 보낼 가능성도 있다. 골치 아픈 녀석들이네. 거대한 나라들 사이에 자리 잡은 작은 나라가 할 수 있는 처세술 중에서도 이 정도면 굉장히 단수가 높은 거 아닌가?
“그런 나라의 성격 때문에 베로나 제국에서는 나와 그 황년의 교류를 위해 테네스 공국의 협조를 구한 거지.”
나는 그 말에 턱을 쓰다듬었다.
“칠색 내각이 테네스 공국에도 자리 잡고 있다면…… 테네스 공국은 베로나 제국은 몰라도, 올리비에 황녀의 돈주머니 역할을 하고 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내 말에 세자가 뭔가를 턱 하고 내밀었다.
“첩보국에서 보낸 정보야. 테네스 공국에 칠색 내각의 머리가 자리 잡고 있는 모양이더군.”
“아, 그 친구들도 일을 하고 있긴 했나 봅니다.”
영 허탕만 치고 있길래 별다른 기대를 하지 않았었는데.
“후보는 어떻게 됩니까?”
“이 친구다.”
내 말에 세자가 다른 서류를 건네주었다. 세코프 무역회사의 소유주 루크 발리아노. 벌어들이는 돈이 기가 막힐 정도다. 거기에 더해 테네스 공국 상인 연합회라는 조직의 회장까지 맡고 있다.
상업과 금융업에 의존이 높은 테네스 공국에서 이 친구가 가지고 있는 권한은 굉장하겠지.
“첩보국에서 엔더슨의 재산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특정 지은 거다. 최소한 칠색 내각에 협조하고 있다는 건 확실해. 게다가 테네스 공국에서 루크 발리아노의 위치를 생각해보면, 머리라고 생각하는 편이 합리적이지.”
“자금 지원을 받은 건 왕국 안에 남아있는 칠색 내각 중 하나라고 생각했습니다.”
내 말에 세자가 고개를 저었다.
“첩보국에서 찾아낸 건 그 자금 지원에 대한 내용이 아니었어. 훨씬 더 이전의 자금 지원이야.”
그래, 자금 지원이라는 게 한 번 받고 마는 건 아니니까. 아무래도 그중에서 하나가 걸린 모양이다.
“루크 발리아노라는 녀석이 올리비에의 지갑 역할을 하는 중이라면, 당연히 이번 방문도 나름의 대비가 되어있을 겁니다.”
“그리고, 자네는 그걸 좀 뚫어줘야겠어. 그년도 지갑이 막히고 나면 똥줄이 좀 타겠지.”
말을 마친 세자가 나를 보다가 잔을 들어 입 안에 얼음을 하나 밀어 넣고 씹었다.
“가서 책만 끼고 도는 걸로는 부족해. 테네스 공국에 칠색 내각이 자리 잡고 있다 해도, 완벽하게 그 황녀의 구역이라고 할 수 있는 베로나 정도로 테네스 공국을 꽉 잡고 있지는 않겠지. 당당하게 들어가서 칠색 내각의 머리를 줄일 수 있는 기회는 지금이야.”
그래 뭐…… 나는 서류를 바라보다가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이번 기회에 확실히 그 여자의 지갑을 닫아버리겠습니다.”
“좋아, 그럼 돌아가서 쉬도록. 아, 로델린 레드우드와 클로에 로니세라 경은 귀빈실에 따로 방을 마련하고 사람을 보내두었어. 아마 지금 즈음이면 거기에 머무르고 있을 거야.”
“감사합니다. 그럼, 편히 쉬십시오.”
인사를 하고 세자의 방을 나온 나는 왕궁을 걸어가며 한숨을 팍 쉬었다.
“골통 아프네.”
올리비에가 테네스 공국에 칠색 내각의 사람이 숨어있다는 걸 감추고 싶었다면 불가능하지는 않았을 텐데.
실제로, 첩보국에서는 엔더슨의 서류를 확인했지만 아직 파이크 왕국 안에 숨어있는 또 다른 칠색 내각의 머리는 특정하지 못하는 중이다.
테네스 공국의 루크 발리아노도 충분히 그렇게 만들 수 있었을 거다. 그런데도 굳이 숨기지 않고 방치한 이유는…….
“깃발 뺏기라. 미친년, 이 상황에서도 놀고 싶다 그거냐.”
내 깃발은 카루토스 타카운의 무덤에서 발견한 책이다. 올리비에의 깃발은 루크 발리아노다. 내 깃발을 지키면서 상대의 깃발을 뺏는 데 성공하면 이기고, 반대로 내 깃발을 빼앗기면 패배다. 적어도 올리비에는 지금 상황을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거다.
기대한 수준 이상의 결과를 계속 보여주면, 결국 고양된 흥분을 충족시키기 위해 놀이판 위에 지 목숨도 올릴 거다. 우선은 거기까지 가는 게 목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