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화
지역의 완전 격리라. 교도소로 쓰면 딱 좋겠는데.
“하이랜더의 무덤을 만들기 위해서 사용했을 수도 있겠네.”
내 말에 엘렌이 고개를 끄덕였다.
“특정 조건이 성립하면 바로 설정된 격리공간으로 전이되도록 할 수도 있는 모양이니까.”
죽은 하이랜더는 모두 카루토스 타카운이 만들어낸 격리공간으로 전이되도록 하는 것도 가능한 모양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작성 방법이 아니지.”
내 말에 엘렌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하지만 격리공간을 해제하는 방법도 분명히 이 책에 기록되어 있을 거야.”
“확신하는 이유는?”
내 말에 엘렌이 책을 툭 하고 쳤다.
“이 책을 쓴 만토스라는 마법사에게는 딸이 하나 있었는데, 강제적인 성관계 요구를 거부하다가 실수로 남편을 죽였나 봐.”
나는 그 말에 저런, 하는 소리를 냈다. 소위 말하는 부부강간인가.
“그래서?”
“만토스는 이 격리구역이라는 마법을 이용해서 당시 법을 기준으로 흉악범죄로 규정된 범죄를 저지른 자는 즉시 격리구역으로 보내버리도록 설정했었나 봐.”
부부강간이란 개념은 지구에서도 비교적 최근 시점에 범죄라는 인식이 자리 잡힌 걸로 안다. 제일 빠른 게 1980년대의 프랑스고, 한국은 21세기가 되어서야 인정한 걸로 안다.
이 세상에서, 심지어 4000년 전이라면 부부 사이의 강제적인 성관계가 잘못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겠지.
즉, 당시의 법률에 따르면 만토스의 딸은 강간 위협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기 보호를 하다 실수로 사람을 죽인 게 아니라, 잠자리를 가지려던 중 남편을 죽인 아내가 된 거다.
“만토스가 격리구역을 연구한 이유 자체가 범죄자가 절대로 탈출할 수 없는 감옥을 만들겠다는 일념 때문이었던 모양이야.”
나는 그 말에 쯔쯔쯔, 하고 혀를 찼다.
딸이 격리공간으로 보내지는 사건이 있기 전까지는 이 세상과 격리구역을 오갈 수 있는 방법 따위는 강구하지 않은 모양이군.
“만토스가 강제로 격리구역 안에 들어갈 방법을 만들어 낸 다음에 격리공간에 들어갔을 때 딸은 이미 폐인이 되어있었고, 결국 격리공간 마법을 활용한 교도소는 파괴되었지.”
폐인이라. 만토스의 딸이 그 격리구역 안에 갇혀서 죽을 날만 기다리던 흉악범들에게 당했을 일은 상상이 간다. 만토스라는 마법사, 피눈물을 흘리며 후회했겠는걸.
“이 책 서두에 관련 내용이 적혀 있었으니까. 이 책은 그 사건 발생 후 작성한 책이 분명하고…….”
클로에가 엘렌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당시의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도록 격리구역을 강제로 열고 들어가는 방법도 기록되어있겠네요.”
올리비에 황녀도 그걸 노리고 있을 거다. 하이랜더의 무덤이라는 격리구역을 설정에 관계없이 강제로 열고 들어갈 수 있는 방법.
“거의 확신하고 있어. 앞으로 남은 건 계속 책의 해석을 진행하며 관련 내용을 찾아내는 거지.”
말을 마친 엘렌이 기지개를 한 번 켰다.
“나는 이렇게 열심히 고생하고 있는데, 두 사람은 어때.”
“몸과 정신이 함께 고단한 하루를 보내고 돌아오는 길이지.”
내 말에 엘렌이 나를 슥 훑어보고는 헹, 하는 소리를 냈다.
“얼굴에 윤기가 반질반질 도는데.”
“윤기 같은 소리 하네. 이 추위에 밤이슬 맞으며 돌아다니는 게 얼마나 빡센데.”
대화를 나누던 나는 주변을 훑어보고 말했다.
“그래서, 이 방의 경계는 잘되어 있는 거 맞지?”
내 말에 엘렌이 대답했다.
“왕도에 있는 내 개인 공간보다 몇 배는 더 빡빡하게 마법을 걸어뒀어. 이 이상의 마법은 나로서는 무리야.”
옆에서 클로에가 나를 보고 말했다.
“게다가 이 방 주변에 10명의 호위병과 기사 한 명이 상주하고,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병사 오십과 기사 둘이 대기 중인 걸로 알고 있어요.”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네. 이야기를 들은 나는 엘렌과 몇 분 정도 더 대화를 나눈 다음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고생해라.”
문을 나선 나는 기지개를 한 번 켜고 로델린에게 찾아갔다.
“이번에는 부탁할 일이 있는 모양이구나.”
“엔리코라는 상인과의 만남을 주선해주셨으면 합니다.”
내 대답을 들은 로델린이 고개를 끄덕이고 테이블 쪽으로 다가가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일정이 정해지면 전해주마.”
좋아, 일단 이걸로 할 일은 끝난 것 같네.
* * *
“오늘 만남은 어땠어? 올리비에, 실수는 하지 않았니?”
올리비에는 자리 앉은 채 레티시아를 바라봤다.
“레티시아, 지금이라도 함께 따라와 주면 안 되나요? 저 혼자서 그런 남자랑 같이 있는 건 너무 무서워서…….”
올리비에의 말에 레티시아가 웃으며 올리비에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조금만 참으렴.”
사적인 자리에서 레티시아는 올리비에에게 말을 놓는다. 올리비에가 부탁한 일이다. 그녀가 올리비에보다 위에 있다는 착각을 심어주기에 딱 좋은 방법이니까.
“이제 잘 시간이야.”
시간을 확인한 레티시아의 말에 올리비에는 고개를 끄덕이고 침대에 누웠다. 침대 바로 옆에 레티시아가 의자를 가져와 앉는다. 자는 척하기 전까지 아마, 이대로 있겠지.
“테네스 공국은 좀 어때, 신기한 물건들이 많았을 텐데.”
“파이크 왕국의 세자는 물건을 골라주지 않는걸요. 그냥 바라보다가 왔어요.”
그 말에 레티시아가 작게 웃음을 터뜨리고는 이불을 끌어 올려 올리비에의 어깨를 덮어준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테네스 공국의 상인연합 건물이 도둑질당했다고 하던데.”
올리비에도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야, 레티시아가 은잔을 통해서 자신에게 보고한 사실이니까. 고로, 이 이후에 레티시아가 할 말도 알고 있다.
“도둑이라니, 베로나 제국에는 그런 일 없는데.”
“그렇지.”
없을 리가 있나. 베로나 제국도 테네스 공국도 멍청하고 둔해 빠진 꼭두각시들이 돌아다니는 세상이다.
당장 눈앞에 보이는 이득을 가지고 싶어서 어쩔 줄 모르다가, 결국 가장 멍청한 방법을 동원해 원하는 물건을 가지려고 한다.
착각에 빠지니까. 도둑질하는 녀석들은 도둑질할 때만큼은 자신이 절대로 잡히지 않을 거라고 스스로를 세뇌한다. 감방에 가고 싶어서 도둑질을 하는 바보는 없다.
돈이나 보석을 훔치면, 그걸 자신이 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니 훔치는 거다.
“무서워라.”
올리비에는 그렇게 중얼거리고 이불에서 잠깐 뒤척였다.
“루크 발리아노라는 상인인데, 많이 난감해하는 모양이야.”
“레티시아와 친한가요?”
올리비에의 질문에 레티시아가 으음, 하는 소리를 냈다.
“그런 편이지. 알게 모르게 도움을 많이 받은 사람인데, 중요한 물건들을 도둑질당하는 바람에 지금 아주 힘든가 봐.”
“레티시아의 지인이라면 제 지인이에요. 도울 수 있는 일이 없을까요? 나는 베로나 제국의 황녀니까, 뭐든지 할 수 있잖아요. 그렇죠?”
올리비에의 말에 레티시아가 부드러운 표정을 짓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올리비에는 베로나 제국의 황녀니까 뭐든지 할 수 있지.”
“제가 하고 싶은 일은 레티시아가 좋아하는 일이에요.”
“그렇게 말해주니 정말 고마워. 역시 올리비에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친구야.”
올리비에는 그 말을 듣고는 배시시 웃었다. 레티시아가 올리비에에게 시키고 싶어하는 일은 자색이 시킨 일이다. 그리고 올리비에는 자색이다.
다른 사람들 눈으로 보기에는 올리비에는 그저 레티시아라는 나쁜 여자에게 놀아나는 멍청한 황녀일 뿐이다.
그렇기에, 올리비에가 무슨 짓을 하더라도 그 책임은 레티시아가 뒤집어쓴다.
계속 그렇게 남아있어야 한다. 올리비에는 이불에서 손을 빼 레티시아의 손을 잡았다.
“그렇게 말해주니 너무 좋아요. 저는 뭘 해야 좋을까요?”
“내일 점심 즈음해서, 나와 함께 이 나라의 공왕을 찾아가 줬으면 하는데.”
올리비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게요.”
올리비에의 말을 들은 레티시아가 활짝 웃으며 침대에 누워있는 올리비에의 입에 초콜릿 하나를 넣어줬다.
“아, 이빨 다시 닦아야 하나요?”
올리비에의 말에 레티시아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 내가 주는 초콜릿은 이빨 안 썩어.”
그런 농담을 던지며, 레티시아는 올리비에에게 챙겨온 서류를 건네주었다.
“공왕 앞에서는, 이대로 말해줄래? 혹시 공왕이 질문을 한다면 내가 살짝 대답을 알려줄게.”
올리비에는 입에 든 초콜릿을 이리저리 굴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용이 너무 많아요. 까먹으면 어쩌죠.”
레티시아가 그 말에 웃으며 올리비에의 뺨을 쓰다듬었다.
“걱정하지마, 우리는 친구잖아. 까먹은 것 같으면 내가 다시 알려줄게.”
“고마워요.”
“이제 자렴. 잠들기 전까지는 함께 있어 줄게. 올리비에.”
올리비에는 눈을 감았다. 잠시 뒤, 그녀가 잠들었는지 확인한 레티시아가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나섰다.
“마틴 레드우드. 일 처리가 좀 투박하지 않아?”
올리비에는 자리에서 일어나 팔을 꼰 채 침대에 기댄 채 희미하게 웃었다.
“난 거친 남자가 좋더라. 사람이 일을 할 땐 그런 면모도 있어야지.”
마틴이 가져간 서류가 뭔지는 알고 있다. 상인연합에서 암암리에 재배하고 유통하던 온갖 불법 작물들과 거래 내역은 물론이고, 누구에게 뇌물을 얼마나 먹였는지와 같은 더러운 것들이 적힌 서류다.
“덕분에 노랑이가 헐레벌떡 나를 찾았지.”
사람을 보냈지만, 예상과는 다른 결과가 나왔다.
“그린모스 늪지대에서 더 강해진 모양이네. 얼마나 강해졌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중얼거린 올리비에는 문을 잠그고 서류를 뒤적거렸다. 금고의 위치추적 마법이 끊어진 자리에는 싸움의 흔적과, 그녀가 보냈던 사람의 시체가 있었다.
서류에는 시체를 발견한 당시의 주변이 세세하게 기록되어 있었고, 치열한 싸움이 이어졌다는 식의 전문가의 소견이 적혀 있었다.
올리비에는 서류를 휙 하고 벽난로에 던져넣었다. 한 번 본 내용이니 보관할 필요는 없다.
“그게 아니야.”
파이크 왕국의 세자와 거리를 돌아다닌다는 핑계로 해당 장소에 직접 방문했었다. 아직 흔적이 남아있었고, 공국의 경비대가 올리비에의 출입을 막았지만…… 그 잠깐으로도 결론을 내리기에는 충분했다.
“그린모스 늪지대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아직 모르지만, 생각보다 훨씬 더 강해진 거야.”
강해진 과정은 중요하지 않다. 도출된 결론만 있으면 된다. 칠색 내각에서 동원할 수 있는 무력으로 마틴 레드우드를 제압하기 위해서는 다수의 인원이 희생되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럴 필요가 없지.”
올리비에는 마틴 레드우드를 죽이려는 게 아니다. 필요한 건 그 남자가 가지고 온 책이다.
“엘렌 리버플로우가 내용을 해석하고 있을 텐데.”
당연히 책이 있는 방 주변에는 엘렌 리버플로우가 최대한의 실력을 발휘해 마법을 걸어놓았을 것이다.
올리비에는 서랍을 뒤적거려 뭔가를 꺼내 들었다. 사슬이 걸려있는 개목걸이다. 그걸 물끄러미 바라보던 올리비에가 어깨를 으쓱했다.
“알몸으로 이걸 목에 차고 배를 깐 채 드러누워서 개처럼 짖으면 봐줄 수도 있는데.”
분명히 재미는 있을 거다. 재미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마틴 레드우드에게 이 제안은 당연히 할 테지만, 막상 정말로 마틴 레드우드가 그런 모습을 보이면 그 순간 질리겠지.
잠깐 가지고 놀면 그걸로 족한 녀석으로 격하된다.
마틴 레드우드는 올리비에의 천칭 위에 올라갔다.
칠색 내각을 처음 만들기로 결심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준비해오던 계획은 그녀에게 있어서도 굉장히 중요하다.
무슨 말을 해도 이해하지 못하는 머저리와 얼간이들 사이에서 미치지 않고 긴 시간을 버틸 수 있게 해주었던 가장 큰 원동력이니까.
마틴 레드우드가 주는 재미가 올리비에의 기준을 충족하지 않는다면 잠깐의 여흥거리가 될 뿐이다.
“이걸 차야 하는 상황을 만들기는 할 건데, 그렇다고 진짜 하지는 마.”
절그럭거리는 쇠사슬을 쓰다듬으며 중얼거린 올리비에는 다시 개목걸이를 집어넣고 침대로 휙 하고 몸을 던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