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화
올리비에가 열심히 저축해두었던 라하둔 꽃의 암술에 불을 지른 다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쿠르스트 산맥 인근의 록밸리 마을이 가까워지고 있다. 다른 곳은 얼음이 녹기 시작하고, 사람들의 옷도 서서히 가벼워지고 있었지만 여기만큼은 아직도 한겨울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추워라.”
마차 안에서 밖을 보고 있던 엘렌이 살짝 몸을 떨며 중얼거린다.
“그래도 날이 풀리고 있는 건 확실해.”
지금의 록밸리 마을을 둘러싼 차가운 공기는, 내가 기억하고 있던 것만큼 차갑지는 않으니까.
“첩보국장님은 먼저 쿠르스트 산맥으로 향했다고 들었어요.”
“먼저 가서 자리를 잡고 있어야 하니까.”
알버트도 이번에는 단단히 준비를 한 모양이다. 첩보국에서 꼭 파악해줘야 하는 정보가 두 가지 있다.
올리비에가 언제 쿠르스트 산맥으로 향하는가.
올리비에와 그 졸개들은 쿠르스트 산맥의 어디에 자리 잡는가.
첩보국에서 이 상황의 처리를 위해 투입된 인간의 숫자만 이백에 달한다. 록밸리 마을에 도착하면 알버트와 합류할 수 있을 거다.
“엘렌 양의 이야기대로라면, 점령전 형식이 될 가능성이 높아요.”
“그래. 각 변의 길이가 3km에 달하는 오각형의 형태를 만들어야 해.”
총 다섯 장소가 필요하다. 쿠르스트 산맥의 어디건, 오각형을 만드는 데 성공하면 된다.
“각 장소에는 지정된 재료로 제작한 제단과 일정 크기 이상의 문스톤과 흑요석으로 만든 대접, 그리고 제물로 바칠 동정남과 동정녀의 피가 필요해.”
대접에는 수은을 채우고, 피는 그 제단 주변에 뿌리면 된다. 뿌리는 피의 양은 수은을 채운 대접을 채울 정도가 필요한 모양이다. 사람 몸에서 피를 그 정도로 뽑아내면 목숨이 위험할 수도 있다.
“사람 피를 정말 좋아하는 녀석들이군.”
하필이면 그것도 불쌍하게 잠자리 한 번 못 가져본 녀석들의 피를 뽑아내고 있냐. 내 말에 엘렌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쩔 수 없어. 카루토스 타카운이 위세를 떨치던 수천 년 전에는 제단 위에 제물을 바치는 형식이 마법을 사용하는 가장 일반적인 방법이었으니까. 공간의 격리 같은 강력한 마법이라면…….”
사람의 살이나 피를 바치는 인신공양은 마법의 행사에 있어 필수적인 모양이다.
“쿠르스트 산맥에 올리비에 황녀가 처음 자리 잡은 곳이 오각형의 꼭짓점 중 하나가 되겠지.”
내 말에 엘렌과 클로에가 고개를 끄덕였다. 첫 장소를 알게 된다면 나머지 장소도 자연스럽게 추측할 수 있다.
“올리비에 황녀가 다섯 곳에 모두 제단을 만들고 필요한 재료를 사용한다면 하이랜더의 무덤으로 향하는 길은 그 즉시 열릴 거야.”
“뭐, 마력을 충전하거나 할 필요도 없는 거야?”
보통 그런 마법은 조건을 달성해도 일정 시간을 버텨야 하는 줄 알았는데. 내 말에 엘렌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마법을 만든 마법사는 그렇게 어설픈 실력이 아니었으니까. 게다가, 슬프게도 이 마법을 만든 마법사는 이 마법이 타인에 의해 방해받을 가능성도 생각해뒀어.”
엘렌이 다리를 꼰 채로 창밖을 보며 말을 이었다.
“다섯 개의 꼭짓점 중 세 개를 완성하는 데 성공하면, 이틀 뒤 하이랜더의 무덤으로 가는 길이 열릴 거야.”
나는 그 말에 얼굴을 구겼다. 그럼 다섯 개의 꼭짓점 중 하나를 깔고 앉아 방어를 펼치는 건 의미가 없다.
망할 자식, 뭐 그렇게 쓸데없는 안배를 해두고 지랄이야. 그 마법사, 자기 딸이 공간을 격리하는 마법 때문에 문제가 생겼다고 했었나.
그게 얼마나 원통했는지, 아주 이를 악물고 만들었다는 느낌이 팍팍 든다.
“그래도 다행인 건, 장소가 쿠르스트 산맥이라는 점이야.”
긍정적인 면이 아주 없는 건 아니다. 제7수색대가 머무르는 막사 하나를 짓는데도 몇 년이 필요했던 장소다.
제단이 크지 않다고 해도, 만드는데 필요한 자재를 옮기는 건 쉽지 않다. 그걸 안 들키는 건 불가능하다.
“아, 거의 다 온 것 같…….”
말을 하던 클로에가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뭐야, 왜 그래.”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고 슬쩍 고개를 내밀어 창밖을 확인한 다음 다시 고개를 마차 안으로 들이밀었다.
“이런 씨. 저건 또 뭐야.”
록밸리 마을 입구에 몰려 있는 어마어마한 숫자의 인파와, 그들을 통제하고 있는 경비대의 모습이 보였다.
저 정도면 록밸리 마을의 사람들이 거의 전부 입구로 튀어나왔다고 봐도 될 정도다.
입구에 몰려 있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손에 작은 깃발 같은 걸 들고 있었다. 그리고 그 깃발에는 레드우드 가문의 문장이 그려져 있었다.
“마틴, 내 생각보다 인기가 훨씬 많은 모양이네.”
엘렌이 당황한 표정을 감추지 못한 채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러게.”
작금의 상황을 받아들이는 게 너무 힘들다. 왜 저러고 있는 거야.
“저기 오신다! 보인다! 으와아아아아아아아!”
마차가 다가오는 걸 확인한 모양인지, 입구에 몰려 있던 사람들의 환호성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 환호성은, 마차의 벽에 의해 한 번 줄어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머리통을 때리는 것처럼 우렁찼다.
마차가 록밸리 입구 앞에 멈추고, 경비대 간부로 보이는 남자 한 명이 조심스럽게 마차 문을 열었다. 그리고, 환호성이 한 층 더 커진다.
“……시죠.”
“뭐라고요?! 잘 안 들립니다!”
문을 열어준 남자가 뭐라고 말을 하긴 했지만, 환호성이 너무 시끄러워서 제대로 들리지 않는다. 엘렌이 얼굴을 구기고 있다가 손을 살짝 들어 올리고 뭐라고 중얼거렸다. 이내, 밖에서 울려 퍼지던 환호성이 거짓말처럼 사라진다. 소리를 차단하는 마법을 사용한 모양이다.
“고마워.”
나는 엘렌에게 감사 인사를 전하고 나서 아까 뭐라고 했던 남자를 바라봤다.
“뭐라고 하셨는지 다시 말씀해주시겠습니까?”
내 말에 남자가 아, 네! 하고 대답한 다음 자세를 바로 하고 말했다.
“록밸리 마을은 물론이고, 인근에 거주하던 백성들이 전부 마틴 레드우드 님을 보기 위해 몇 시간을 기다렸습니다.”
그래서? 나는 뭔가 불길한 느낌을 받으면서 녀석이 하는 말을 계속 듣기 시작했다.
“기다리고 있던 백성들을 위해서 잠깐이나마 얼굴을 비춰주시는 편이 좋지 않을까 하는 게 상부의 의견입니다. 여기, 금일 일정을 한번 짜 봤습니다.”
녀석이 내민 서류를 확인한 나는 입에서 한숨이 나오려고 하는 걸 참았다.
내가 지금 무슨 콘서트 투어 다니는 연예인으로 보이냐? 여기에서 해야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이해하지 못할 건 아니다.
여기에 오기 위에 가져다 붙인 핑곗거리가 개보수 현장 시찰 및 수비대 격려였으니까. 하지만, 명목상으로 가져다 붙인 핑곗거리에 휘둘릴 수는 없다.
“죄송하지만, 우선은 국경 사령부를 먼저 방문해야 할 것 같습니다.”
내 말에 남자가 아, 하는 소리를 내고 바깥을 슬쩍 바라봤다.
“하지만, 몰려 있는 사람들이 크게 실망할 겁니다.”
“어쩔 수 없습니다.”
나는 저 사람들 기대를 충족시켜주려고 여기에 온 게 아니다. 내 단호한 한마디에 남자가 어물어물하다가 이내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그럼, 모여있는 사람들을 통제한 다음 사령부까지 안내해드리겠습니다.”
“길은 알고 있습니다. 통제에만 신경 써 주셨으면 합니다.”
이내 마차의 문을 다시 닫은 남자가 백성들을 통제하는 사람들에게 말을 전달한다. 그리고, 몰려 있는 사람들 사이로 마차가 지나갈 수 있는 너비의 공간이 생겼다.
다시금 마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잠깐 내 눈치를 보던 클로에가 입을 열었다.
“그래도 간단하게 인사 정도는 해 줄 수 있지 않았을까요? 저렇게 좋아하는데.”
“저 사람들뿐 아니라, 올리비에 황녀도 좋아하겠지. 빠르게 움직이지 않으면 곤란해지는 건 우리야.”
사람들이 좋아해 주는 건 아무 의미 없다.
그리고, 이런 식으로 하나씩 양보해주며 말려들기 시작하면 경찰서의 포돌이나 포순이 같은 마스코트로 신세가 되는 건 순식간이다.
아마, 국경 사령부에서도 그런 걸 원해서 이런 상황을 방조한 것도 있겠지. 이건 가서 확실히 말해야 한다.
마차는 부지런히 굴러가 사령부 앞에 멈췄다. 마차에서 내리자, 곧바로 사령부 앞을 경계하고 있던 병사가 다가와 눈을 빛내며 말했다.
“마틴 레드우드 님, 실제로 뵙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이번에 정말 큰 도움을 받았습니다.”
쿠르스트 산맥 일대의 백성들만 저러는게 아니라는 건 확실히 알 것 같다.
“사령관님은?”
내 말에 병사가 아, 하는 소리를 내고 이내 자세를 바로잡은 다음 대답했다.
“사령관께서는 방문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바로 안내해드리겠습니다. 다른 분들도, 머무르실 숙소를 안내해드리겠습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뒤에 서 있는 클로에에게 말을 걸었다.
“내 짐도 좀 부탁해.”
“네, 걱정 말고 다녀오세요.”
대화를 마친 다음 나는 병사의 안내를 따라 사령관의 집무실로 향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곧바로 사령관이 만면에 웃음을 띤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틴 레드우드, 쿠르스트 산맥에 방문한 걸 환영하네.”
집무실 안에는 사령관만 있는 게 아니었다. 사령관을 제외하고도 여섯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집무실 소파에 앉아서 기다리고 있다, 내가 들어오자 일제히 일어났다.
“오랜만입니다, 사령관님. 이분들은?”
내 말에 사령관이 웃음을 터뜨리며 대답했다.
“쿠르스트 산맥 인근에 영지를 가지고 있는 영주님들과 그 영애분들이시네. 인사 나누게.”
남자가 셋, 그리고 여자가 셋. 남자는 대부분 나이가 어느 정도 있어 보이지만, 함께 자리하고 있는 여자들은 높게 쳐줘도 이십 대 초반 정도로 보이는 소녀들이다.
“만나서 반갑네. 안 그래도 이번에 왕도에서 해 준 일 때문에 꼭 한번 만나보고 감사 인사를 전하고 싶었어. 여기는 내 딸인 소피아라고 하네. 자자, 인사하거라.”
“처음 뵙겠습니다, 마틴 레드우드. 높으신 명성과 업적은 익히 들어서 알고 있어요. 만나 뵙게 되어서 영광이에요.”
나는 그들과 간단하게 인사를 나눈 다음 곧바로 사령관을 보고 입을 열었다.
“죄송하지만, 사령관님과 독대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내 말에 곧바로 방 안의 분위기가 상당히 묘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많이 급한 일이 아니라면 여기까지 먼 길을 하신 분들인데. 간단하게 이야기라도 조금 나누지 그러나.”
“죄송합니다, 많이 급한 일입니다. 먼 길을 오셨다는 건 알고 있지만, 염치 불고하고 잠시 독대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말을 마친 나는 서 있는 영주와 그 딸들을 보며 말했다.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양해해주셨으면 합니다.”
내 말에 그들이 크흠, 하는 소리를 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중한 일이라 하니 어쩔 수 없지. 빠른 시일 안에 다시 만나보기를 고대하네.”
그런 말과 함께 모여있던 사람들이 사령관의 집무실에서 나갔다. 곧바로, 사령관이 허어 하는 소리를 냈다.
“이보게, 내가 이래 봬도 준비를 많이 한 거야. 쿠르스트 산맥 인근에서는 다들 한가락 하는 영주님들이란 말일세. 자네의 앞날을 위해서 내가 얼마나 많이 신경을 썼는지 아나? 좋게 보여서 나쁠 것 없는 사람들이야. 나중에라도 찾아가서 방금 전의 무례에 대해 정중히 사과하도록 하게.”
내가 그 말에 대해서 뭐라고 하려는 순간, 갑자기 문이 팍 하고 열렸다. 문을 열고 들이닥친 남자는 짙은 갈색의 피부에, 구불거리는 검은 머리카락을 한 미중년이었다. 연미복을 입고 있었고, 손에는 지팡이를 들고 있었다.
“이거 실례. 노크를 할 상황은 아닌 것 같아서 말이야.”
첩보국장 알버트. 사령관이 들이닥친 남자를 보고 눈을 크게 뜨고 외쳤다.
“자네는 누군가, 여기는 군 사령부다! 허락 없이 아무나 출입할 수 있는 곳이 아니야!”
“어디 보자, 긴말을 할 필요는 없겠지.”
갈색 피부의 남자가 툭 하고 사령관 쪽으로 뭔가를 던졌다. 국왕의 옥새다. 어차피 지팡이를 보고 짐작했지만, 역시 저 갈색 피부의 중년은 알버트가 변장한 모습인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