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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우드-127화 (127/275)

127화

올리비에가 움직이기 전까지 우리는 꾸준히 준비를 계속했다. 테네스 공국에서는 소수의 인원들이 일을 처리하는 고요한 싸움이었지만 이번에는 다르다.

천이 넘는 사람이 움직이는 일이다. 예정된 전투는 피할 수 없고, 격렬할 것이다.

그리고 며칠에 걸쳐 제대로 쉬지도 못하면서 준비를 이어가던 시간은 알버트가 올리비에 황녀가 쿠르스트 산맥으로 향한다는 정보를 전해주면서 마침내 그 끝을 고했다.

“숨길 생각도 없어 보이더군. 마치 여봐란듯이 당당하게 향하고 있었어.”

보온을 위해 두꺼운 옷을 껴입은 알버트가 입김을 뿜어내며 산을 오르다가 나에게 말을 건넸다.

“그 여자는 그런 식이죠.”

싸움이 시작된 줄도 모르는 상태에서 상대를 두들기는 경우는 없다.

단거리 달리기에서 신호탄을 쏘아 올리는 것처럼 지금부터 시작이다! 라고 선언하는 걸 즐긴다.

상대가 아무 반응도 하지 못하고 당해버리면 재미없으니까.

“파악된 인원은 어떻습니까?”

내 말에 알버트가 후우, 하고 숨을 내쉰 다음 지팡이로 얼어붙은 땅을 콱 찍고 올라가며 말했다.

“제국이 방어하고 있는 케스트렐 산머리 제1방벽에 평상시보다 훨씬 많은 물자가 비축되고 있어. 그 양을 고려해보면, 올리비에 황녀는 약 2500명 정도의 병력을 준비한 모양이더군.”

케스트렐 산머리라. 평상시에는 거기야말로 제국 병사들이 목숨을 걸고 싸우는 최전선 중 하나였겠지만, 이번 싸움에서는 보급창의 역할을 담당하게 될 것이다.

“서로 보급선을 건드릴 수 없는 싸움이라니.”

이 싸움의 기괴한 점이다. 나와 올리비에, 두 사람 모두 상대의 보급창이 어디에 있을지는 훤히 알고 있다.

하지만, 그 보급창을 공격 할 수는 없다. 그 순간 제국과 왕국은 전쟁까지 생각해야 할 정도로 그 관계가 악화될 테니까.

“우리도 준비한 물자는 충분해요. 거기에 더해서, 싸움이 길어질 때를 대비해 예비 병력도 충분히 선발해 둔 상황이고요.”

옆에서 이야기를 들으며 산을 타고 있던 클로에의 말에 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 주변을 살폈다.

“조금 있으면 해가 집니다. 일단 오늘은 이 근처에서 야숙하는 편이 어떨까요. 병력들도 많이 지쳤습니다.”

내 말에 도리안이 뒤편을 슥 훑어보고는 혀를 찼다.

“그래 보이는군.”

수색대의 병력은 별로 힘든 기색이 없었지만, 문제는 관문 수비대에서 차출한 병력들이다. 험한 산길에 몰려오는 추위까지, 분명히 병력이 행군하기에는 지나치게 가혹한 상황이다.

도리안은 앞서 정찰 나간 수색대에게 지시를 내리기 위해 입에 피리를 물고 신호에 맞춰 불었다.

몰아치는 칼바람이 땅에 쌓인 눈발을 흩날리게 한다. 언제나 그렇듯이, 이 망할 놈의 산맥은 사람을 개불알 비슷한 수준으로 하찮게 만든다. 좁은 길 때문에 필연적으로 행렬이 길어질 수밖에 없고, 그 와중에 쌓인 피로나, 찰나의 방심으로 인해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저지르는 녀석들도 보인다.

“역시, 좀 많이 뽑은 감이 있는데. 그렇지 않나?”

알버트가 지렁이처럼 길게 꼬리를 물고 움직이고 있는 병력들을 보며 작게 탄식했다. 이 좁고 험한 산길을 천명이 훌쩍 넘는 인원이 행군하는 건 끔찍한 일이다.

“어쩔 수 없지 않습니까. 한 삼백에서 오백 명 정도의 인원이 적절했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그럼 머릿수에서 너무 밀리게 됩니다.”

그때, 몰아치는 찬바람 사이로 희미하게 울려 퍼지는 피리 소리.

“앞서서 주변을 정찰하던 수색대에서 연락이 왔다. 조금만 더 나아가면 이 샛길이 끝나고, 경사가 조금 완만해질 거야. 지금 속도라면…… 30분 정도는 더 나아가야겠군. 숙영도 충분히 가능하겠지.”

도리안의 대답을 들은 나는 고개를 돌려 뒤를 향해 크게 외쳤다.

“조금만 더 나아가자! 얼마 남지 않았다, 이 샛길이 끝나고 나면 숙영한다!”

내 목소리는 산울림을 타고 뻗어 나가기 시작했다. 내 목소리를 들은 병사들이 내 말을 따라 복창한다.

그리고 얼마나 더 걸었을까. 마침내 우리가 조심스럽게 나아가고 있던 좁고 위태롭기 짝이 없는 절벽 위의 샛길이 끝나고, 30-35도 정도의 경사를 가진 산비탈이 나왔다.

“여기라면 공간이 조금 협소하긴 하지만 어떻게든 숙영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내 말에 알버트가 주변을 둘러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바로 준비하지.”

나는 고개를 돌려 클로에를 바라봤다.

“클로에, 너는 뒤따르는 인원을 파악하고 행군 중 발생한 부상자가 없는지 확인해.”

말을 마친 나는 검을 뽑아 들고 주변을 살피다가 도리안을 바라봤다.

“저는 여기에서 숙영지 편성을 서두르겠습니다. 도리안 경은 수색대를 동원해, 주변에 위협이 될 만한 녀석들이 없는지 한 번 확인해주세요.”

예를 들면 하이랜더 같은 거. 내 말에 주변을 훑어보던 도리안이 대답했다.

“주변에 동물 발자국이 있어.”

나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네, 크기와 흔적을 고려해보면 근처에 늑대 굴 같은 게 있는 것 같습니다만, 그게 신경 쓸 사안은 아닙니다.”

소수의 인원이라면 모를까, 천 명이 넘어가는 인원이 머무르고 있는데 급습을 강행하는 바보 같은 동물은 없다.

“거참 황량하기 짝이 없네.”

그래도 산맥이라는 이름이 붙어있는데, 어쩜 이렇게 초목이라고는 한 포기도 안 보일 수 있는 건지.

“그럼, 소나무라도 자랄 줄 알았어? 날은 제법 쌀쌀하지만, 이 시기에는 눈보라가 몰아치는 일은 거의 없어.”

도리안은 능숙한 솜씨로 텐트를 짓기 시작했다. 나 또한 마찬가지로 빠르게 비탈길에 텐트를 빚어내기 시작했다.

1500명, 어차피 날씨도 추우니 쉰내 나는 남자 놈들을 한 텐트에 서너 명씩 밀어 넣는다면 불쾌하긴 하겠지만 서로의 체온이 최소한의 보온 효과는 제공해 줄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최대한 빠르게 있는 장비를 동원해서 텐트를 마구 찍어내기 시작했고, 그사이에도 속속들이 뒤따르던 병력들의 행렬이 산비탈에 도착하고 있었다.

그 사이, 우리는 임시로 지휘부로 사용할 큰 텐트 하나를 만들어 낸 다음, 병사들이 머무를 텐트를 계속해서 찍어내는 중이었다.

“첩보국장님과 저, 그리고 도리안 경이 한 텐트에서 자면 될 것 같은데요.”

내 말에 첩보국장이 나를 보고 한숨을 쉬었다.

“그래야겠지.”

여기에서 혼자 넓게 공간을 쓰고 싶다고 텐트를 혼자 쓰다간 동상은 물론이고 입이 돌아가서 밥도 제대로 먹기 힘들 수 있다.

“이걸로 전원 도착했어요!”

약 한 시간 정도가 지나서야, 도착하는 인원들을 확인하던 클로에가 지휘부 텐트 안으로 들어와 보고했다. 부상자가 78명, 실족사가 네 명이라. 부상자 중 두 명은 중상인 모양이다. 그 이외의 인원은 문제없이 도착했다.

그럼 엘렌도 도착했다는 뜻이겠지. 후미에 문제가 생길 것을 대비해서 그녀는 최후방으로 빼두었다.

“엘렌에게 물을 끓이도록 지시해줘.”

동행한 마법사들의 힘을 빌린다면 물론 이 추운 쿠르스트 산맥 안에서도 문제없이 머무를 수 있겠지만, 그건 마법사를 혹사하는 길이다.

하지만 불 피우는 것 정도는 충분히 가능하겠지.

“불이요?”

나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사방 천지에 눈이잖아. 녹여서 데운 다음, 수건을 적실 거야.”

이런 극한의 상황 속에서도 여유가 있을 때는 몸을 닦아야 한다.

“첩보국에서는 별다른 소식 없습니까?”

방금 알버트가 잠시 자리를 비웠었다. 대변이 마려워서 자리를 비우는 것 같지는 않았으니까.

“올리비에 황녀도 등산을 시작한 모양이더군. 케스트렐 산맥에서…….”

지휘부에 급하게 만들어진 조잡한 책상 위 지도를 확인한 알버트가 흑연 막대를 꺼내서 지도 위에 이런저런 표시를 하기 시작했다.

현재 올리비에가 나아가는 방향과, 첩보국의 요원들이 파악한 그 일대의 지리 정보다.

“이런 식으로 이동하는 모양이던데. 병력은 예상했던 대로 약 2500명 정도다.”

“저쪽에서 우리에게 상대가 파견한 첩보원은 없었습니까?”

내 말에 알버트가 대답했다.

“다섯 명 정도, 제국 정보처 녀석들을 잡아냈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있을 거야. 우리도 두 명의 희생이 있었지.”

그렇다면 우리의 이동 경로도 적이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을 거다. 모를 수가 없지. 이 산맥에서 이렇게 많은 병력이 움직이는 중이잖아.

“저쪽에 방해를 해보는 건 어떻습니까.”

올리비에가 움직일 것 같다는 정보를 듣자마자 우리는 바로 움직였다. 그리고, 이후에 우리는 올리비에가 제대로 장기 숙영을 위한 거점을 세우기 전까지는 녀석들 쪽으로 점점 다가가는 형국이 될 것이다.

본격적으로 올리비에와의 점령전을 시작하기 전에 피해를 좀 줄 수 있다면 나쁘지 않은 선택이 될 거다.

내 말에 알버트가 흠, 하는 소리를 냈다.

“가능한 이야기야. 상대의 병력은 이런 산에서 운용하기에는 지나치게 많거든.”

우리도 적은 편은 아니지만, 2500명이라는 사람 숫자는 이런 산에서는 곤란하다. 전달해야 하는 보급품의 양도 늘어나고, 편성해야 하는 숙영지의 규모도 거대해진다.

“목적 달성을 위해서는 결국 다섯 곳에 병력을 분산해서 배치해야 하니,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겠지.”

나는 지도를 계속 살펴보다가 입을 열었다.

“저 녀석들도 결국 우리가 지나왔던 것처럼 좁고 험한 길을 지나가야 합니다. 오랜 시간이 걸릴 테니, 샛길을 통과한 다음에는 숙영을 택할 수밖에 없겠죠.”

우리처럼. 내 말에 도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피해를 줄 수 있을 거야.”

“올리비에 황녀도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지 않을까?”

이야기를 듣고 있던 엘렌의 의견이었다.

“염두에 두고 있겠지. 그러니까, 직접적인 피해를 준다기보다는 피로를 누적시키는데 집중할 거야.”

소수의 인원으로 공격할 것처럼 굴어서 적에게 대응 준비를 강요한 다음, 그대로 물러나면 된다.

적 입장에서는 이제 좀 쉬려고 하는데 갑작스러운 급습으로 인해 충분한 휴식을 취하지 못하는 상황이 반복되는 거다.

그걸로도 충분하다.

* * *

케스트렐 산머리까지 가는 길에서, 안전을 보장할 수 있는 마지막 장소인 제1관문. 올리비에는 얌전히 의자에 앉아서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찻물에 티스푼을 적시고,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종이 위에 떨어뜨리기를 반복하고 있던 올리비에는 티스푼을 시계추처럼 흔들다가 이내 테이블을 작게 딱, 하고 때렸다.

그와 동시에 들리는 노크 소리.

“올리비에 황녀 전하.”

올리비에는 방금까지의 지루해 미치겠다는 표정을 싹 지우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급하게 일어나는 바람에 드르륵, 하고 의자 끌리는 소리가 울려 퍼진다.

“로베르 그리즈만!”

그런 외침과 함께 바로 문을 열자, 거기에는 청백색의 갑옷을 입은 남자 한 명이 투구를 벗어 옆구리에 낀 채 서 있었다.

“어서 들어와요. 기다리고 있었어요. 왜 이렇게 늦은 거예요. 많이 기다렸어요.”

양손으로 그의 팔을 잡은 올리비에가 그의 팔을 살짝 끌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출군을 위해 준비해야 할 일이 생각보다 많아서.”

올리비에는 그 말에 아, 하는 소리를 내고 살짝 눈치를 본다.

“미안해요. 정말, 정말로 이런 일에 부르고 싶지는 않았는데. 하지만, 저기…… 당신 말고는 달리 믿고 맡길 수 있는 사람이 없었거든요.”

말을 마친 올리비에가 손을 뻗어 로베르의 뺨을 한 번 쓰다듬은 다음, 그대로 로베르의 품 안에 안겼다. 곧바로 로베르의 몸이 순간적으로 움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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