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이야기를 듣고 있기만 했는데 피로해지는 경험은 처음이었다. 그린모스 늪지대의 소나기처럼 쏟아지는 이야기 속에서 내가 필요한 정보만을 찾아내서 취합하는 행위는 마치, 인터넷 서핑을 통해 신뢰할 수 있는 학술 정보를 찾아내는 행위나, 금광석에서 순금을 분리해 내는 것과 비견할 만한 일이었다.
하지만, 어떻게든 해내는 데 성공했다. 해가 저물어 갈 즈음이 되어서야 나는 마침내 그 바다의 폭풍 같은 입담을 가진 갑판장과 헤어질 수 있었다.
“그런대로 즐거웠다! 그럼 살펴 가라고 꼬맹이!”
“이야기 잘 들었습니다. 그럼, 항상 안전한 항해 되시길.”
그리고, 너와 함께 배를 타야 하는 모든 선원들에게 명복을.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인사를 하고 술집을 빠져나와 다시 연빈관으로 향했다.
“저기…… 칠색 내각의 급습이라도 받으셨어요?”
다시 돌아와 몸에 묻혔던 검댕을 닦아내고 있으려니 클로에가 내 모습을 보고 그런 질문을 던졌다.
“그건 아니지만, 비슷한 수준으로 힘든 일이 있었어.”
이 정도면 수다를 넘어서 언어폭력에 가까웠다고 생각하는데.
“뭔가, 성과는……?”
클로에의 조심스러운 질문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루크 발리아노가 불법 작물을 재배하는 리마 섬의 항구로부터 시작되는 항로는 크게 다섯 개가 있는 모양이야.”
나는 그렇게 말하고 나서 펼쳐진 지도를 살피다가 리마 섬을 확인한 다음 내가 걸러낸 정보를 최대한 종합해서 선을 긋기 시작했다.
“다섯 항로 모두 중간에 3-4개 정도의 섬을 경유한 다음 글림하트로 돌아오지.”
섬을 경유하게 되면 해당 장소에서 보급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생필품을 최소화하고 대신 판매 물품을 더 많이 선적할 수 있다.
“그렇군요.”
“하지만, 이야기를 들어보니…… 정규 항로를 사용하지 않고 운행되는 배가 있는 것 같던데.”
“불법 작물로 생산한 약물을 판매하기 위한 경로가 아닐까요?”
나는 그 말에 고개를 저었다.
“우리가 확보한 서류에는 항만장들에게도 뇌물을 먹인 걸로 되어있어.”
“그렇겠네요, 정규 항로를 사용하지 않을 이유가 없어요.”
뇌물을 먹여놓은 항만장들이라면 어차피 눈감아 줄 텐데, 굳이 위험한 비정규 항로를 고집할 이유가 없다.
“근데, 그건 어떻게 알아내신 거예요?”
말이 많다는 건, 견뎌내면 무수한 정보를 건져낼 수 있다는 거다. 당사자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이야기라고 생각해서 가볍게 넘기지만, 결국 듣는 사람이 중요한 거니까.
“길을 잃고 표류하던 배가 리마 섬에 도착했는데, 거기에 머무르면서 특이한 배를 봤다고 하더군. 식량과 물의 적재량이 다른 배들에 비해 이상할 정도로 많았다나 봐. 배 이름이 날개물범호야.”
내 말에 클로에가 아, 하는 소리를 내고는 쌓여있는 서류를 뒤적거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루크 발리아노가 소유한 배에요.”
클로에는 그걸 확인한 다음 나를 바라봤다.
“이 배가 라하둔 꽃의 암술을 수송했을 거라고 생각하세요?”
“가능성은 있잖아. 애초에 꽃의 암술이라는 게 채취한다고 몇 톤씩 나오는 것도 아닐 테니.”
물론, 다섯 포대라고 하는 양이 적은 건 절대로 아니다. 약의 재료로 쓸 때도 귀이개만 한 스푼의 절반 정도만 채워서 쓸 정도고, 애초에 말린 꽃술의 채취량이 많을 수는 없잖아.
사프란이라는 향신료만 해도 사프란 꽃의 암술을 말려서 만드는 건데. 1g을 채취하는데 꽃 170송이가 필요하다고들 하니…… 이 라하둔이라는 꽃의 암술도 크게 차이는 없을 거다.
“배에 몇 포대 싣고 난 다음, 남은 자리는 물과 식량으로 꽉꽉 채우는 거지.”
그럼 보급 없이도 멀리 항해할 수 있으니, 정규 항로를 따라 움직일 필요는 없어진다. 나는 머리를 벅벅 긁은 다음에 한숨을 푹푹 쉬어가며 편지를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자그마치 여덟 장에 달하는 장문의 편지가 완성되었다. 나는 곧바로 편지를 밀봉하고 엘렌에게 찾아가서 편지에 마법을 걸어달라고 했다.
마법이 걸린 편지를 받아든 나는 클로에를 바라봤다.
“이 편지, 첩보국장에게 전달하고 싶은데. 절대로 열어 볼 생각하지 마. 너는 물론이고, 첩보국의 그 누구도.”
내 말에 클로에가 고개를 끄덕였다.
“필요한 일이죠? 반드시 지키도록 할게요.”
말을 마친 클로에가 편지를 조심스럽게 품 안에 집어넣었다. 클로에는 이미 외출 준비를 마친 상태다.
“이제 외출 준비해야겠지. 어머니는?”
“레드우드 부인께서는 먼저 엔리코의 저택에 도착하셨어요.”
저런, 서둘러야겠네. 나는 재빠르게 옷을 갈아입고 나서 클로에와 함께 밖으로 나갔다.
“올리비에가 우리가 엔리코를 만난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할까요?”
나는 그 말에 음, 하는 소리를 내고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니라고 생각해.”
“그럼 의미가 없잖아요.”
나는 그 말에 고개를 저었다.
“알아차린다고 해서 의미가 없어지느냐? 라고 물어보면 그건 또 다른 문제지.”
우리는 글림하트의 거리를 누벼 마침내 엔리코의 저택 앞에 도착했다.
“아,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엔리코 씨는 안에서 레드우드 부인과 함께 기다리고 계십니다.”
대문 앞을 지키던 사람들에게 다가가 우리의 이름을 말하자, 집을 지키던 자들이 인사를 하고 문을 열어준 다음 우리를 응접실로 안내해주었다.
문이 열리고, 검은 머리카락을 포마드로 빗어넘긴 다음, 꽁지머리로 멋을 낸 젊은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틴 레드우드 님, 그리고 클로에 로니세라 경.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로델린이 자리에 앉은 채 나와 클로에를 보고 웃었다.
“약간 늦었구나. 바쁜 일이 있었나 보지?”
“약간요. 일이 마음대로 흘러가지만은 않네요.”
내 말에 로델린과 엔리코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죠, 마음먹은 대로 흘러가지 않는 게 또 세상사의 묘미 아니겠습니까. 자, 두 분 모두 앉으시죠.”
말을 마친 엔리코가 우리에게 자리를 내주었다.
“오늘 외국의 귀한 분들이 세 명이나 저의 집에 찾아와 주신 데에는 분명히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그 말에 대답했다.
“상인연합,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내 말에 엔리코가 으음, 하는 소리를 낸 다음에 소파에 기댄 채 대답했다.
“저와는 생각하는 바가 조금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점이 다를까요.”
내 말에 엔리코가 나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돈을 쓰는 방법.”
말을 마친 엔리코의 눈이 살짝 빛났다.
“고용이라는 개념을 바라보는 관점부터 말해볼까요.”
“재미있겠네요. 한번 들어보죠.”
내 말에 엔리코가 손을 양쪽으로 벌리며 말했다.
“노동의 가치는 돈으로 정해집니다. 누군가 많은 돈을 받는다면 그 사람의 노동은 적게 받는 사람보다 더 가치 있는 법입니다.”
말을 마친 엔리코가 물을 들이켜나 싶더니 잔을 내려놓았다.
“상인연합은 이 원칙을 저와는 좀 다른 식으로 적용하더군요.”
말을 마친 엔리코가 어깨를 으쓱했다.
“상인연합 소속의 상인들이 부리는 사람들은, 어느 정도 이상의 경력을 쌓고 높은 자리에 올라가게 된다면 그 자리에 상응하는 돈을 받으며 일합니다. 하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생계를 유지하기 힘들 정도의 적은 돈을 받아가며 일하죠.”
“뭐, 말씀하신 철학대로라면 어쩔 수 없지 않겠습니까.”
노동의 가치는 받는 돈으로 정해진다. 그렇다면 대체할 수 있는 노동을 하는 자는 적은 돈을 받는다. 방금 말한 철학을 엔리코도 가지고 있다면 상인연합과 친하면 친하지, 사이가 나쁠 이유는 없다.
“문제는 고용주의 관점입니다.”
말을 마친 엔리코가 자리에서 팍 하고 일어나 창문을 바라본다.
“사람을 고용하는 이유는, 그 사람이 저에게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아무리 하찮은 일을 하더라도 그 사람이 어떻게든 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수준의 돈을 쥐여줘야 합니다. 만약, 그럴만한 가치가 없는 사람이라면 해고해야죠.”
우어, 해고라니. 좀 극단적인데.
“저는 사람을 고용하면, 어떻게든 이 사람이 정상적인 삶을 영위할 수 있을 정도의 월급은 보장합니다.”
“하지만 필요 없어지면 해고하겠죠.”
내 말에 엔리코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필요 없는 인원은 해고합니다. 저는 그 행위가 잘못이라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말을 마친 엔리코가 창밖을 바라보던 시선을 돌려 나를 바라봤다.
“사업은 정으로 하는 게 아니라, 돈을 보고 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까놓고 말해서 돈을 적게 줘가면서 고용하는 상인연합이 돈을 적게 주는 대신 해고를 하지 않을까? 그럴 리가.
어차피 필요 없는 인원이 발생한다면 인력감축은 발생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차라리 고용한 동안에는 제대로 보수를 챙겨주는 엔리코가 나쁜 사람은 아니지.
“대충 알았습니다.”
“하지만, 해고는 심사숙고 끝에 결정해야 합니다. 저 또한 해고당한 사람들이 어떤 삶을 살지 충분히 짐작하고, 잦은 해고는 고용된 사람들의 노동 효율을 낮추니까요.”
말을 마친 엔리코는 후우, 하고 숨을 내쉰 다음 손깍지를 꼈다.
“해고는 전쟁과 같습니다. 하기 전에는 신중하게 생각하고, 결정 나면 고민이나 불안감을 품지 않고 쭉 밀어붙여 끝내야 합니다.”
“고용 철학에 대해서는 충분히 알았습니다. 상인연합에서 엔리코 씨를 좋아하지 않는 이유도 알 것 같군요.”
내 말에 엔리코가 고개를 끄덕였다.
“노동자에게 좋은 대우를 해준다면, 점점 더 많은 걸 요구한다는 거죠. 실제로, 저에게 고용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현재의 사업 규모에 필요한 수준의 인력은 이미 다 뽑아놓았기에, 당분간 추가로 사람을 고용할 생각은 없습니다.”
“다만, 그런 식으로 고용한다면 사업의 확장도 느려질 수밖에 없겠군요.”
내 말에 엔리코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실제로, 상인연합에서 자주 훼방을 놓곤 하죠. 나름대로 잘 대처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긴 합니다만.”
얼굴을 구긴 채 한동안 턱을 쓰다듬던 엔리코가 한숨을 섞어 한마디 했다.
“솔직히 개 같긴 합니다. 내가 고용한 내 사람들 내가 밥 좀 먹여가며 부리겠다는데 왜 지들이 아가리에 거품을 물고 미쳐서 지랄인지.”
로델린이 엔리코의 말을 듣고는 순간적으로 움찔한다.
“고용인과 피고용인을 떠나서, 애초에 연합이라는 거 자체가 웃기지 않습니까?’
엔리코는 다소 격양된 목소리로 우리를 바라봤다.
“여언하압? 우리는 상인입니다! 이 족속의 본질은 제가 잘 압니다. 완벽히 외부와 차단된 밀실에 많이도 말고 딱 세 명만 모아놓고 1시간 기다리잖습니까? 그럼 그 즉시 지들끼리 물건 가격을 담합하는 게 바로 우리의 본질이죠! 근데 이 망할 나라는 잘도 그런 말도 안 되는 연합을 방치해두고 있더군요.”
말을 마친 엔리코는 푸후, 하는 소리를 내고 손을 휘휘 흔들었다.
“상인은 서로 뭉치게 두면 안 됩니다. 우리의 천성은 상생이 아니라 경쟁입니다. 경쟁하지 않고 상생하려 드는 상인은 국가를 좀먹는 병마입니다. 테네스 공국의 상업이 더 발전하기 위해서는 상인연합부터 작살 내야 합니다.”
“그런 이야기를 저희에게 하시는 이유는, 저희가 찾아온 이유를 대충 짐작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도 되겠습니까?”
내 말에 엔리코가 고개를 끄덕였다.
“마틴 레드우드 님도 상인연합을 싫어하고, 저도 상인연합이 걸리적거립니다. 이 정도만 알고 있으면 그 이외의 나머지는 아무래도 상관없지 않겠습니까?”
나는 그 말에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그렇죠, 필요 이상의 호기심은 명줄을 짧게 하는 법이니.”
엔리코가 내민 내 손을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