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화
잠깐 그 편지를 살펴보던 나는 눈을 감은 채 엘렌에게 질문을 던졌다.
“엘렌, 책의 내용은 다 해석했지?”
내 말에 그녀가 아, 하는 소리를 냈다.
“맞아. 쿠르스트 산맥에 있는 하이랜더의 무덤으로 가는 방법은 찾아냈어.”
좋아, 그럼 충분하다.
우리도 하이랜더의 무덤을 열어젖히는데 필요한 준비가 뭔지 알고 있고, 올리비에도 알고 있다. 우리는 방해하고, 올리비에는 방해를 극복하고 문을 열려고 한다.
올리비에가 책을 읽고 그 내용을 복사하는 데 성공한다고 해도 쿠르스트 산맥에서 2차전을 벌일 수 있다.
결정을 내린 나는 입을 열었다.
“어머니한테 향할 거야. 다만, 조금 있다가.”
* * *
올리비에는 하품을 한 다음 시간을 확인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머니라. 10점 만점에 6점 정도의 선택지네. 합격점이긴 한데, 만점은 못 주겠어.”
질려버릴 정도로 멍청한 선택지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도 실망스러운 결과다. 그나마 그녀가 제시한 세 가지 선택지 중에서는 가장 나은 선택이라는 건 확실하다.
“뭔가 다른 방안을 마련하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뭐, 정이라는 건 어쩔 수 없는 거니까. 그래도 북쪽으로 향하지 않은 게 어디야.”
그건 빵점짜리 선택지였다. 혹여나 해서 넣어본 독약이다. 만에 하나라도 마틴 레드우드가 그 선택지를 골랐다면 그 이후에 올리비에가 할 일은 정해져 있었다.
“어차피 그걸 선택할 거라고는 생각하지도 않았지만.”
마틴 레드우드는 어설프게나마 올리비에의 성정에 대해서 이해하고 있으니까. 북쪽으로 향할 일은 없을 거라고 예상했다.
“2차전을 생각하고 있는 거겠지.”
그것만으로도 다소 실망스럽긴 하지만 다음을 기대해 볼 만하다. 올리비에는 자리에서 일어나 엘렌의 방으로 향했다.
칠색 내각에서 동원한 마법사들은 연빈관 밖에서 엘렌 리버플로우의 마법을 무력화시키는 중이다. 파괴도 아니고 무력화에 스무 명의 마법사가 30분이나 소모할 정도로 철저한 마법이었지만, 그래도 한계는 있는 법이다. 문을 열고 안에 들어간 올리비에가 콧노래를 부르며 주변을 살폈다.
테이블 위에 서류 더미와 함께 올려져 있는, 오래되고 두꺼운 책이 인상 깊다.
“음흠흠.”
올리비에는 콧노래를 부르며 그 책을 무시하고 선반에 올려진 물병을 들고 벽난로로 향했다.
벽난로에 물을 쏟아 넣자, 벽난로에서 타오르던 화염이 꺼진다. 근처에 놓인 쇠꼬챙이로 걸리적거리는 재와 장작을 이리저리 치우자, 벽난로 안에 들어있던 책이 모습을 드러냈다.
“어디 보자.”
올리비에는 그렇게 중얼거리고 손에 들고 있는 물병의 물을 책 위로 쏟아냈다. 치이이익, 하는 소리와 함께 책에 닿은 물이 끓어오른다.
어느 정도 온도가 내려간 걸 확인한 올리비에는 책을 잡아서 재를 털어낸 다음, 책을 펼쳤다.
착착착, 하는 소리와 함께 올리비에가 손에 들린 책의 페이지가 넘어간다.
“끝.”
올리비에는 그렇게 중얼거리고 나서 휙 하고 바닥에 책을 버린 다음 문을 나섰다. 이제 여기에 볼일은 없다.
“지갑을 희생한 건 쬐끔 아쉽지만.”
어차피 파이크 왕국에도 아직 그녀의 지갑은 남아있다. 물론, 동원할 수 있는 자금의 양은 테네스 공국에 있는 지갑이 더 많았지만, 새로운 지갑을 찾아내기 전까지는 아쉬운 대로 파이크 왕국에 있는 지갑을 활용해야지.
“돈을 조금은 아껴 써야겠네.”
다시 자기 방으로 돌아간 올리비에는 은잔을 손에 쥐고 레티시아에게 연락했다.
― 자색, 무슨 일이십니까?
레티시아의 목소리를 확인한 올리비에가 변조된 목소리로 대답했다.
“로델린은 풍차 안에 묶은 채 방치해두고, 미리 내정한 경로를 따라 즉시 철수하도록. 복귀하는 대로 올리비에 황녀를 설득해서 밤중으로 제국으로 돌아가라. 여기에서 볼일은 끝났다.”
― 목표를 달성하신 모양이군요. 축하드립니다. 지시는 바로 이행하겠습니다.
축하는 무슨, 올리비에는 다시 은잔을 집어넣은 다음, 얼굴이나 옷에 엉겨 붙은 재를 깨끗하게 털어낸 다음 잠옷으로 갈아입고 침대에 누워 눈을 감았다.
* * *
1시간이 지나기 전에 도착한 풍차 안에는, 묶여있는 로델린이 방치되어 있었다.
“주변에 사람은 없는 것 같아요.”
그렇겠지. 우리가 출발한 것을 확인하자마자 여기에서 로델린을 지키고 있던 녀석들을 철수시켰을 것이다. 어차피 목적 자체가 책을 읽을 시간을 벌기 위함이었을 테니까. 쓸데없이 싸워서 가용한 부하들의 숫자를 줄일 생각은 없었을 거다.
우리가 도착하자, 로델린이 으읍, 하는 소리를 내고 몸부림을 친다.
“어머니.”
나는 빠르게 다가가서 그녀를 묶고 있던 밧줄과 재갈을 풀어주었다. 곧바로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 로델린을 안은 채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괜찮아요. 어머니 탓 아닙니다.”
내 말에도 불구하고 로델린이 눈물을 흘리는지 어깨가 젖기 시작한다.
“내가, 네가 경비대에 구속되어 끌려갔다는 소식에 당황하지만 않았어도…….”
나는 그 말에 대답했다.
“진정하세요.”
나는 로델린을 안은 채 울음이 어느 정도 진정될 때까지 기다렸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내가 경비대 본부로 갔다는 이야기를 듣고 불안해하던 참에 경비대 소속이라고 밝힌 자들이 로델린을 찾아왔다고 한다.
“네가 무사히 풀려나기 위해서는 당시 네가 뭘 하고 있었는지 증명해야 하는데, 네가 경비대에서 나와 함께 있었다는 주장을 했다고…….”
그걸 증명하기 위해서는 로델린의 진술이 필요하다. 따라서 우리와 함께 가줘야겠다. 뭐 그런 식의 이야기를 한 모양이다.
로델린으로서는 무시할 수가 없었겠지. 자식을 둔 부모 심리를 참 잘도 후비고 들어간 셈이다.
이야기를 들으며 로델린의 긴장과 패닉을 풀어주고 있으려니, 밖을 바라보고 있던 클로에가 입을 열었다.
“병사들이 오고 있어요. 왕국 호위병으로 보이는데…….”
세자가 뒤늦게 상황을 알아채고 병사들과 함께 온 모양이다. 나는 로델린의 등을 몇 번 두들기고 나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틴 레드우드, 거기 있느냐!”
다급해 보이는 세자의 목소리에 나는 풍차에서 나왔다. 곧바로 말에서 내린 세자가 내 쪽으로 다가왔다.
“레드우드 부인은?”
“무사합니다.”
내 말에 세자가 후우, 하고 숨을 내쉰 다음 나를 바라봤다.
“그 황년이 제국으로 돌아가는 중이다.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하고 혹시나 싶어 엘렌 리버플로우의 거처에 찾아가 봤는데…….”
세자의 손에는 구겨진 편지가 쥐어져 있었다. 저 편지를 읽자마자 대충 상황을 파악하는 데 성공했던 모양이다.
“필요로 하는 걸 얻었으니까요. 자세한 이야기는 풍차 안에서 나누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내 말에 세자가 고개를 끄덕이고 함께 풍차 안으로 향했다. 안에 들어온 세자는 고개를 들어 올려 천장을 바라보다 주먹을 꽉 쥐었다.
“그 망할 년이 기어이 이겨 먹고 말았군. 필요한 건 다 얻어서 돌아갔어. 아무래도 한 방 먹은 것 같은데. 그 여자가 결국 우리를 이겨 먹었어.”
나는 그 말에 음, 하는 소리를 냈다.
“사실, 꼭 그런 건 아닙니다. 한 방 먹기는 했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비긴 게 아닐까 싶습니다.”
올리비에가 이긴 건 아니다. 내 말을 들은 세자가 눈썹을 찌푸리고 나를 바라봤다.
“그래, 테네스 공국에 머무르던 칠색 내각의 머리 중 하나는 중태에 빠졌지. 하지만, 그건 네가 한 일이 아니다.”
나는 그 말에 목소리를 낮추고 조용한 어조로 말했다.
“그건 저도 알고 있습니다. 저는 그것 때문에 비겼다 말한 것이 아닙니다.”
내 말을 들은 세자가 덩달아 목소리를 낮췄다.
“더 자세히 말해봐라. 무슨 뜻이냐.”
후우, 하고 숨을 내쉰 나는 물을 한 모금 마셨다. 그사이 내 이야기를 들은 클로에와 로델린, 엘렌이 근처로 다가왔다.
“라하둔 꽃의 암술은 지금이 채취 시기입니다. 올리비에가 무슨 의도를 가지고 그 꽃의 암술을 채취하고 있는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만, 팔아넘기지 않는 걸 보면 생각해둔 계획에서 꽤 중요한 역할을 하는 모양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내 말에 클로에가 아, 하는 소리를 내고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이즈음이 채취 기간이라고 알고 있어요. 그리고,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첩보국장에게 편지를 전달하라고 하셨죠.”
나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재배하는 섬이 어딘지 알고 있으니, 첩보국장에게 말해서 그 섬을 감시하라고 부탁했습니다. 꽃의 암술을 싣고 있는 배를 찾아내고, 그 뒤를 추격한다면 결국 라하둔 꽃의 암술을 쌓아둔 장소를 알 수 있겠죠.”
올리비에는 눈치채지 못했다. 알아차렸다면 이런 식으로 팍 하고 일을 진행할 수 없었을 거다.
라하둔 꽃 암술의 수송에도 신경을 써야 했을 테니까. 계획을 준비해 두었다고 해도 이렇게 빠르게 진행하지는 않았을 거다.
내 집에 불이 났다는 사실을 알고도 남의 집에 불을 내는 데 치중할 수는 없는 법이잖아?
그런데도 불구하고 나를 이기는 데 치중했다는 건, 첩보국장에게 내가 부탁한 내용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있다는 뜻이다.
“심지어, 루크 발리아노를 버리기까지 했어.”
내가 라하둔의 꽃술을 수송하는 배를 노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루크 발리아노를 버리는 선택은 할 수 없었을 거다.
첩보국에서 분명히 좋은 결과를 가져다줄 것이다.
“라하둔 꽃의 암술을 모아둔 장소의 위치를 알아내고 그 장소에 쌓여있는 암술을 다 태워버린다면…….”
내 말에 세자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년, 뒤통수에 벼락이 떨어진 기분이겠군. 자네 말대로야. 그렇다면 비긴 셈이지.”
“왕도에 도착하면 첩보국장에게 더 자세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올리비에 황녀도, 황도에 도착할 즈음이 되면 아마 소식을 들을 수 있지 않을까.
“표정을 못 봐서 아쉬울 따름입니다.”
그 여자가 어벙벙한 표정을 짓는 건 좀처럼 보기 힘들 것 같은데 말이야. 나는 주변을 둘러보다가 로델린을 보고 희미하게 웃었다.
올리비에 황녀도 황도로 돌아가는 길을 서둘렀고, 이제 테네스 공국에서 해야 할 일은 거의 없다.
그 여자가 테네스 공국을 떠난 지금, 그 일을 돕는 건 그렇게 어려울 것도 없지.
“이런 일에 말려들게 해서 죄송합니다. 어머니.”
내 말을 듣고 있던 클로에가 잠깐 눈알을 이리저리 굴리다가 질문을 던졌다.
“하지만, 처음에 루크 발리아노가 중독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굉장히 화를 내셨잖아요.”
나는 클로에의 말에 대답했다.
“그럼 거기에서 좋았어! 라고 외칠까?”
대놓고 다른 개수작을 피우고 있다는 걸 알려주는 꼴인데, 그럴 수는 없지. 게다가 실제로 화가 날 만한 상황이기도 했다.
“게다가, 어쩌면 완전히 내가 이길 수 있었는데 결국 비겨버린 꼴이잖아.”
무지하게 아쉽지. 축구로 치면 2 대 0으로 이길 상황에서 상대가 갑자기 두 골을 연속으로 넣어서 비겨버린 건데, 안 억울한 사람이 어디 있냐.
아니면 돈으로 비유하는 게 좋을까. 투자한 주식이 올랐길래 이득을 남길 생각에 두근두근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팍 주가가 떨어져서 본전치기하면 기분이 더럽잖아.
지금 딱 그런 느낌이네.
“황녀가 돌아갔는데도 우리가 여기에 남아있으면, 그녀가 수상하게 생각하지 않을까?”
엘렌의 질문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올리비에는 우리가 패배했다고 생각할 테니까. 여기에 머무르면서 최대한 건질 걸 건지는 모습을 보여주는 게 좋아.”
루크 발리아노의 사업을 엔리코가 인수하는 데 도움을 주고 돌아가야 오히려 의심을 받지 않는다.
“하지만, 엔리코는 준비가 제대로 되지 않은 상황이에요.”
클로에의 말에 나는 어깨를 한 번 으쓱했다.
“괜찮아. 올리비에가 통제하지 않는 상황이라면 상인연합이 루크 발리아노의 유산에서 손을 떼게 하는 건 그렇게 어렵지도 않을 테니.”
간만에 건달 놀이 한번 해볼까.
“클로에는 연빈관에 돌아가면 상인연합에 소속된 상인들 중 주머니 굵직한 녀석들을 좀 추려줘.”
일단, 이걸로 테네스 공국에서 올리비에와의 격돌은 일단락된 것 같다.
협박은 별로 취향이 아니지만, 지금은 어쩔 수 없는 노릇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