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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우드-110화 (110/275)

110화

철문에는 마법이 걸려있었던 모양이다. 용병이 열쇠를 꽂은 다음 돌리자, 열쇠 구멍 주변에 마법진이 떠올랐다가 사라진다.

문을 연 다음, 용병이 조심스러운 어조로 말을 건다.

“……정말 죄송합니다.”

나는 그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좋아. 여기에서 적당히 루크 발리아노와 이야기를 나눈 다음, 나가는 척하면서 허상을 건물 밖으로 내보내고 나는 은신한 채 이 건물 안에 남는다.

루크 발리아노가 나가고 나면 이 건물은 다시 문이 닫힐 테고, 그럼 이 안에 나 말고는 아무도 없게 된다.

은신을 사용한 채 마력을 끌어모으면, 내일 해가 뜨기 전까지는 넉넉히 은신을 유지할 수 있다. 그 정도 시간이라면 루크 발리아노의 손이 테네스 공국의 어디까지 뻗어 있는지 확실히 알 수 있겠지.

기다리고 있으려니, 문이 열리고 콧수염을 기른 대머리 남자 하나가 안으로 걸어들어왔다.

“…….”

녀석은 나에게 곧바로 인사를 하려다가 내 얼굴을 보고 그대로 멈췄다.

“왔군. 너는 나가봐.”

내 말에, 용병이 루크와 나에게 인사를 하고 곧바로 문을 나갔다. 가시방석 같았겠지. 나는 히죽 웃으면서 녀석을 바라봤다.

“루크 발리아노, 이야기는 많이 들었어요. 글림하트의 거부 중 하나라지요?”

내 말에 녀석이 큼, 하는 소리를 내고 나를 바라봤다.

“이야기는 많이 들었습니다. 마틴 레드우드 님, 왕국에서의 명성이 여기까지 전해질 정도입니다.”

나는 그 말에 이야, 하는 소리를 내고 소파에 등을 기댔다.

“루크 발리아노 씨의 위세만 하겠습니까. 저 같은 녀석은 아래에 두고 부리는 용병이 밤거리에 속옷 한 장만 입힌 채 몸수색을 해도 문제없을 정도잖아요?”

내 말에 녀석이 침을 삼켰다.

“……이번 일은 용병이 허락 없이 개인적으로 벌인 일입니다.”

“고용은 상인연합에서 했겠죠. 고용인의 책임은 고용주가 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참 재미있는 상황이다. 우리는 서로의 정체를 알고 있지만, 최선을 다해 모르는 척하고 있는 중이다.

“이번 사태로 인해 마틴 레드우드 님에게 큰 무례를 저질렀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상인연합을 대표해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또한, 해당 용병에게는 적절한 수준의 징계를 가하겠습니다.”

“도대체 어떤 징계를 가할지 궁금하네요. 그리고 그 징계가 저지른 잘못을 벌충할 만한 수준인지도 모르겠고.”

왕국에서 내 이름은 꽤 무거워졌다.

두 번에 걸친 파이크 왕국의 이상 사태를 막아내는 데 공을 세웠고, 왕궁을 집처럼 써도 될 정도의 대우를 받게 된 상황이다.

저지른 잘못으로 무게로만 치면 파이크 왕국의 기사단장을 한밤중에 벗겨놓고 수색한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어쩌려고?

“잘못에 대한 사죄의 뜻으로 충분한 배상금을 드리겠습니다.”

“그렇습니까? 용병에 대한 처우는 어떻게 되는 건지 궁금하네요.”

내 말에 루크가 턱을 쓰다듬고는 대답했다.

“채찍질 40대, 그리고 제가 소유한 목화농장에서 10년간의 중노동에 처할 생각입니다.”

저런, 그 녀석 입장에서는 난데없이 하늘에서 벼락이 떨어진 기분이겠군. 까놓고 말해서 내 수작질에 놀아난 죄밖에는 없을 텐데.

하지만 여기에서 내가 그 용병의 처벌을 가볍게 해달라는 이야기를 하는 것도 그림이 좀 웃기긴 하지. 채찍질 40대라.

“잘 모르시는 분들은 40대면 너무 처벌이 약한 게 아닌가 생각하는 경우도 있는데. 테네스 공국의 채찍형은 네 갈래로 갈라진 채찍 끝에 작은 아령 모양의 쇳덩이를 달아놓습니다. 40대를 맞고 나면, 거의 불구가 됩니다.”

어떤 잘못을 저질러도 가할 수 있는 채찍질의 횟수는 40대까지가 한계라고 한다. 그 이상은 법으로 금지되어있다.

“피를 보는 걸 좋아하는 성격은 아닙니다. 그 용병에게 선택지를 주도록 하죠. 40대 맞고 10년인가, 아니면 안 맞고 15년인가.”

내 말에 루크가 아, 하는 소리를 냈다.

“그런 제안이라면 누구나 15년의 노동을 택할 겁니다. 자비로우시군요.”

자비롭기보다는, 어떻게 보면 내가 목적하고 있던 계획을 달성하는데 징검다리 역할을 했을 뿐이잖아? 일종의 희생양일 뿐인데, 그렇게 살벌한 채찍으로 후려치는 건 사람이 할 짓이 아니다.

“용병에 대한 처우는 그렇게 결정되었으니, 다음으로는 배상금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 볼까요.”

내 말에 루크가 침을 삼키고 대답했다.

“5000론도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물가에 차이가 있기는 하겠지만, 대충 한국 돈으로 환산하면 4억에 달하는 배상금이다. 더 달라고 할 필요는 없겠지. 어차피 이 일은 돈이나 한탕 땡겨보겠답시고 한 일이 아니니까.

4억 줄 테니 광화문에서 속옷만 입고 5분 정도 서 있을래? 라는 제안을 거절할 사람이 있을까. 난 없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좀 많은 거 아닌가? 난 천만 원 정도만 줘도 웃으면서 할 것 같은데.

“적절하군요. 배상금은 최대한 빨리 받고 싶습니다.”

간단하게 대화를 마친 다음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틴 레드우드 님, 그럼 이번 일은…….”

“사죄와 배상을 받고 용병에게 가해질 처벌도 확인했으니, 굳이 공론화할 생각은 없습니다.”

해야 할 일을 마친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루크 발리아노도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이제 해야 할 일은 간단하다. 적절한 순간에 은신과 함께 허상을 만든다. 이 건물을 나서는 건 허상이고, 나는 은신을 사용한 채 이 건물 안에 남는다.

“아, 시간이 이렇게 되었군요. 내일 일정이 있어서 돌아가야 할 것 같네요.”

말을 마친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문밖으로 나왔다. 호위로 보이는 용병 둘이 문 앞에 서 있다가 내가 나오자 곧바로 자리를 옆으로 비킨다.

“저희가 저지른 잘못은 아니지만, 정말 죄송합니다.”

“…….”

나는 녀석들의 사과에 대꾸하지 않았다. 지금부터는 완전히 입을 다물어야 한다. 나는 은신과 함께 허상을 사용하고, 곧바로 벽 쪽으로 붙어 내 허상과 용병을 앞으로 보냈다.

좋아.

이제 그 뒤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계단의 철문 앞에 도착하자, 용병이 철문을 열고 옆으로 자리를 비켜준다.

철문 너머에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나는 허상을 그 철문 너머로 보냈다.

허상이 문을 나가자 곧바로 용병들이 쿵, 하고 철문을 닫아건다. 나는 바로 허상을 취소했다.

“후, 새파랗게 어린 새끼가 싸가지는 어디에 팔아먹었는지 대답 한마디를 안 하네.”

“잘나가시는 귀족 놈들 싸가지가 다 그렇지 뭐. 재수 털렸다 생각하자고.”

문 닫고 바로 뒷담화를 하는 건 인성에 문제가 있는 건데. 그런 생각을 하면서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계단을 올랐다.

가야 하는 곳은 루크 발리아노가 머무르고 있는 집무실이 아니다. 같은 층에 있는, 평범한 고용인들이 일하는 개방된 장소다.

목적지에 도착한 나는 벽에 나 있는 창문을 확인했다. 클로에가 건물의 출입구를 뚫어지라 바라보고 있었다.

“좋아.”

여기서도 어떻게든 될 것 같다. 나는 상인연합 건물의 유리문 너머에 다시 환상을 만들었다.

“아, 끝났나 보네.”

문 앞에 대기하고 있던 클로에가 내 모습을 확인했는지 당황하지 않고 문을 연 다음, 나에게 몸이 닿지 않도록 조심하며 주변에 모여있던 사람들을 뒤로 물린다.

“고생했어요. 마틴 레드우드 님. 마차가 준비되어 있으니 타시면 됩니다.”

클로에가 나와 함께 인근에 멈춰 있던 마차로 향했다. 파이크 왕국의 문양이 붙어 있다.

그녀가 마차의 문을 열고, 나는 허상을 그 마차 안으로 밀어 넣었다. 뒤따라 클로에도 마차에 올랐다.

이걸로 끝. 나는 저 마차를 타고 돌아간 것처럼 될 것이다.

“마차 타고 가다가 사고라도 났으면 좋겠군!”

내가 일을 마치는 사이, 루크 발리아노가 집무실에서 걸어 나오며 나에게 저주를 퍼붓고 있었다. 욕 정도는 괜찮아. 4억을 받았으니까. 녀석은 나를 철문까지 안내했던 용병 둘의 호위를 받으며 계단을 걸어 내려간다.

“운 좋은 새끼.”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고 작게 한숨을 쉬었다. 저 녀석이 만약에 바로 건물을 나서지 않았다면, 여기에서 바로 목을 딸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뭐, 어쩔 수 없지.”

저 멀리에서 쿵, 하고 철문이 닫히고 잠기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은신을 유지한 상태로 주변의 마력을 끌어모으며 30분 정도 사무실을 돌아다녀 봤다.

별다른 이상은 없다.

“내부에 마법을 걸어놓지는 않아서 다행이네.”

대신, 용병 서너 명이 3층부터 5층까지를 주기적으로 순찰하고 있다.

기사단장의 저택과 같은 곳이라면 몰라도, 상인들이 서로 모여서 공익을 도모한다는 식의 표제를 걸고 있는 건물에 과도한 경비 마법을 걸어놓기에는 주변의 시선이 신경 쓰였던 거겠지.

하지만 출입구라고 할 수 있는 철문에는 마법이 걸려있었으니까, 외부에서 안으로 들어올 수 있는 유일한 경로 중 하나인 창문에도 비슷한 마법이 걸려있다고 봐야 한다.

철컥, 하는 소리와 함께 철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숨을 죽이고 기다리고 있으려니, 3층에서 사람들이 이야기 나누는 소리가 들린다.

“아, 교대하는 건가.”

1시간 30분 정도 지난 건가? 표준적인 근무시간이네. 지금 교대했다면…….

나는 철문이 닫히는 소리를 확인하고 3층으로 내려갔다. 아까 순찰을 돌던 녀석들과는 다른 용병 네 명 정도가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벽에는 3층부터 5층까지의 구조와 용도가 적혀 있는 지도가 붙어 있다.

“…….”

테이블 위에는 수정구가 놓여 있고, 그 옆에는 종이가 한 장 놓여 있다. 시간이 적혀 있고, 바로 옆에 '보고완료[이상없음]' 이라는 단어가 적혀져 있다.

대충 30분에 한 번 정도씩 보고를 하는 모양이다.

충분한 시간이다. 나는 검을 뽑아 들고 모습을 감춘 상태에서 재빠르게 녀석들을 공격했다.

“무슨……?!”

네 명을 정리하는 데 시간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녀석들이 상황을 파악하기 전에 두 명이 칼에 맞아 죽었고, 남은 두 명도 무기를 뽑아 들기 전에 처리했다.

“서두르자.”

나는 피투성이가 된 공간을 한 번 살펴본 다음 재빠르게 녀석들의 시체를 뒤져 열쇠 꾸러미를 찾아내 챙긴 다음 루크 발리아노의 집무실을 따고 들어갔다.

“금고라.”

집무실 안의 옷장을 열어젖히자, 거의 성인 남자만 한 크기의 튼튼해 보이는 금고가 눈에 들어온다.

“통째로 들고 튀지 뭐.”

피와 살로 이루어진 평범한 인간이 저런 무식한 금고를 들고 옮기는 건 불가능한 일이지만, 이럴 때 쓰라고 마력이 있는 거 아니겠어.

“일단 이것도 이거지만.”

챙겨야 할 게 더 있다. 4층의 서류 보관소도 털어야 한다. 나는 금고를 턱 하고 옆에 내려놓은 다음 곧바로 계단을 내려갔다. 서류 보관소의 문을 열쇠로 열었다.

“저기가 진짜지.”

두터워 보이는 철문이 또다시 자리 잡고 있다. 지도로 확인했을 때는 저 철문 너머에 자리 잡은 공간은 그렇게 크지 않다. 중요한 서류들이 담겨 있을 가능성이 높다. 마법 같은 게 걸려있으려나.

“위험한 마법이라면 브레이서로 막아낼 수 있을 테고.”

경보 마법 같은 거라면 오는 데 시간이 필요하다. 길지는 않겠지만…… 어차피 챙겨야 하는 건 루크 발리아노의 집무실에 있던 금고와 이 너머에 있는 서류들이 전부다.

건물 안을 뒤져, 제법 튼튼해 보이는 커다란 마대 자루를 찾아낸 나는 후우, 하고 심호흡을 했다. 뭐, 큰 쓰레기 같은 걸 버리기 위해 마련해 놓은 것 같은데. 자상하기도 해라.

“인생 참. 살기 빡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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