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드우드-119화 (119/275)

119화

창밖으로 해가 저물고 있었다. 나는 기억력을 쥐어짜 서류를 복원하기 시작한 다음 방 밖으로 나가지 않은 채 약 3일 동안이나 창밖으로 저무는 해를 바라봐야 했다.

마침내, 3일간의 노력이 결실을 보았다. 나는 머리를 벅벅 긁고는 중얼거렸다.

“이야, 이제는 때려죽여도 더 못 뽑아내겠다.”

이게 한계다. 더는 쥐어짜도 나오지 않는다. 마른걸레도 쥐어짜면 물 한 방울은 나온다고 하지만 나는 그 한 방울까지 남김없이 짜낸 상황이다. 쌓여있는 서류를 멍하니 바라보던 나는 다 식은 커피를 한 모금 마신 다음 클로에를 바라봤다.

“이거, 다시 엔리코에게 전달해줘.”

“네, 이번에는 실수하지 않을게요.”

클로에는 서류를 챙긴 다음 꽤 살벌한 눈을 한 채 밖으로 나갔다. 지금 누가 클로에를 습격한다면 그 인간은 최소 사망이라고 봐야겠는데.

일을 마치고 나서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노크 소리가 들렸다.

“누구야.”

“저에요!”

클로에의 목소리다. 하지만, 뭔가 굉장히 급해 보인다. 불길함을 느낀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었다.

“무슨 일인데 표정이 그래.”

클로에의 표정이 좋지 않다.

“설마, 또 서류가 털린 건 아니겠지.”

내 말에 클로에가 침을 삼키고 대답했다.

“그런 건 아니에요. 하지만 그것보다 더 심각해요.”

말을 마친 클로에가 잠깐 심호흡을 한 다음 입을 열었다.

“루크 발리아노가 독극물에 중독된 모양이에요. 목숨이 위태롭다고……!”

나는 그 말에 움찔하고는 얼굴을 구겼다.

“이런 씨팔.”

누가 그런 일을 저질렀는지는 안 봐도 알 수 있다. 우리는 루크 발리아노를 죽이고 그 유산을 엔리코를 비롯한 상인연합에 소속되지 않은 상인들이 갈라 먹게 할 생각이었다.

그리고 이 작전의 가장 큰 장점 중 하나가 바로 작업을 시작하기 위한 타이밍을 우리가 잡을 수 있다는 점이었는데.

“엔리코의 저택으로!”

마차에 오른 나는 곧바로 마부를 향해 외쳤다. 마차가 굴러가기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엔리코의 저택에 도착할 수 있었다.

“오셨습니까.”

엔리코의 말에 나는 곧바로 대답했다.

“루크 발리아노가 중독되었다지요.”

내 말에 엔리코가 어두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이렇게 일이 될 줄은 몰랐습니다.”

빠르게 머리를 굴려야 한다. 루크 발리아노가 바로 죽지는 않겠지만, 결과적으로 죽게 되는 건 기정사실이다. 올리비에가 그냥 놔둘 리가 없다.

“괜찮아요. 당황하지 마시고.”

나는 차분한 어조로 엔리코를 진정시킨 다음 말을 이었다.

“루크 발리아노가 중태에 빠졌다면, 엔리코 씨가 함께할 사람들을 끌어모으는 일은 탄력을 받을 수 있어요.”

쌩쌩하게 살아있는 사람의 유산을 갈라 먹자는 이야기는 사람들을 설득하기 어렵지만, 중태에 빠진 사람의 유산을 갈라 먹자는 식의 이야기는 별다른 노력을 하지 않아도 상인들의 구미를 끄는 제안이다.

“네, 그 점은 확실히 그렇군요.”

문제는, 우리는 준비가 되지 않은 상황이고, 올리비에는 이미 어느 정도 준비를 마친 상황이라는 점이다. 엔리코가 사람들을 최대한 빨리 모아야 한다.

“이걸로 끝이 아닐 텐데.”

올리비에가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한 거다. 뭘 준비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고작 루크 발리아노를 자기 손으로 죽여 우리에게서 타이밍을 선택할 권한을 빼앗는 것 정도로는 그치지 않을 거다.

“마틴 레드우드 님 되십니까? 여기로 향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나는 그 말에 시선을 뒤쪽으로 돌렸다. 거기에는, 테네스 공국의 경비병들이 서 있었다.

“뭐지? 지금 좀 바쁜데.”

내 말에 경비병 중 대장으로 보이는 자가 대답했다.

“루크 발리아노가 독극물에 중독되었습니다.”

나도 이야기를 들어서 알고 있는 내용이다.

“죄송하지만, 루크 발리아노와 가장 최근에 대화를 나눈 것으로 파악된 분이 마틴 레드우드 님입니다.”

나는 그 말에 대놓고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서 뭐. 내가 루크 발리아노를 독살이라도 했다는 건가?”

내 말에 경비병의 대장이 움찔했다.

“그런 건 아닙니다. 다만, 루크 발리아노의 중독 사건에 대한 조사를 위해서는, 최근 그가 만난 사람들을 조사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어디까지나 참고인 자격이니 잠시만 시간을 내주신다면…….”

나는 그 말에 하늘을 잠깐 바라보다가 발로 땅을 한 번 강하게 찼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바닥의 포장재에 금이 쩍쩍 가고, 진동이 퍼진다.

루크 발리아노와 내가 만난 건 며칠 전이다. 근데, 상인인 루크 발리아노가 그날 이후로 사람을 전혀 만나지 않았다고? 올리비에가 지시를 했다는 뜻이다.

이건 거부할 수 없다. 이 상황에서 조사받기를 거부하는 건 너무 수상해 보일 뿐 아니라, 나는 외국인이니까. 내가 루크 발리아노의 독살 건으로 의심받게 된다면 파이크 왕국과 세자의 입장도 난처해진다.

올리비에가 루크 발리아노를 죽이려는 건, 우리에게서 타이밍을 빼앗기 위한 것만이 아니었다.

아니, 애초에 루크 발리아노의 재산을 누군가에게 먹이고 그 녀석을 루크 발리아노의 대용품으로 쓸 생각도 없었던 거야.

“협조해주신다면 최대한 빠른 시간 안에 조사를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나는 그 말에 바닥에 침을 뱉고 나서 대답했다.

“알았어. 서두르지.”

내 말에 경비병 대장이 고개를 끄덕이고 경례를 한다.

“협조에 감사드립니다. 그럼, 경비대 본부까지 모시겠습니다.”

“클로에, 너는 돌아가서…….”

내가 말을 이으려고 하자 곧바로 경비대 대장이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죄송하지만, 루크 발리아노와 만날 당시, 클로에 로니세라 경도 동행한 걸로 알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클로에도 같이 조사를 받아야 하는 상황인 모양이다.

“얼마나 걸릴 것 같은지, 구체적으로 시간을 말해.”

내 말에 경비대 대장이 잠깐 침묵한 채 내 눈치를 보다가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오래 걸리지는 않습니다. 한두 시간 정도면 충분합니다.”

한두 시간이 오래 걸리는 게 아니라고? 나는 그 말에 얼굴을 구긴 채 대답했다.

“한 시간, 무조건 그 안에 끝냈으면 좋겠는데.”

“노력해보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마틴 레드우드 님의 적극적인 협조가 요구됩니다.”

나는 그 말에 으아! 하는 소리를 내고는 녀석들 쪽으로 다가갔다.

“알아먹었으니, 서둘러.”

결국 나와 클로에는 마차를 타고 꼼짝없이 경비대 본부로 향했다. 마차가 움직이는 동안, 나는 입을 다물고 가만히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이후로 무슨 일이 일어날까. 올리비에가 일부러 루크 발리아노를 죽여가면서 나를 경비대 본부에 붙들어 놓은 건 이유가 있을 텐데.

경비대의 조사 자체는 그렇게 대단할 거 없었다. 주로 그 이후 내 행적에 대한 것들을 물어보는 형식이었다. 당연히 루크 발리아노의 독살은 나와 관련이 없었기 때문에 나에게는 충분한 알리바이가 있었다.

심지어 내가 했던 일인 상인연합의 건물 털이도 내가 마차를 타고 연빈관으로 돌아갔다는 식의 알리바이를 만들어 놓을 정도인데, 하지도 않은 일에 대한 알리바이를 증명하는 건 그렇게까지 어렵지 않았다.

“더 필요한 거 있나?”

경비대장은 잠깐 나를 바라보다가 서류를 한 번 점검하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간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조사 결과, 혐의는 없는 것으로 판단됩니다.”

나는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슬쩍 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갔다. 밖으로 나오니 클로에가 나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서둘러. 연빈관에서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났을 거야.”

그리고 그게 뭔지, 나는 아직 모른다. 나와 클로에는 서둘러 연빈관에 도착했다.

“엘렌 리버플로우 양이 자신의 방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연빈관에 도착하자, 곧바로 입구를 지키는 병사 중 하나가 나에게 말을 전달했다.

“알았다. 바로 가지.”

나는 연빈관의 엘렌이 머무르는 곳으로 향했다.

“마틴.”

엘렌의 표정이 엄청나게 안 좋다.

“무슨 일이야.”

내 말에 엘렌이 잠깐 머뭇거리다가 편지 한 장을 나에게 내밀었다.

친애하는 마틴 레드우드에게.

지식? 은혜? 아니면 자존심?

선택지는 세 개, 포기해야 하는 건 단 하나. 제한 시간은 경비대에서 풀려난 이후 1시간.

어머니는 글림하트 남쪽 외곽에 위치한 풍차에 있어. 아름다우신 분이지. 정해진 시간이 되어도 오지 않는다면 무슨 일을 당할 것 같아?

구하고 싶다면 세 명이 함께 와. 세 명 중 하나라도 저택에 남아있다면…….

냉혹한 아들의 선택 때문에 어머니는 죽어도 잊지 못할 추억을 가진 채 시체로 발견될 거야.

머무르거나 달려가거나. 두 가지 모두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연빈관 지붕 위에 백기를 걸어두고, 혼자서 북쪽의 창고로 오면 될 거야.

언제나 너의 건강을 빌며.

자색이 보냄.

ps. 먼저 보게 되는 엘렌 리버플로우 양은, 다른 사람에게 이 편지를 전달할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아. 난 경고했어.

필체는 올리비에의 것이 아니다. 꾸며낸 거겠지. 하지만 그 여자가 이 지랄을 해놓았다는 건 분명하다. 옆에서 곁눈질로 편지를 읽은 클로에가 얼굴을 굳히고 레이피어를 뽑아 들고 문 쪽으로 향했다.

“하지 마.”

내 말에 클로에가 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그 황녀……!”

클로에는 지금 당장 올리비에의 거처로 달려가서 검을 박아넣을 기세였다.

“영양가도 없고, 파이크 왕국에도 악영향을 줄 거야.”

자색이 올리비에다. 그건 여기에 있는 사람들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다. 하지만, 여기에 있는 사람들을 제외하면 모르고 있다.

“그럼, 일을 저지른 다음 밝히면 되잖아요. 극단적이긴 하지만……!”

클로에의 말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레티시아라는 시녀의 말에 따라 꼭두각시처럼 움직이는 황녀가 제국과 왕국, 나아가 공국에까지 영향력을 발휘하는 비밀 조직의 수장이라는 사실을 밝히자고? 믿는 사람이 거의 없을걸.”

오히려, 베로나 제국의 황녀를 죽여 놓고 파이크 왕국에서 비겁하게 핑계를 댄다는 식으로 나오겠지.

“파이크 왕국은 지금 제국과의 전쟁을 수행할 수 없어. 명분도 부족하고, 쿠르스트 산맥과 그린모스 늪지대에서 일어난 사태 때문에 동원할 수 있는 병력들 중 상당수가 지친 상황이야.”

그 말에 클로에가 몸을 한 번 부르르 떨었다.

“세 명이에요. 게다가 세자 저하에게 이 이야기를 전달하지도 말라고 했으니…….”

즉, 로델린을 구하기 위해 연빈관을 떠나는 순간 올리비에가 엘렌의 방 안에 있는 책을 보게 되는 건 기정사실이 된다.

“다른 선택지를 위해 저택 위에 백기를 올리고 글림하트의 북쪽 외곽으로 가는 건 어때.”

“그걸 선택하면 다 끝장이야.”

올리비에는 나에게 개목걸이를 채우겠지. 물론 그걸로 끝나는 건 아닐 거다. 최소한 알몸으로 기어 다니다가 한 다리 들고 오줌 정도는 싸게 하지 않을까?

사실 그건 문제가 아니다. 한순간 받게 되는 수치 같은 건 아무래도 좋다. 몇 번이고 할 수 있다.

문제는, 내가 북으로 가는 순간 올리비에는 나에게서 흥미가 떨어져 나간다. 그 후에는 나를 망가뜨리며 잠깐의 즐거움을 얻으려 들 것이라는 점이다.

내가 북으로 향한다면 로델린은 죽지는 않겠지만, 무사하지는 않을 거다.

수치심을 무릅쓰고 시키는 걸 다 한 다음 남쪽으로 가봤더니, 로델린은 이미 차마 말로 꺼낼 수 없는 모진 일들을 당하고 폐인이 되어있는 그림.

사람 하나 망가뜨리는데 이것보다 쉬운 길이 있을까. 올리비에가 그 기회를 마다할 리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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