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드우드-117화 (117/275)

117화

악수를 나눈 다음 나는 입을 열었다.

“서로 원하는 게 같다고 주장하지만, 실제로는 어떨지 까보지 않으면 모르는 법이죠.”

내 말에 엔리코가 대답했다.

“어디까지나 제 기준일 뿐이지만, 꽤 떳떳하게 장사하며 산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죠, 어디까지나 엔리코 씨의 기준일 뿐이죠.”

내 말에 엔리코가 고개를 끄덕인 다음 입을 열었다.

“궁금하시거나, 찾아보고 싶으신 서류가 있다면 기꺼이 제공하겠습니다.”

꽤 당당한데. 나는 녀석이 챙겨 온 서류들을 훑어보기 시작했다. 빠르게 서류를 훑어보던 나는 이내 어디서 본 건 같은 글자를 확인하고 입을 열었다.

“필로스키 사립 고아원, 엔리코 씨가 지은 건물이었던 모양이군요.”

내 말에 녀석이 하하하, 하고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돈 되는 이야기를 할 때는 냉혹한 상인이지만, 저에게 주어진 모든 시간을 상인으로서만 사용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습니까.”

딴 구멍으로 주머니 차려고 만든 고아원은 아니다. 그런 고아원의 재정상태는 슬쩍 훑어보기만 해도 알 수 있다.

내가 항구에서 본 고아원을 제외하고도 두 곳 정도의 고아원이 추가로 엔리코의 투자에 의해 운영되고 있다.

부자들이 마련해 놓은 딴 주머니라는 걸 내가 이 세상에 와서 처음 보는 건 아니니까. 이건 진짜 부모 잃은 아이들을 데려와서 키우는 고아원이 맞다.

“좋은 일을 하시는군요.”

로델린의 말에 엔리코가 애매한 표정을 지으며 머리를 긁었다.

“좋은 일이라고 할 만한 건 아닙니다.”

착한 상인이라. 병립할 수 없는 두 개의 단어가 이어져 있군. 이성애자 게이를 보는 기분이야. 다른 서류들도 내 눈에는 큰 문제가 없어 보인다.

사실 떳떳하게 돈을 벌고 있느냐 아니냐가 아니라, 이 자식이 번 돈이 다른 구멍으로 새고 있는가 그렇지 않은가가 중요한데.

그 점을 고려해봐도 이 녀석이 번 돈이 다른 곳으로 흘러 들어가는 것 같지는 않다.

“잠깐 저희끼리 이야기를 나눠봐도 괜찮을까요?”

내 말에 엔리코가 그러시죠, 라는 대답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나가 자리를 비워줬다.

“어떻게 생각해?”

내 질문에 클로에가 음, 하는 소리를 내고는 어색하게 웃었다.

“저는 고아였잖아요? 그 생활이 그렇게 유쾌하지는 않거든요.”

그래, 고아원을 운영하는 상인이라는 점에서 이미 덮어놓고 믿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건 어쩔 수 없을 거다.

“어머니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로델린은 서류를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이렇게 많은 돈을 버는 상인이고, 여기는 돈으로 원하는 것은 대부분 이룰 수 있는 글림하트란다. 돈이 있는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는 유혹이 한두 가지가 아니야.

돈만 있으면 왕 부럽지 않게 살 수 있는 곳이다. 정해진 가격을 지불하면 온갖 사치품들의 주인이 될 수 있고, 사람을 개처럼 부릴 수 있다.

“이런 장소에서, 이렇게 돈을 많이 버는 사람이 다른 사람의 사정을 살피는 건 굉장히 힘든 일이야.”

다른 사람 돕는 거 말고, 자신을 위해서 돈을 쓸 방법이 무궁무진하다. 로델린과 클로에는 그 점을 높게 평가하는 모양이다.

“알겠습니다. 두 사람의 이야기는 잘 들었습니다. 잠깐 저와 엔리코, 둘이 이야기를 나눌 테니 두 사람은…….”

내 말에 클로에와 로델린이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나섰다. 잠시 뒤, 엔리코가 들어왔다.

“엔리코 씨.”

내 말에 엔리코가 고개를 끄덕였다.

“루크 발리아노는 머지않은 시일 안에 죽을 겁니다.”

내 이야기를 들은 엔리코가 움찔했다.

“루크 발리아노가 이 세상을 뜨고 나면 남은 그의 사업은 누군가 가져가야 하죠.”

녀석의 재산을 죽일 수 있는 방법은 없다. 루크 발리아노가 쌓아놓은 부는 어디론가 반드시 흘러 들어가게 되어있다.

올리비에 황녀가 루크 발리아노의 죽음을 짐작했다면, 이미 녀석의 사후 재산을 원하는 사람에게 건네줄 준비를 하고 있을 거다.

루크 발리아노의 재산은 요컨대, 로열젤리 같은 거다. 먹게 되면 그자는 자연스럽게 다시금 올리비에 황녀를 위해 일하는 칠색 내각의 머리 중 하나가 될 거다.

“……루크 발리아노의 사업은, 제가 혼자 먹어치우기에는 너무 규모가 큽니다.”

나는 그 말에 대답했다.

“당연히 혼자서 다 먹어 치울 수는 없겠죠.”

내 말을 들은 엔리코가 작게 한숨을 쉬고 나를 바라봤다.

“다른 상인들과 함께 쪼개 먹으라는 뜻이군요.”

전문 용어로 뭐라고 하더라. 인수합병을 위한 컨소시엄이라고 하던가. 굳이 혼자 먹을 필요는 없다.

먹고 싶은 사람들이 한곳에 모여 돈을 투자한 다음, 사들이고 나서 각자 투자한 돈 만큼 루크 발리아노가 운영하던 사업을 나눠 먹으면 되는 거다.

“그런 식으로 루크 발리아노의 사업을 나눠 먹기 위해서는 준비가 필요합니다.”

“준비가 필요하다는 건 이해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걸리느냐가 중요하죠.”

내 말에 엔리코가 끄응, 하는 소리를 냈다.

“하지만, 결국 루크 발리아노가 죽고 난 다음의 권리는 그 자식과 아내들에게 돌아갑니다.”

나는 그 말에 대답했다.

“상속받고 싶으면, 공왕의 허가가 필요하지 않습니까.”

내 말에 엔리코가 아, 하는 소리를 내고 나를 바라봤다.

죽은 사람의 재산을 그 친족이 상속받기 위해서는 군주, 즉 공왕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 그리고 공왕의 허락을 받기 위해서는 유산의 일정 비율을 납부해야 한다.

쉽게 말해서 상속세 같은 거다. 당연히 그 납부는 현금이 원칙이다. 국가에서 사업체를 현찰 대신 받지는 않는다.

즉, 엔리코의 친족이 유산을 받기 위해 납부해야 하는 현찰이 없다면, 자연스럽게 그 사업체를 타인에게 매각해서 현찰을 마련할 수밖에 없다.

“확실히, 루크 발리아노의 아내는 사치를 즐기고, 사업을 운영하는 데에는 재능이 없는 편입니다. 게다가 자식들은 아직 어리죠.”

“그렇다면 일이 더 쉽게 풀릴 수 있겠네요.”

기왕에 파는 김에 싹 다 정리해서 매각한 다음 돈을 한 아름 안겨주면 된다.

“루크 발리아노의 사업은 매력적입니다. 상인연합에 소속된 상인들이 그냥 두고 볼 리는 없으니, 결국 그들과 돈으로 싸워야 할 겁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본과 사람을 충분히 모아놓는 데 주력하시면 됩니다. 상인연합의 적극적인 움직임은 제가 최대한 막아보지요.”

상인들이 남의 사업 갈라 먹는 과정에 끼어든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나 같은 인간이 활약할 길은 얼마든지 있다. 나는 손깍지를 낀 채로 차분한 표정으로 엔리코를 바라봤다.

“대답은?”

엔리코가 후우, 하는 소리를 내고 머리를 긁으며 한동안 침묵에 빠졌다. 나는 그런 엔리코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머릿속으로 이런저런 계산을 하던 엔리코가 내 쪽으로 손을 내밀었다.

“큰 기회는 언제나 큰 위험과 함께 오는 법입니다. 한번 해보죠.”

나는 웃음을 띤 채 엔리코가 내민 손을 바라보다 말했다.

“한번 해보는 건 없습니다. 하거나 하지 않거나, 둘 중 하나지요.”

스타워즈에 나오는 요다 선생님의 말씀이시다. 영화에 나오는 캐릭터지만 참 좋은 말을 했단 말이지.

내 말을 들은 엔리코가 다시 한번 굳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하겠습니다.”

나는 그제야 녀석이 내민 손을 꽉 잡고는 말했다.

“파이크 왕국에서 테네스 공국으로 향한 호위병들 중 절반 정도가 연빈관에서 더 이상 머무를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렇군요.”

엔리코는 그다음에 내가 할 말을 기다렸다.

“물론 따로 머무를 장소를 테네스 공국에서 마련해주기는 한 모양이지만, 기왕이면 엔리코 씨가 좀 돌봐주셨으면 좋겠군요.”

녀석과 내가 만났다는 걸 올리비에 황녀가 알게 된다면, 엔리코에게 위협이 가해질 수도 있다. 파이크 왕국의 호위병 절반과 함께 있게 된다면 그 가능성을 상당히 덜어낼 수 있겠지.

“저런, 멀리에서 오신 귀한 분들이시지 않습니까. 제가 머무르는 저택의 규모가 제법 됩니다. 파이크 왕국의 병사들이 쉬기에는 모자람이 없을 것 같은데.”

“그래 주신다면 더할 나위 없겠군요. 잘 부탁드릴게요.”

말을 마친 나는 로델린과 클로에를 다시 방으로 불러들인 다음, 서류를 한 장 작성했다.

“클로에, 이 서류를 세자 저하에게 전달해줬으면 하는데.”

서류를 확인한 클로에가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갈까요?”

“그래 줘.”

내 말에 클로에가 인사를 하고 문을 나섰다. 세자에게 부탁한 건 두 가지다. 하나는 연빈관에서 나온 호위병들을 여기에 머무르게 하며 엔리코를 지킬 것.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우리가 확보한 루크 발리아노에 대한 서류 중 사업 규모와 재산 규모에 대한 내용이 적힌 서류들을 그 호위병들과 함께 여기로 보낼 것.

이 정도면 되겠지. 만약을 대비해 나와 로델린은 호위병들이 여기로 오기 전까지 엔리코의 저택에서 대기할 생각이다.

그 여자라면 내가 여기에 왔다는 이야기를 듣고 바로 사람을 보내고도 남을 인물이니까.

“혹시, 준비하는 과정에 있어 필요한 게 있다면 언제든지 말해주시면 됩니다. 구할 수 있다면 구해보지요.”

내 말에 엔리코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도록 하죠. 아, 기다리는 동안 식사라도 하시겠습니까?”

공짜 밥을 거절하는 건 또 매너가 아니지.

“주신다면야 달게 먹죠.”

나와 로델린, 엔리코가 이제 막 스테이크를 앞에 두고 식사를 하려는 와중에 갑자기 클로에가 들이닥쳤다.

표정이 영 심상치 않은데.

“……마차에 화재가 발생했어요.”

나는 그 말에 포크를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차에 화재가 발생했다는 말을 못 알아먹을 정도로 멍청하진 않다.

“얼마나 살렸어?”

내 말에 클로에가 순간적으로 침묵했다.

“클로에, 빨리!”

내 재촉을 들은 클로에가 후우, 하고 숨을 내쉰 다음 대답했다.

“호위병들이 불길을 무릅쓰고 빠르게 조치한 덕분에 전부 타지는 않았지만…… 삼에서 사 할 정도는 손실된 것 같아요.”

나는 그 말에 입술을 꽉 깨물었다. 로델린과 엔리코는 내가 지킬 게 뻔하니, 그 대신 서류를 담고 이리로 오는 마차를 노린 건가.

나 또는 클로에와의 교전을 피하면서 우리에게 줄 수 있는 피해 중에서는 이게 제일 효과적이었을 거다.

잠깐 머리를 굴리던 나는 이내 표정을 풀고 클로에의 어깨를 몇 번 두들겼다.

“표정 풀어. 호위병들은 저택에 다 도착한 거지?”

“네, 죄송해요. 제가 조금 더 신경을 썼으면 서류도 안전하게 도착했을 텐데…….”

“그건 가봐야 알 수 있는 거지.”

클로에가 막을 수 있었던 상황이었는지, 그렇지 못한 상황이었는지는 아직 모른다. 막을 수 있었는데 방심해서 못 막은 거라면 질책을 해야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질책할 수는 없다.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고 코트를 입으며 엔리코에게 말했다.

“미안하지만, 식사는 나중에 기회가 되면 다시 권해주세요. 왕국의 호위병들이 머무르며 경계태세를 취하겠지만, 조심하셔야 할 것 같네요.”

“괜찮습니다. 상황이 이렇게 되어버렸으니 식사하고 가라고 붙잡는 게 오히려 예의가 아니겠죠.”

나는 엔리코와 인사를 한 다음 클로에를 바라봤다.

“어머니를 모셔다드려. 나는 화재가 일어난 곳으로 가볼 테니.”

내 말에 클로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게요. 화재가 발생한 마차는 병사들로 하여금 함부로 사람들이 손대지 못하도록 조치해놓았어요. 롭코 십자로에요.”

“그래, 정신없었을 텐데 후속 조치는 취했네.”

말을 마친 나는 곧바로 문을 나서 화재가 발생한 장소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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