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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우드-131화 (131/275)

131화

군대가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하자, 녀석들이 쌓아 올린 담벼락 위 하늘에서 머리통만 한 화염구나, 얼음으로 빚어낸 창 같은 것들이 마구 떠오르기 시작한다.

“적의 마법이다!”

병사들의 외침에 엘렌이 동행하고 있던 마법사들과 함께 입을 열었다.

“빛을 잃은 등대 아래. 길 잃은 조각배는 검은 물 아래로 침잠하고. 원을 그리며 퍼져나가는 파문. 호수 위의 달을 부순다. 그 풍경 아득하니, 손 닿을 길 없구나.”

하늘 위에 빚어지고 있던 적군 마법사들의 마법은 완성되려는 순간 급격하게 흔들리며 그 모양새가 무너지기 시작한다.

결국, 적이 준비한 마법 대부분은 완성되지 못하고 흩어졌다. 엘렌을 비롯한 마법사들의 방해를 견디고 가까스로 완성된 마법도, 그 위력이 현격히 낮아져 큰 피해를 주지 못했다.

“궁수! 조주우우우운!”

도리안의 외침과 함께 병사들이 활시위에 화살을 먹이고 쭉 당긴다.

“일제히! 발사아아아!”

얼음으로 빚어진 벽 너머를 향해 쏟아지는 화살, 그와 동시에 벽 너머에서도 아군을 노리고 화살이 날아들기 시작한다.

“자 그럼.”

이제 나도 좀 나서 볼까. 나는 마법사들과 함께 적의 마법을 요격하고 반격하는 엘렌 쪽으로 달려가서 말했다.

“엘렌, 마법 하나만 부탁하자.”

뒤이어진 설명을 들은 엘렌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려울 건 없지. 자. 1시간 정도는 유지될 거야.”

내 몸 주변에 순간적으로 희미한 빛이 일어났다가 사라진다. 바닥을 살펴본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다. 고생해라.”

엘렌에게 마법을 받은 나는 날아오는 화살들을 쳐내면서, 나는 하얀 벽을 향해 달려들어, 그대로 뛰어올랐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몸이 솟구쳐 대번에 발아래 하얀 벽이 자리 잡는다.

“안녕 친구들.”

성벽 너머에서 다가오는 병력들을 창으로 찌르려 대기하던 녀석들이 벽 위에 올라와 있는 나를 확인하고 창을 내 쪽으로 추켜든다.

“사람이 인사를 하잖아 새끼들아.”

내가 직접 나서서 움직일 필요도 없었다. 녀석들의 앞에 나타난 분신이 잠깐 사이에 무장한 병사 여섯을 쓸어내고 사라진다.

“벽 위에 적장 확인!”

그 말과 동시에 나를 노리고 쏟아지는 화살과 마법들. 나는 손목을 감싼 브레이서에 마력을 불어넣었다. 마법과 화살이 방벽을 뚫지 못하고 부딪쳐 소멸한다.

“댁들로는 못 막아. 가서 그 새끼 데려와.”

“마틴 레드우드!”

나는 그 외침을 듣고는 후우, 하고 심호흡을 하고는 자세를 잡았다. 청백색의 갑옷을 입고, 양손에 시미터와 스틸레토를 쥔 녀석이 나를 노리고 돌진한다.

“어디 보자.”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주변에 서서 어어어어, 하고 있는 적병 중 하나를 분신으로 확 떠밀었다. 녀석이 기괴한 소리와 함께 확 하고 앞으로 튀어나와 돌진하는 로베르와 나 사이에 선다.

“이런……!”

로베르는 달려들던 속력을 확 줄여, 병사 앞에 멈춰 섰다. 나는 픽 웃고는 밀었던 녀석의 머리통을 쪼개며 로베르를 향해 분신을 만들었다.

푹, 하는 소리와 함께 녀석의 가슴에 내 분신이 내지른 검이 박혔다. 로베르는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을 찌른 분신을 향해 왼손의 스틸레토를 찔러넣었다.

“비겁한 자식! 뭐 하는 짓이냐?!”

“보면 몰라? 싸우고 있잖아.”

갑작스러운 대면은 사람을 당황하게 했지만, 이번에는 알고 있던 녀석이 출현한 것뿐이다. 녀석의 이마에 팍하고 힘줄이 튀어나오더니, 나를 향해 시미터를 들어 올린다.

“아니.”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고 있는 힘껏 발로 바닥을 쓸었다. 바닥에 쌓인 눈이 그 힘을 이기지 못하고 확 일어나 녀석의 시야를 순간적으로 가린다.

시야를 막았던 눈의 커튼이 사라졌을 때, 나는 허상과 함께 둘이 되어있었다. 그런 나를 보고 로베르가 비웃는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멍청한 자식. 여기는 쌓인 눈 위다! 단순한 허상은…….”

말을 이어가던 녀석이 입을 다물었다. 나는 히죽 웃으며 허상을 움직여 검을 척하고 어깨 위에 올리는 행세를 하게 했다.

“단순한 허상은 뭐? 말을 꺼냈으면 마저 해야 할 거 아니야.”

허상이 눈 위에 발자국을 남길 수 없다는 건 나도 알아 병신아. 내가 벽을 넘기 전에 괜히 엘렌에게 마법을 걸어 달라고 한 줄 아냐.

엘렌의 마법이 유지되는 동안은, 나도 단순히 걷는 정도로는 발자국이 남지 않게 되었다.

“상관없다. 그렇다면 진짜가 걸리기 전까지 네 모습을 한 모든 것을 박살내 주지.”

말을 마친 녀석이 휘리릭, 하고 손에 쥐어진 스틸레토를 돌리며 나를 향해 달려들었다. 옆으로 빠지는 허상을 만들자. 녀석이 곧바로 검로를 바꿔 허상을 때리려 든다.

그 틈을 노리고 배에 검을 박아넣고, 그대로 위로 베어 올리자 녀석의 배가 활짝 열리며 안에 들어있던 것들이 쏟아져 나온다.

“거참. 지독한 능력이네.”

바닥을 향해 쏟아지던 내용물은 눈에 닿는 일 없이, 다시 쏟아지던 피와 함께 녀석의 몸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갈라졌던 배가 닫히고 상처가 사라진다.

다시 한번 무시무시한 속도로 휘둘러지는 시미터가 브레이서의 방어막을 가르고, 급하게 몸을 뒤로 젖힌 내 머리 위를 스치고 지나간다. 곧이어 내 가슴을 노리고 내려 찍히는 스틸레토는 급하게 내 몸 위에 만든 분신을 찌르고 멈춘다.

자세를 바로잡고 뒤로 약간 빠진 나는 양손으로 검을 쥔 채 입을 열었다.

“로베르, 힘내세요!”

익숙한 목소리가, 익숙하지 않은 어조로 내 귀를 간지럽힌다. 고개를 슬쩍 돌려보니 거기에는 올리비에가 세상 걱정은 다 품은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서 있었다.

“이야, 황녀 전하께서 직접 행차하셨네.”

그런 말과 함께 그녀를 향해 분신을 만들어 검을 휘둘렀지만, 분신의 검은 허공에 딱 멈췄다. 역시, 모습을 드러내도 괜찮다는 확신이 있으니 굳이 얼굴을 보인 거겠지.

“황녀 전하, 위험합니다!”

올리비에는 로베르의 외침을 듣고 나서도 양손을 꽉 모은 채로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그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올리비에의 표정을 살피다가 기가 막힌 표정을 지은 채 로베르를 바라봤다.

“뭐, 몰랐던 건 아닌데.”

이 새끼, 눈깔에 사랑의 콩깍지가 껴버린 모양이구만.

“얼마나 단순무식하면 저런 독사 같은 년에게 푹 빠질 수 있는 거냐?”

내 말에 로베르의 표정이 구겨졌다.

“황녀 전하에 대해 함부로 말하지 마라! 네 녀석 따위가 입에 담을 수 있는 분이 아니다!”

나를 향해 쏟아지는 무수한 참격에 관절이 시큰거리기 시작한다. 나는 살짝 몸을 숙인 채 쏟아지는 공격을 피하고 막아내다가 뒤로 쫙 물러나며 말했다.

“저년이 한 일을 몰라서 그러는 것 같은데.”

“알고 있다!”

그런 외침과 동시에 휘둘러진 시미터를 막아낸 내 몸이 뒤로 쫙 밀려난다. 막아낸 손이 시큰거린다. 나는 검을 쥔 손에 다시 힘을 넣으며 말했다.

“어디까지 알고 있냐?”

“칠색 내각, 그리고 그린모스 늪지대와 쿠르스트 산맥에서 벌인 일. 아니, 그 이상을 알고 있다.”

저런. 나는 그 말에 혀를 찼다.

“그걸 알면서도 좋아하는 건 신기하네. 원래 쌍년한테 하이힐로 밟히는 성적 취향이 있냐?”

대답 대신 질풍처럼 몰아치는 참격과 함께 내 몸에 생채기가 무수히 생겼다. 그사이 나는 녀석의 몸에 검을 몇 번이나 박아넣었지만, 이 자식의 몸은 상처입히는 게 의미가 없다.

애초에, 저놈은 방어를 생각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이렇게까지 사람을 몰아붙일 수 있는 거기도 하다.

다행히도, 녀석은 지금 나한테 화가 무진장 나 있어서 공격 자체는 하나하나가 무슨 대포알 같지만, 공격 자체는 직선적이고, 다음 행동을 생각하지 않는 중이다.

그래서 아직까지도 내가 밀리지 않고 어떻게든 상대할 수 있는 거다.

어쨌든, 이 친구가 저 독사 같은 여자에게 뻑이 갔다는 건 명백해 보이니까. 그쪽으로 성질을 좀 긁어볼까.

“너 올리비에랑 무도회에서 춤춰봤냐?”

대놓고 유치하긴 하지만…… 이런 단순한 친구들에게는 오히려 이런 게 직빵으로 먹히는 법이다.

내 말에 녀석의 표정이 확 변한다. 허상을 남기고 옆으로 돌아간 나는 녀석의 겨드랑이 쪽에 검을 박아넣은 다음 히죽 웃었다.

“파이크 왕국에 왔을 때, 저 여자가 한 번만 춰 달라고 애원을 하던데? 그때 시간만 조금 더 있었어도 아마 나랑 침대 위에서 배를 맞췄을 텐데. 아쉬워라. 저 여자도 그걸 바라는 것 같기도 했고.”

별로 듣기 좋은 이야기는 아니지만, 저 친구를 자극하기 위해서는 이런 더러운 이야기가 또 효과가 있거든. 실제로 눈깔 돌아가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녀석의 표정은 격렬한 변화를 겪고 있었다.

“으아아아아!”

단순한 외침이지만, 어쩐지 그 외침의 의미가 해석된다. 이 망할 새끼, 산채로 별 모양으로 갈라 죽여버리겠어! 뭐 이런 거겠지. 녀석의 공격에 이제는 이성이라고는 한 조각도 남아 있지 않았다.

마치, 투우사와 투우가 싸우는 것 같은 형국이다. 투우가 당연히 투우사 정도는 씹어먹을 수 있는 육체적 스펙을 가지고 있지만, 그렇다고 투우사를 이기는 건 아니잖아. 지금 상황이 딱 그렇다.

“확실히 좋은 여자지? 안고 춤을 출 때 느꼈는데, 허리는 가느다란데 맞닿은 가슴에서 느껴지는 감촉은 또 얼마나 기가 막히던지. 저런 여자들은 침대 위에 엎드리게 한 상태로 품으면 기가 막힐 텐데.”

“그 아가리를 닥쳐라! 네 녀석의 혀와 아랫도리를 작살내 주마! 이 개자식! 죽여 버린다!”

이런 식으로, 녀석을 확실히 빡치게 만들 수 있는 대사만을 골라 던지며 나는 일부러 적군이 몰려있는 장소 주변에서 녀석을 상대하고 있었다.

이미 눈에 뵈는 게 없어진 로베르의 검은 나를 작살내기 위해서 몰아치는 태풍 같았고, 그 태풍에 휘말리고 있는 건 나뿐이 아니었다. 올리비에의 병력들도 로베르의 몰아치는 공격에 큰 피해를 입기 시작한다.

궁수 진형이 붕괴되고, 마법을 준비하고 있던 마법사들이 급하게 마법을 취소하는 상황이 반복된다.

그 틈을 타, 아군 병력들은 속속들이 눈과 얼음으로 빚어진 벽을 넘어오고 있었다. 이제 슬슬, 여기는 결착이 난 것 같은데.

“후퇴, 후퇴한다!”

적의 지휘관으로 보이는 남자의 외침이었다. 더 이상 여기에 있어봤자 피해만 심각해진다는 걸 알아차린 모양이다.

“문제는…….”

지금 나랑 싸우고 있는 이 친구 귀에는 그 명령이 들리지 않는다는 사실이지.

로베르는 지금 사랑해 마지않는 올리비에와 했던 일들을 떠드는 걸 넘어서, 성희롱적인 발언을 늘어놓는 나 때문에 맛탱이가 갔거든.

횡으로 크게 휘둘러진 시미터를 막아내자 쩌정! 하는 소리와 함께 배트에 얻어맞은 야구공처럼 내 몸이 훙, 하고 허공을 날았다. 눈으로 만든 벽 위에 안착한 나는 메마른 표정으로 로베르를 바라보는 올리비에를 보고 히죽 웃었다.

그래, 전황이 안 좋으니 아무래도 여기를 버려야 할 것 같은데. 로베르의 상태가 좀 이상하지? 어쩔래?

“죽어라!”

확 뛰어오른 로베르가 나를 노리고 시미터를 내려찍는다. 옆으로 피하자 녀석의 시미터가 3m에 달하는 눈벽을 그대로 쫙 쪼개버렸다. 무식한 녀석.

“꺄아아아아아아!?”

그때, 올리비에의 비명소리가 울려 퍼졌다. 고개를 돌려보니 올리비에의 팔뚝에 화살이 박혀있다. 장담한다, 저거 그냥 바닥에 떨어진 화살을 스스로 주워서 팔에 박아넣은 거다.

자해라니. 하여튼 독한 년이라니까. 하지만 효과는 확실하겠네.

“올리비에?”

그리고, 그 비명을 들은 로베르가 퍼뜩 정신을 차린 모양이다. 급하게 주변을 살피던 로베르가 거점의 상황이 안 좋아졌다는 걸 깨닫고 뿌득, 하고 이를 간다.

“세상천지가 갈라져도, 네 놈 만큼은 반드시 죽여버리겠다.”

“그러시겠지.”

슬프게도, 말이랑 꼴아보는 눈깔만으로는 사람을 죽일 수 없어. 로베르는 곧바로 올리비에 황녀에게 달려가 그녀를 지키며, 제국의 병력들과 함께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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