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드우드-108화 (108/275)

108화

나와 클로에, 엘렌과 로델린은 왕도에 도착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테네스 공국으로 향하는 세자의 행렬에 동행했다. 로델린 같은 경우에는 여러 가지로 고민을 해본 결과, 차라리 내 쪽에서 끼고 있는 편이 더 안전하다고 판단해서 동행을 결정한 거다.

쿠르스트 산맥, 왕도, 그린모스 정글, 다시 왕도, 그리고 테네스 공국의 수도인 글림하트까지. 방랑벽이라도 도진 것 같은 하루하루가 지나가고 있었다. 이젠 알버트가 마련해준 저택이나 레드우드 가문의 영주성보다 마차 안이 더 집 같은 기분이다.

그리고, 여행 끝에 도착하게 된 테네스 공국의 수도 글림하트를 눈으로 영접하자마자 내가 내뱉은 말은 하나였다.

“이런 돈 많은 미친놈들.”

나는 희미하게 푸른빛이 도는 병사들의 무기를 보고 기겁했다. 저거 미스릴 합금이야? 기사도 아니고 병사한테 저런 걸 쥐여준다고?

마차 안에서, 나는 병사들의 무장 상태를 보고 한 번 기겁했고, 성벽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저 멀리에 보이는 거대한 황금상을 보고 다시 한번 기겁했다.

35m에 달하는 거대한 통짜 황금상이 세워져 있다. 햇빛을 받아 번쩍이는 황금 덩어리는 '우리는 돈이 존나 많도다'라고 선언하는 것처럼 우리를 내리깔아보고 있었다. 돈으로 사람을 주눅 들게 만든다는 게 바로 이런 장면 아닐까.

무수한 병력들이 시립한 가운데, 세자를 포함한 파이크 왕국의 사람들이 바닥에 깔린 카페트 위에 서자, 테네스 공국의 공왕이 입을 열었다.

“테네스 공국은 파이크 왕국의 세자와 그 일행들을 성심을 다해 환영하는 바이다. 부디, 공국의 자랑스러운 심장 글림하트에서 만족할 만한 시간을 보내길 기원한다.”

그 이후로도 이런저런 이야기가 오갔지만 별로 중요한 건 없었다. 애초에 이런 식으로 진행되는 행사는 그 기승전결이 너무나도 뻔하니까.

왔니? 그래 왔어. 정도의 이야기가 30분 정도의 길이로 늘어난 것뿐이다.

테네스 공국이 마련한 환영 행사를 마치고 나서, 연빈관이라는 이름의 숙소에 짐을 풀었다.

“화려하네.”

“그러게요.”

클로에가 머무를 장소는 이 공간 안에 따로 마련되어 있었다.

이 방 안에 들어있는 물건을 죄다 훔쳐서 팔면 어지간한 규모의 저택 하나 정도는 살 수 있지 않을까. 침대 위에는 편지가 한 통 놓여있다. 장담하는데 올리비에다. 편지 봉투를 열어 안에 들어있는 내용을 확인한 나는 지을 수 있는 가장 떫은 표정을 짓고 혀를 한 번 찼다.

[테네스 공국에 온 걸 환영해. 잊지 못할 추억을 만들자!]

필체는, 이전에 내가 받아본 적 있는 편지와 일치한다.

추억 같은 소리 하네. 마차에 치여 죽어버렸으면 좋겠군. 종이는 양피지나 파피루스 같은 게 아니다. 한지를 닮은 것 같은데. 테이블 옆에 마련된 종이의 재질과 같다. 테네스 공국이 바다 너머에서 수입해 오는 물건인가.

“식초라, 애들 장난도 아니고.”

들고 있는 종이에서 시큼한 냄새가 난다. 촛불에 편지를 살짝 그슬자 곧바로 적갈색의 글자가 나타났다.

[새벽 1시 30분, 로엔자이나 카페 독실 102호. 예쁜 호위가 같이 와도 상관없어♥]

편지의 숨겨진 내용을 확인한 클로에가 나를 바라봤다.

“어머, 하트까지 해놓은 걸 보니 의외로 올리비에 황녀가 세심한 성격인가 봐요. 가실 건가요?”

나는 그 말에 고개를 저었다.

“내가 미쳤냐, 거길 뭐하러 가.”

“여자를 바람맞히는 건 좋은 취미가 아니라고 들었는데.”

“그게 여자로 보이는 사람이 있으면 데려가서 결혼하라지.”

3개월 살아남는 데 성공하면 장수한 거다.

“엘렌은?”

“책의 연구에 필요한 자료를 모으는 중이에요.”

즉시 책의 해석에 집중할 모양이다. 내용의 해석을 위해서는 엘렌이 책을 지니고 있어야 하니까, 그녀가 일종의 최종방어선 같은 역할까지 겸하게 된다.

“실력 있는 마법사니까. 습격당한다고 해도 우리가 도착하기 전까지는 대응할 수 있겠지.”

내 말에 클로에가 고개를 끄덕였다.

“세자 저하께서도 엘렌 리버플로우 양이 머무는 방의 호위에 상당히 신경 쓰신 걸로 알아요.”

“말이 나온 김에, 세자 저하는 지금 어디 계신지 알아?”

내 말에 클로에가 서류를 몇 장 확인하고는 대답했다.

“지금이라면 올리비에 황녀와 식사 중이겠네요.”

“끔찍하군.”

불쌍하기도 하지. 굉장히 피곤할 거다. 밥을 먹어도 살이 빠지는 기분일 텐데. 식사가 끝나고 나면 바로 세자에게 찾아가야겠는걸.

이미 테네스 공국으로 향하면서 세자에게는 당부해둔 말이 있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안하다.

* * *

세자와 황녀가 한 테이블을 공유하고 있다. 세자는 황녀를 대놓고 경계하는 중이고, 황녀는 그런 남자를 보며 웃고 있다. 서로의 신체에 무기가 없다는 사실은 이미 확인되었고, 문은 베로나 제국의 기사와 파이크 왕국의 기사, 그리고 테네스 공국의 기사가 함께 지키는 중이다.

안전과 비밀이 보장되는 식사 시간, 먼저 입을 연 건 올리비에 황녀였다.

“이렇게 사적으로 이야기를 나누는 건 처음인 것 같은데요. 파이크 왕국의 세자 제이콥.”

이름으로 불린 제이콥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경계하시는 건가요? 이유가 뭘까요.”

제이콥은 그 말에 대답했다.

“몰라서 물어보는 건가?”

“아니요.”

올리비에는 그렇게 중얼거리고 짙은 미소를 띠고 포크를 테이블 위에 올려둔 채 제이콥을 응시했다.

“그렇게 적대하실 필요 없는데, 섭섭해라.”

올리비에가 손수건을 들어 살짝 입가를 닦으며 눈을 가늘게 뜨고 제이콥을 바라본다.

“질문 하나 할래요. 마틴 레드우드가 이 자리에서 뭘 하라고 명령했나요?”

“……명령?”

올리비에는 그 말에 어깨를 으쓱했다.

“단어가 마음에 들지 않으셨나요? 그럼 조금 부드러운 단어로 표현해둘까요. 이걸 해라, 저걸 하지 마라 하는 식의…… 그래, 소위 조언들 말이에요.”

제이콥의 표정이 살짝 구겨졌다.

“무슨 소리를 하고 싶은지 알 것 같군.”

“마틴 레드우드에게도 예쁜 강아지 한 마리 정도는 있는 게 당연하잖아요? 마틴 레드우드는 남자니까 암컷을 선호하지 않을까 했는데, 수컷을 키울 줄은 몰랐어요.”

그 말에 제이콥이 포크를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올리비에 황녀, 그대는 지금 파이크 왕국의 세자에게 말하고 있는 거다!”

“화를 내고 목소리를 높인다고 당신이 마틴 레드우드의 뜻대로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이 변하는 건 아니에요.”

제이콥이 몸을 한 번 떨고는 후우, 하고 숨을 내쉬었다.

“아, 그런 지시를 받으신 모양이구나. 저와 만나면, 자존심을 긁는 이야기를 할 텐지만 참아야 한다고. 주인이 시킨 걸 충실히 수행하는 좋은 강아지네요.”

제이콥은 별다른 말 없이 물을 한 모금 마셨고, 올리비에는 그 장면을 얌전히 바라보다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제가 주인은 아니라지만, 칭찬의 뜻에서 우쭈쭈라도 해드릴까요?”

올리비에는 제이콥을 바라보다가 주머니로 손을 넣으며 입을 열었다.

“식사를 마치고 돌아가면, 지금 있었던 일을 주인님께 제대로 보고하…….”

말을 이어가는 올리비에의 얼굴에 확 하고 물이 뿌려졌다.

“이제 좀 조용하군. 조잘거리는 꼴이 시끄러워서 밥이 어디로 들어가는지 모를 지경이었는데.”

올리비에는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얼굴을 닦았다. 마치 이럴 줄 알고 있었다는 듯이 자연스러운 행동이었고, 표정에는 놀람이나 분노 같은 것도 없었다. 그 사실이 알게 모르게 제이콥의 성질을 긁는다.

제이콥 세자가 뭘 해도 올리비에의 성미를 긁을 수는 없다. 하지만 올리비에 황녀는 착실하게, 일방적으로 제이콥의 성질을 건드린다.

“네년이 노리고 있는 건 알고 있다. 그리고 그 책이 너에게 넘어갈 일은 없어.”

“아, 그건 마틴 레드우드와 이야기하고 싶은 주제네요. 넘어가죠. 우리 본래 주제로 넘어가는 건 어떨까요. 혹시 따로 취미 같은 거 가지고 계신가요?”

이제 와서 취미를 물어보고 있는 올리비에를 보며, 제이콥은 어금니를 꽉 물었다.

* * *

세자가 올리비에와의 식사를 하고 돌아왔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는 곧장 세자가 머무르는 거처로 향했다.

“세자 저하, 안에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지금은 말을 조심해야 한다. 올리비에가 무슨 개수작을 부렸을지는 안 봐도 뻔하다.

“그 독사 같은 년.”

세자는 굉장히 열 받은 표정으로 팔을 꼰 채 술을 한 잔 쭉 들이켰다.

“면상에 물을 부어도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더군. 오히려,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이 주머니에 손을 넣고 있었어.”

말을 마친 세자가 후우, 하는 소리를 내고는 의자 팔걸이 옆으로 팔을 늘어뜨린 채 나를 바라봤다.

“복잡한 심경이야. 그년의 수작에 넘어가는 건 빤히 알고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머릿속에서 말이 떠나지를 않는단 말이지.”

“어떤 말을 했는지 알 수 있겠습니까?”

내 말에 세자가 곧바로 대답했다.

“나를 완전히 네 개 취급하더군.”

개 취급이라.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격렬한 표현이 오갔던 모양이다. 황녀의 면상에 물을 뿌린 건 개 취급에 대한 반발이겠지.

그 반발심이 나에게 뻗쳐 나올 가능성도 얼마든지 있다. 그래도 살아온 시간이 있어서 대놓고 올리비에의 말에 홀라당 넘어가지는 않았지만, 그녀가 세자의 머릿속에 박아놓은 가시가 곪기 시작하면 결국 내 발목을 잡겠지.

지금 괜찮아 보인다고 해서 그냥 버려두면 안 된다. 여기서 올리비에가 세자에게 박아놓은 가시를 바로 뽑아내야 한다.

“원래 세상일이 다 그런 법이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입을 열자 세자가 나를 바라봤다.

“무슨 뜻으로 한 말인지 잘 모르겠군.”

“그 여자가 개로 비유를 했으니, 저도 개로 비유를 해보겠습니다.”

내 말에 세자가 의자 옆으로 늘어뜨리고 있던 팔을 바로 하고 나를 바라봤다.

“듣고 있다. 너는 말해라.”

“주인이 개를 키우면, 주인은 개를 살피게 됩니다. 밥과 물을 주고, 씻겨주고, 똥오줌을 치워줍니다. 강아지를 살피는 좋은 주인이라면 모두 그렇게 합니다.”

내 말에 세자가 등받이에 허리를 기댄 채 나를 바라봤다.

“때로는 개가 주인에게 요청을 하기도 합니다. 산책을 나가고 싶다, 공놀이를 하고 싶다. 개의 주인들은 그런 강아지의 요청을 들어주는 경우가 대부분이죠.”

말을 마친 나는 잠깐 침묵하다 다시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런 일이 일어난다고 해서 개와 주인의 관계가 역전되지는 않지 않습니까? 주인은 단지 좋은 주인으로서의 역할을 할 뿐이죠. 강아지는 그런 주인의 행동에 의존하는 것뿐입니다.”

“그래, 하고자 하는 말은 이해했다.”

다행이네. 세자의 언동에 끼어있던 다소의 불쾌함 같은 게 가셔나갔다.

“사냥개는 주인이 원하는 사냥감을 찾아내면 물어 죽이거나, 짖어서 주인을 오게 합니다. 사냥개로서 당연해 해야 하는 일을 하는 것뿐입니다.”

“사냥감을 발견하고 짖어, 사냥꾼이 사냥개 쪽으로 간다고 해서 사냥개가 사냥꾼의 주인이 되는 건 아니다. 그런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건가.”

세자의 미간에 들어가 있던 힘이 약간 빠지는 게 느껴진다.

“그래. 비단 이런 일뿐이 아니라, 왕이 되어 나라를 운영하는 것 또한 같은 이치겠지.”

“왕이 백성을 보살피고, 그들의 요청을 들어준다고 해서 백성이 왕의 주인이 되는 건 아닙니다.”

내 말에 세자가 픽 웃고는 남은 술을 쭉 들이켠 다음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네 말은 충분히 알아들었으니, 그만해도 좋다. 마틴 레드우드. 나를 위해서 테네스 공국에서 해줘야 하는 일이 있지 않느냐.”

나는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하고 문을 나섰다. 일단, 이걸로 올리비에가 시도했던 수작질은 막아낸 것 같다. 같은 수법에 또다시 흔들릴 정도로 세자가 바보는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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