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드우드-133화 (133/275)

133화

내 말을 들은 클로에가 아, 하는 소리를 냈다.

“그렇군요. 좋은 방법 같아요.”

나는 모습을 숨기고 로베르가 지키는 제단으로 향한다. 알버트는 내 모습을 한 채 소수 인원을 데리고 두 개의 거점 중 하나를 공격하는 움직임을 보인다.

그 사이, 다수의 병력으로 구성된 본대는 또 다른 거점을 공격한다.

“마틴 님이 로베르와의 싸움을 피하고 소수 인원으로 거점을 공략하려는 움직임을 보인다고 착각할 거예요.”

“당연히, 나를 상대하기 위해 배치했던 로베르는 내가 거점에 등장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쪽으로 향하겠지.”

그사이 나는 홀몸으로 로베르가 지키고 있던 장소로 짓쳐들어가 제단을 박살 내고, 바로 본대를 향해 달린다.

내 모습을 하고 있던 알버트는 내가 제단을 부쉈다는 이야기를 듣는 즉시 해당 거점에서 물러나, 나와 마찬가지로 본대에 합류한다.

여기에서 주의해야 할 점은 하나다.

“올리비에의 위치 파악이 정말 중요합니다. 그 여자는 첩보국장님이 저로 모습을 바꾼다고 해도 대번에 알아차릴 거예요.”

나도 알버트가 다른 모습으로 바꾼다고 해도 어렵지 않게 눈치챌 수 있다. 올리비에가 못 할 리가 없다. 고로, 알버트가 내 모습을 하고 모습을 드러내는 장소는 올리비에가 없는 거점이어야 한다.

“알았네. 첩보원들을 시켜 그 점에 대해서 다시 한번 확인하게 하지.”

“두 거점 사이의 거리가 별로 멀지 않습니다. 작전을 실행하기 바로 전까지도 계속해서 확인해야 합니다.”

고작 3km.

그렇기에 우리도 이런 작전을 짤 수 있는 거다. 반대로 말하면, 올리비에도 언제 어디로든지 향할 수 있다는 뜻이다. 올리비에가 알버트의 위장을 눈치채는 순간 이 계획은 못 써먹을 물건이 된다.

오히려, 괜히 나와 클로에, 엘렌을 비롯한 주요 전력들이 뿔뿔이 흩어지는 바람에 아무것도 달성하지 못하는 병신같은 상황이 될 수도 있다.

“병력의 피로도를 고려해도, 내일 밤 중으로는 계획을 실행해야 합니다. 도리안 경은 다른 병력들과 함께 이 거점을 지켜주시기 바랍니다.”

밤까지 아군 병력이 휴식하는 동안 제단은 세 개가 완성될 것이다. 전투는 장작에 휘발유를 들이붓고 태우는 것처럼 체력 소모가 격렬하기 때문에, 휴식도 없이 바로 다음 싸움을 준비한다는 건 말도 안 된다. 병력들이 무슨 기름 먹고 움직이는 자동차는 아니잖아.

게다가, 파악한 바에 따르면 만들어지고 있는 제단은 다섯 개가 아니라 세 개다. 굳이 휴식까지 걸러 가면서 급하게 들이댈 이유는 없다.

따라서, 휴식하는 사이 제단의 완성은 어쩔 수 없다고 쳐도, 완성 이후 일정 시간을 버텨 하이랜더의 무덤으로 가는 길이 열리는 건 막아야 한다.

내 이야기를 들은 도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문제없어. 거점을 지킬 병력들로 하여금 최대한 방벽 일대를 경계하게 하면서, 출동할 병력들에게는 휴식여건을 보장해두마.”

좋아, 이걸로 끝. 우리는 맛없는 밥을 먹고 눈으로 몸을 비벼 씻은 다음 냉동실처럼 차가운 텐트 안에 쑤셔박혀 다음 날 새벽을 기다렸다.

“으브브브브브븝.”

그런 소리를 내고 눈을 팍 하고 뜬 나는 눈썹에 엉겨 붙은 서리를 털어내고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한번 크게 몸을 떨었다.

“춥고 배고프고 힘들다니.”

정말 거지가 따로 없잖아. 밖으로 나와 온 천지에 깔린 눈을 한 뭉치 집어 얼굴을 벅벅 비비자 골통에 얼음이 가득 차는 것 같은 느낌과 함께 정신이 번쩍 든다.

“일어났나? 안 그래도 깨우려고 했는데.”

무기를 챙긴 도리안이 나를 보고 히죽 웃었다.

“밤새 고생하셨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전부 깨웠다. 차나 한잔해라.”

나무를 깎아 만든 컵에 뜨거운 찻물이 차오르고, 나는 자리에 서서 찬바람을 맞으며 하얀 김이 펄펄 쏟아지는 차를 홀짝이기 시작했다.

“빠르면 오늘 오후, 늦으면 내일 새벽 중으로 관문에서 출발한 보급품이 도착할 겁니다. 만약 오지 않는다면…….”

“무슨 문제가 생긴 거겠지. 바로 사람을 풀어서 조사를 시작할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말을 마친 도리안이 후릅, 하고 차를 마신다. 그사이 나는 이런저런 고민을 했다. 보급품도 여기까지 오기 위해서는 호위 병력이 필요할 것이다. 한 200-300명 정도는 붙여두었을 것 같은데.

“감사합니다. 아, 그리고 보급품을 여기까지 끌고 온 호위 부대도 거점 병력으로 편입해버리세요.”

“그래도 되겠나?”

“국경 수비대에서는 별말 없을 겁니다.”

최대한의 협조를 해주기로 사령관과 이야기를 끝냈다. 이런 걸로 문제 삼지는 않겠지.

“아니, 병력들 말이야. 식량만 전달해 주는 걸로 알고 있었는데 목숨 걸고 싸우라고 하면 반발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선택하게 하면 됩니다. 돌아가겠다고 하는 자들은 돌려보내세요. 대신, 남으면 지금 여기에서 싸우는 병력들과 마찬가지로 전역을 보장해주겠습니다.”

내 말에 도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러면 대부분 자발적으로 참가하겠군. 그렇게 진행하도록 하지.”

도리안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으려니, 죽은 것처럼 조용하던 거점 안의 텐트에서 사람들이 나와 바로 필요한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차를 한 모금 마신 나는 약간 인상을 구겼다. 이게 벌써 미지근하게 식어버리네.

“본대와 별동대 전원, 출동 준비 끝났어요.”

아직 약간 피곤한 기색이 남아 있는 클로에의 표정을 본 나는 픽 웃었다.

“밤에 안 자고 뭐 했냐?”

내 말에 클로에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얼어 죽지 않으려고 최선을 다했죠.”

“고생했다. 첩보국장님은?”

“지금 지휘용 텐트 안에서 대기 중이세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클로에를 향해 작게 속삭였다.

“텐트에서 들어갔다 나온 다음, 네가 보는 마틴 레드우드는 내가 아니라 첩보국장이다. 혹시 말실수하지 않도록 조심해.”

클로에는 알버트와 함께 소수의 별동대를 이끌어야 한다. 어느 시점부터 알버트가 나를 대신하는지는 알 권리가 있다. 내 말에 클로에가 순간 움찔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대화를 마친 나는 텐트 안으로 들어갔다.

“아, 왔군.”

“벌써부터 그 모습을 하고 있을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내가 내 모습을 한 알버트를 보고 있으려니 꽤 기분이 이상하다. 알버트는 의자에 앉은 채 테이블 위에 양다리를 걸쳤다.

“뭐 어때. 크게 상관없잖아.”

말을 마친 알버트가 자리에서 일어나 자기 몸을 이리저리 살펴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대충 이 정도면 되겠지. 거점에 있는 녀석들이 지금의 나를 보면 꼼짝없이 자네라고 생각할 거야.”

“네, 그럴 것 같습니다. 저는 이 안에 있다가 천천히 나올 테니. 가서 예정된 대로 진행해주시기 바랍니다.”

대화를 마친 알버트가 나갔다. 나는 잠시 지휘 텐트 안에서 시간을 보냈다. 그 사이 바깥은 쉬지 않고 분주하게 움직이는 소리가 들린다.

“출발!”

내 모습을 한 알버트의 외침과 함께 병력들이 움직이기 시작하고, 나는 곧바로 은신하고 마력을 모으며 로베르가 지키고 있는 제단 근처로 향했다. 은신을 사용했고, 알버트가 내 행세를 하고 있다는 건 신뢰할 수 있는 인원들 이외에는 모르니까. 적군은 물론이고 아군들조차 지금 병력을 이끌고 있는 게 내가 아니라는 생각은 하지 못할 거다.

“엘렌과 피터가 잘 해줘야 할 텐데.”

알버트와 클로에는 별동대를 지휘하고, 도리안은 거점을 지켜야 한다. 가장 많은 병력을 지휘해야 하는 건 수색대의 부대장이었던 피터와 엘렌 리버플로우다.

“뭐, 큰 문제는 없겠지.”

눈이 덮인 산을 달려 올라가던 나는 목적한 장소 근처에 멈춰 주변을 살폈다.

“찾았다.”

얼음과 눈이 엉겨 붙은 거대한 돌덩이 아래에 어제 봤던 그 제단이 완성되어 있었다.

“저건…….”

로베르는 홀몸이 아니었다. 내 시선을 끄는 녀석들과 함께 주변을 지키는 중이었다. 이전에 올리비에가 소개해줬던 눈에 뵈는 거 없고 귀에 들리는 게 없는 녀석들.

그 자식들 여섯 명이 로베르와 함께 해당 제단 주변을 지키고 서 있다. 나는 녀석들을 살피며 시간을 보냈다.

마침내 새벽을 넘어 분명히 아침이라고 부를 만한 시간이 되었다. 이 시간 즈음이라면 분명히 별동대와 본대도 각각 목표한 거점에 도착하고 제법 시간이 지났을 텐데…….

“로베르 그리즈만 경!”

그런 외침이 저 산머리 너머에서 울려 퍼졌다. 거기에는 병사 하나가 제국의 깃발을 든 채 서 있었다.

“무슨 일이냐!”

“제2거점에 마틴 레드우드가 소규모 병력과 함께 등장했습니다! 병력은 가려 뽑은 정예로 보이고, 부관으로 알려진 클로에 로니세라의 모습도 보입니다!”

좋아, 이야기는 전달되었다. 이제 그다음에 저 녀석이 어떻게 행동하느냐가 중요한데. 이야기를 들은 로베르 그리즈만이 가만히 서서 고민하다가 주저하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화, 황녀 전하께서는 나에게 여기를 지키라는 지시를 내리셨다!”

음? 이건 전개가 조금 이상해지는데. 안 움직일 거냐? 나는 약간 당황한 표정을 지은 채 눈에 힘을 주고 녀석을 바라봤다.

“하지만, 마틴 레드우드입니다! 소규모 병력이라고 하지만 무시할 수 없는 전력입니다! 거점이 위험할 수도 있습니다!”

“나는 황녀 전하의 지시를 따를 것이다!”

이야기를 듣고 있던 나는 작게 하아,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두 번이나 로베르가 통제를 벗어나서 일을 그르치는 상황을 만들지는 않겠다는 건가.

“병력들이 두려움에 떨고 있습니다!”

“젠장맞을, 안 간다고 했잖아!”

그 말을 마친 다음 로베르는 주변을 둘러보다가 외쳤다.

“어쨌든 나는 거기로 가지 않을 거다.”

“그럼 거점이 위험합니다!”

로베르가 다시 한참을 서 있다가 대답했다.

“나를 제외하고, 여기를 지키고 있는 녀석들을 보내겠다고 전해라!”

“……알겠습니다!”

말을 마친 병사가 사라지고 나서, 로베르는 완성된 제단의 돌탁자를 툭툭 두들기기 시작했다.

뭐 하는 거지?

로베르가 더듬거리면서 돌탁자를 다 치고 나자 갑옷 입은 녀석들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아니 씨팔, 저걸 어떻게…….”

눈도 멀었고 귀도 막혔다면서?!

탁자를 두들긴 건 어떻게 알아차린 거지. 뭐 진동 같은 걸 몸으로 느끼는 건가, 지들이 무슨 곤충이야?

그 정도면 내가 은신을 썼다 해도 들켰겠는데. 인간의 감각 수준을 초월했잖아. 은신뿐 아니라 허상도 안 통했을 거다.

“그냥 은신 쓰고 제국군의 거점에 몰래 들어가서 올리비에의 목을 따려고 했었다면 조질 뻔했군.”

저 녀석들이 전부는 아니었을 테니까. 올리비에가 저 녀석들을 끼고도는 한, 재빠르게 올리비에의 목을 따고 돌아가는 일은 거의 불가능하다.

다행히, 갑옷과 투구를 뒤집어쓴 녀석들이 향하는 경로는 나와는 정반대였다. 들키지는 않을 거다.

“그나저나, 저걸 아직도 다 못 외워서 신호가 적혀있는 수첩을 보고 두들겨야 할 정도라니.”

확실히 머리가 좋지는 않은 편이구나.

“이런 상황이라면 몰래 돌아가서. 제단을 부순 다음 직면할 수도 있긴 한데.”

은신을 써서 그런 짓을 할 거라면 내가 확실히 로베르와 싸워서 죽일 수 있다는 확신이 있어야 한다. 녀석이 살아 돌아간다면 일어났던 일을 올리비에에게 일러바치겠지.

내가 지금까지 잘 숨기고 있었던 히든카드를 까는 거다. 당연히, 올리비에는 이에 대한 대항책을 다음부터 강구하겠지.

“제단을 먼저 부수고 시작하는 게 그렇게까지 가치 있는 일인가?”

나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은신을 까지 들키는 건 역시 너무 위험하다.

“설원에서 1대1이라.”

씨발, 별로 하고 싶진 않은데. 근처 비탈길에 몸을 숨긴 나는 주변에 수상한 녀석들이 없는 걸 신중하게 확인한 다음, 은신을 풀고 검을 쥔 다음 로베르를 향해 나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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