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화
불 꺼진 배가 넘실거리는 파도를 타고 서서히 섬에 접근하는 중이었다. 배 위에 서 있는 사람들 중 하나가 입을 열었다.
“정면에 보이는 섬에는 파이크 왕국에 잠재적인 악영향을 끼칠 수 있는 조직이 암암리에 비축한 물자가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그나저나, 정보의 출저가 그 유명한 마틴 레드우드라는 이야기가 있던데.”
배의 마스트에 기대있던 여자의 말에 설명을 이어가던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첩보국의 인물 평가가 잘못되는 경우는 좀처럼 없었지만, 그 인간은 가장 최근에 발생한 예외지. 목표는 간단하다. 섬 안에 비축된 물자가 무엇이건, 하나도 남긴 없이 파괴한다.”
열 명 정도의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이고 각자 필요한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작전 완료까지 2시간이다. 시간 내 임무를 완수한 경우 합류 지점으로 집합하도록. 시간 내 임무 달성에 실패할 경우, 우선적으로 임무를 마저 완수한 다음 자력으로 탈출할 수단을 강구한다.”
시간 내 임무를 끝내지 못한다면 버리겠다. 라고 하는 선언에도 불구하고 흔들리는 작은 배 위에 서 있는 사람들의 표정은 전혀 변하지 않았다.
“위치 파악했습니다. 섬 안에 파악된 인구 150, 그중 78명이 한 지점에 모여있습니다.”
로브를 뒤집어쓴 소년이 앳된 목소리로 보고를 올린다. 녀석의 양손 사이에 희미한 빛으로 이루어진 지도가 놓여 있었다.
“그럼, 시작하지. 임무 달성을 위해 꼭 필요한 교전이 아니라면 피해라. 임무는 무조건 달성하고, 가능하다면 살아 돌아오도록.”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배 위에 타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입에 작은 막대기를 입에 물고 바닷속으로 뛰어들었다.
로티샤 호수에서 마틴 레드우드가 잠수했을 때 마주쳤던 칠색 내각의 조직원 중 하나가 사용했던 수중 호흡 장치와 비슷한 종류였다.
새벽이 찾아오기 전에, 섬에는 불이 붙었다. 멀리에서도 명확하게 확인할 수 있을 정도로 큰 불이었다.
“라하둔 꽃의 암술이라.”
타오르는 섬을 보며 얼굴에서 흘러내리는 바닷물을 닦은 남자가 그렇게 중얼거린 다음 모인 사람들을 바라봤다.
“세 명이 전부인가.”
스물다섯 명이 투입되어서 그중 세 명 만이 성공적으로 복귀할 수 있었다.
“임무는 달성했습니다. 섬에 비축되어있던 물건을 전부 태웠습니다.”
섬 안에는 아직 아군 생존자가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작전에 주어진 시간은 두 시간이었고, 임무 달성 후 퇴각을 위해 마련된 시간은 그 후 30분이었다. 이미 작전을 시작한 지 세 시간이 지난 시점이다.
이 이상 배를 섬 근처에 정박해 두는 것은 위험하다.
“임무는 달성했다. 우리는 돌아간다.”
그 말과 함께 타고 있던 배의 뱃머리가 천천히 회전하고, 사람들이 타고 있는 배는 섬에서 멀어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섬에 비축되어있던 라하둔 꽃의 암술이 전소했다는 사실이 황도에 있는 올리비에에게 전달되는 데에는 그렇게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황도에 머무르고 있던 올리비에는 다 무너져가는 낡은 건물의 곰팡이 슨 의자에 앉아, 밧줄로 몸이 꽁꽁 묶인 채 무릎 꿇은 남자를 보고 있었다.
“다시 말해볼래?”
“자색, 아니…… 올리비에 황녀 전하. 저는……!”
그녀가 모습을 드러내기 전까지는 올리비에 황녀가 자색이라는 점을 모르고 있던 남자다. 그리고, 그런 남자 앞에서 올리비에가 우둔하고 유약한 황녀를 연기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 의미하는 바는 명확하다.
이 남자는 오늘 여기에서 죽을 것이다.
“하고 싶은 말 말고, 해야 하는 말을 해. 내가 여기에 네 하소연 듣고 싶어서 온 건 아니니까.”
올리비에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일견 감정이 담겨있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바짝 마른 사막의 모래알처럼 감정이 쫙 빠진 목소리를 이런 분위기, 이런 상황에서 마주한 남자의 몸이 서서히 떨려오기 시작한다.
“라하둔 꽃을 비축해 둔 창고에 화재가 일어났습니다.”
“너의 역할은?”
몸을 부르르 떨던 남자가 구멍 속으로 숨어두는 쥐새끼 같은 표정으로 작게 중얼거렸다.
“황녀 전하…… 저는…….”
올리비에가 눈을 감고 고개를 돌렸다. 정말이지 진저리난다.
질문에 대답해. 이 말이 이것에게는 얼마나 어려운 주문이었길래 몇 초 지나지도 않아서 까먹은 걸까? 같은 공간에서 공기를 들이켜야 한다는 사실이 역겹다.
“저는 최선을 다했습니다. 하지만 워낙 갑작스러운 습격이었고, 적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잔혹한 녀석들이었습니다. 실제로, 섬을 습격한 25명의 중 대부분을 제거하기까지 했습니다!”
심지어, 쉬지 않고 귀로 밀려 들어오는 짖는 소리도 시끄럽다. 올리비에가 뭐라고 계속해서 중얼거리고 있는 남자의 목줄기를 향해 단검을 박아넣었다.
크르륵, 하는 소리와 함께 마침내 묶여있던 녀석이 시끄럽게 짖어대는 행위를 멈춘다. 이제는 시체가 되어버린 녀석이 밧줄에 묶인 채 옆으로 풀썩 쓰러진다.
“아. 이제 좀 조용하네.”
사실, 그녀는 딱히 화가 난 것도 아니었다. 분명히, 섬에 쌓아놓은 라하둔 꽃 암술이 전부 소실된 것은 그녀가 몇 년에 걸쳐 쌓아 올리고 있던 계획이 통째로 흔들릴 정도로 큰 타격이다.
자신의 가슴 위에 손을 올려두고 있던 올리비에의 입에서 들뜬 것 같은 숨이 토해졌다. 처음 보고를 듣자마자 올리비에의 몸을 덮친 것은 뱃속 깊은 곳에서 끌어 올려낸 것 같은 짙은 흥분이었다.
격렬하게 뛰는 심장과 상기된 피부, 계속해서 척추를 찌르고 들어오는 짜릿한 감각과 가슴으로부터 벅차오르는 뜨거운 흥분까지.
“개가 아니었잖아.”
마틴 레드우드는 사람 하나 없는 무인도 같은 세상 속에서 만난 강아지가 아니다. 이건, 분명히 사람이다.
이번에 있었던 습격은 올리비에로 하여금 그런 확신을 가지게 했다.
몇 년에 걸친 계획과 마틴 레드우드의 무게를 비교하던 천칭이, 마침내 마틴 레드우드 쪽으로 완전히 기우는 순간이었다. 이젠 더 이상 잠깐의 여흥거리가 아니다. 황궁으로 돌아온 올리비에는 자신의 방에 들어가 개목걸이를 꺼내 들고 창문으로 향했다.
휙, 하고 창밖으로 던져지는 개목걸이. 곧바로 올리비에는 잔을 들고 레티시아에게 연락을 넣었다.
― 부르셨습니까, 자색.
“계획을 변경한다. 쿠르스트 산맥으로 너도 향하도록.”
올리비에의 말을 들은 레티시아가 잠깐 침묵하더니 대답했다.
― 하지만 자색, 하이랜더의 무덤을 여는 일은 제법 시간이 필요합니다. 물론 아실 거라고 생각하지만, 저는 황궁을 오래 비워놓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닙니다.
“올리비에 황녀 때문이겠지? 그럼 그 황녀도 함께 가면 되겠군. 그 어수룩하고 둔한 여자를 설득하는 건 그렇게 어려운 일도 아닐 텐데.”
그 말에 레티시아가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 혹시, 제가 감히 이유를 여쭤봐도 괜찮겠습니까?
“아니.”
올리비에의 말에 레티시아가 다시금 입을 다물었다.
― 알겠습니다. 다만, 올리비에 황녀는 테네스 공국에서 돌아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황녀가 별로 내켜 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불가능한 일이라면 지시를 내리지도 않았다. 황녀는 네 요청을 수락할 테니, 너는 걱정할 필요 없다. 바로 진행하도록.”
말을 마친 올리비에는 은잔을 다시 숨겨놓고, 의자에 앉아서 레티시아의 방문을 기다렸다.
* * *
마침내 몰아치던 겨울의 추위가 잦아들기 시작한다. 여전히 바람은 서늘하고, 새벽에는 입김이 나올 정도로 춥지만, 해가 떠 있는 동안 쏟아지는 햇빛은 얼어붙은 물을 제법 녹이고, 껴입고 있던 사람들의 옷을 서서히 얇게 만들고 있었다.
봄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이 실감 나는 풍경이다.
내궁에 머무르고 있던 나는 아침 일찍 찾아온 세자의 표정을 보고 좋은 소식이 들어왔음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첩보국장에게서 보고가 들어왔다. 습격은 성공했다고 하는군. 섬에 비축되어 있던 물건은 전부 태웠다고 한다.”
나는 그 말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주먹을 꽉 쥐었다. 그래, 결국 먹혔구나. 역시 테네스 공국에 머무를 당시 그 여자의 시선은 나에게 고정되어있었던 것이 맞았다.
“좋았어! 이제 올리비에 황녀는 무조건 쿠르스트 산맥으로 향할 겁니다.”
그러지 않고는 견딜 수 없을 테니까. 내 말에 세자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지, 다만 그 황년도 눈깔이 아주 회까닥 돌아버린 채 쿠르스트 산맥으로 올 텐데. 좀 걱정이군.”
“그건 뭐, 일단 부딪쳐 봐야 답이 나오지 않을까 싶습니다.”
눈이 회까닥 돌아버린 올리비에 황녀를 내가 감당할 수 있을까? 라고 하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이 정도가 고작이다.
“이제 바로 쿠르스트 산맥으로 향할 준비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내 말에 세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정되어 있던 일 아닌가. 지금 당장이라도 보내 줄 수 있어.”
제7수색대도 협조하도록 이야기를 마친 상황이다. 세자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으려니 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첩보국장 알버트다. 오랜만이군, 내궁이라 그런지 항상 들고 다니던 지팡이는 챙겨오지 않은 모양이다.
“세자 저하, 이곳으로 향하셨다는 이야기를 듣고 찾아왔습니다.”
알버트가 허리를 숙여 인사한 다음 나를 바라봤다.
“마틴 레드우드, 제공해준 정보는 유용하게 사용했다.”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첩보국장님. 도움이 되었다니 기쁘군요. 자, 앉으시지요.”
알버트는 끄응, 하는 소리를 내고 자리에 앉아서 나를 바라봤다.
“계획 자체는 성공했지만, 첩보국의 주요한 인재 상당수를 잃어야 했어.”
“슬픈 일이지만, 그분들이 개죽음당한 건 절대로 아닙니다.”
내가 알버트에게 보낸 쪽지에도 적혀 있던 내용이었다. 당연한 일이다. 거기에 쌓여있는 건 용도는 몰라도 그 여자에게는 굉장히 중요한 물건이었을 거다.
대충 방치해두지는 않았겠지. 분명히 경계가 삼엄할 테니, 유능한 인재 상당수의 희생을 각오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 예상은 결국 사실이 되었다.
“이번에 성공했으니, 마찬가지로 쿠르스트 산맥에 집중하는 척하면서 슬쩍 뒤로…….”
알버트의 말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 여자가 두 번 당하지는 않을 겁니다.”
한 번이면 충분하다. 심지어, 그것도 위험을 감수하고 그 여자의 시선을 나에게 붙들어 두는데 성공해서 가능한 일이었다.
아마, 크로케를 하면서 나눴던 대화가 꽤 주요했겠지. 하지만 그것도 한 번이다. 두 번 통하는 족속이 아니다.
“테네스 공국과 쿠르스트 산맥은 그 무게가 다릅니다.”
테네스 공국으로 향한 목표는 기껏해야 칠색 내각의 머리 중 하나인 황색을 제거하는 게 원래 목표였지만, 쿠르스트 산맥은 그게 아니다.
“결국 쿠르스트 산맥에서 대치하면서 뒷구멍으로 딴짓을 한다면 올리비에 황녀가 쿠르스트 산맥으로 향한 목적은 성취하게 될 가능성이 큽니다.”
이번에 올리비에의 뒤통수를 치려고 들 때도, 결국 카루토스 타카운의 책을 보지 못하게 한다는 본연의 목적은 어쩔 수 없이 실패해야 했다.
몇천 년 동안 쌓여있던 하이랜더 시체들이 다 언데드로 부활하는 걸 방치하면서까지 뒷구멍으로 해야만 하는 딴짓거리라는 게 있기는 할까.
“우린 쿠르스트 산맥에서 일어나는 일을 막는데 전력을 다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올리비에 황녀도 하이랜더의 무덤을 여는데 전력을 다해야 할 거다. 우리도, 그 여자도 이번에는 다른 곳에 신경을 팔 수는 없다.
이야기를 듣고 있던 세자가 후우,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일이 잘못되면 난리가 나겠군.”
그 여자가 공사판에 동원할 생각으로 하이랜더 시체를 일으킨 건 아닐 테니까.
“일이 성공한 것을 확인했으니, 쿠르스트 산맥으로 향할 준비를 서두르겠습니다.”
말을 마친 나는 알버트를 바라봤다.
“첩보국장님도 이번에 함께 한다고 들었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내 말에 알버트가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 이제껏 잘해왔듯이 이번에도 잘해보자고. 나도 급하게 처리해야 하는 일을 마친 다음에 바로 출발할 준비를 하지.”
잠깐 악수를 나눈 다음, 알버트와 세자는 내 방에서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