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화
로베르와 내 눈이 서로 마주쳤다. 검을 들고 자세를 잡은 나는 곧장 녀석을 향해 뛰어들어 검을 휘둘렀다. 쿠웅, 하는 소리와 함께 녀석이 뽑아든 시미터와 내 검이 서로 부딪쳤다.
“얼굴이 말이 아니네, 밤에 안 자고 뭐 했냐?”
“마틴 레드우드. 네 녀석만 없었어도!”
로베르가 팔에 힘을 주자, 녀석을 내려찍은 내 검이 확 위로 들어 올려진다. 곧바로 녀석이 뽑아 든 스틸레토가 내 겨드랑이를 노린다. 왼손을 뻗어 스틸레토를 쥔 손목을 꽉 잡아 그 공격을 막은 나는 발로 녀석의 가슴을 차며 공중제비를 돌며 뒤로 빠졌다.
“내가 뭘 어쨌다고 눈깔에 불을 켜고 지랄이야.”
화내는 이유라도 좀 알고 싶은데.
녀석은 대답 없이 나를 향해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차라리 이렇게 되어서 다행이군. 네 녀석 만큼은 오롯이 내 손으로 찢어발겨 주마! 그러면…….”
나는 쏟아지는 참격을 허상과 분신을 만들어 피하고 막아내며 대꾸했다.
“그러면?”
“그녀도 나를 용서해주겠지!”
저런, 올리비에를 말하는 건가.
“용서해준다고 확실히 들은 거야?”
“……죽어라!”
또 대답이 없네. 망할 자식이 아주 지 할 말만 하는구나. 이건 의사소통이 아니라 차라리 젖먹이가 우는 거랑 비슷하군.
그 사이, 나는 슬쩍 녀석의 뒤편에 자리 잡은 제단을 확인하고 거기에 분신을 만들었다.
“개수작 부리지 마라!”
제단을 향해 검을 휘두르려 하는 분신을 상아색의 섬광이 꿰뚫었다. 상아색 섬광의 정체는 녀석이 손에 들고 있던 스틸레토였고, 그건 지금 제단 뒤편의 돌덩이에 박혀있다.
“다시는 실수하지 않는다.”
“말은 잘해요.”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다시 제단을 향해 분신을 만들었다. 그때, 녀석이 입은 청백색 갑옷 중 건틀릿이 희미하게 빛을 뿌렸다.
벽에 박혀있던 스틸레토가 쑥하고 뽑히더니 녀석의 손을 향해 날아오며, 내가 만들어낸 분신의 머리통을 강하게 후려친다.
그 충격을 이기지 못한 분신이 흩어지고, 녀석의 손에는 다시 상아색의 스틸레토가 쥐어졌다.
“갑옷이랑 한 세트였던 모양이네.”
갑옷이 자석처럼 스틸레토를 끌어당기는 건가. 회수하는 속도가 보통을 넘었다. 당기는 힘이 엄청난 모양인데.
진작에 사용하지 않은 이유는 이걸 사용할 마력이 있으면 아껴두었다가 공격당한 다음 상처를 복구하는데 쓰는 편이 더 이득이기 때문이었겠지.
지금은 그게 아닐 뿐이고.
“끈질기네. 역시 여자가 좋아할 만한 성격이 아니야.”
마력을 발현점 이상으로 모았을 때 생겨나는 능력은 사용자의 성격을 따라간다. 이 친구의 능력은 그 지독한 집착에 뿌리를 두고 있는 거겠지.
“그런 말에 더 이상 현혹되지 않을 거다. 올리비에 황녀 전하를 실망시킨 건 한 번이면 족하니까.”
그 이야기를 들은 나는 잠깐 고개를 갸웃하고는 녀석을 바라봤다. 올리비에 황녀 전하라.
“저번까지만 해도 이름을 쉽게 말하던데. 우리 친구가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어서 그 여자를 공손하게 황녀 전하라고 부르는 걸까.”
내 목을 노리고 휘둘러진 시미터가 머리카락을 몇 가닥 자르고, 뺨에 상처를 남겼다. 그사이 내가 만들어낸 분신은 녀석이 던진 스틸레토로 인해 흩어졌다.
“쥐새끼처럼 피하는 것도…….”
녀석은 그렇게 중얼거리더니 뒤로 약간 물러나서, 갑자기 자기가 입고 있던 갑옷을 건틀렛만 남기고 전부 벗어던졌다. 퍼억, 하는 소리와 함께 눈 위로 떨어지는 갑옷.
“여기까지다.”
“미치겠네. 내가 쿠르스트 산맥까지 와서 쉰내 나는 남자 새끼 헐벗은 꼴을 봐야 하다니.”
눈살이 절로 찌푸려지는 풍경이었지만, 한편으로는 긴장감에 몸이 서늘하게 식는다.
갑옷을 벗었다. 방어를 포기했지만 덕분에 행동속도는 더 빨라졌을 거다. 어차피, 내 공격을 당해도 계속해서 무시무시한 속도로 육체를 재생하며 달려드니 처음부터 갑옷 같은 건 필요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뭐.”
녀석의 움직임을 봉인할 수 있는 수단은 너무나도 명확하게 나에게 쥐어져 있었다. 분신을 만들어, 제단을 공격하면 녀석은 움직임을 잠깐 멈추고, 우선적으로 제단을 공격하는 분신을 제거한다.
“제발, 제발…….”
녀석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충혈된 눈으로 나와 제단을 번갈아 바라본다. 이유가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녀석이 굉장히 긴장했고…… 뭔가를 두려워하고 있다는 건 알 것 같다. 제단을 공격하는 분신을 공격하는 방식이, 거의 발작에 가까울 정도다.
“어제랑은 너무 다른데.”
괄목상대라고 하지만 이건 좀 너무 변한 거 아닌가? 그런 녀석을 보던 나는 의심스러운 표정을 짓고 한마디 했다.
“설마 밤새도록 그 여자한테 뭔가 당한 거냐?”
내 말에 녀석이 몸을 부르르 떨고는 나를 향해 달려들었다.
“끄으으으…….”
브레이서의 방어막을 박살 내며 내 검 위로 때려 박힌 참격에 내 몸이 바닥을 몇 번 구른다. 공격이 더 빠르고 강력하다. 이 새끼 장난 없네.
“지켜야 하는 게 있으면 혼자 싸우기 힘들지. 너는 함께 지키던 녀석들을 다른 곳으로 뺀 시점부터 이미 그 여자에게 또 한 번 실수를 저지른 거야.”
내 말에 녀석의 몸이 움찔한다.
“아니, 여기에서 널 죽여버리면 실수가 아니다.”
“그건 그렇지. 어디, 달리기 시합이나 한번 해볼까.”
나는 그런 소리와 함께 녀석을 향해 분신을 마구 쏟아내면서, 허상과 함께 제단 쪽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가지 마라!”
분노, 공포, 애처로움…… 공존하기 힘들 거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서로 뒤섞인 참 이상한 외침과 함께, 녀석이 자신을 향해 검을 휘두르는 분신들을 무시하고 나를 향해 질주한다.
머리통이 절반 정도 날아가고, 배가 칼질로 활짝 열리는 와중에도 녀석은 질주를 멈추지 않았고, 결국 제단 앞에서 나를 다시 막아서는 데 성공했다. 내가 입힌 모든 치명상은 눈을 한 번 껌벅하는 사이 모두 사라졌다. 녀석은 하얀 입김을 뿜어내며 나를 향해 검을 겨누었다.
“제단과의 거리가 상당히 가까운데요, 친구. 여기서 싸워도 괜찮겠어요? 실수로 제단이 부서지거나 하지는 않을까?”
빙글거리는 듯한 놀림과 함께 나는 분신과 함께 녀석을 노리고 달려들어 몸을 난자하기 시작했다. 여기에서라면 함부로 검을 휘두를 수 없지만…….
그렇다고 딱히 나에게 좋은 상황은 아니다.
“그것참.”
알버트가 생각이 있다면, 로베르가 모습을 보이지 않는 순간 일이 예상대로 흘러가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을 거다. 그렇다면, 차라리 별동대로 거점을 공격하는 대신 방향을 돌려 본대와 합류하려 들겠지.
진짜로 내가 그 별동대와 함께 있었다면 그 귀먹고 눈먹은 녀석들과 싸우면서 거점을 노려볼 만하지만, 알버트의 싸움 실력은 클로에보다 낮다.
잠깐 고민 정도는 하겠지만, 결국 본대와의 합류 결정을 하겠지.
그럼, 그 검은 기사들이 다시 여기로 돌아온다. 그리고, 별동대가 본대와 합류하면, 별동대가 억누르고 있던 거점에서는 본대로 지원군을 보내려 들 거다.
“복잡하게 되었네.”
재빠르게 생각을 정리한 나는 다시 한번 분신으로 제단을 노리면서 뒤로 쭉 빠졌다. 여기에서는 더 늦기 전에 후퇴하는 게 맞다.
“그래, 가버려.”
녀석은 약간 힘이 빠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곱게 보내 줄 생각인가? 정말로 여기를 떠날 생각이 없는 모양이네.
보내 준다면야 바로 떠나고 싶었으니까. 나는 재빠르게 이 장소를 이탈해 원래 별동대가 노리고 있었을 거점으로 향하다가 저 멀리에서 다시 로베르가 있는 쪽으로 돌아가는 세 명의 기사를 확인했다.
“세 명?”
여섯 명이었잖아. 나머지 세 명은 어디 간 거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나는 씨팔, 하는 소리를 내고 더 빠르게 움직였다.
물러나는 군대의 꼬리를 노리는 건 정석 중 정석이다. 당연히, 지휘관이라면 후퇴하기 전에 꼬리물기를 방지하기 위해 대비책을 세워놓는다. 알버트가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한정되어있다.
“클로에.”
알버트로서는 꼬리를 물고 쫓아오는 병력을 막기 위해서 클로에를 쓸 수밖에 없었겠지.
“으아아아아! 덤벼!”
그런 외침과 함께 귀를 때리는 충격음. 소리가 들린 곳으로 달려가자, 가파른 산 사이로 난 좁은 길을 막고 서 있는 클로에가 보였다.
대충 봐도 스무 발 정도는 되어 보이는 화살이 갑옷에 박혀있고, 왼팔은 축 늘어져 있다.
검은 갑옷을 입은 녀석 중 하나가 바닥에 풀썩 쓰러져있다. 입고 있는 갑옷은 꽉 움켜쥔 음료수 캔처럼 구겨져 있다. 나머지 두 녀석도, 썩 멀쩡한 상태는 아닌 것 같지만, 지금 이 자리에 서 있는 녀석들 중에 누가 제일 먼저 죽을까? 라고 내기한다면 당연히 클로에다.
그 모습을 확인한 나는 곧장 달려들어 클로에의 머리를 향해 검을 내려찍은 검은 갑옷의 공격을 막아냈다.
“아. 마틴 님.”
클로에가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희미하게 웃음을 흘렸다.
“오셔서 아무것도 없으면 실망하실까 봐, 좀 남겨놨어요.”
“옘병한다.”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그녀의 앞에 쭉 서 있는 병력들을 확인하고는 작게 한탄했다. 저 갑옷 입은 녀석들을 제외하고도 200명 정도가 따라붙은 모양인데.
이게 그 유명한 네덜란드 소년인가 뭔가 하는 건가. 무너지려고 하는 둑을 혼자 막고 있었던?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답시고 여기에서 저 녀석들을 혼자 틀어막고 있는 거야. 그러다 뒤지기밖에 더하나.
“몸은 어때?”
내 말에 클로에가 하아, 하고 숨을 내쉬었다.
“도움 정도는 드릴 수 있어요.”
“좋네. 그럴 기운이 있다니. 그럼 그 고슴도치 같은 꼴부터 어떻게 해.”
내 말에 클로에가 잠깐 비틀거리다가 뒤로 빠져서 갑옷에 박힌 화살들을 뽑아내기 시작했다. 갑옷은 뚫었지만 그녀의 능력 덕분에 화살이 살을 뚫고 들어가지는 않은 모양이다. 한 서너 발 정도만 빼고.
“뭐 하고 있어? 깡통 새끼들아.”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고 앞으로 튀어 나가 검을 휘둘렀다. 공격을 막아낸 녀석의 몸이 뒤로 쭉 밀려난다. 이미 클로에와 싸우느라 상당히 지쳐있는 모양이군.
“전 궁수! 준비!”
“무슨 준비, 죽을 준비?”
뒤편에서 병사들을 호령하는 녀석이 보인다. 나는 그걸 확인하고 녀석 앞에 분신을 만들었다. 녀석도 나름대로 한 가락 하는 편이었는지, 공격을 막아냈지만. 그 분신은 이미 흩어져 사라진 상태였다.
분신이 만들어지고 사라지기를 반복하면서 지휘관의 목을 노렸고, 쏟아지는 공격을 막아내던 지휘관이 결국 분신의 공격을 허용하고 가슴에 칼이 박힌 채 낙마했다.
“너도 이제 죽어라.”
거의 동시에, 나도 검은 갑옷 중 하나의 머리통을 잘라내는 데 성공했다. 곧바로 그 잘려나간 머리통을 발로 차 적들에게 날려 보내자, 녀석들이 공포에 질린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며 머뭇거린다.
제대로 공포심을 좀 줄 필요가 있겠는데. 바닥에 침을 뱉은 다음, 나를 향해 달려든 검은 갑옷의 공격을 막아내고, 연격을 쏟아내 무력화시켰다.
“너도 친구 따라가야지.”
나는 마지막 남은 검은 갑옷의 머리통을 자른 다음, 투구를 벗겨 머리채를 오른손으로 붙들고 적군을 향해 들어 올린 채 히죽히죽 웃으며 입을 열었다.
“얘들아, 얘들아! 들어봐, 이 친구가 하고 싶은 말이 있데!”
“도망쳐어어어어~ 여기 있다간 다 죽을거야아아아~”
왼손으로 녀석의 턱을 잡고 위아래로 흔들며 꾸며낸 목소리를 내자. 녀석들이 창백하게 질린 표정을 짓고 뒤로 슬금슬금 물러나다가, 그대로 줄행랑을 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