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화
서류를 보는 건 언제나 즐거운 일이다. 눈이 뽑힐 것 같거든. 나와 클로에는 잠을 잊어버릴 정도로 서류를 탐독했고, 그 결과 몇 가지 결실을 맺을 수 있었다.
“그거참.”
나쁜 짓거리는 아주 다 하고 있었군그래. 루크 발리아노는 당당하게 진행하는 사업 이외에 몰래 진행하는 사업들이 있었는데, 그 거래 품목은 불법 작물의 재배와 노예 거래였다.
“엘렌의 말에 따르면…….”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고 나서 루크 발리아노가 재배 중인 약초 목록을 한번 훑어봤다. 마약의 재료가 되는 작물들이 상당수를 차지하고 있지만, 그것들 사이에 이상한 물건이 하나 껴 있다.
“라하둔이라.”
특정 환경하에서만 성장하는 꽃이다. 꽃의 암술을 채취해서 사용하는데, 전문적으로 교육받은 전문가에 판단하에 꼭 필요한 상황이 아니면 해당 성분을 넣은 약은 사용하지 않도록 규정되어있다.
테네스 공국뿐 아니라, 베로나 제국이나 파이크 왕국도 같은 방식으로 취급한다.
“라하둔 꽃의 암술은 불임 치료의 목적으로 사용되지만…….”
그 양을 잘못 조절하거나, 장기 복용하면 작게는 두통, 소화불량 같은 증상에서 시작해 결국은 만성 신부전증을 비롯한 부작용이 나타나 사람의 몸이 망가진다.
“건강한 여성에게 사용할 경우에는 쌍둥이나 세쌍둥이가 나올 가능성도 확연히 증가한다고 엘렌 리버플로우 양이 말했었죠.”
일종의 배란유도제 같은 용도로 쓰이는 모양이다.
“문제는 그게 아니라. 이걸 왜 재배하고 있느냐겠지.”
도대체 이걸 어디에 쓰고 싶어서 재배하고 있는 건지 당최 감이 잡히지 않는다. 칠색 내각의 부하로 두고 싶은 녀석 중에 아내가 불임인 사람이 있는 건가?
단지 그런 간단한 이유라고 생각하기에는, 서류에 작성된 라하둔 암술의 산출량이 다섯 포대나 된다. 심지어…….
“다른 불법 작물들은 수확하면 바로 가공한 다음 밀거래를 하는 모양인데.”
라하둔 암술은 생산량만 기록되어있고, 정작 팔아넘겨 수익을 낸 기록이 전혀 없다. 즉, 어딘가에 쌓아놓고 있다는 거다.
쌓아놓은 장소는 모른다. 서류에는 나와 있지 않다.
“정말 감도 안 잡히네요.”
클로에는 으어, 하는 소리를 내고 차갑게 식은 커피를 쭉 들이켰다.
“일단, 노예무역과 마약의 원료를 재배한 것만으로도 루크 발리아노는 충분히 위험한 녀석이에요.”
“돈을 먹여놓은 곳이 굉장히 많아. 이거, 루크 발리아노를 건드렸다간 테네스 공국에서 반발하는 녀석들이 꽤 많이 나오겠는데.”
일단 상인연합은 물론이고, 돈을 퍼먹은 조폐국장부터 시작해서 공국의 관리들 중 힘 있는 녀석들이 꽤 크게 반발할 예정이다.
“우리는 외국인이기도 하니까요. 뇌물을 먹지 않은 사람들도 그렇게까지 달가워하지는 않을 수도 있어요.”
“더 나아가, 오히려 우리가 의심받을 수도 있고.”
외국인이 밝혀낸 자국의 비밀이라는 상황은 우리가 나쁜 의도를 가지고 꾸몄다는 식의 이야기가 나와도 이상하지 않다.
“그러면 어쩌죠.”
“우리랑 손을 잡을 테네스 공국 사람을 찾아봐야겠지.”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고 나서 서류 중 하나를 집어 들었다. 상인연합에 소속된 상인들의 목록이다.
“연합에 소속되어있지 않은데, 테네스 공국 안에서 제법 잘나가는 상인이 있나 한번 살펴보자고.”
내 말에 클로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첩보국으로부터 정보를 받아 낼 수 있을 것 같아요.”
나는 그 말을 듣고 클로에를 슬쩍 바라봤다. 첩보국에서 정보를 주는 게 아니라 받아 낸다라. 이젠 소속감이 거의 없어졌다고 생각해도 될 정도인데.
쐐기를 박아넣을 만한 계기만 생긴다면 클로에를 완전히 내 아래에 소속시킬 수 있을 것 같다.
“그건 다행이네. 얼마나 걸릴 것 같아?”
내 말에 클로에가 대답했다.
“연합에 소속되지 않은 상인에 대한 건 그리 대단한 정보는 아니니까, 요청한다면 오늘 저녁 중으로도 받을 수 있을 거예요.”
“그럼 그렇게 해줘.”
말을 마친 나는 기지개를 한 번 켜고 물을 한 모금 마셨다.
“서류는 정리해두고, 첩보국으로부터 정보가 오기 전까지는 조금 쉬자.”
내 말에 클로에가 아싸, 하는 소리를 내고는 서류를 정리한 다음 인사를 하고 방을 나섰다.
“더럽게 피곤하네.”
눈가를 손가락으로 꾹꾹 누르던 나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역시 마력을 모으면서 움직이는 건 정신이 쉽게 피로해지는 것 같다.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로델린이 머무르는 숙소로 향했다.
“어머니.”
노크를 한 다음 말하자, 안쪽에서 로델린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들어오렴.”
문을 열고 들어가자, 로델린이 자리에서 일어나 내 쪽으로 다가왔다.
“테네스 공국은 좀 어떠세요.”
내 말에 로델린이 대답했다.
“혹시나 올 일이 있으면 사고 싶은 물건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는데. 지금은 별로 그럴 생각이 들지 않는구나.”
말을 마친 로델린이 슬쩍 방의 뒤편을 바라봤다. 뭐야? 저게 다.
“선물인가요?”
내 말에 로델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왕도에서부터 함께 왔던 사람들이 글림하트에서 구해 선물한 물건들이란다. 자식이 잘나가니 뜻밖의 선물을 다 받는구나.”
“하지만, 전혀 뜯어본 흔적이 없는걸요.”
내 말에 로델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의상 받아서 보관해두고 있지만, 적당히 시간이 지나면 돌려줄 생각이란다. 세상에 이유 없이 보내는 선물은 없지 않겠니. 받은 선물들이 너를 귀찮게 할 수도 있어.”
받은 선물을 그 자리에서 즉시 거절하는 게 귀족들 사이에서는 일종의 무례 중 하나인 모양이다.
네 선물 따위는 받을지 말지 길게 고민할 필요 없이 이 자리에서 즉각 거절할 거다, 같은 식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게 로델린의 설명이었다.
“당장은 바빠서 시간이 나지 않지만, 테네스 공국에서 해야 할 일이 어느 정도 정리되고 나면 시간이 날 것 같아요.”
관광시켜주고 싶어서 로델린을 여기까지 데려온 건 아니지만, 그래도 일단 외국으로 나왔잖아.
여기에서 볼일이 끝나면 하루 정도는 쉬었다 가도 괜찮을 테니까. 그때 즈음해서 한번 돌아다녀 보는 것도 괜찮겠지.
내 말에 로델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없는 시간을 억지로 낼 필요는 없단다.”
“그런 거 아니에요.”
로델린은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 뭔가를 내 쪽으로 건네주었다.
“이건……?”
내 말에 로델린이 대답했다.
“편지를 보내볼까 하는 테네스 공국의 사람들이란다. 가지고 있다가, 혹시 만나면 도움이 될 것 같은 사람들이 있다면 말해주렴.”
나는 그 목록을 확인하고 고개를 끄덕인 다음 테이블을 살펴보다가 고개를 갸웃했다.
“이 편지는…….”
내 말에 로델린이 아, 하는 소리를 내고 쓰게 웃었다.
“내 친정 가문에서 보내온 편지란다.”
“답장은 하셨나요?”
내 말에 로델린이 고개를 저었다.
“별로 그러고 싶지 않구나.”
“하긴, 어머니가 힘들 때 별다른 도움을 주지 않았던 모양이니까요. 이해해요.”
로델린이 자신의 친정에 좋은 감정을 품고 있지 않을 만하긴 하다. 내 말에 로델린이 대답했다.
“그건 문제가 되지 않는단다. 원래 결혼은 그런 거니까.”
결혼한 귀족 영애의 처우를 신경 쓰는 척하다가, 슬금슬금 다른 가문의 내정까지 간섭하려 드는 경우가 예전에 꽤 있었던 모양이다.
결국, 시집간 귀족 영애에 대해 친정에서 신경을 쓰려 드는 행위 자체가 비난받을 만한 행동이 되었다는 게 로델린의 이야기였다.
“내가 힘들 때 보낸 편지에는 어쩔 수 없으니 참으라며 아무 행동도 취해주지 않다가, 이제 와서는 그런 비난을 무릅쓰고 편지를 보낸 이유가 뭐겠니?”
그래, 나한테서 뜯어먹을 건덕지가 있다 그거지. 그리고, 그 뜯어먹을 건덕지라는 게 다른 귀족 가문의 비난을 감내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판단한 거다.
“조금은 야속하기도 하고, 편지의 속셈도 너무 빤히 보여서 답장은 하지 않기로 했다.”
야속하다고 느낄 만하지. 지금 와서 편지를 보냈다는 건, 그동안은 그녀에게 도움을 줄 수 없었던 게 아니라, 도움을 줄 가치가 없다고 판단했다는 뜻이니까.
로델린이 잠깐 내 얼굴을 살피나 싶더니 입을 열었다.
“많이 피곤해 보이는데, 너무 오래 붙들어 둔 것 같구나. 돌아가서 쉬렴.”
“알겠습니다.”
나는 로델린의 말에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를 하고 내 방으로 돌아와 침대에 누워 그대로 기절하듯 눈을 감았다.
“쓰읍.”
팍 하고 정신을 차려보니 저 멀리 저물어가는 저녁 해가 보인다. 많이도 잤네. 입가의 침을 훔치고 자리에서 일어나 물을 들이켠 나는 세수를 하고 클로에가 머무르는 방으로 향했다.
“아, 일어나셨어요? 안 그래도 찾아가려고 했는데.”
“뻥 치지 마. 딱 봐도 이제 일어난 것 같은데.”
부스스한 머리카락이라도 빗고 나서 거짓말을 해라. 내 말을 들은 클로에가 고개를 저었다.
“정말이에요.”
그런 대답을 돌려준 클로에가 서류를 나에게 건네주었다.
“첩보국에서 전해준 명단이에요. 챙겨서 가려던 참이었어요.”
나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서류를 살폈다.
“어, 이 이름은.”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고 눈을 가늘게 떴다. 로델린이 건네주었던 명단에도 있는 녀석인데.
“엔리코 프레니. 상인연합에 소속되지 않은 사람 중에서는 굴리는 사업의 규모가 가장 크다고 하는데요.”
서른 초반이라고 적혀 있다. 꽤 젊은 주제에 잘나가는 중이네.
“루크 발리아노만큼 사업 규모가 큰가?”
“그 정도는 아닌 것 같지만요.”
“그건 다행이네.”
내 말에 클로에가 나를 바라봤다.
“마약 팔고 노예 파는 식으로 따로 구멍을 마련해서 돈을 추가로 충당하는 녀석이야.”
정상적으로 사업하는 녀석이 발리아노의 사업 규모를 따라잡을 수 있을까? 더럽게 어려울걸.
“뭐, 만나보면 알겠지.”
실제로 불법적인 거래에 손을 뻗어있지만, 루크 발리아노 만큼의 규모를 마련하지는 못했을지도 모르니까.
“만남은…….”
“어머니의 도움을 받을 생각이야.”
가짜 일정을 잡아두고 로델린과 만나는 중에 난입하면 내가 직접 불러서 만나는 것보다는 시선이 조금이나마 덜 쏠린 상황에서 만날 수 있겠지.
“엘렌 리버플로우 양에게 가는 건가?”
“아! 그렇습니다!”
하녀 한 명이 커피를 챙겨서 이동하는 걸 보고 물어보자 맞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안 그래도 거기로 가는 길이었다. 커피는 내가 전달할 테니 가서 쉬어.”
어차피 보러 가야 했으니까. 내 말에 하녀가 머뭇거린다.
“하지만…….”
“됐어. 커피나 줘.”
말을 마친 나는 커피가 담긴 쟁반을 받아들고 엘렌에게로 향했다. 문 앞에서 노크 대신 신발코로 문을 툭툭 차며 말했다.
“커피 왔다.”
“뭐야, 마틴?”
한동안 문 너머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문이 열렸다.
“뭐가 이렇게 오래걸려.”
“옷 입느라.”
엘렌은 피곤에 쩔은 표정으로 하품을 한 번 하고는 나와 클로에를 방 안으로 들였다.
“고생한다. 해석은 어느 정도 된 것 같아?”
내 말에 엘렌이 마법으로 커피를 식힌 다음 쭉 들이키고 입가를 훔쳤다.
“크으, 확실하지는 않지만 나흘 정도 더 필요할 것 같아.”
나흘이라.
“지금까지 해석된 내용은?”
내 말에 엘렌이 머리에 오른손을 이마에 올린 채 대답했다.
“만토스라는 마법사가 쓴 책인데, 격리구역의 설정에 대한 방법이 적혀 있어.”
“격리구역?”
내 말에 엘렌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 세상의 일부분을 통째로 뜯어내 특정한 방법을 통해서만 출입할 수 있도록 완전히 격리시키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