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화
편안한 수면은 상쾌한 기상의 시작이자, 안정된 하루를 열기 위한 첫 단추다. 오늘 하루는 하늘에서 운석이 떨어지지 않는 한 푹 쉬기로 결정했다.
테이블 위를 살피던 클로에가 잠깐 입을 헤 벌리고 있다가 한마디 했다.
“갑자기 아침 식사를 다 같이 하자고 하시더니, 오늘은 아침부터 거하게 드실 모양이네요.”
“쉬는 날이니까.”
구운 감자와 빵. 사과잼과 버터. 바삭하게 구운 베이컨과 소시지. 샐러드와 오렌지 주스. 반숙으로 익힌 수란. 커피와 우유.
휴식의 시작은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서 삼시 세끼 제대로 배 터지게 챙겨 먹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세자 저하께서는 오전에는 바쁘신 모양이에요.”
“어쩔 수 없는 노릇이지.”
해야 할 일이 꽤 많을 테니까.
까놓고 말해서 여기에 오고 나서부터 지금까지 세자보다는 우리가 훨씬 더 바빴다. 고로, 우리가 쉴 때 세자가 바쁜 건 어딘지 모르게 속이 시원한 느낌이 있다.
“이게 다 뭐야.”
클로에가 도착하고 난 다음, 로델린과 함께 엘렌이 들어오면서 테이블 위에 차려진 음식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
“밥.”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고 난 다음 로델린을 보며 말했다.
“다 모인 것 같아요, 식사하셔야죠.”
말을 마친 우리는 테이블 앞에 앉았다.
“어쨌든, 쉬는 건 좋다 이거야.”
나는 나이프로 수란의 배를 쪼개고 질질 흘러내리는 노른자에 빵을 찍으며 입을 열었다.
“구체적으로 뭘 하는 게 좋을까.”
내 말에 클로에가 입을 열었다.
“온천은 어떨까요? 포리우스 온천이라는 곳이 글림하트에서 그렇게 멀지 않은 장소에 있다고 들었는데.”
날이 서서히 풀리고 있는 중이라곤 하지만, 아직은 봄이 아니라 늦겨울에 가까운 추위가 감돌고 있다. 온천 가기에는 딱 좋은 날씨긴 한데.
“나쁘지 않은 생각 같은데. 포리우스 온천이라면 왕국에서도 굉장히 유명한 곳이란다.”
그렇게 긍정적인 신호를 보낸 로델린이 이내 난감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회원제로 운영되기 때문에, 지인의 소개 없이는 이용할 수 없을 텐데.”
“엔리코 씨에게 한번 물어보는 건 어때? 나름 친해졌잖아. 원래도 꽤 유명한 상인이었으니까 포리우스 온천 소개 정도는 받을 수 있지 않을까.”
엘렌의 제안이었다. 틀린 말은 아니지. 물론 내가 부지런히 움직인 이유는 엔리코의 이윤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한 일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게 엔리코에게 도움이 되지 않은 건 아니니까.
쪼잔하게 온천 한번 소개해주는 것도 안 해주지는 않겠지.
“그럼 그렇게 할까.”
내 말에 식사를 하던 클로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그런 클로에를 보다가 한숨을 쉬고 말했다.
“기껏해야 온천 가고 싶으니 이름 좀 빌려달라는 거야. 대단한 일 아니잖아. 네가 움직일 필요는 없어.”
그냥 놀러 가고 싶으니 온천에 우리 좀 소개해달라고 하는 것뿐이다. 하인을 시켜도 된다. 내 말을 들은 클로에가 아, 하는 소리를 내고는 머리를 긁었다.
“듣고 보니 그렇네요.”
실수 한 번 하고 나서 사람이 빠릿빠릿해졌다는 건 확실하지만, 지나치게 성실하게 움직이려고 하는 감이 없지 않아 있다.
“나 혼자서 물놀이라니, 너무 처량하잖아.”
여자 셋과 남자 하나가 덜렁 온천을 가버리면 여자 세 명이야 재미있을지 몰라도, 남자 한 명 입장에서는 전혀 재미있지 않다.
“무슨 말이야?”
엘렌의 질문, 그리고 클로에의 의문이 담긴 시선과 로델린의 씁쓸한 웃음. 뭔가 내가 잘못 알고 있는 게 있는 모양이다.
로델린의 이야기를 듣던 나는 이내 아, 하는 소리를 냈다.
테네스의 온천 자체는 남자와 여자가 구분되어 있지만, 온천보다는 애초에 온천 일대의 지열을 이용해 만들어 놓은 토굴에서 땀을 빼는 게 더 유명한 모양이다.
쉽게 말하자면, 온천이라기보다는 찜질방에 더 가까운 물건이다. 맥반석 계란 같은 것도 파나.
“왕국에는 그런 시설이 좀처럼 없는 편이야. 쿠르스트 산맥 안에는 온천수가 나올 정도로 충분히 땅이 뜨거운 곳도 있다고 하지만…….”
나는 그 말에 허허허 웃었다. 찜질하고 싶다고 쿠르스트 산맥을 가는 건, 아랍어를 배우고 싶다고 ISIS에 입단하는 것만큼이나 바보 같은 생각 아닐까.
식사를 마치고 잠시 쉬고 있으려니 하녀 한 명이 다가와서 나에게 편지 한 통을 건네주었다. 봉투는 엔리코의 서명과 함께 밀랍으로 봉인되어있었다.
“엔리코 씨가 말하길, 이 편지를 보여주신다면 만족할 만큼 포리우스 온천의 시설을 이용하실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온천에는 미리 사람을 보내 이야기를 해두겠다고 합니다.”
그 말을 들은 엘렌이 히죽 웃으며 내 등을 한 번 탁 쳤다.
“봐, 내 말이 맞지. 이렇게 된 거 빨리 준비하자.”
오늘 하루를 보낼 장소가 정해지고 나자, 우리는 늘어져 있던 몸을 일으켜 빠르게 필요한 것들을 준비한 다음, 포리우스 온천이 자리 잡은 곳으로 향했다.
“이건 뭐.”
괜히 사람을 가려 받는 걸로 유명한 게 아닌 모양이다. 입구부터 '지갑에 돈이 없으면 꺼져라'라고 말하는 것처럼 으리으리하다. 심지어, 온천의 규모 자체가 거의 산 하나를 통째로 점령하고 있는 수준이다.
그리고 희미하게 코를 타고 전해지는 온천수의 냄새.
“실례합니다. 저희 온천은 처음으로 와주신 분들 같습니다만…… 죄송스럽게도 회원제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입구 앞에 마차가 멈춰서자 입구를 지키고 있던 사람 중 하나가 조심스럽게 다가와서 우리에게 말을 건넸다.
“엔리코 씨의 소개를 받았는데.”
나는 그런 말과 함께 편지를 건네주었다. 내용을 확인한 남자가 아, 하는 소리를 내고 뒤편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 뭐라고 손신호를 보냈다.
“마틴 레드우드 님, 포리우스 온천에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방금 전의 다소 까칠한 것 같은 태도가 사라지고, 그 빈자리를 극도의 친절함이 대신 채운다. 그의 안내를 받아 입구 안으로 걸어 들어간 우리는 어떤 커다란 건물 앞에 멈춰 섰다.
“데이릴리 관입니다. 급하게 준비하느라 미비한 점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혹시라도 머무르시는 데 불편함이 있으시다면 언제든지 건물 안에 있는 줄을 당겨 주시길.”
말을 마친 그는 인사와 함께 돌아갔다.
“잠깐, 이거 하나를 우리가 통째로 쓰는 거였어?”
안에 들어간 나는 일단 사람이 한 명도 없다는 점에 놀랐다. 그렇다고 뭐 있는 게 찜질방 하나만 있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중앙의 커다란 공간에는 커다란 테이블이 놓인 족욕장이 놓여있는데, 온천수가 솟아나고 있었다. 테이블 위에는 족욕 하면서 시간을 보내는 용도로 보드게임 같은 것들이 놓여있다.
벽에는 내부의 온도에 따라 구분된 네 개의 토굴과, 열을 식히기 위해 따로 만들어 놓은 서늘한 토굴이 하나 있고, 남자와 여자가 각자 이용할 수 있도록 마련된 욕장이 있다.
“이 정도면 여기에서 종일 머물러도 질리지 않을 것 같은데.”
“옷부터 갈아입죠.”
우리는 마련된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테이블 앞에 앉아 온천수에 발을 집어넣었다. 아, 장난 아니게 좋네.
“이거 한판 하실래요?”
클로에가 나에게 보여준 보드게임은 당연하게도 내가 모르는 물건이었다.
“규칙을 모르는데.”
내 말에 엘렌이 슬쩍 클로에가 들고 있는 물건을 확인하고는 규칙을 설명해준다. 설명을 들은 나는 속으로 작게 한숨을 쉬었다.
이거, 카탄이라는 보드게임이랑 엄청나게 비슷한데. 이걸 알고 있는 이유는 한국에 있던 어떤 또라이 새끼 하나가 굉장히 좋아하는 게임이었기 때문이다.
“점수를 제일 적게 낸 사람은 제일 뜨거운 토굴에 들어가서 10분 있다가 나오는 걸로 하죠.”
2시간 정도가 지나자, 승부가 갈렸다.
“왜 진 거지?!”
당연하다는 듯이 클로에가 꼴지를 먹었다. 어쩐지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게임을 시작하기 전부터 모두가 어렴풋이 저 끓어오르는 불가마 속으로 들어가게 될 사람이 클로에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흐어어어…….”
10분 뒤, 통째로 삶아진 클로에가 문을 열고 밖으로 걸어 나왔다. 땀범벅이 된 클로에가 이마를 훔친 다음 잠깐 비틀거리다가 그대로 찬물을 쭉 들이켰다. 벌겋게 달아오른 피부와 땀에 젖어 몸에 딱 달라붙은 옷을 보고 있으려니, 매혹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불쌍하다는 생각이 앞선다.
제일 뜨거운 토굴의 온도가 어떤지는 살짝 들어가 봐서 아니까.
“이야, 건강해진 것 같네.”
내 말에 클로에가 땀에 젖은 옷을 펄럭거리며 지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두 번 건강해지면 실신할지도 몰라요.”
클로에는 차가운 토굴에 들어갔다가 다시 살아난 것 같은 얼굴로 나와 자리에 앉았다. 그 사이, 다른 사람들도 토굴을 들락거리며 시간을 보내기 시작했다.
신기한 건,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대화 주제가 다시 해야 할 일에 대한 내용으로 고정되었다는 점이다.
이유는 간단했다. 로델린에게 이야기를 해주어야 했으니까. 이전에도 어느 정도 알려주기는 했지만…… 그녀가 납치의 대상이 되었던 이상, 로델린도 지금 우리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련의 상황에 대해서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을 필요가 있다.
이야기를 들은 로델린이 얼음이 들어간 차가운 음료수를 한 모금 마셨다.
“그래서, 어머니의 안전을 위해서 세자 저하에게 부탁해두었습니다. 왕도로 돌아가시면, 제가 돌아오기 전까지는 내궁에 머무르시는 편이 좋을 것 같아요.”
“그래야겠구나. 가능하면 내궁 밖으로 나가는 일도 삼가는 편이 좋겠어.”
로델린이 삼가겠다고 하면, 그건 외출하는 횟수를 줄이겠다는 소리가 아니라 절대로 나가지 않겠다는 뜻이다. 이야기를 나누고 있으려니 문이 열리고 누군가 들어왔다.
“이야, 팔자들 좋군그래.”
세자였다. 우리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그가 살짝 손을 저었다.
“앉아들 있게.”
말을 마친 세자가 잠깐 욕탕에 가나 싶더니 이내 옷을 갈아입고 나와서 내 옆에 앉았다.
“이런 망할 녀석 같으니라고. 세자는 골방에 박혀서 개고생을 하고 있었는데, 여기에서 여자 세 명과 함께 풍류를 즐기고 있어?”
나는 그 말에 세자 앞에 놓인 잔에 차가운 음료를 담아서 건네주었다.
“일은 잘 처리되셨습니까?”
내 말에 세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적절한 시기가 왔다고 생각하면 말하게. 쿠르스트 산맥으로 바로 보내줄 테니.”
“시기는 명확합니다.”
성공하건, 실패하건. 올리비에가 쌓아둔 라하둔 꽃의 암술이 쌓인 곳을 첩보국장 알버트가 공격하고 나면 그때가 바로 우리가 쿠르스트 산맥으로 향하게 되는 순간이다.
“이번에는 첩보국장 알버트도 동행할 생각인 모양이야. 비밀리에 인력을 동원해야 하는 만큼, 첩보국의 도움이 필요하겠지.”
대놓고 군대를 움직이는 건 국가 간의 분쟁으로 번질 가능성이 높다. 그러니 몰래 해야 하고, 뭔가를 몰래 하는 데에는 첩보국의 인력만큼 적절한 것도 없다.
“그렇군요, 첩보국장에게도 조금 여유가 생긴 모양입니다.”
내 말에 세자가 고개를 저었다.
“지금 왕국이 당면한 과제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쿠르스트 산맥에서 일어날 일이라는 점에는 폐하께서도 동의하셨어.”
첩보국장 알버트가 우리와 함께 움직이는 직접적인 이유가 바로 그거다.
“그리고 제7수색대의 인력을 미리 빼돌려서 함께 움직일 수 있도록 안배해 둘 생각인데, 어떤가?”
“감사합니다.”
기왕에 단체로 움직여야 한다면, 이미 한 번 서로 손발을 맞춰본 적이 있는 사람들은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좋아, 그럼 정말로 테네스 공국에서 해야 할 일은 다 정리되었군. 남은 건 그 황년이 뒤통수 맞은 다음 어떤 병신같은 표정을 지을지 기대하면서, 푹 쉬는 일만 남았어.”
말을 마친 세자는 잔 안의 음료수를 싹 비운 다음에 입가를 훔치며 말했다.
“고생 많았다, 마틴 레드우드. 조금만 더 고생하라고. 나 또한 너에게 필요한 지원이라면 아끼지 않을 생각이니.”
그 대화를 끝으로 일에 관한 이야기는 정말로 끝나게 되었다. 우리는 해가 저물 때까지 온천 안에 머무르며 식사를 하고, 온천을 하고, 찜질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