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화
도착한 현장에는 사람들이 몰려 있었고, 주변에 하얀 연기가 아직 남아있었다. 냄새를 맡은 나는 곧바로 얼굴을 구긴 채 코트 깃으로 코를 가렸다.
매캐한 냄새 사이로 마늘 냄새를 닮은 악취가 희미하게 코를 타고 들어온다. 나는 이게 뭔지 알고 있다.
“마차에서 불이 났다고 하길래 뭔가 했더니, 백린 같은데?”
“마틴 레드우드 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네, 고생했어요. 좀 가까이서 살펴봐야 할 것 같은데.”
내가 접근하자, 타오른 마차 주변을 지키고 있던 호위병들이 길을 비켜준다. 나는 마차 속을 뒤졌다.
“유리라.”
색을 입힌 유리 조각이 하얀 가루가 묻은 채 마차의 잔해 속을 굴러다니고 있었다. 유리 조각에 붙어있는 가루에 혀를 살짝 가져가니, 얼마 지나지 않아 혀를 타고 확 하고 쓴맛이 퍼진다.
나는 얼굴을 구긴 채 물로 입을 가글한 다음 바닥에 확 뱉어낸 다음, 유리 조각에 남아있는 가루를 살짝 덜어내 손가락으로 비벼봤다.
“소석회 같은데.”
대충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알 것 같다. 유리병 안에 물과 생석회를 같이 넣었다. 생석회는 물과 반응하면 발열반응으로 100도까지 온도가 올라간다.
그리고 백린의 발화점은 60도를 넘지 않는다. 생석회가 물에 닿으며 발생한 열로 인해 백린에 불이 붙고, 그 불꽃이 마차 안의 서류를 태운 거다.
“이러면 클로에가 눈치채기 힘들지.”
마법을 사용했거나, 몰래 사람이 들어와서 불을 질러놓고 간 게 아니다. 둘 중 하나였다면 클로에가 눈치챌 수 있었을 것이다.
심지어, 많은 양의 백린을 사용한 게 아니다. 백린은 타오르면서 위험한 유독가스를 생성한다. 타오르는 백린의 양이 많았다면 서류를 꺼내기 위해 달려들었던 병사들도 위험했어야 정상이다.
“뭐였지. 오산화인이라고 하던가?”
탈수 작용이 무지하게 강한 성분으로 알고 있다. 어쨌든, 병사들이 쓰러지는 일은 없었으니, 사용된 백린은 어디까지나 불쏘시개와 같은 역할을 했을 뿐이라는 뜻이다.
“그 여자가 이런 거에도 조예가 있을 줄은 몰랐는데. 백린 만드는 법은 또 어디에서 주워들은 거야.”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그 여자도 백린의 존재는 알지만, 대량생산할 수는 없는 모양이라는 점이다.
“대량 생산이 가능한 상황에서, 서류를 확실하게 처리하고 싶었다면 생석회와 물, 백린이 섞인 커다란 통 같은 걸 마차 쪽으로 집어 던졌겠지.”
그럼 뭘 해볼 틈도 없이 다 타버렸을 거다.
“알아낸 건 그렇다 쳐도…….”
나는 타오른 나무 사이에 박혀있는 작은 철판 하나를 꺼내 들었다. 철판 위에는 숫자가 적혀있다. 마차의 일련번호 같은 거다.
“누가 이 짓을 저질렀는지 알아내는 게 중요하겠지.”
이 마차가 들린 경로에 대한 조사를 부탁해야 할 것 같다. 마차를 다 살핀 나는 혀를 한 번 차고 연빈관으로 향했다. 연빈관 앞에 도착하자 해가 저물어 밤이 되어있었다.
“…….”
클로에의 방문을 열고 들어가자, 곧바로 클로에의 몸이 움찔하더니 시선이 아래로 내려간다. 저 어깨가 축 처진 이유는 백 퍼센트 죄책감 때문이겠지.
“클로에. 화재 현장을 살펴봤는데 질책할 만한 일은 아니라는 판단이 섰다.”
이건 아무리 생각해봐도 클로에가 뭘 잘못했다고 보긴 어렵다. 병 자체가 그렇게 크지 않았을 테니, 숨겨 놓으려고 마음먹었다면 마차의 짐칸 어디라도 숨겨 놓을 수 있었을 거다.
클로에는 기사잖아. 기사가 백린과 생석회의 특성에 대해서 알고 있으면 오히려 그게 더 이상한 거라고 생각한다. 검을 10년이나 휘둘렀다는 건, 그것 이외에 다른 지식의 습득에는 거의 관심이 없었다는 뜻이니까.
애초에 내가 서류가 들어있는 마차에 머무르고 있었어도 백린으로 인한 화재 같은 건 아예 생각조차 하지 못했을 거다. 나도 예상하지 못했을 사태를 클로에가 예상하지 못했다고 질책하는 건 잘못된 거다.
“그렇게 말씀하셔도, 서류들이 훼손된 건 피해가 심하잖아요.”
클로에는 여전히 극도의 저기압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기세만 봐서는 지금 여기에서 배에 칼 꽂고 죽어버리라고 하면 진짜로 그렇게 할 것 같은 느낌이다.
“괜찮아. 손실된 부분 중에 엔리코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부분이 있다면 내가 최대한 떠올려볼 테니까.”
종이와 잉크, 충분한 시간만 주어진다면 몇 번이고 다시 찍어낼 수 있는 인간 인쇄기 같은 그 여자와 비교한다면 보잘것없는 수준이긴 하지만, 나도 기억력이라면 꽤 좋은 편이다. 애초에, 쿠르스트 산맥에서 확보했던 대리석 기둥 안의 내용을 파악할 수 있었던 것도 내가 그 내용을 어느 정도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니까.
“죄송해요, 믿고 맡겨주셨는데 괜히 일만 늘려서.”
나는 그 말에 어깨를 으쓱하고 대답했다.
“괜찮다고 했잖아. 쓸데없이 마음에 담아두고 내가 뭐 시킬 때마다 '아, 또 실수하면 어쩌지?' 이런 멍청한 생각만 하지 마. 털어내고 잊어버려. 그리고, 첩보국에 부탁해서 서류 운송 중이던 마차가 이전에 들렀던 장소들을 한번 알아봐 줘.”
클로에와의 대화를 마친 나는 내 방으로 향했다.
“아 제발.”
문 앞에 선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고 얼굴을 구겼다. 바닥에 뭔가가 끌린 자국. 이건 일부러 남긴 거다. 나는 혀를 잠깐 차고 노크를 했다.
“안에 사람 있어요.”
“사람들이겠지.”
내 말에 문 너머에서 기분 나쁜 웃음소리가 들린다. 문을 살펴본 나는 만약의 사태를 대비하기 위해 검에 손을 가져간 채로 문을 열었다.
“늦었네.”
올리비에가 마치 제 방인 양 내 방의 소파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그녀 주변을 지키는 눈과 귀가 먼 호위병들도 보인다. 나는 그 사람들을 보다가 입을 열었다.
“제국 황녀는 남자와 잠자리를 이런 환경에서 가지나?”
내 말에 올리비에는 어깨를 으쓱했다.
“글쎄. 비슷하지 않을까 싶은데.”
말을 마친 올리비에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나를 바라봤다.
“어때, 좀 알 것 같아?”
무슨 말을 하는 건지는 안다. 마차에 불을 어떻게 질렀는지, 그걸 물어보는 거겠지.
“남에게 엿 먹이고 어떻게 먹은 건지 스스로 설명하라고 하다니, 취미하고는.”
“원래 나 같은 여자가 좀 그런 편이라고 생각하는데.”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고 검을 잡은 손에 힘을 주며 말했다.
“나가, 남의 방에서 알짱거리지 말고.”
“대담하게 내 옆에 자리 잡은 건 너야. 이 정도 상황은 예상했잖아?”
예상했다고 해서 달갑지 않은 방문이 달가워지는 건 아니다. 매달 날아오는 카드 명세서도 언제 날아올지 알고 있지만, 볼 때마다 우울해지잖아.
“레티시아를 불러오면 나가려나?”
내 말에 올리비에가 아, 하는 소리를 내고 검지로 나를 가리켰다.
“나쁘지 않은 시도네. 하지만 나와 레티시아 사이의 관계는 내가 이 관계를 유지하고 싶어서 유지하는 것뿐이라는 걸 잊지 말았으면 좋겠어.”
말을 마친 올리비에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말을 건네며 문 쪽으로 다가간다.
“스테이크를 먹으려던 참에 갑작스럽게 나가게 되어서 배가 많이 고플 텐데, 뭐라도 먹어둬. 음식에는 장난치지 않을게, 진짜야.”
급하게 나가느라 옷에 스테이크 소스가 약간 묻어있었다. 하지만 식사 중에 나간 건지, 아니면 식사를 하기 전에 나간 건지 맞춘 건 어떻게 해낸 일인지 알 도리가 없다.
“너도 돌아가서 먹던 케이크 마저 먹지 그래.”
“아이, 아쉬워라. 살짝 빗나갔네? 케이크는 마저 먹는 게 아니라 먹으려던 참이었어.”
문으로 다가간 그녀는 문고리를 잡아당기며, 소매에서 색을 입힌 작은 유리병 하나를 꺼내 내 쪽으로 던졌다. 나는 호리병이 던져지는 걸 확인하자마자 분신을 만들어 호리병을 잡은 다음, 조심스럽게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 모습을 본 올리비에가 눈웃음을 짓는다.
“역시. 마차 화재의 원인은 알아낸 모양이구나? 그건 맞춘 기념으로 주는 선물이야.”
말을 마친 올리비에가 그녀를 호위하는 병사들과 함께 문을 나섰다. 나는 바닥에 놓인 호리병을 살펴보다가 뚜껑을 열고 내용물을 쥐똥만큼 덜어 혀에 비벼 본 다음 얼굴을 구겼다.
“민트소스?”
나는 그걸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잠시 뒤, 연빈관에서 나를 위해 식사를 준비해주었다. 메뉴는 양갈비였다. 그제야 나는 호리병 안에 담긴 민트소스의 의미를 깨달았다.
불편한 표정으로 그 소스통을 바라보던 나는 창문을 확 열었다. 창문에 끼어있던 종이 한 장이 떨어진다.
[버리지마.]
“이게 이젠 이 자리에 없는 주제에 대화를 하려고 드네.”
나는 곧장 쓰레기통을 한번 살펴봤다. 거기에도 마찬가지로 소스를 버리지 말라는 쪽지가 들어있었다.
“다행이네.”
아직은 전부 파악하지 못했다 그거지.
내가 어느 정도 올리비에의 손안에서 놀아나는 중이었다면 여기에 쪽지가 들어있을 리 없다. 창문으로 향했을 거라는 사실을 짐작하고 있었을 테니까. 나는 소스통을 이리저리 살펴보다가 그냥 식사를 하고, 얌전히 통은 테이블 위에 올려뒀다.
“뭐야.”
씻고 잠을 자고 있는데, 아침에 노크 소리가 들렸다.”
“아직 주무세요?”
클로에의 목소리다. 나는 고개를 갸웃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었다. 문 너머에는 퀭한 눈을 하고 있는 클로에가 서류 뭉치를 들고 있었다.
“다행이다.”
그렇게 중얼거린 클로에가 내 쪽으로 서류 더미를 내밀었다.
“갑자기 이건 뭔데.”
내 말에 클로에가 침을 삼키고 대답했다.
“서류에서 손실된 부분, 정리했어요. 그, 마틴 님의 기억을 의심하는 건 아니지만 이런 건 빠를수록 좋잖아요? 그리고 이건, 부탁하셨던 마차의 운행 내역이에요. 최근 2주 정도만 조사했는데, 더 예전도 조사해볼까요?”
나는 받아든 서류를 훑어보며 대답했다.
“마차는 2주 정도의 행적을 조사했으면 충분해. 어차피 올리비에 황녀가 온 이후로부터의 기록을 살펴볼 생각이었으니까.”
그나저나, 딱 봐도 이거 때문에 밤을 홀딱 넘겨버린 모양인데. 아마 밤중에 엔리코의 저택에 다녀온 거겠지.
“이거 하느라 잠을 못 자서 피곤하다는 말을 할 생각은 아니지?”
“그럴 생각 없어요. 밤새우는 건 어느 정도 익숙해졌고.”
나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지나가는 하인을 불러 차 두 잔을 부탁했다.
“시간이 걸릴 테니까, 잠깐 졸고 있어. 애썼다.”
말을 마친 나는 클로에의 앞에 커피를 한 잔 놓아두고 곧바로 책상에 앉아 서류를 확인하고, 기억나는 부분들을 종이 위에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시간이 좀 지나서 슬쩍 클로에 쪽을 바라보니 꾸벅꾸벅 졸고 있다. 다시 일을 하다가 보니, 아예 소파에 쓰러진 채 기절해있다.
“피곤이라기보다는.”
심적 부담이 심했던 거겠지. 어차피 오늘 하루는 꼬박 여기에 시간을 투자해야 할 것 같으니 따로 어딜 나갈 생각도 없고.
“그래도 손은 안 아파서 좋네.”
써야 할 내용이 하도 많다 보니 마력을 돌려가며 펜을 움직이고 있었다. 점심이 지나자 소파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깬 모양이다.
“아.”
“아. 같은 소리 하네. 일어났으면 지나가는 하인 시켜서 식사 좀 넣어달라고 해. 포크랑 나이프 필요한 거 말고, 다른 걸로.”
“네, 그럴게요.”
내 말에 클로에가 자리에서 팍 하고 일어나더니 문을 열고 지나가는 하인에게 식사를 부탁했다. 칠면조를 넣은 샌드위치와 레모네이드 같은 것들이었다.
“뭐, 제가 도와드릴 건…….”
“서류 내용 중에 기억나는 거 있어?”
내 말에 클로에가 입을 다물었다.
“어차피 앞으로 한동안 이거랑 씨름해야 하니까, 너는 돌아가서 쉬고 있어.”
딱히 도와줄 일이 없다. 내 말에 클로에가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여기 있을 테니까 심부름이라도 시켜주세요.”
“그럼 그래라.”
나는 일은 억지로 시키지만, 억지로 쉬게 하지는 않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