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드우드-111화 (111/275)

111화

클로에는 파랗게 질린 표정으로 살짝 몸을 떨었다.

“추워. 언제 오신다는 거야.”

벌써 몇 시간이나 밖에서 대기 중인지 모르겠다. 옷을 따뜻하게 챙겨입지 않은 건 아니지만, 오랜 시간 추위에 노출되어 있으면 결국 옷으로는 한기를 막는 데 한계가 있다.

그리고 지금 클로에가 그런 상황이었다.

“잠은 안 와서 좋네.”

춥다 보니 최소한, 잠은 오지 않는다. 밤거리를 돌아다니던 사람들도 이젠 다들 사라졌다.

“차 마시고 싶…….”

클로에가 그런 소리를 하는 와중에, 갑자기 상인연합의 건물에서 위용삐용 하는 요란한 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흐어아?!”

클로에는 눈을 크게 뜨고 건물을 바라봤다. 어떡하지, 문제가 생긴 건가. 건물로 향하려고 하던 클로에가 걸음을 멈췄다.

마틴 레드우드가 보낸 신호가 아니다.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클로에는 침을 삼킨 채 조용히 건물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저 멀리에서, 횃불을 든 경비병들이 달려오는 게 보인다. 5층에서, 와장창하는 소리와 함께 창문이 박살 났다. 그리고 들리는 피리 소리.

클로에의 시선이 박살 난 창문 쪽으로 향했다. 모자를 꽉 눌러 쓴 마틴 레드우드의 모습이 보인다.

“어, 저기. 그러니까.”

클로에가 뭐라고 말을 하기 전에, 마틴이 퉁, 하고 옆에 세워져 있던 뭔가를 한 번 때린 다음 검지로 클로에를 가리킨다.

뭐지, 라는 생각이 떠오르기가 무섭게 박살 난 창문에서 시커멓고 거대한 덩어리가 클로에를 향해 확 던져졌다. 클로에는 본능적으로 능력을 사용해 자신을 향해 쏘아진 그 거대한 쇳덩이를 받았다.

“……금고잖아.”

그리고, 곧이어 휙, 휙. 하고 거대한 마대 자루가 클로에를 향해 날아온다. 일단, 클로에는 그걸 전부 받아내는 데 성공했다.

마지막으로, 마틴 레드우드는 창밖으로 물이 담긴 병을 내밀어 아래로 쏟아내고는 그대로 창밖으로 뛰었다.

마틴이 클로에가 대기하고 있는 건물로 뛰어오르는 사이, 두 건물 사이의 골목에 그의 분신이 나타나더니 물을 밟은 다음 골목을 달리다가 사라진다.

팍, 하고 검을 건물 벽에 박아넣은 마틴 레드우드는 즉시 그 힘을 이용해 재빠르게 벽을 타고 올라, 클로에가 있는 곳에 도착했다.

클로에와 마틴의 눈이 서로 마주쳤다. 그리고, 마틴 레드우드가 히죽 웃으며 말했다.

“날도 추운데 고생했고, 고생하자. 챙겨서 뛰어.”

* * *

우리는 이미 사람의 몸뚱어리는 아니다. 클로에는 내용물이 꽉 차 있는 마대 자루를 양손에 움켜쥔 채 건물 위를 달리고 있었고, 나는 사람만 한 크기의 묵직한 금고를 등짝에 짊어진 채 달리고 있었다.

내 예상대로 알람이 울렸고, 경비병을 비롯한 용병들이 몰려왔지만, 이미 그 자리에 우리는 없다.

두 건물 사이에 물을 뿌리고, 분신으로 하여금 그 물을 밟게 한 다음 다른 곳으로 달리게 만들어 발자국을 남겼으니까, 경비병이나 용병들은 그 발자국 때문에 건물 주위를 순찰하며 허탕 칠 확률이 높다.

“크흐흐흐.”

저 건물 안에 있던 중요해 보이는 서류들은 이걸로 싹 다 털어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밤공기 한번 기가 막히게 상쾌하군. 저 멀리, 횃불들이 몰려서 소란피우는 모습이 보인다.

“그래서, 우리는 어디로 가는 거예요?”

나는 그 말에 대답했다.

“여기에서 조금 더 가면 된다. 세자 저하께 마차 한 대 준비해달라고 했거든.”

“출발하기 전에 전해드린 편지 말이죠?”

그럼 텔레파시로 부탁했을까. 건물 위를 한동안 달리던 나는 주변을 살피고 말했다.

“내려가자.”

건물 지붕 위를 달리던 우리는 휙 하고 아래로 떨어졌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바닥에 떨어지자 마차에 타고 있던 엘렌이 고개를 내밀었다.

“좋은 밤.”

엘렌의 말에 나는 손을 몇 번 흔들어주고 말했다.

“책은?”

내 말에 엘렌이 슬쩍 마차 밖으로 책을 내밀었다가 다시 집어넣었다. 책의 안전을 확인한 나는 곧바로 금고를 툭 하고 쳤다.

“걸려있는 마법 없어?”

내 말에 엘렌이 음, 하는 소리를 내고 눈썹에 힘을 준 채 커다란 금고를 바라보다가 대답했다.

“위치추적 마법이랑, 소각 마법. 강제로 열려고 했었다면 안에 있는 서류가 전부 불탔을 거야.”

“해제할 수 있지?”

“문제없어. 잠깐만 기다려 봐.”

엘렌이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양손을 빛내기 시작했다.

“거기까지. 네 녀석들, 잠깐 사이에 멀리도 왔군.”

그 말에 나는 순간적으로 멈칫했다.

“위치추적이 있다고 해도 빠른데.”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목소리가 들린 쪽을 바라봤다.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녀석이 서 있었다.

“공국 경비대로 보이지는 않는 친구들이군. 이 금고에 들어있는 물건들은 공국에 걸려도 좋은 꼴 못 보는 것들인가 봐?”

“짐을 포기하고 무기를 내려놓아라. 그럼 고통 없이 죽여주마.”

나는 그 말에 얼굴을 구겼다. 이 새끼 그걸 설득이랍시고 하는 건가. 고통 없이 죽여준다니. 뭘 해도 죽는다는 거잖아. 내가 검을 뽑아 들자, 녀석이 입을 열었다.

“네 실력에 대해서는 이미 파악이 끝났다. 네가 나를 이길 가능성은 없으니 헛된 저항은 하지 말아라. 내가 여기에 온 것에는 이유가 있어.”

“자색이 그렇게 말하디?”

나는 검을 휙휙 몇 번 돌리고는 몸에 마력을 불어넣고 녀석에게 쏘아져 나가는 동시에 분신을 만들었다. 녀석과 내 검이 서로 부딪치자,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녀석은 쥐고 있던 검을 놓쳤다.

“커…….”

녀석의 입에서 주륵, 하고 피가 흘러내린다.

“살아가면서 꼭 지켜야 하는 미덕 중 하나가 자기계발이야 병신아. 내 실력을 안다고?”

알긴 뭘 알아.

내가 그린모스 정글에서 얼마나 힘들었는데. 심장이 몇 번이나 다치고 회복되어가면서 쌓여있는 마력의 양이 확 늘었고, 덤으로 1대1로 카루토스와 싸우면서 검술 실력도 상당히 올랐다.

클로에가 말했던 것처럼, 지금은 왕국 기사단장들과 1대1로 비벼도 밀리지 않을 정도다.

무기를 놓친 녀석을, 나는 분신까지 동원해서 쉬지 않고 난도질하기 시작했다.

30개가 넘어가는 자상이 만들어진 다음에야, 나는 녀석의 목줄기에 검을 박아넣어서 숨통을 끊었다.

“후우.”

“화가 많이 나셨나 봐요.”

나는 클로에의 말에 혀를 한 번 찼다.

“화가 날 게 뭐가 있어.”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고 나서 녀석이 떨어뜨린 검을 주운 다음, 사방으로 휘둘러 칼자국을 남겼다. 그다음, 그 칼자국을 살피면서 내 검을 휘둘러 흔적을 남겼다.

테네스 공국의 경비병들이 여기까지 올 가능성은 없다. 그야, 지금 상인연합 건물에서 일어난 일 때문에 거기로 다 몰려 있을 테니까.

일을 다 마친 나는 히죽 웃으며 클로에를 돌아봤다.

“어때, 좀 열정적으로 서로 치고받은 것 같냐?”

“……네. 이 광경만 보면 굉장히 격렬한 싸움이 이어진 것 같네요.”

“다행이네.”

손쉽게 이겼다는 사실을 올리비에 황녀에게 알리고 싶지 않다. 녀석의 검을 쓰러져 있는 녀석의 옆에 툭 하고 내려놓은 다음 마차로 향했다.

“해제했어?”

“잠깐만 있어 봐.”

금고 주변에 확 하고 짙은 하늘색의 마법진이 떠오르더니, 이내 유리처럼 박살 나며 흩어진다.

“끝. 해제했어.”

“좋아, 이제 연빈관으로 돌아가자. 마차 몰아.”

고삐를 잡은 클로에가 걱정되는 것 같은 표정으로 말했다.

“연빈관 앞을 지키는 공국의 병사들이 있을 텐데.”

“그래서 세자 저하께 쪽지를 보냈잖아. 글림하트에 경비병들이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하면 연빈관 앞에서 기다려 달라고 부탁했어.”

파이크 왕국의 세자가 들여보내겠다고 하면, 검문은 문제가 되지 않을 거다.

“그렇다면 문제없겠네요.”

대화를 마친 우리는 마차를 타고 도로를 달려 연빈관까지 이동했다.

“아, 왔군.”

연빈관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세자가 우리가 탄 마차를 보고는 고개를 끄덕인 다음 연빈관을 지키는 병사들에게 말했다.

“마차는 통과시켜라. 내가 개인적으로 필요해서 부탁한 물건들이니.”

“세자 저하, 하지만…….”

“내 이름을 걸지, 저 마차가 테네스 공국에 해가 될 일은 없을 거다. 이 이상 귀찮게 굴지 말도록.”

세자의 말에 연빈관 앞을 지키던 병사들이 끄응, 하는 소리를 내며 서로를 바라본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세자가 대놓고 불편한 표정을 지었다.

“네 녀석들이 지금 내 말을 믿지 못하겠다는 것이렷다. 제아무리 외국의 세자라고 해도 나는 한 나라의 주인이 될 자다. 그런 자가 한 언약을 한낱 경비병 따위가 이리도 가볍게 여긴단 말이냐!”

그 외침에 경비병들이 움찔하고는 고개를 숙였다.

“그런 게 아니었습니다. 세자 저하, 마차는 통과시키겠습니다.”

세자가 그 말을 듣고 나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야지.”

나와 클로에가 탄 마차는 무사히 연빈관에 도착할 수 있었다.

“필요한 건 얻었나?”

“그렇습니다. 도움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세자 저하.”

연빈관 앞을 지키는 병사들만 통과한다면, 이 건물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파이크 왕국의 사람들이다. 다른 말로는 세자의 사람들이다.

“바로 옮기…….”

마차의 짐칸을 확인한 세자가 허, 하는 소리를 내고 나를 바라봤다.

“거 욕심도 많군그래.”

“살펴볼 시간이 없어서, 최대한 많이 챙기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습니다.”

나와 클로에는 각자 마대 자루와 금고를 챙겨 연빈관 건물 안으로 향했다.

“그냥 창문을 박살 내고 열심히 도망치기라니, 과격한 방법이었네요.”

“가끔은 그런 방법이 가장 뛰어날 때도 있는 법이야.”

결국 잘 풀렸다. 위치추적은 우리가 마차를 탄 장소에서 끊겼다. 돈 많은 테네스 공국 수도인 글림하트의 도로는 전부 포장도로이기 때문에, 마차의 바퀴 자국을 쫓을 수도 없다.

“심야에 돌아다니는 마차라고 한다면 목격자가 있을 수도 있잖아.”

엘렌의 말에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래서 뭐 어쩔 건데. 목격자의 증언만을 토대로 해서 파이크 왕국의 세자가 머무르는 연빈관을 수색하겠다고?”

세자가 고개를 끄덕이고 입을 열었다.

“마틴 레드우드가 털어낸 건 국가의 공공기관도 아니고, 사조직이라고 할 수 있는 테네스 공국 상인연합의 건물이다.”

내 말이 바로 그거야 세자 나으리.

“녀석들이 숨기고 있던 게 국가기밀 같은 것일 리도 없는데, 파이크 왕국의 세자와 그 일행들의 거처를 수색하는 미친 짓을 벌일 수 있을 리가 없지.”

이 정도면 성공이라고 해야겠지. 물론 대박은 그 자리에서 바로 루크 발리아노의 목을 수확하는 거였지만, 어차피 시간 계획상 그 목적을 달성할 가능성은 그렇게 높지 않다고 생각했으니까.

“이제 서류를 살펴보고, 이걸 어떻게 써먹을지 한번 고민해보자고. 엘렌은 책의 해석에 집중해주고.”

클로에가 으음, 하는 소리를 내고 머리를 긁었다.

“밤공기 쐬며 돌아다닌 다음에는 서류업무네요. 힘들어라.”

우리의 대화를 듣고 있던 세자가 한숨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로니세라 경, 서류업무가 마음에 안 들면 나 대신 베로나 제국의 황년과 함께 글림하트를 관광하는 방법도 있다.”

그래, 누가 뭐라고 해도 지금 이 상황에서 가장 불행한 건 세자라고 생각한다. 세자의 말을 들은 클로에가 자세를 바로잡고 대답했다.

“세자 저하 앞에서 약한 소리를 한 점, 진심으로 사죄드립니다. 마음을 똑바로 먹고 열정적으로 업무에 착수해 기대에 어긋나지 않는 결과를 내도록 하겠습니다, 세자 저하.”

클로에의 대답을 들은 세자가 나를 슬쩍 바라봤다.

“다른 녀석들은 내가 말을 걸면 저 정도의 정성은 보인다.”

아, 저런 걸 원해? 나는 그 말에 자세를 척 하니 바로잡고 굳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저 또한 세자 저하와 파이크 왕국을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 말과 개처럼 일해 반드시 목표하신 성과를 달성하도록 하겠습니다.”

내 모습을 보고 있던 세자가 혀를 한 번 찼다.

“집어치우게, 막상 그런 태도를 취하는 걸 보니 더럽게 안 어울리는군.”

말을 마친 세자가 돌아가고, 우리도 각자 해야 하는 일을 위해 이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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