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화
상인연합에 소속된 바스티오는 오늘도 즐거운 하루를 마치고, 평안한 마음으로 침실로 향하는 중이었다. 그의 지갑에는 돈이 많다. 단지 쌓여있는 돈이 많은 게 아니라, 이 무거운 지갑 안으로는 계속해서 돈이 들어오고 있었다.
그리고, 앞으로 더 많이 들어올 예정이었다.
“루크 발리아노 그 대머리 자식. 죽어서도 돈주머니를 싸 들고 갈 것처럼 굴더니만 결국 그렇게 끝나버리는 군 그래.”
남은 건 산 자들이 알아서 뜯어먹을 것이다. 물론, 공짜로 먹어치울 수는 없다. 그래도 녀석에게는 유족이 있으니까. 적당한 수준의 값을 치러준다고 하면 남편을 먼저 떠나보낸 루크 발리아노의 아내는 순순히 자기 남편의 사업기반들을 팔아넘길 것이다.
눈앞의 보석이 앞으로 굴러들어올 돈보다 더 중요한 여자니까.
“그나저나, 갑자기 이렇게 될 줄은 몰랐는데.”
바스티오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상인연합에서 루크 발리아노의 유산을 나눠 먹기로 합의한 녀석들 중 몇 명이 갑자기 사업 인수를 포기했다. 덕분에 남은 사람들이 나눠 먹을 몫이 늘었다.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그에게 이득이 되는 일이기에 왜 갑자기 인수를 포기한 건지 물어보지는 않았다.
“즐겁나?”
침실을 열고 들어가 콧노래를 부르던 바스티오는 그 목소리에 움찔했다.
“누…….”
턱, 하고 입이 막힌다. 후드를 뒤집어쓰고 가면을 쓴 누군가가 바스티오 앞으로 가면을 들이민 채 중얼거렸다.
“쉬이.”
목에 닿는 섬뜩한 날붙이의 느낌, 곧바로 버둥거리던 바스티오의 몸이 그대로 딱 멈췄다.
“조용히 할 거라고 믿어. 시끄럽게 굴면 내가 조용하도록 만들 테니까.”
가면을 쓴 자는 그런 말과 함께 바스티오의 입을 막고 있던 손을 풀었다.
“누, 누구시오.”
“행복의 전도사.”
가면을 쓴 자의 말에 바스티오의 표정이 순간적으로 멍해졌다. 행복의 전도사라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행복은 만족으로부터 온다지. 만족은 지금 있는 것에 감사하는 마음에서 비롯되고.”
그런 중얼거림과 함께 가면을 쓴 자는 다시 남자의 입을 틀어막고 바스티오의 어깨를 다른 손으로 꽉 눌렀다.
어깨를 타고 전해지는 지독한 격통에 바스티오는 으읍, 으읍 하는 소리를 내며 하얗게 질린 표정으로 진땀을 줄줄 흘리기 시작한다.
5분 정도 그러고 있었을까, 가면을 쓴 자는 어깨를 붙잡고 있던 손에서 힘을 풀고 바스티오의 얼굴을 이리저리 훑어보다가 날이 시퍼렇게 선 단검으로 바스티오의 뺨을 톡톡 건드리기 시작한다.
“내가 가만히 보아하니 네 녀석의 머리에는 탐욕이 가득하구나. 지금 가진 걸로는 부족해서 루크 발리아노의 유산까지 탐낸다지?”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바스티오의 머리 바로 옆에 단검이 박혔다. 바닥으로 떨어지는 몇 가닥의 머리카락.
가면을 쓴 자의 말을 들은 바스티오의 눈에 눈물이 맺히고, 지려버린 오줌으로 인해 바지가 젖는다.
“그렇게 위로 아래로 질질 싸면 목마르지 않아?”
가면을 쓴 남자는 그렇게 중얼거리고 나서 입을 틀어막은 손을 놓았다. 바스티오의 입에서 허으윽, 하는 소리가 흘러나오고, 다리에 힘이 풀려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는다.
“길게 이야기하지 않겠어. 루크 발리아노의 사업에서 손 떼도록.”
가면을 쓴 남자는 말을 마치고 나서 바스티오를 향해 단검을 마구 던지기 시작했다.
바스티오는 시퍼렇게 질린 표정으로 비명도 제대로 지르지 못한 채 눈을 감고 히익, 히이 하는 소리만 낼 뿐이었다.
“흐으으윽.”
벽에 칼날이 박히는 소리가 잦아들고 나자, 남아있는 건 축축한 바지,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과 덜덜 떨리는 몸.
그리고 바스티오의 몸 근처에 빼곡하게 박혀있는 단검들뿐이었다.
* * *
휙, 하고 연빈관의 창문으로 들어오자 엘렌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일은 잘 풀렸어?”
나는 엘렌의 말에 얼굴에 뒤집어쓰고 있던 가면을 벗어 테이블 위에 올려두며 대답했다.
“뭐, 이 정도면 엔리코와 그 친구들이 뜯어먹을 몫이 제법 있을 거야. 여기에서 멈추고 돌아갈 준비를 하면 딱 좋을 것 같은데.”
내 말에 엘렌이 의외라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여기서 멈춘다고? 계속할 줄 알았는데. 제법 효과가 좋았잖아.”
“이 정도면 충분해. 더 하면 녀석들도 반발하기 시작할 테고, 그러다간 단순한 욕심 때문에 일이 너무 커질 수도 있어.”
전부 챙길 수는 없겠지만, 루크 발리아노의 유산 중 4-5할 정도는 엔리코의 손에 쥐여 줄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그 정도면 충분하다.
“우리는 쿠르스트 산맥으로 향해야 하잖아.”
올리비에가 책의 내용을 알게 되었다. 물론 황도로 돌아가 머릿속에 있는 내용을 다시 책으로 옮기고, 안티온 대도서관에서 내용을 해석하는 데에는 시간이 필요하겠지.
하지만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것이다. 결국 우리는 다시 한번 쿠르스트 산맥으로 향해야 한다.
내 말에 엘렌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머리를 한 번 쓸어넘겼다.
“다시 돌아가게 되다니, 그리운 얼굴이 제법 있겠네.”
나는 그 말에 음, 하는 소리를 내고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런 편이지.”
어떻게 보면 내가 이 세상에 떨어지고 나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 장소라고 할 수 있다. 레드우드 백작가의 영주성보다는 쿠르스트 산맥의 제7수색대가 더 고향이라는 뜻에 가깝지 않을까.
“이제 겨울도 얼마 남지 않았네. 한동안 날씨가 풀렸다가 추웠다가를 반복할 텐데, 쿠르스트 산맥은 어떠려나.”
나는 그 말에 픽 웃었다.
“더럽게 춥겠지 뭐.”
가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날씨가 따뜻해지는 건 이런 곳에서나 통용되는 이야기다.
“가면 대접은 기가 막히게 잘 받을걸.”
내 말에 엘렌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이랜더의 습격을 막아내고, 황도로 가서 폐하께 간청드려 부족한 식량까지 지원해줬으니까.”
왕도에서도 제법 영웅 취급을 받긴 했지만, 쿠르스트 산맥에 가면 사람들이 몰려나와서 꽃 같은 걸 뿌리면서 반길지도 모른다.
“마틴 님, 안에 계세요?”
노크 소리와 함께 들린 클로에의 목소리.
“들어와.”
문을 열고 들어온 클로에가 엘렌을 보고는 아, 하는 소리를 냈다.
“두 분이 이 야심한 밤에 뭘 하고 계셨을까요?”
엘렌이 그런 클로에를 보고 애매한 표정을 지었다.
“꼭 뭘 해야 하는 건 아니잖아요.”
클로에가 엘렌의 말에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냥 인사말 같은 거였어요.”
“돈은?”
상인연합에서 받은 돈은 그대로 엔리코에게 전달하라고 부탁한 참이었다.
“네, 무사히 전달했어요. 사업 인수에 큰 영향을 줄 정도의 거금은 아니지만, 마틴 님이 도움을 주신 건 단지 자금 지원뿐이 아니잖아요? 발생하는 순수익의 40% 정도는 마틴 님을 위해 보존해 둘 생각인가 봐요.”
순수익이라. 그럼 엔리코의 주머니 안으로 들어갈 예정인 돈의 40%가 나에게 들어온다는 뜻이다. 뭘 또 그렇게까지나 신경을 써주고 그럴까.
“물론, 그 이외에도 꼭 필요한 순간이 있다면 사업에 지장이 가지 않는 범위 안에서의 자금 지원도 약속했고요.”
그 정도면 충분하다. 나는 올리비에처럼 대형 조직을 굴리고 있는 게 아니니까. 필요한 자금도 많지 않다.
“좋아, 이걸로 정말 해야 할 일은 다 끝난 것 같으니까. 내일 하루 쉰 다음, 모레부터는 왕도로 돌아갈 준비를 해보자고.”
로델린에게 미리 말했던 것처럼, 내일 하루 정도는 함께 쉬면서 보내도 될 것 같다.
이야기를 나누고 있으려니 노크 소리가 들렸다.
“세자 저하십니다.”
뭐야, 오늘 내 방에 꿀이라도 발라 둔 건가. 왜 갑자기 이렇게 사람들이 모이는 거지. 문이 열리고 세자가 들어오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있는 우리를 바라보고 멈칫했다.
“남자 하나에 여자 둘이 이 시간에 한 방에 있다니. 혹시, 내가 좋은 시간을 보내려는 순간 방해한 건가?”
“아닙니다.”
좋은 시간 같은 소리 하네. 세자에게 자리를 내주자. 그가 소파에 앉으며 말했다.
“테네스 공국으로 온 일은 어느 정도 마무리가 된 모양이군. 제국 쪽에서 연락이 왔어. 혼사 이야기는 없던 걸로 하자는 말이었지.”
“그럼, 공물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원래 세자와 올리비에의 혼사 건 때문에 면제되었던 공물이다. 혼사 건이 취소되었다면 당연히 공물에 대한 의논이 오갈 수밖에 없다. 내 말에 세자가 한숨을 쉬었다.
“왕국의 외교대신들이 기를 쓰고 노력하는 중이야. 우리가 취소한 게 아니고, 저쪽에서 취소 의사를 밝혔으니 아마 공물의 양을 대폭 줄이는 방향으로 가닥이 잡힐 것 같은데.”
말을 마친 세자가 기지개를 한 번 켜고 나를 바라봤다.
“그것만 해도 어디인가.”
그래, 그 정도만 해도 어디야.
“엘렌 리버플로우. 올리비에 황녀가 하이랜더의 무덤을 열어젖히기 위해서는 꽤 까다로운 준비가 필요하다고 들었는데.”
엘렌이 그 말에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다만…….”
엘렌은 그렇게 중얼거리고 나서 고민하나 싶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쿠르스트 산맥의 경우, 왕국뿐 아니라 제국도 국경이 맞닿아 있습니다. 황녀가 무덤을 열 준비를 한다면 아마도 제국이 지키고 있는 쿠르스트 산맥 쪽에서 벌이지 않을까 합니다.”
뭐, 그편이 훨씬 쉽긴 하겠지. 나는 그 말에 고개를 저었다.
“아니. 왕국과 제국 모두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장소를 선택할걸.”
내 말에 세자가 나를 바라봤다.
“확실한가? 올리비에 황녀로서는 그럴 이유가 없어 보이는데.”
“가능성이 굉장히 높은 추측이긴 합니다. 물론, 어디까지나 추측이기 때문에 틀릴 수도 있습니다.”
내 말에 세자가 턱을 쓰다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다. 그 황년이 어떤 선택을 하더라도 파이크 왕국의 영역에서 사건이 일어나지는 않는다는 소리군.”
세자는 턱을 쓰다듬다가 입을 열었다.
“공식적으로 제국과 왕국은 현재 우호 관계를 유지하고 있으니, 제국군과 왕국군 사이의 교전은 발생해서는 안 되는 끔찍한 상황이야.”
나는 그 말에 어깨를 으쓱했다.
“저런, 들키면 안 되니 몰래 해야겠군요.”
내 말에 세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야겠지. 신분을 들킬 수는 없으니 나는 왕도에 머무르겠네. 자네들은…….”
나와 클로에, 엘렌이 쿠르스트 산맥으로 향할 이유를 만드는 건 일도 아닐 것이다.
“적당히 뭐 방벽 보수 작업 확인 및 쿠르스트 산맥 인근 거주 주민 및 병력의 사기 증진을 위한 파견이라는 이유를 가져다 붙이면 될 것 같습니다.”
내 말에 세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머니 같은 경우는…….”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고 세자를 바라봤다. 그는 턱짓으로 내 가슴에 달려 잇는 옥으로 만들어진 열쇠를 가리켰다.
“레드우드 부인에게 잠깐 넘겨주게. 원래는 절대 허락되지 않는 일이지만, 이번 납치 사태 건이 있고 하니…… 그 핑계를 활용해 내 선에서 무마시켜주겠네.”
로델린이 왕궁 안에서 머무르게 된다면 안전은 보장될 것이다. 왕궁, 그것도 왕족만 머물 수 있는 내궁은 다른 흔해 빠진 안전가옥 따위와는 차원이 다르니까.
“배려에 감사합니다.”
“중요한 일이야. 그 황년이 정말로 하이랜더의 무덤을 열어젖히고 죽은 하이랜더를 병사로 쓰게 된다면, 왕국으로서는 그 군세를 막아낼 길이 없으니.”
말을 마친 세자가 내 어깨 위에 손을 올렸다.
“다른 일은 가능한 신경 쓰지 않을 수 있도록 최대한의 배려를 할 테니, 너는 반드시 그 황년이 원하는 것을 손에 넣지 못하도록 최선을 다해라.”
말을 마친 세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향해 걸어가며 말했다.
“많은 일이 있었으니, 하루 정도는 쉬고 왕도로 향할 준비는 모레부터 하는 게 어떻겠나?”
안 그래도 내가 그 말을 하고 싶었는데, 먼저 말해줘서 고맙다.
“감사합니다. 그리하겠습니다.”
세자가 고개를 끄덕이고 문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