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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우드-132화 (132/275)

132화

싸움이 끝나고 난 뒤, 올리비에는 굳은 얼굴을 한 로베르를 바라보고 있었다.

“왜 그러신 거예요? 로베르.”

로베르가 그 말에 울컥한 표정을 짓고 올리비에를 바라봤다.

“파이크 왕궁에서, 그 자식과 춤을 췄다는 이야기를 들었어. 그것도, 네가 직접 요청해서.”

그 말에 올리비에가 기가 막히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런 올리비에를 보던 로베르가 침을 꿀꺽 삼키고 올리비에를 바라봤다.

“있지, 그런 표정을 지어야 하는 건 나야. 지금, 내가 얼마나 큰 배신감을…….”

올리비에가 고개를 숙인 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로베르를 향해 외쳤다.

“나가요, 당장!”

올리비에의 목 메인 외침에 말을 이어가려 하던 로베르는 고개를 들어 올린 올리비에의 얼굴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눈에서 눈물이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배신감? 내가 당신과 함께 있기 위해서 어떤 일을 하고 있는데, 내가 어디까지 노력하고 있는데! 지금 저한테 배신감을 느낀다고 하셨어요?!”

올리비에는 말을 마치고 나서 몸을 부르르 떨고, 가슴 언저리로 손을 가져가 그대로 옷과 살을 함께 쥐어뜯기 시작했다.

“황녀, 아니. 더 나아가 사람이 하면 안 될 짓거리까지 해가면서 나는 당신과 함께 있으려고 뭐든지 했어! 배신감, 어떻게 나한테 그런 이야기를 꺼내는 거예요?”

로베르의 몸은 딱 굳어서 움직이지 않았다. 올리비에는 다시 고개를 숙이고 중얼거렸다.

“춤이요? 네, 췄어요. 필요한 일이었으니까! 그리고, 그건 하고 싶지 않았지만 해야만 했던 수십, 수백 가지 일 중 하나였죠! 근데 당신은 내 맘도 몰라주고, 내가 왜 그래야만 했는지 알지도 못하면서 고작, 고작!”

올리비에는 의자에 털썩 주저앉아서 양손을 들어 얼굴을 가리고 작게 중얼거렸다.

“질투 같은 것 때문에 사람을 몰아붙이는 거예요? 나도 올리비에랑 춤추고 싶어, 그런 어린애 같은 생각 때문에 배신감이라는 단어까지 입에 올리는 거예요?”

“올리비에, 나는 그게 아니라…… 미안해.”

올리비에는 고개를 저었다.

“됐으니까 나가세요. 아니, 이 길로 그냥 내 눈앞에서 평생 사라져요. 당신 같은 사람 나는 모르니까! 바보 같은 여자. 내가 당신에게 그 정도밖에 안 되는 사람이었다면, 나는 도대체 왜 당신 하나만 바라보고 이런 일을 벌였던 걸까요.”

말을 마친 올리비에가 눈을 질끈 감았다.

“너무 바보 같아.”

올리비에는 그렇게 중얼거리고 나서 로베르를 노려보며 말했다.

“나가라고 했잖아요. 앞으로 내 앞에 나타나지도 마세요.”

“정말, 정말로 미안해. 나는 그런 뜻으로 한 말이 아니었어, 올리비에! 다시는 이런 일 없을 거야!”

올리비에에게서 버림받는다는 선택지는 로베르가 선택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가문을 버렸다. 기사로서 얻을 수 있는 모든 영광과 명예까지 버려가며 올리비에를 선택했다. 지금 와서 올리비에에게 버려진다면, 로베르에게 남은 건 아무것도 없다. 지난 몇 년 동안 로베르의 삶은 서서히 올리비에라는 여자에게 잠식되었고, 이제는 그녀가 삶의 전부가 되었다.

모든 걸 버려가며 마약을 선택한 중독자에게, 마약을 빼앗아가면 어떻게 될까. 그 사람은 마약을 다시 하기 위해서 어디까지 할 수 있을까?

올리비에와 로베르의 관계는 마약과 중독자의 관계를 닮아있었다.

당연히, 올리비에도 그걸 알고 있다. 그녀가 그렇게 만들었으니까. 로베르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올리비에가 등을 돌린 채 말했다.

“정말요?”

올리비에의 말에 로베르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진심이야. 다시는 이런 시시콜콜한 일 가지고 뭐라고 하지 않을 테니까.”

“모르겠어요, 당신이 정말로 미안해하는 건지. 내가 당신의 말을 믿을 수 있을지 어떨지.”

그 말에서 일말의 희망을 느낀 로베르가 황급하게 입을 열었다.

“내가 뭘 해야 믿을 수 있겠어? 뭐든지 할 테니까.”

“뭐든지?”

“뭐든지.”

등을 돌린 채 어깨를 들썩이며 그 이야기를 듣고 있는 올리비에의 표정은 냉담했다.

“너무 화났어요. 그리고 실망했어요. 이런 일로 로베르가 저에게 그런 말을 할 줄은 정말로 몰랐거든요. 로베르, 당신이 잘못한 거죠?”

“맞아, 내가 잘못했어. 미안해.”

“그럼 제가 벌을 내려도 될까요?”

“그래. 뭐든지 받을게. 네가 화를 풀어준다면…….”

올리비에는 고개를 살짝 돌려 로베르의 얼굴을 확인한 다음 다시 휙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그럼 우선 무릎 꿇고, 절하는 건 어때요? 30분 정도. 그리고, 그 사이 제가 뭘 하더라도 참아줬으면 해요.”

올리비에의 말에 로베르가 움찔했다. 곧바로 올리비에의 말이 이어졌다.

“고민하시는 건가요? 그럼 됐어요. 제 화를 풀어준다고 하셨으면서 무릎도 못 꿇는다면, 저도 당신 같은 남자 필요 없어요.”

모든 것을 버리고 선택한 사람에게 버림받을지도 모른다고 하는 공포. 로베르는 무릎을 꿇고 이마를 바닥에 가져갔다.

“절대 움직이지 마세요.”

올리비에는 그렇게 중얼거리고 몸을 돌려 로베르를 내려다봤다. 그 얼굴에는 조금의 감정도 담겨있지 않았다.

그저 필요하기 때문에 진행하는 작업일 뿐이다. 더 이상 로베르의 폭주는 용납할 수 없다. 누가 위에 있는지 명확하게 인지시키고, 저게 더 이상 주인의 허락 없이 멋대로 움직이지 못하게 해야 한다.

마틴 레드우드가 한 번은 로베르의 심리를 파고들어서 성과를 얻었을지 몰라도 두 번은 없어야 하니까.

“으윽.”

바닥에 무릎을 꿇고 이마를 땅에 박은 로베르의 등을 올리비에가 손에 접시와 물병을 든 채 의자 삼아 털썩 앉았다.

“싫으시면 언제든지 말하세요. 저도 사실은 이러고 싶지 않지만……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당신을 믿을 수 없고, 그렇다면 저는 더 이상 당신과 함께할 수 없어요.”

말을 마친 올리비에가 로베르의 뒤통수를 쓰다듬었다.

“당신을 사랑하니까. 정말로 다시는 당신이 나에게 그런 슬픈 이야기를 하지 않을 거라고 믿고 싶으니까 이러는 거예요. 알고 있죠?”

로베르는 대답하지 않았다. 곧바로 올리비에가 약간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면, 이번에도 또 제가 이러는 마음을 이해해주지 못하시는 건가요? 아까 그 이야기를 꺼낼 때처럼?”

“아니야, 이해해!”

얼굴을 땅에 처박은 채 이해한다고 외치는 모습이 꽤 웃겼는지, 올리비에의 입가에 약간의 미소가 걸렸다 이내 사라졌다.

“고마워요, 로베르. 하지만, 사랑한다는 말은 못 하겠어요. 아직은 잘 모르겠어. 당신이 정말로 나를 사랑하고 있는지.”

“나는, 너를 사랑하고 있어.”

로베르의 말에 올리비에가 음, 하는 소리를 냈다.

“하지만, 저는 당신을 위해서 뭐든지 했는데 당신은 저에게 배신감을 느꼈다고 했잖아요?”

“그건…….”

로베르가 말을 이어가려고 하자 올리비에가 탁 하고 로베르의 뒤통수를 때렸다.

“쉬이, 말은 필요 없어요. 이번에야말로 보여주세요. 당신이 저를 위해서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 그걸 알고 나면, 저는 가슴에 남은 상처를 극복하고 다시 이전처럼…… 아니, 이전보다 더 당신을 사랑할 수 있어요. 분명히.”

올리비에의 처벌은 그날 밤부터 시작해 다음 날 밤까지, 한순간도 쉬지 않고 이어졌다.

* * *

후퇴하는 군대가 물자를 챙기는 건 굉장히 어려운 일이다. 당연히 녀석들이 거점에 준비해놓은 물자들은 그대로 쌓여 있었지만…….

“이럴 것 같더라니.”

녀석들이 두고 간 군량을 약간 집어 살에 비벼보자, 얼마 지나지 않아 살갗이 시뻘겋게 달아오르고, 고름이 들어찬 수포가 생긴다.

“독인가요?”

“그래, 우리가 공격을 준비하는 동안 식량에 뿌려놓은 모양이야.”

이러면 이 식량은 그냥 못 쓰는 물건이 된 거다.

“어쩔 수 없지 않나. 애초에 우리가 적에게서 약탈한 물자에 의존하는 식으로 계획을 짠 것도 아니니, 그냥 좀 아까울 뿐이지.”

노획은 어디까지나 보너스다. 언제나 자기가 이길 거라고 믿는 미친 사람이 아니고서야 노획을 통해서 모든 보급을 해결하겠다는 건 정신병에 걸리지 않고서야 짤 수 없는 계획이니까.

“무너뜨렸던 방벽은 지금 보수 중에 있어요.”

클로에의 보고를 받은 나는 고개를 끄덕인 다음 주변을 살펴보다가 기괴한 오브제를 확인하고는 입을 열었다.

“엘렌, 저게 제단이지?”

내 말에 엘렌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아직은 만들고 있을 뿐이었지만.”

석제 원탁 위에 검은 염소의 머리통을 통째로 잘라, 입에 접시 하나가 물려 있었다.

석제 원탁을 중심으로 복잡해 보이는 마법진이 원형으로 자리 잡고 있고, 짐승의 뼈로 만든 여섯 개의 촛대가 그 마법진의 테두리를 따라 세워져 있다.

“이건 두개골이잖아.”

머리뼈를 가로로 착 쪼개서 윗부분을 그릇처럼 사용한 거다. 원효대사의 해골 물이랑 비슷한 원리다. 촛대 위에 끼워져 있는 커다란 양초를 바라보던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밀랍이 아니잖아? 이거 재료가 뭐지.”

양초를 만지자 기름기가 약간 느껴진다. 동물 기름 같은 걸로 만든 모양인데.

엘렌이 잠깐 침묵하고 있다가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그건…… 사람 기름으로 만든 양초야. 미리 말해주지 않아서 미안해.”

“이런 씨팔.”

나도 모르게 욕이 튀어나왔다. 진짜, 별짓을 다 하네.

이 세상 고대인들의 대가리 속에는 도대체 뭐가 들어있었던 거야. 진짜, 더럽게 미개하잖아. 다문화 상대주의? 좆까라지. 그게 인간 기름으로 만든 양초까지 포용하는 개념은 절대 아닐 테니까.

카루토스 타카운이 사람 가죽을 벗겨서 책을 만들어 버린 이유가 있었네! 그 당시에는 정말로 그런 짓거리가 상식이었던 거야! 잠깐 인상을 쓴 채 그 제단을 바라보던 나는 차분한 어조로 엘렌에게 질문을 던졌다.

“뭐, 박살 내기 위해서 필요한 절차라도 있어?”

“아니. 그냥 박살 내는 걸로 충분해.”

“좋아.”

그 모습을 확인한 나는 곧바로 전력을 다해 주먹을 휘둘렀다. 뻐억, 하는 소리와 함께 돌로 만들어진 원탁이 박살 나고, 사방으로 퍼지는 충격파가 그 역겨운 양초가 꽂혀있는 촛대를 무너뜨렸다.

“제단의 크기는 역시 별로 크지 않네.”

내 말에 엘렌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면 거점을 만들지 않고 소수의 사람을 보내서 몰래 만들 수도 있다고 했었잖아.”

“그래서 첩보국에서 고생해주고 있는 중이고.”

여기에 거점을 잡았다는 걸 안 순간부터, 이 거점을 꼭짓점 삼아 오각형을 만들 수 있는 장소 20곳에 모두 알버트의 요원들이 파견되어있고, 만약을 대비해 제국이 수비하는 쿠르스트 산맥 일대를 순찰하는 요원들도 있으니까.

올리비에가 우리에게 들키지 않고 개수작을 부리기는 힘들 거다.

“보고가 들어왔다. 올리비에 황녀가 한 번에 세 곳에 제단을 만드는 모양이더군.”

박살 난 제단을 바라보고 있으려니 알버트가 나에게 와서 그런 정보를 전달해주었다.

“병력은?”

내 말에 알버트가 지도를 펼치며 대답했다.

“병력은 둘로 갈라져서 여기와 여기로 향하는 중이다. 그리고, 남은 한 곳은…….”

“로베르가 소수 인원과 함께 갔겠군요.”

내 말에 알버트가 심각한 표정을 짓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거의 나한테 초대장을 돌린 수준이군.”

우리가 병사를 둘로 쪼개는 건 힘들다. 여기를 치켜야 하는 인원을 제외하고 나서, 병력을 쪼개면 기꺼해야 300에서 400 정도의 병력을 각 거점으로 보낼 수 있다. 그걸로는 싸움이 될 리가 없다.

따라서 아군 병력은 장소 두 곳 중 하나를 택해서 집중공격해야 한다. 그리고, 그사이에 나는 로베르를 상대해야 한다.

“증원 병력이 도착할 때까지 기다리는 건 어떨까요?”

클로에의 말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럴 시간은 없어.”

“하지만, 로베르 그리즈만이 마틴 님과 싸우는 건 저도 봤어요. 위험한 사람이에요.”

클로에도 상대의 강력함은 인지하고 있는 모양이다. 나는 그 말에 대답했다.

“괜찮아. 방법은 있어.”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고 나서 후우, 하고 숨을 내쉰 다음 알버트를 바라봤다.

“제 얼굴 좀 빌려가주시죠.”

내 말에 알버트가 응? 하는 소리를 내고 나를 바라봤다.

“저는 로베르가 지키고 있는 제단으로 향하겠습니다. 첩보국장님은 수색대와 함께 구성된 소수 인원을 이끌고, 클로에와 함께 거점 중 하나로 향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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