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화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쨌든 꺼내야 하는 이야기라는 점은 변하지 않는다.
“저도 회포를 풀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습니다만…… 그 전에 꼭 해야 하는 말이 있습니다.”
내 말에 도리안이 슬쩍 내 눈치를 보다가 입을 열었다.
“결혼하냐?”
난데없이 결혼은 무슨 결혼. 나는 그 말에 헛웃음을 흘린 다음 다시 진지한 표정을 짓고, 현재 우리가 처한 상황에 대해 설명해주었다.
“……그러니까, 잠깐만.”
도리안은 그렇게 중얼거리고 자기 이마를 짚은 채 한동안 가만히 있다가 멍한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오랜만에 만나서 헛소리를 하는 건 아니겠지?”
나는 그 말에 고개를 저었다.
“헛소리를 하고 싶어서 지어낸 이야기라기에는 너무 무겁지 않습니까?”
“제국의 황녀가 헛소리로 치부되던 하이랜더의 무덤을 열어젖히고, 그 안에 쌓여있던 하이랜더의 시체를 죄다 일으켜 세워서 군대를 만들 생각이라니.”
그래, 이게 제정신으로 들을 수 있는 소리가 아니라는 건 나도 인정한다. 근데 어떡하겠냐, 슬프게도 전부 사실인걸.
“제가 여기에 온 목적도 당연히 보수 공사 현장 확인 같은 게 아닙니다.”
“……그리고 이런 이야기를 네가 나에게 해주는 이유도 어쩐지 알 것 같은데.”
그래, 니가 생각하고 있는 그게 맞아.
“국가를 위해 봉사하는 자랑스러운 국경수비대 소속 제7수비대장으로서, 이번에도 국가와 국왕 폐하를 위해 개고생 한 번 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내 말에 녀석이 쯔, 하고 혀를 차고는 어깨를 으쓱했다.
“우리는 괜찮다. 수색대에 차출된 인원은 언제나 내가 엄선하고 있어. 실력, 국가에 대한 충성심, 도덕성 모두 하나같이 큰 문제가 없는 녀석들뿐이지.”
말을 마친 도리안이 나를 바라봤다.
“하지만 수비대는 다르다. 정말로 자원해서 온 녀석들도 물론 있겠지만, 대부분 너도 알다시피…….”
나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간부들이라면 모를까, 그들이 지휘하는 병력은 어딘지 모르게 한구석 켕기는 일이 있는 녀석들이나 범죄자들이다. 쿠르스트 산맥에 처음 왔을 때 두들겨 맞았던 기억은 아직도 내 머릿속에 깊게 각인되어있다.
초장부터 그렇게 조져놓지 않으면 통제가 되기 힘든 녀석들.
“네가 필요로 하는 도움이 한때 너와 함께 이 산맥을 돌아다니던 우리로 충분하다면야 다행이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맞서게 될 적만큼이나 내부의 적도 조심해야 할 거야.”
“명심하겠습니다.”
내 말에 녀석이 히죽거리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래 봬도 돌아다니면서 별의별 녀석들을 다 만나봤으니까 꽤 도움이 될 거다. 그래서, 지금 이 사건에 대해 지휘 권한을 맡은 자는 누구야?”
“접니다.”
내 말을 도리안이 잠깐 움찔하고는 정색을 했다.
“그럼, 나에게 대장이라고 부르면 안 되지 않을까 싶은데. 괜히 혼선이 생길 수도 있어.”
꽤 진지하다. 심지어, 방금까지의 장난스러운 어조도 많이 사그라들어 있었다. 도리안의 대답을 들은 나는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앞으로는 도리안 경이라고 부르겠습니다. 하지만, 서로 말을 편히 하는 것 정도는 다른 사람들도 넘어가 줄 거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제7수색대에서 군역을 수행했다는 사실을 모르는 녀석들은 없을 테니까. 그렇게 서로 간의 친분 과시 정도는 크게 문제 삼을 리가 없다.
도리안이 내 말을 듣고는 작게 끄응, 하는 소리를 냈다.
“알았네. 아니, 오히려 내가 고맙다고 해야겠군.”
“그럴 거 뭐 있습니까.”
도리안이 존댓말 한다고 주머니에 돈이 들어오는 것도 아닌데.
“아 참, 그리고 방금 말씀하셨던 수비대 병력 관련 문제에 있어서는 도리안 대장님의 도움을 좀 받을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내 말에 도리안이 응? 하는 소리를 냈다.
“적게는 오백에서 많게는 천명 정도 정도를 관문 수비대에서 차출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또한, 그 숫자에 맞춰서 중소규모 부대 지휘가 가능한 수준의 간부도 필요합니다.”
해당 인원을 골라내는 업무를 도리안에게 맡기고 싶다. 내가 뭔가를 믿고 맡길 수 있는 사람들 중에 가장 오랜 기간 쿠르스트 산맥에 머물렀던 사람이니까. 내 말에 도리안이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조언 정도라면 몰라도, 인선 권한 자체를 나에게 넘겨주는 건 너무 과하지 않나? 나는 기껏해야 일개 수색대의 대장일 뿐이야.”
내가 그걸 따로 검토할 시간이 부족 할 것 같아서 도리안에게 일을 맡기려는 거다. 누군가에게 맡겨놓고 다시 검토할 생각이었다면 애초에 이런 청을 할 필요도 없었겠지.
“문제없습니다. 적절한 인원을 추려낸 다음 제가 뽑았다고 하면 될 일이니까요.”
전문 용어로 이름 팔기라고 하던데.
니가 뭔데 이걸 하고 있어?
ㅇㅇㅇ님이 시켰습니다.
뭐 이런 식으로 이어지는 대화 있잖아.
“알겠네, 내가 한번 책임지고 신경 써서 사람을 걸러보도록 하지.”
“뽑아야 하는 인원이 적은 숫자가 아니고, 준비에 투자할 수 있는 시간은 짧습니다. 최고를 뽑는다기보다는, 최악을 걸러낸다는 느낌으로 뽑아주세요.”
정말 못 써먹겠다 싶은 녀석들만 걸러내면 된다. 국방부에서 현역 대상자 뽑는 것처럼 말이지.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것보다는 잘 뽑아야 하겠네. 거긴 못 써먹을 녀석도 현역판정을 내리곤 하잖아?
“명심하지.”
그럼, 병력 차출은 도리안이 신경을 써줄 테니까…… 잠깐 고민하던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다른 사람들은 어디에 있습니까? 지금은 약간 바빠서 곤란하지만, 오늘 함께 저녁이라도 하고 싶은데.”
일단 가장 먼저 도리안을 찾아오기는 했지만, 그래도 인사는 나눠둬야지. 오늘 만나고 앞으로 볼 일 없는 사람들이라면 몰라도, 앞으로 쿠르스트 산맥의 심부를 함께 쑤시고 다녀야 하는 입장이니까.
“그래, 다른 녀석들에게도 말해두지.”
“감사합니다. 자세한 일정이 정해지면 전달해드릴게요.”
인사를 한 다음 밖으로 나온 나는 기지개를 한 번 켰다.
“다음은 엘렌을 찾아가야겠네.”
내가 다 해 먹으려고 하면 될 일도 안 되기 마련이다. 테네스 공국에서처럼 서너 명이 움직이는 거라면야 혼자 원맨쇼를 해도 충분히 일 처리가 가능하지만. 지금은 다수의 인원으로 구성된 병력을 움직이는 거니까.
목적을 달성하기 전까지 문제없이 작동할 수 있는 조직을 만들어야 한다. 조직을 만드는 건 결국 사람을 적재적소에 배치해야 하는 능력에 따라 그 결과가 판가름 난다.
“제7수색대장을 만나러 갔다고 해서 꽤 시간이 걸릴 줄 알았는데. 무슨 일이야?”
방의 문을 열고 들어가자 편한 옷을 입고 빵을 씹고 있던 엘렌이 나를 바라봤다.
“움직이게 될 병력과의 유기적 통신 및 화력 지원을 위한 마법사가 필요해. 네 도움을 받아서 적절한 실력을 가진 마법사들을 선발하고, 배치하고 싶은데.”
내 말에 엘렌이 물을 들이켜 입 안에 들어있던 빵조각을 삼킨 다음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준비할게.”
“다만, 다나 힐베른 건이 있으니까, 소지품 검사는 필수야.”
상대가 기를 쓰고 선발된 사람들 사이에 불순물을 풀어놓으려고 들면 완벽히 걸러내는 건 힘들겠지만, 그렇다고 아무나 받아들일 수는 없다.
내 말에 엘렌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 점에 유의할게.”
정보 관련 업무는 알버트가 담당한다. 인사는 도리안에게 맡겼다. 마법사의 통제는 엘렌에게 맡겨두면 문제 없을 거다.
엘렌과의 만남까지 끝낸 나는 다시 한번 사령관의 집무실로 향했다.
“마틴 레드우드.”
이야, 아까랑은 내 이름을 부르는 온도 차가 상당한데. 아무래도 갑작스럽게 등장한 알버트가 던진 대사가 이 친구의 심기를 상당히 불편하게 한 모양이다.
기분이 나빠지면 바로 태도가 변하는 게 바로 인간미 아니겠어. 그런 면을 생각해보면 이 친구도 참 인간미가 넘치는 녀석이라니까.
어차피 이 친구가 나에게 재떨이 같은 걸 던질 수 있는 상황도 아니니까, 녀석의 바뀐 태도는 전혀 걱정되지 않는다. 사령관이 서류를 살펴보다가 입을 열었다.
“그래, 차라도 한잔할 텐가?”
“감사합니다.”
찻잔을 앞에 둔 나는 바로 입을 열었다.
“요전에, 첩보국장님의 고압적인 태도 때문에 약간 불편하셨던 것 같은데요.”
내 말에 사령관이 서류를 내려놓고 나를 바라봤다.
“왕국의 첩보를 총괄하는 첩보국의 장이 아닌가. 다소 고압적인 태도를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네. 다만, 너무 갑작스러웠기 때문에 그로 인한 당황감이 쉽게 가시지는 않는군.”
사람을 때리기만 하면 안 되는 법이긴 하지. 이쯤에서 슬슬 달래주지 않으면 물건과 사람을 받아오는 입장에서 영 껄끄럽다. 가벼운 감기도 그냥 방치해두면 폐렴으로 진화하는 법이잖아.
“그 건으로 마음이 불편하셨다면 제가 대신 사과드리겠습니다. 저도 그렇고 첩보국장님도 그렇고,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내 말에 사령관이 으음, 하는 소리를 내고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사람이 온 것도 아니고 정말로 첩보국장 본인이 찾아왔다면야 그럴 만한 일이 있기 때문이겠지.”
“자세한 이야기를 전해드리지 못하는 건 정말로 아쉽습니다만, 저도 사령관님께는 여러 가지로 감사하고 있습니다. 신경이 워낙 날카로워져 있어서 실수를 하긴 했지만, 그래도 쿠르스트 산맥에서 곤란한 처지에 빠져있을 때 도움의 손을 내밀어 주신 분이 아닙니까?”
엄밀히 말하면 도움의 손길이라기보다는 주고받는 게 정해져 있는 일종의 거래 같은 거였지만, 굳이 여기에서 거래였다는 점을 강조할 필요는 없다.
“지금이라도 방금 상황에 대해서 사과의 말을 전하려고 한 것도 그런 뜻에서였습니다. 저를 위해 준비해주셨던 자리도, 사령관님의 마음은 정말로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말이라도 그렇게 해주니 고맙군. 안 그래도 여기로 불렀던 사람들이 불만을 토로하는 바람에 약간 입장이 난처해지려던 참이었어.”
나는 사령관의 말을 듣고 희미하게 웃음을 지었다. 그래, 말로 사과하는 건 이 정도면 충분하고 이제 우리가 고압적으로 나오는 바람에 튀게 된 불똥을 좀 처리해 달라는 뜻이겠지.
이미 이 친구가 원하는 것 정도는 하이랜더의 습격을 막아낸 이후 나눴었던 대화로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이번에는 저희가 국경 사령부에 도움을 받아야 하는 일이 정말로 많습니다.”
“그렇겠지. 당장 지금 자네가 나를 찾아온 이유도 그런 점이 있기 때문 아니겠나.”
나는 찻잔을 내려놓으면서 최대한 부드러운 어조로 말을 이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이번에 제공해주시는 적극적인 협조에 대해서는 저와 첩보국장님은 물론이고, 이 일을 지시하신 국왕 폐하와 세자 저하께서도 잊지 않으실 겁니다. 일이 잘 처리되고 나면 제가 직접 말씀을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네가 적극적으로 이 일에 협조해준다면, 응당한 보상이 있을 것이다. 이 정도만 해도 충분하다.
보상을 주는 상대가 무려 이 나라에서 으뜸가는 존엄과, 버금가는 존엄이다. 이런 사람들의 보상을 약속해준다면 굳이 구체적인 보상 내용에 대해서는 언급할 필요가 없다.
초거대 재벌가 2세가 저녁에 밥 한 끼 하자고 했을 때 '뭐지, 뜨끈한 순대국밥에 소주 한 잔 걸치자는 건가?'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은 없잖아.
재벌이 저녁 한 끼 하자고 하면 클래식 음악 질질 흘러나오고 두세 시간에 걸쳐서 하나씩 나오는 코스 요리 대접을 기대하기 마련이다.
이야기를 다 듣고 나자, 사령관의 표정이 대번에 밝아진다. 장마철 구름 낀 하늘 같은 면상에 갑자기 봄날이 찾아왔군.
“그렇겠지? 물론 나는 국왕 폐하의 지시를 받아 임무를 수행하는 입장에서 당연히 자네들을 적극적으로 도울 생각이었네. 더 나아가 폐하께서 나…… 아니, 국경수비대의 노고를 알아주신다면 그 이상의 영광은 또 없겠지.”
순간적으로 말을 바꾸는 거 봐라. 보통은 저런 걸 보면 순발력이 좋다고 생각하기 마련이지만, 오히려 대부분의 경우에는 정반대다.
너무 정신머리가 한곳으로 쏠려서 튀어나오는 말을 채 필터링하지 못했다는 증거니까. 어쨌든, 내가 한 말은 저 친구의 정신머리가 나가게 할 정도로 꽤 매력적인 이야기였던 모양이라는 점이 만족스럽다.
일단 이 정도면 충분할 것 같네.
“그럼, 앞으로 적극적인 협조를 기대해보겠습니다.”
“걱정하지 말게, 힘닿는 데까지 조력을 아끼지 않도록 할 테니.”
나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찻잔을 비운 다음 자리에서 일어났다.
“단순히 충분한 지원을 받는 걸로는 부족합니다.”
“그래, 대외적으로 의구심이 들지 않게 처리하라는 거겠지. 충분히 이해하고 있네.”
우리가 지원받을 물자는 세간의 관심을 사면 안 된다. 필요한 물건을 은밀하게 준비해줘야 한다. 어쨌든, 이 정도면 충분히 알아먹은 것 같아서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