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화
테이블 위에 올려진 옥새를 확인한 사령관의 눈이 커졌다.
“이건…….”
사령관이 말을 이어가기 전에 알버트가 건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는 국왕 폐하의 명을 받들어 쿠르스트 산맥으로 향했다. 마틴 레드우드는 우리와 함께 협업할 것이고, 대외적으로 알려진 방문 목적은 거짓이다. 마틴 레드우드와 첩보국이 어떤 일을 하는지는 절대로 알려질 일이 없을 것이며, 국경 사령부 사령관은 이 일에 대해서 어떠한 의문도 가지지 말도록. 또한, 국경 사령부를 구성하고 있는 병력 중에 임무 수행에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인력을 차출할 예정이다.”
말을 마친 알버트가 지팡이로 땅을 찍으며 딱, 하는 소리를 냈다.
“이상이외다, 사령관. 지금 들은 이야기와, 이 이야기를 통해 추론될 수 있는 가설에 대해서 한마디라도 벙긋하는 순간 첩보국은 자랑스러운 파이크 왕국의 수호자이자 합당한 통치자이신 국왕 폐하께서 우리에게 내리신 특권을 통해 즉각 처벌할 테니, 그리 알고 있도록.”
“……알겠습니다.”
연신 옥새를 확인하던 사령관이 이내 가라앉은 목소리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좋아. 그럼 이제 순서대로 처리하자고. 마틴 레드우드와 동행한 클로에 로니세라 경과 엘렌 리버플로우 양 또한 첩보국과 공조할 예정이다. 명확히 해당 상황을 인지하고, 동행자들의 활동에 제한되는 일이 없도록 하게.”
알버트는 말을 이어가며 소파에 앉아 사령관을 바라봤다.
“다음. 저녁 환영 만찬에 참석하기 위해 사령부에 머무르는 중이던 제7수색대의 지휘권은 현 시간부로 국경 수비대 사령관에게서 마틴 레드우드에게로 위임한다. 또한, 최대한 빠른 시일 안에 우리 측에서 요청한 병력과, 그 병력의 유지에 필요한 물자를 제공하도록. 이후, 추가로 첩보국 및 마틴 레드우드가 요청한 사항에 대해 국경 수비대 사령부의 적극적인 협조를 요청한다.”
말을 마친 알버트는 기지개를 켠 다음 나를 바라봤다.
“마지막으로, 당장 나는 이 친구와 이야기를 좀 나누고 싶으니, 자리를 비워줬으면 좋겠는데.”
그 말을 들은 사령관이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를 하고 문을 나섰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나는 시선을 알버트에게 돌렸다.
“첩보국장님, 일 처리를 이렇게 빨리할 수 있었다면 제가 방문하기 전에 끝내주시는 편이 어땠을까 싶습니다.”
내 말에 녀석이 하하, 하고 웃은 다음에 얼굴을 가렸다가 내렸다. 그러자, 내가 알고 있던 알버트의 얼굴이 드러났다.
“이런 종류의 일 처리는 급작스럽게 해야 효과가 극대화되는 법이야. 게다가, 우리의 움직임을 미리 통보하는 건 보안상 좋은 행위가 아니지.”
뭐, 저 말은 틀리지 않다. 불시점검이라고 말은 하지만 실상은 검사받는 사람들도 검사관들이 언제 올지 훤히 알고 있고, 보안을 위해 마련된 컴퓨터 암호는 1q2w3e!!이 태반인 무슨 나라의 어떤 국방부처럼 일하는 것보다는 훨씬 나은 거다.
“덤으로 이후 자네에게 달라붙으려고 들 게 뻔한 거머리들을 미리 털어내 주겠다는 나름의 배려도 있었고.”
“확실히, 그 점은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갑작스럽게 밝힌 정체와 쉬지 않고 몰아친 명령으로 인해 사령관은 확실히 위축되었다. 녀석은 이번에 내가 찾아온 김에 확실하게 내 쪽에 줄을 대고 싶었던 모양이지만, 이런 일을 당해버리면 나한테 달라붙어 뭔가를 주워 먹겠다는 생각은 함부로 못 하겠지.
“그나저나, 말하실 때 상당히 고압적이시던데요.”
내 말에 알버트가 지팡이를 손에 들고 이리저리 살펴보다가 대답했다.
“첩보국장으로 일하다 보면 예의를 차려야 하는 사람이 국왕 폐하나 세자 저하 정도를 제외하면 없거든. 고압적인 태도는 버릇 같은 거라네.”
하긴, 그렇겠지. 알버트가 지팡이를 살짝 던졌다가 다시 받으면서 나를 바라봤다.
“다행인 점은, 그래도 내가 사람 보는 눈은 있는 것 같다는 점이야. 록밸리 마을 앞에 몰린 사람들이 보내는 성원에 감동먹어서 칠렐레팔렐레 했으면 세자 저하께서 말씀하셨다고 해도 나와 첩보국이 자네와 함께 일하지는 않았을 걸세.”
나는 그 말에 약간 불편한 표정을 짓고 알버트를 바라봤다.
“애초에 제가 라하둔 꽃에 대한 정보를 제공해주지 않았다면 알아차리지도 못했을 거 아닙니까?”
올리비에 황녀에게 들키지 않고 라하둔 꽃의 암술을 태워버린 건 분명히 알버트의 수완이 뛰어나다는 방증이다.
애초에, 이 정도로 일을 은밀하게 처리할 수 있으니 올리비에가 파이크 왕국에 칠색 내각의 머리가 둘이나 있는데도 불구하고 적극적인 공세를 펼치지 않고 있었던 거라고 생각한다.
내 말에 알버트가 오호, 하는 소리를 내고 나를 바라봤다.
“그 점은 인정하지, 하지만 능력이 있는 관심 중독자라는 것도 얼마든지 있는 법 아니겠나. 사실, 그런 녀석들을 몇 명 마주한 경험이 있거든. 자네가 이해하게.”
그래, 능력 있는 관심종자는 원래 그냥 관심종자보다 더 큰 사고를 치곤 하는 법이니까, 알버트가 하고자 하는 말은 잘 이해했다.
“자. 사담은 이쯤 해두고, 일 이야기를 해보자고.”
“알겠습니다.”
우선, 나는 마차를 타고 록밸리로 오면서 엘렌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알버트에게 해주었다.
“첫 장소를 안다고 해도 확실하게 나머지를 알 수 있는 건 아니군.”
꼭짓점 중 하나를 알아내는 것뿐이다. 그 꼭짓점이 앞으로 만들어질 오각형의 어느 부분을 차지하게 될지는 알 수 없다. 따라서, 우리는 첫 꼭짓점을 확인하는 데 성공하면 두 번째 꼭짓점은 24개의 나머지 가능성 중 하나라는 뜻이다.
“게다가, 우리가 집중하고 있는 장소가 아니라 다른 곳에 다시 오각형을 만들려고 들 수도 있습니다.”
“알겠네, 첩보국의 인력을 최대한 뽑아내서 쿠르스트 산맥으로 끌고 오길 잘했군.”
상대가 움직이면 우리는 그걸 반드시 파악하는 데 성공해야 한다.
“이런 말씀 드리면 실례일지도 모르겠지만, 첩보국의 무력 수준에 대해서는 사실 엄청난 기대를 품고 있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상대의 움직임을 파악하는 데 있어서는 기대 이상의 역할을 해 줄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첩보국에 소속되어있던 클로에의 실력은 굉장히 뛰어난 편이지만…….
국왕 바로 아래에 있는 직속 기관이긴 하지만, 클로에가 첩보국에서도 손꼽힐 정도의 무력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고려해 본다면 첩보국 요원들의 싸움 실력은 엄청나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
애초에, 이전에 대화를 나눴을 때 클로에는 첩보국장과 대련해서 이길 정도였잖아. 조직의 머리가 항상 최고의 무력을 가지고 있는 건 아니라고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정면충돌에서 첩보국에게 크게 기댈 수 없다는 사실은 자명하다.
내 말에 알버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첩보국은 엄밀히 말하면 은밀한 기동하에 첩보 수집 및 파괴 공작, 암살에 특화되어있지. 라하둔 꽃의 암술을 태우는 데 성공한 것도 어두운 밤에 기습적인 움직임이라는 점 때문에 성공할 수 있었던 거지. 제대로 평가했군.”
암살자에게 있어서, 뛰어난 싸움 실력은 갖춰두면 유용하지만 필수로 갖춰야 하는 미덕은 아니다.
모 게임에 등장하는 후드 뒤집어쓰고 손목에 낀 장치에서 이쑤시개만 한 칼날 뽑아내며 진실은 없고 모든 것이 허용된다 외치는 공포의 살인마 집단은 암살 장면이 들키면 다 죽여버리고 암살이라고 우긴다지만, 그건 게임이니까 그런거고.
“무력은 국경 수비대에서 차출된 병력과, 수색대에 기대할 생각입니다.”
일단, 내가 이제 어디 가서 기사단장이라고 우겨도 크게 문제 되지 않을 만한 무력을 가지고 있는 상황이다.
국경 수비대에서 동원한 수색대와 수비대의 인력을 동원한다면 어지간한 기사단 1-1.5개 정도의 무력을 동원하는 셈이 된다.
“아, 그리고 카일 블랙매도우라고 하는 학자를 만나봐야 합니다.”
내 말에 알버트가 음? 하는 소리를 냈다.
“필요한 일인가?”
나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카일 블랙매도우는 하이랜더에 대해서 오랜 시간 연구한 학자다. 우리는 올리비에 황녀와 대치하고 있긴 하지만, 그 전장은 높은 확률로 왕국이나 제국이 수비하는 영역이 아닌 쿠르스트 산맥의 심부가 될 것이다. 쿠르스트 산맥의 온갖 괴물들은 물론이고, 무엇보다 하이랜더들이 멋대로 돌아다니는 영역이다.
카일 블랙매도우가 있다면 큰 도움이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네, 중요한 사람입니다. 남들에게 들키지 않도록 몰래 데리고 와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알았네, 거절한다면 납치해서라도 끌고 오도록 하지.”
그럴 필요까지는 없을걸. 순순히 협조해 주지 않을까 생각하는데.
“네, 거절한다면 납치라도 해 주셔야 합니다.”
그래도 혹시 모른다. 나는 슬쩍 사령관의 집무실에 놓인 지도를 보고 혀를 찼다.
“하다못해 쿠르스트 산맥 심부의 지도라도 작성되어 있으면 좋을 텐데.”
사령관 집무실에 놓인 작전지도조차 쿠르스트 산맥의 심부는 제대로 파악되어있지 않다. 애초에 국경수비대 입장에서는 거기로 들어갈 이유가 없으니까.
“어쩔 수 없는 노릇 아니겠나, 없는 걸 아쉬워해봤자 의미 없어. 있는 정보와, 추후 파악되는 정보를 통해 판단할 수밖에.”
말을 마친 알버트는 지팡이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 또한 당분간 사령부 건물에 머무를 테니, 매일 만나서 작업의 진행 상황을 공유하도록 하지. 아침 식사를 함께하는 건 어떤가?”
“좋습니다. 저는 이제 제7수색대 사람들을 만나보겠습니다.”
내 말에 알버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리고. 해당 인원들에게는 우리가 맡은 임무와 현재 상황에 대해서 어느 정도 범위 한에서는 공유할 생각입니다.”
이건 허락을 맡는 게 아니라 통보다. 엄연히 지금 쿠르스트 산맥에서 진행되는 임무는 내가 세자로부터 지시를 받은 일이고, 첩보국장인 알버트는 어디까지나 내 임무 수행에 도움을 주기 위해서 여기에 자리한 거다.
“그러도록 하게. 이야, 책임질 필요 없는 일을 얼마 만에 해보는 건지 모르겠군.”
알버트의 말은 일종의 경고였다. 이 일에 대해서는 내가 전적으로 권한을 가지고 있다는 점은 분명히 인정하겠다, 하지만 그 말은 이 일이 잘못될 경우 그 책임을 네가 떠안게 된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어라, 라고 하는 일종의 조언 같은 거다.
“자주 이러면야 짜증 나시겠지만, 가끔 정도는 괜찮지 않겠습니까. 첩보국은 올리비에의 움직임을 파악하는 데 주력해주셨으면 합니다.”
알버트가 돌려서 말한 조언에 대해 나도 '알고 있으니 걱정하지 말아라.'라고 돌려 말해주었다.
“알았네. 간만에 만난 전우라고 너무 영양가 없이 회포만 풀지는 않길 바라네.”
그러지는 않을 거야 인마. 그 대화를 끝으로 우리는 사령관의 집무실에서 나와 각자 가야 할 길을 갔다.
“제7수비대라.”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지나가는 병사 하나를 붙잡고 도리안이 머무르고 있는 숙소를 물어보았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침대에 드러누워 있는 도리안이 보인다. 몸무게가 좀 줄었는데. 아무래도 일이 많이 힘들었던 모양이다.
“이야. 잘 지내셨습니까, 대장님.”
내 목소리를 들은 도리안이 침대에서 팍 하고 일어났다.
“마틴 레드우드! 너 이 자식!”
저 대사만 따로 들으면 내가 뭐 돈이라도 떼먹은 것 같은 느낌이었지만, 그런 말과 함께 다가오는 도리안의 얼굴에는 웃음이 봄날 벚꽃처럼 가득하다.
“건강해 보이십니다.”
내 말에 도리안이 혀를 차며 대답했다.
“건강? 겨우내 얼어 죽는 줄 알았어. 이것아. 불알이 시퍼렇게 얼어 터지는 줄 알았다고. 그 와중에 두르밀로 산머리부터 이어지는 방어선의 경계를 위해 파견까지 나가려니 하루하루가 죽을 맛이었다.”
저런, 나는 그 말에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부터 내가 하게 될 말을 들으면 도리안이 어떤 표정을 지을지 조금은 걱정되는데.
저렇게 개고생을 했는데 또다시 나랑 개고생을 하자는 이야기를 들으면 도리안의 표정이 팍 썩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