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화
다음 날 아침, 일어나 식사를 하고 있는데 꽤 신박한 소식이 귀에 들어왔다.
“올리비에가 오전 계획을 취소한 다음 공왕을 만나고 있다고?”
“왜 만나는 걸까요.”
나는 그 말에 으음, 하는 소리를 냈다.
“루크 발리아노 건 때문이 아닐까 싶은데.”
당장 그거 말고는 갑자기 일정까지 캔슬하면서 공왕을 만날 이유가 없다.
“만나서 할 만한 이야기가 뭘까요. 루크 발리아노가 공왕에게 손을 뻗치지는 않았을 텐데.”
테네스 공국의 공왕이 돈이 많다는 건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는 사실이다. 나는 식사와 함께 나온 차를 한 모금 마신 다음 턱을 괸 채 생각에 빠졌다.
“우리가 머무르고 있는 연빈관을 강제로 수색하려는 게 아닐까요?”
나는 그 말에 고개를 저었다.
“테네스 공국이 눈치를 봐야 하는 건 베로나 제국만 있는 게 아니야.”
테네스 공국은 상업이 극도로 발달하면서 성장한 나라인 만큼, 다른 나라와 우호 관계를 유지하는 건 굉장히 중요한 일이다.
다른 나라의 세자가 머무르고 있는 건물을 강제로 수색하는 건 올리비에 황녀가 아무리 강하게 요구해도 공왕에게는 고려할 만한 선택지가 되기 힘들다.
“도대체…….”
그런 생각을 하면서 식사를 하고 있으려니, 갑자기 문이 벌컥 열렸다.
“세자 저하, 무슨 일이십니까?”
얼굴이 살벌하다. 도대체 무슨 일이지.
“공왕이 올리비에를 비롯한 베로나 제국의 사람들과 연빈관을 함께 쓰도록 배려해줬다더군.”
나는 그 말에 입에 물고 있던 홍차를 그대로 뱉을 뻔했다. 배려? 배려 같은 소리 하네.
“……올리비에 황녀의 요청이겠군요.”
지금까지는 건물을 따로 쓰고 있었지만, 오늘부터는 같은 연빈관을 사용하게 되었다.
“절반을 비워주라고 하더군.”
“그럼, 호위병을 빼라는 겁니까?”
내 말에 세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빈자리는 베로나 제국의 호위병들이 자리 잡게 될 거다.”
나는 그 말에 인상을 썼다. 다른 곳은 몰라도 최소한 연빈관은 테네스 공국에서 편히 쉴 수 있는 안전지대였는데, 이제 그것도 아니게 되었군.
“나쁘게 생각할 일은 아닙니다.”
나는 들고 있던 찻잔에 각설탕을 때려 박고 쭉 들이켰다. 물론 우리는 편히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을 빼앗긴 상황이지만, 그건 올리비에 황녀라고 해서 예외가 아니다.
싸움으로 치면 참호전에서 난전이 되어버린 거다.
안방이 갑자기 복마전이 되어버렸군. 뭔가 더 이야기를 나누려고 하는 순간, 문이 열리고 누군가 안으로 들어왔다.
“안녕, 마틴 레드우드. 어머, 제이콥 세자도 있었던 모양이군요.”
은으로 만들어진 쟁반 위에 얼음 구슬을 굴리는 것 같은 목소리가 내 귀를 때렸다. 고개를 돌려보니 거기에는 올리비에 황녀가 갑옷으로 중무장한 여섯 명의 호위와 함께 서 있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테이블 위에 기대두었던 검으로 손을 가져갔다. 올리비에가 그런 나를 보고 희미하게 미소를 띠었다.
“왜 이래. 그런 공허한 위협은 별로 효과가 없다는 거 알잖아?”
무심해 보이는 보라색 눈동자가 나를 슥 훑는다. 내가 검 쪽으로 손을 가져가려 들자 그녀의 뒤편에 서 있던 호위가 자세를 약간 바꾼다.
나는 녀석을 살피다가 입을 열었다.
“저 친구들은 귀가 막힌 모양이지.”
존대를 할 필요는 없다. 애초에 저 여자는 반말 같은 걸로 화를 내지는 않을 거다. 내 말에 올리비에가 고개를 끄덕였다.
“달군 쇠꼬챙이로 귀와 눈을 후볐어.”
“미쳤군.”
내 말에 올리비에가 놀란 표정을 짓고 양손으로 자기 가슴을 감싼다.
“내가 한 거 아니야. 잠깐 이야기를 나눈 다음, 자기들이 자발적으로 한 일인걸. 아, 그래도 실력은 굉장히 뛰어나니까 걱정하지마. 눈에 뵈는 게 없어서 그런가?”
키들거리며 말을 마친 올리비에가 천천히 테이블 옆에 놓인 의자에 앉았다. 곧바로, 그녀의 뒤편에 서 있던 기사들이 그녀의 뒤편에 시립한다.
“신기하단 말이지. 어떻게 주변을 파악하는 건지 물어보고 싶어도, 듣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하니 물어볼 수가 없다는 점이 아쉬워.”
말을 마친 올리비에가 슬쩍 클로에를 바라본 다음 웃었다.
“예쁘기도 해라. 바쁘지 않으면 차 한 잔 따라주지 않으련?”
클로에는 잠깐 올리비에를 노려보다가 찻잔에 차를 따라 올리비에에게 건네주었다. 차를 한 모금 마신 올리비에가 나와 세자를 번갈아 가며 보다가 입을 열었다.
“엘렌 리버플로우 양은 바쁜가 보지? 하긴, 혼자서 그 책을 해석하는 일이 그렇게 쉽지는 않을 테니까.”
“댁이 신경 쓸 일은 아닌 것 같은데.”
내 말에 올리비에가 웃었다.
“레티시아는 두고 왔나 보지?”
내 말에 올리비에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침 식사 다했으면 우리 크로케 할래? 사람도 딱 네 명이고, 날씨도 좋은데.”
내 대답은 듣지도 않고 자리에서 일어난 올리비에는 히죽 웃으며 말했다.
“나는 제이콥 세자와 같은 편, 너는 옆에 있는 그 예쁜 애랑 한편.”
“내가 왜 해야 하지?”
내 말에 올리비에가 대답했다.
“내가 하고 싶으니까.”
“시키는 대로 하는 사람이 필요하다면 다른 곳 가서 알아보는 게 어때.”
내 말에 올리비에가 어머, 하는 소리를 냈다.
“크로케, 네가 이긴다면 책 정도는 포기할 수 있는데.”
올리비에의 말에 곧바로 클로에와 세자가 반응을 보였다. 나는 그런 두 사람을 보다가 시선을 올리비에에게 고정한 다음 말했다.
“난 이길 수 없는 놀이는 안 해.”
내 기억이 맞다면 크로케는 그렇게 어려운 게임은 아니다. 문 모양의 작은 장식물이 여섯 개, 그리고 말뚝이 하나 박혀 있는 잔디밭에서 하는 경기다.
공을 막대기로 쳐서 여섯 개의 문을 순서대로 통과시키고, 마지막에 말뚝을 때리는 데 성공하면 된다.
문제는 저 여자가 그런 놀이를 못 할 리가 없다는 거다. 몇 초에 공이 어디를 지나 어디에 멈출지 훤히 알고 있을 텐데, 이길 수 있을 리가 없지.
“정말로? 후회하지 않겠어? 만에 하나 내가 실수할 수도 있잖아. 이래 봬도 나는 이런 식의 약속은 꼭 지켜.”
나는 그 말에 헛웃음을 지었다. 실수 같은 소리 하네.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다.
“크로케라. 준비는 해놓고 말한 거겠지.”
내 말에 올리비에가 눈을 살짝 빛낸다.
“어머, 하게?”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세자 저하와 클로에 로니세라 경은 일정이 있을 예정이니까.”
내 말에 올리비에가 흠, 하는 소리를 냈다.
“그래, 그럼 둘이 하자. 정원에서 기다리고 있을게.”
말을 마친 올리비에가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나섰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나는 입을 열었다.
“클로에, 너는 어머니에게 가서 만남이 확정되었는지 확인한 다음, 엘렌 리버플로우를 지키고 있어.”
“네, 그럴게요.”
내 말을 들은 클로에가 문을 나서고, 나는 세자를 바라봤다.
“상시 동원할 수 있는 호위의 숫자가 줄면, 엘렌 리버플로우 양의 방을 지키는 호위의 숫자도…….”
내 말에 세자가 끄응, 하는 소리를 내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줄일 수밖에 없어.”
연빈관 안에 머무르는 호위의 숫자가 줄었으니, 당연히 엘렌의 방을 지키는 호위의 숫자도 줄어들게 된다.
“방을 옮겨야겠네요. 클로에 로니세라 경의 거처를 엘렌 리버플로우 양의 방 좌우로 배정해주셨으면 합니다.”
내 말에 세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조치하겠네. 자네는?”
나는 그 말에 대답했다.
“저 여자의 옆방으로.”
내 말에 세자가 눈을 크게 뜨고 나를 바라봤다.
“괜찮겠나? 위험한 여자야.”
“서로 위험할 겁니다.”
내 말에 세자가 잠깐 입을 다물고 생각하다가 이내 후우, 하고 숨을 내쉬었다.
“알았네. 그렇게 하게. 나는 줄어든 인원수에 맞춰 연빈관 내의 경비 계획을 다시 검토하겠네.”
“감사합니다.”
말을 마친 나는 올리비에가 기다리고 있을 정원으로 향했다.
“늦었네. 방은 엘렌 리버플로우의 옆으로 옮겼겠지?”
나는 그 말에 대답했다.
“미안하지만 네 옆방인데.”
내 말에 올리비에가 잠깐 눈을 크게 뜨나 싶더니 이내 웃음을 터뜨렸다.
“그럴 줄은 몰랐는데. 바로 옆방에 남자가 잔다니. 두근거려라.”
지랄하네. 나는 그 말에 대답하는 대신 통에 꽂혀 있던 스틱 중 하나를 들어 올렸다. 끝부분이 망치처럼 되어있는 막대기다. 이걸로 공을 치면 된다.
“누가 먼저 하는 게 좋을까. 동전 던지기는 어때?”
“어차피 의미 없잖아. 네가 먼저 해.”
내 말에 올리비에가 응, 하는 소리를 내고는 공을 툭 하고 잔디 위에 올린 다음 막대기로 툭 하고 공을 쳤다. 데구르르 굴러간 공이 작은 문을 통과하고 멈춘다.
사실, 이딴 공놀이 같은 건 크게 의미 없다. 올리비에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어젯밤 내가 보낸 사람, 꽤나 쉽게 처리한 모양이더라.”
역시, 이 여자의 눈까지 속이는 건 힘들었나 보다. 하지만, 그래도 내 실력을 정확히 측정하지 못한 건 확실하다.
“그거야 뭐, 워낙 형편없는 녀석이었으니까. 적색이 죽고 나서 괜찮은 실력자를 동원하는 게 많이 힘들어진 모양인데.”
죽은 엔더슨은 왕국의 기사단장이었고, 질 좋은 인재를 많이 끌어들일 수 있었을 것이다. 나는 딱, 하고 내 공을 쳤다. 공은 문을 통과한 다음 먼저 자리 잡고 있던 올리비에의 공을 건드린다.
“좋아.”
상대의 공을 내 공으로 건드리는 데 성공하면 상대의 공을 견제할 수 있다. 사실 이 게임은 이게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는 내 공을 올리비에의 공 바로 옆에 바짝 붙여두고. 내 공을 발로 살짝 누른 채 막대기를 휘둘렀다.
내 공을 타고 막대기의 충격이 올리비에의 공에 전달되고, 그녀의 공이 저 멀리 구석탱이로 굴러가 버린다. 딱 봐도, 저기에서 두 번째 문을 통과하는 건 요원해 보인다.
“상황이 어려워졌으면 그만두는 게 어때? 양질의 인재를 동원할 수 없는 조직에게 남은 건 내리막길뿐이야.”
“어려워졌다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말을 마친 올리비에가 콧노래를 부르며 툭 하고 공을 친다. 저 멀리 떨어져 있던 공인데도 불구하고, 데굴데굴 굴러서는 기어이 두 번째 문을 통과하고야 만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귀신이 공의 멱살을 잡고 문 쪽으로 끌고 간 것처럼 보일 정도다.
“어머, 운도 좋아라.”
“운 같은 소리 하네.”
올리비에가 내 말이 아하하, 하고 웃은 다음 막대기를 빙글빙글 돌리며 말했다.
“모처럼 노랑이의 서류를 손에 넣었는데, 내가 뭘 하려고 하는지 짐작 가는 건 없어?”
“아직까지는 전혀 모르겠는데.”
내 말에 공을 치려던 올리비에가 동작을 딱 멈춘 다음, 불만스러운 표정을 짓고 나를 슬쩍 째려본다.
“모르겠다고? 내 옆방으로 옮겼다는 이야기로 깜짝 놀래켜 놓고는, 곧바로 실망시키는구나.”
“글쎄다. 혹시 장래 희망이 좋은 남편을 만나 자식을 스무 명 정도 낳고 싶다는 게 계획인가?”
내 말에 올리비에가 으흥, 하는 소리를 냈다.
“그렇구나.”
“그렇긴 뭐가 그래. 혼자 알지 말고 좀 같이 아는 건 어떨까.”
내 말에 올리비에가 쯔, 하고 혀를 찼다.
“알려달라고 하지 말고, 알아내야지.”
“그래야겠지.”
내 말을 들은 올리비에가 입을 열었다.
“네 말대로 적색의 자리가 비었잖아? 사람을 새로 찾고 있는데. 너 정도면 따로 복잡한 검증 절차 같은 건 필요 없어. 그래서 말인데, 혹시 생각 있어?”
“없어.”
내 말에 올리비에가 슬픈 표정을 짓는다.
“어째서? 잘 대해줄게.”
나는 그 말에 공을 툭 하고 쳐서 문을 통과한 다음 대답했다.
“너 같은 게 사람을 어떻게 다루는지는 짐작 가니까.”
나는 말을 마치고 나서 툭 하고 막대기를 바닥에 떨군 다음 올리비에를 바라봤다.
“기를 쓰고 흥미를 끌 만한 것들을 계속해서 찾지. 하지만 몇 개월이 걸려 찾아낸 무언가에 대한 흥미를 잃는 데는 보통 1시간도 안 걸려.”
올리비에는 가만히 내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그 이후에는 뻔해. 샅샅이 뜯어보다가 더 이상 뜯어 볼 게 없으면 그대로 망가뜨리고, 저런 꼴로 만들지.”
나는 슬쩍 이 정원을 지키고 있는 갑옷 입은 호위들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성질 더럽고 버릇없는 애가 장난감을 망가뜨리는 것처럼. 내가 네 아빠였으면 엉덩이를 불이 나도록 때렸을 텐데.”
내 이야기를 다 듣고 나서, 갑자기 올리비에가 손에 들고 있던 막대기를 휙 하고 던진 다음 나를 응시하며 말했다.
“저기, 개목걸이 좋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