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화
세자의 마음속에 박힌 불안감을 뽑아내고 다시 방으로 돌아온 나는 새벽이 되자 코트를 챙겨 입고, 따로 준비해두었던 테네스 공국 통행증을 주머니에 넣었다.
마틴 레드우드라는 이름 대신 가명이 적혀 있는 통행증이다. 왕국에서 테네스 공국까지 향하는 길에는 시간이 충분했으니, 세자에게 부탁해서 하나 만들어 달라고 했었다.
“외출하시나요? 동행할까요?”
“테네스 공국 상인연합의 건물로 향할 거야. 동행해. 하지만, 그 전에 일단 이 편지부터 세자 저하에게 전해줘. 그리고, 너 마차 몰 줄 알던가?”
“네 뭐…… 만약을 대비해서 배워뒀어요. 첩보국에서 일하다 보면 직접 몰아야 하는 일도 있어서.”
“좋아.”
말을 마친 나는 목도리를 두르고 모자를 눌러 쓴 다음 클로에를 기다렸다. 잠시 뒤 클로에가 돌아왔다. 우리는 함께 밖으로 나섰다.
“루크 발리아노가 테네스 공국의 어디까지 손을 뻗고 있는지가 중요해.”
그저 돈이 엄청나게 많은, 올리비에의 충실한 지갑일 뿐이라면야 증거를 찾아내서 테네스 공국의 공왕에게 넘기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하지만, 만약 그렇지 않다면 단순히 루크 발리아노가 칠색 내각의 머리 중 하나라는 걸 밝혀내는 걸로는 부족하다. 직접 손을 써서 제거해야 한다.
“새벽인데도 제법 활기차네요.”
돌아다니는 사람들이 보이고, 불 켜진 술집들이 보인다. 벽에 기댄 채 잠들어 있는 취객들도 몇 명 보이고, 길거리를 돌아다니던 경비병들이 그런 취객들을 깨우고 있다.
테네스 공국 상인연합의 건물 앞에 도착한 나는 걸음을 멈추고 멍하니 건물을 바라봤다.
“이런 씨팔년.”
“네? 갑자기 왜 욕을…….”
욕이 안 나올 수가 없잖아. 나는 손을 들어 세워진 커다란 건물의 간판 중 하나를 가리켰다. 로엔자이나 카페. 상인연합이 사용하는 건물에 있는 카페다. 클로에가 그 간판을 확인하고 입을 열었다.
“이리로 올 줄 알고 있었던 모양이네요. 미친년.”
클로에의 입에서도 욕이 튀어나왔다. 나에게 보내진 편지에 있던 내용이다. 저 카페의 독실 중 102호로 오라고 했지.
“어떡하죠?”
“건물 안에는 들어가야겠지만, 올리비에가 마련한 장소로 갈 생각은 없어.”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고 나서 건물 주변을 확인했다. 유리로 만들어진 커다란 문 앞에 사적으로 고용한 용병으로 보이는 녀석들이 보인다.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데. 국가는 사병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병을 방치해 두고 있다면 둘 중 하나다.
치안이 더럽게 나쁜 나라거나, 아니면 이 건물 안에 사는 사람들은 국가가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다 해도 가볍게 무시하고 사병을 부릴 수 있을 정도로 권세가 높다는 뜻이다.
밤거리의 풍경을 생각해 본다면 테네스 공국의 치안은 나쁘지 않은 게 확실하니, 저 친구들이 사병을 거느릴 정도로 위세가 드높다는 식으로 해석해야겠지.
“장비도 신기하네요. 제가 본 적 없는 무기들뿐이에요.”
낫칼이나 쿠크리를 닮은 무기를 지니고 건물을 지키는 용병들은 이 대륙의 사람이 아닌 것 같다. 녀석들 중 하나가 우리와 눈이 마주쳤다.
“어이, 뭘 그렇게 보는 거야.”
나와 눈이 마주친 녀석이 다른 녀석들에게 무슨 이야기를 한 다음, 내 쪽으로 다가온다. 경계심이 뛰어난데. 지키는 사람으로서 가질 만한 좋은 미덕이다.
“어쩌죠.”
어쩌긴 뭘 어째.
“내가 갑자기 웃으면, 시선을 좀 끌어줘. 이런 거 싫어하는 건 알지만 부탁 좀 하자. 정말 미안하다.”
나는 태연한 표정으로 녀석이 다가오기를 기다리다가 통행증을 내밀었다.
“파이크 왕국에서 세자 저하를 모시고 온 사람들이다. 잠깐 여유가 생겨서 글림하트를 구경하고 있는데. 이 건물은 뭐지?”
“아.”
녀석이 내 손에 쥐어진 통행증을 확인하고 잠깐 움찔한다.
“파이크 왕국에서 오신 분이셨군요. 죄송합니다. 이 건물은 테네스 공국 상인연합이 사용하는 건물입니다.”
곧바로 태도가 공손해진다. 옷의 앞섶 형태가 약간 부자연스러운데, 뭐 따로 암기 같은 것도 챙겨둔 모양이고. 손에 들고 있는 검을 보니, 희미하게 녹색빛이 돈다. 독을 바른 건가.
이 자식, 이 앞을 지키는 목적이 수상한 대상의 제압 같은 게 아니라, 죽이는 거다.
일단, 내가 누군지 모르는 모양이다. 아무래도 칠색 내각에서 건물을 지키는 용병에게까지 나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는 않은 모양이다. 그렇다면…… 나는 머릿속으로 생각을 정리하며 입을 열었다.
“안에 들어가 봐도 괜찮나?”
내 말에 녀석이 으음, 하는 소리를 한 번 내고는 대답했다.
“일 층에서 삼 층까지 마련된 카페는 외부인의 출입이 자유롭지만, 그 이외에는 테네스 공국 상인연합에 소속되지 않은 분들의 출입이 금지되어있습니다. 죄송합니다.”
나는 그 말에 하하하 웃으며 대답했다.
“거기까지 들어갈 생각은 없었어. 문 앞을 지키고 있길래 혹시 저 카페도 못 들어가는 건가 싶어서 물어본 거야.”
내가 갑자기 웃음을 터뜨리자, 클로에가 슥 하고 내 앞에 서 있는 남자 쪽으로 바짝 다가선다.
“그나저나, 바다 너머에서 오신 분인가요?”
클로에의 얼굴이 남자에게 들이 밀어지자, 녀석이 살짝 당황한다.
“그렇습니다.”
“정말? 그럼 원래 고향은 어디인지 알 수 있어요?”
“카푸라 군도입니다.”
클로에가 그 말에 아! 하는 소리를 내고 활짝 웃었다.
“거기 알아요. 고품질의 정향으로 유명한 곳이죠? 군도라고 하니, 많이 습하겠네요. 피부는 그을린 건가요, 아니면 원래? 한번 만져봐도 될까요?”
클로에가 그런 이야기를 하며 자연스럽게 녀석의 손을 만지작거리며, 한 걸음 더 앞으로 다가갔다. 그 틈을 타, 나는 녀석의 주머니 쪽으로 손을 뻗었다.
바짝 붙어 이런저런 것들을 물어보는 클로에에게 시선이 고정되어있는 사이, 나는 녀석의 주머니를 뒤지다가 서너 개의 열쇠가 달린 꾸러미를 하나 찾아 손에 넣었다.
“누나, 너무 캐묻는 건 실례가 아닐까요?”
내 말에 클로에가 아, 하는 소리를 내고 나를 보다가 이내 히죽 웃는다.
“그런가? 기분 나쁘셨으면 죄송해요. 바다 너머의 분들을 뵙는 건 처음이라서 본의 아니게…….”
클로에가 사과 인사를 했다. 그다음, 건물 근처로 다가가 입구와 건물을 살펴보던 나는 클로에 쪽을 돌아봤다.
“황금 동상부터 가 보자. 오면서 봤는데 기가 막히더라고.”
그걸 끝으로, 우리는 테네스 공국 중앙의 광장에 세워져 있는 거대한 동상 쪽으로 향했다.
“고생했다.”
“익숙한 일이니까요. 뭐 얻은 거 있으신가요?”
역시 별로 마음에 드는 일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나는 내 주머니를 툭 하고 쳤다.
“열쇠.”
“아, 그래도 바로 성과가 나오니 좀 덜하…… 뭐 하세요?”
나는 휙 하고 열쇠를 버렸다.
“보면 몰라?”
“저도 봐서 알아요, 제 질문은 그게 아니에요. 기껏 얻은 열쇠를 왜.”
나는 그 말에 대답했다.
“열쇠를 잃어버렸다는 사실은 지금쯤 되면 알아차릴걸.”
중요한 건 열쇠를 얻었다는 게 아니다.
“열쇠를 잃어버렸다는 사실을 아는 게 중요하지.”
얼마 지나지 않아 알아차릴 거다.
“거기, 멈춰!”
뒤편에서 성난 외침이 들렸다. 거기에는, 살벌한 눈을 한 아까의 그 용병이 다른 용병들과 함께 서 있었다.
“뭐지?”
내 말에 녀석이 눈을 음산하게 빛내며 대답했다.
“남의 열쇠를 소매치기하고 들키지 않을 줄 알았나?”
나는 그 말에 코웃음을 쳤다.
“이 자식들이, 생사람을 잡아도 정도가 있지.”
내가 말을 하는 사이, 용병들이 검을 들고 내 쪽으로 다가왔다.
“열쇠, 내놔라.”
다소 외국의 억양이 섞인 어색한 말투다. 나는 그 말에 얼굴을 구기고 아까 클로에에게 맛탱이가 가 있었던 용병을 바라봤다.
“지금이 일련의 행동, 감당할 수 있겠나?”
내 말에 녀석이 등에 메고 있던 낫칼을 손에 쥐며 말했다.
“내가 저 여자에게 눈이 팔린 사이 슬쩍한 거지? 그거 말고는 열쇠가 사라졌을 이유가 없다.”
나는 그 말에 얼굴을 구겼다.
“정말 그거 말고는 다른 가능성이 없다고 확신하나? 어디에서 흘리거나 하지는 않았고?”
내 말에 녀석은 별다른 대답이 없다. 나는 인상을 팍 쓰고 양손을 들어 올렸다.
“그럼 몸을 살펴봐라. 만에 하나, 열쇠가 나오지 않으면 각오하도록.”
녀석이 나를 노려보다가 다른 용병들에게 눈짓을 한다. 용병들이 다가와 내 몸과 클로에의 몸을 수색하기 시작한다. 나는 얌전히 그 녀석들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열쇠는 나오지 않았다. 당연하지, 버렸으니까.
“이건…… 이럴 리가. 속옷 같은 곳에 숨긴 거냐?!”
그제서야 방금까지 기세등등하게 나를 노려보던 녀석의 표정이 변한다.
“내가 이 자리에서 알몸이 되면 믿겠나?”
“이…… 자식이! 그래, 그러면 믿으마!”
말을 마친 나는 옷을 벗을 준비를 했다. 상의를 벗고, 바지춤으로 손을 뻗었다.
밤거리를 걸어 다니던 사람들이 나를 바라보는 가운데, 나는 바지를 벗고 속옷 바람으로 녀석을 바라봤다. 당연히, 열쇠는 없다.
“네놈들은 이 일에 대해서 책임져야 할 거다.”
그제서야 용병들도 자기들이 처한 상황을 알게 된 모양이다. 파이크 왕국에서 세자를 모시고 여기까지 온 사람이라면 당연히 귀족이다.
그리고, 이 녀석들은 지금 나를 의심해서 길바닥에서 팬티 바람으로 귀족을 서 있게 했다.
그리고 정작, 찾고 있던 열쇠는 내 몸에서 나오지 않았다. 나는 바닥에 침을 뱉고는 다시 옷을 챙겨 입으며 말했다.
“상인연합의 회장 불러와. 지금 당장. 아니면 글림하트의 궁으로 찾아갈까?”
내 말에 녀석들이 고개를 숙이고 사과하기 시작한다.
“죄송합니다, 저희는…… 저는 정말로!”
“죄송이고 지랄이고, 지금 이 길로 궁으로 찾아가서 지금 있었던 일에 대해 항의할 수도 있는 사안이라는 걸 모르지는 않을 텐데.”
말을 마친 나는 서늘한 표정으로 다른 용병들을 바라봤다.
“누나는 가서 상인연합 건물 앞을 지킬 병력을 데려오도록 해요. 최대한 빨리.”
내 말에 클로에가 고개를 끄덕이고 곧바로 자리를 벗어난다.
“너희들은 나를 상인연합 건물까지 안내해라.”
“상인연합 회장은…….”
나는 그 말에 인상을 팍 쓰고 대답했다.
“멀쩡히 글림하트를 구경하던 사람을 붙들어 놓고 무기까지 꺼내 가며 협박하는 녀석들을 사병으로 부리는 마당에 내가 뭘 믿고 바로 사람을 보내지? 상인연합 건물 앞에 왕국의 호위병들이 도착하면 그때 가서 전해.”
“알겠습니다.”
큰 실수를 저지른 상황이면, 분위기에 압도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런 상황에서 하는 요구는 당장 입에 칼 물고 고꾸라지라는 식의 얼척없는 요청이 아닌 이상 거절당하지 않는다. 그럴 수가 없다.
녀석들이 침을 삼키고 고개를 끄덕인 다음 나를 상인연합까지 데려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클로에가 오십 명 정도의 왕국군과 함께 상인연합 건물 앞에 도착했다.
“가서 불러와. 그리고 너.”
나는 용병 중 하나를 집어 가리켰다.
“문 열어. 밖이 추우니 안에서 기다리겠다.”
말을 마친 나는 상인연합의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3층에서 4층으로 향하는 계단에는 두터워 보이는 철문이 자리 잡고 있다. 나는 뒤로 약간 물러나서 작은 목소리로 클로에를 향해 말했다.
“너는 철문 안으로 들어오지 말고, 3층에서 1층까지 내려가는 길목을 지키는 용병이 배치되는지 확인해줘.”
“만약 있으면 어떻게 할까요.”
“지키는 용병이 있으면 철문 앞에서 기다리고, 없으면 너는 유리문 앞에서 내가 모습을 드러낼 때까지 기다렸다가 내가 나타나면 문을 열어줘.”
내 말에 클로에가 슬쩍 나를 바라봤다.
“문으로 나가는 건 내가 아니라 허상이야. 너는 그게 들키지 않도록 주변의 사람들을 뒤로 물리고, 호위병과 함께 돌아가는 척한 다음 바로 옆의 건물 옥상에서 대기해. 무슨 일이 생기면 피리로 신호를 보낼게. 명심해, 내 신호가 아니라면 절대로 거기에서 움직이지 마.”
내 말을 들은 클로에는 표정 변화 없이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