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화
적이 도망치는 꼴을 보고 있던 나는 바닥에 툭 하고 머리통을 던져버린 다음 숨을 내쉬었다.
뒤편에서 희미하게 클로에의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려보니, 바닥에 주저앉은 클로에가 약간 당황한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다.
“방금 전에 그거.”
“상또라이 같았지? 그래 보였다니 다행이군. 여기에서 200명 상대로 혼자 다 쓸어낼 수는 없잖아.”
시신 능욕이라고 하면 할 말 없지만, 살 사람은 살아야 할 거 아니야. 죽은 사람 체면 챙겨주다가 산 사람이 죽으면 그것만 한 개그도 없다.
게다가 나는 방금까지 엄청 무시무시한 녀석과 치고받다 돌아온 길이다. 클로에의 몸 상태도 말이 아니지만, 내 컨디션도 썩 좋은 편은 아니다.
나는 클로에의 손을 붙잡아 일으켜 세웠다.
지형이 괜찮아서 불가능하지는 않았을 것 같지만, 시간 낭비다.
“첩보국장님의 말이 맞아서 다행이네요. 꼼짝없이 여기에서 제 인생 망가지는 줄 알았어요.”
버티고 있으면 내가 올 거라고 했겠지. 굉장히 아슬아슬했지만, 틀리게 본 건 아니었네. 나는 클로에의 왼쪽 어깨를 잡았다.
내가 갑자기 어깨를 잡자 클로에가 순간적으로 흠칫한다.
“아플 거다. 어금니 꽉 물어.”
그리고, 나는 축 늘어진 클로에의 팔을 잡고 그대로 힘을 주었다. 우드득, 하는 소리와 함께 클로에가 눈을 크게 뜨고 잠깐 입을 벙긋거린다.
빠진 팔은 맞췄으니까.
“본대에 가면 수색대 부대장인 피터가 있어. 치료할 수 있으니 일단 거기까지 가자고.”
말을 마친 나는 클로에를 어깨 위로 둘러매듯이 들어 올렸다. 그 뭐냐, 어깨법이라고 하던가.
“무겁죠?”
“더 무거운 걸 더 불편한 자세로 들고 훨씬 더 멀리까지 옮긴 적도 있어. 몸에 힘 풀어, 옮기기 불편하다.”
그 망할 대리석 기둥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간다. 어쨌든, 클로에를 둘러매고 달리기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는 본대와 합류할 수 있었다. 이미 본대는 거점을 공격하는 중이었다.
“피터 부대장!”
이미 도착한 알버트가 지휘권을 넘겨받아 거점에 대한 공세를 이어가는 중이었던 모양이다. 부상자들을 치료하고 있던 피터가 내 외침에 고개를 들고 나를 확인했다.
“이 여자, 치료!”
내 말에 피터가 고개를 끄덕이고 곧바로 클로에를 모포 위에 눕힌 다음 치료하기 시작했다. 그사이 나는 기지개를 한 번 켜고 검을 다시 뽑아 들었다.
“좋아, 일이 이렇게 비비 꼬였으니.”
여기라도 확실하게 먹어야 한다. 눈 위를 화살처럼 질주하던 나는 눈으로 만들어진 방벽을 훌쩍 뛰어넘어 바닥에 착지하며 두 녀석의 목을 따고, 곧바로 주변을 쓸어내기 시작했다.
“마틴 레드우드! 네 녀석이 기어이!”
익숙하면서 익숙하지 않은 여자의 목소리.
“이게 누구야, 시녀잖아? 그러고 보니 너도 있었지.”
별로 그렇게 중요한 친구가 아니라서 신경을 끄고 있었지 뭐야.
레티시아가 손에 박힌 연결점을 빛내며 나를 향해 마법을 쏟아낸다. 브레이서의 보호막으로 일차적으로 막아낸 다음, 그 방어막을 뚫고 들어오는 마법들을 피하며 나는 재빠르게 레티시아 쪽으로 접근했다.
이번 기회에 저 여자 목도 따놓으면 좋겠는걸. 지금은 올리비에가 하는 모든 일이 저 여자가 조종했다는 식으로 핑계를 대고 있지만, 저 방패가 사라지면 올리비에도 이후의 움직임에는 신중을 기할 수밖에 없을 테니까.
“마틴 레드우드를 막아라!”
녀석은 어제 내가 로베르와 함께 날뛰는 모습을 봤던 녀석들이다. 곧바로 열 명은 될 것 같은 기사들이 방패를 치켜들고 나를 방해한다. 나는 아쉬운 표정을 지은 채 살짝 뒤로 물러났다.
“아 왜 이래. 오랜만에 본 거라 반가워서 이야기 좀 하겠다는데.”
아이돌 좋아서 쫓아다니는 악성팬 취급을 하네 아주. 내 말은 아랑곳하지 않고 나를 향해 쏟아지는 마법과 화살, 그 사이 앞을 턱 하고 막아버린 방패까지. 나는 그 공격들을 피하면서 결국 레티시아를 포기하기로 결정했다.
이 친구들 되게 사납네. 녀석들의 공격을 피하면서 반격을 하고 있으려니, 저 멀리에서 이 부대를 지휘하는 녀석이 작게 고개를 끄덕이는 장면이 보였다.
부우웅, 하고 뿔나팔 소리가 크게 울려 퍼졌다. 그와 동시에 거점을 지키고 있던 적병들이 재빠르게 물러나기 시작한다.
“후퇴하는군.”
이내, 방패의 벽을 세우고 각자의 능력을 뽐내고 있던 기사들과 마법사들이 슬금슬금 물러나기 시작한다.
“하.”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고 나서 물러나는 녀석들을 보다가 손을 몇 번 흔들어 인사를 해주고, 곧바로 제단을 박살 낸 다음 눈밭에 털썩 드러누웠다.
“정말 개같이 힘드네.”
로베르 자식과 치고받는 과정에서 쌓인 피로가 굉장했다. 휘두르는 검격은 전력을 다해서 받아내지 않으면 그대로 균형을 잃을 정도로 강력했다. 그 와중에 상황을 파악하고, 쉬지 않고 떠들면서 제단을 공격할 틈도 봐야 했으니까.
잠깐 누워서 머리통을 눈에 파묻고 있던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고생했다.”
“고생하셨습니다. 클로에는 좀 어떻습니까?”
피터와 인사를 나누고 나서 바로 던진 질문에 피터가 어깨를 으쓱했다.
“로니세라 경은 괜찮을 거야. 혼자서 이백을 상대했다지? 굉장한 기사였군그래.”
나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수통을 꺼내 물을 좀 마신 다음 자리에서 일어나 클로에를 확인하러 갔다.
“아, 오셨어요?”
클로에는 다른 부상병들과 함께 쉬고 있는 중이었다. 몸 상태는 괜찮아 보인다.
“욕봤다.”
“뭘요, 다 쓸어낼 실력이 없었던 게 안타깝네요. 돌아가면 실력 향상에 시간을 투자해야겠어요.”
나는 그 말에 대답했다.
“서류 업무는 좀 줄여주지.”
“그 이야기를 들으니 갑자기 몸 상태가 확 나아지는 느낌이에요.”
나는 그 말에 혀를 한 번 찼다.
“몸이 완전히 호전될 때까지는 쉬고 있어. 어차피 이 거점도 지켜야 할 사람이 필요하니까. 자기 몸은 자기가 관리해야지.”
처음으로 점령한 거점은 도리안이 관리하고 있다. 여기도 마찬가지로 지킬 사람이 필요하니, 클로에로 하여금 지키게 하면 될 것이다.
내 말을 들을 클로에의 표정이 별로 즐거워 보이지는 않는다.
“완쾌했다고 판단되면 네가 싫다고 해도 싸우게 할 거야. 지금은 일단 거점을 방어하면서 회복에 집중해.”
“네, 알겠어요.”
이야기를 마치고 방벽을 보수하기 시작하는 병력들을 살펴보고 있으려니, 알버트가 내 쪽으로 다가오는 게 보였다.
“거점 안을 조사하다가 이런 걸 발견했는데.”
편지 한 통이 알버트의 손에 들려 있었다. 봉인이 뜯어져 있는 걸 보니 이미 알버트가 한 번 읽어본 모양이다.
내밀어진 편지를 받아들자, 일부러 보란 듯이 편지에 뿌려놓은 향수 냄새가 코를 자극한다. 내 기억이 맞는다면 올리비에가 사용하는 향수다.
“내용은 뭡니까?”
내 말에 알버트가 고개를 저었다.
“모르네. 엘렌 리버플로우 양의 말에 따르면 마법이 걸려서, 특정 대상이 아니면 내용을 볼 수 없는 모양이야.”
나는 그 말에 고개를 갸웃했다.
“마법을 해제하면 되지 않을까요?”
“해제하면, 종이 안에 적힌 내용도 같이 사라진다고 하더군. 혹시 자네한테 보내는 내용이 아닐까 해서 가져와 본 거야.”
아, 그런 식으로 작동하는 건가.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종이를 꺼내 들었다. 하얀 종이였다.
“저도 마찬가지로 아무 내용도 보이지 않…….”
말을 이어가려는 와중 스슥, 하는 소리와 함께 금색으로 빛나는 글자가 써지는 게 보인다.
[아, 확인한 모양이네?]
그런 문자가 떠올라 있었다.
[보고 있으면 뭐라고 좀 써주는 건 어때. 그러면 나도 볼 수 있거든.]
거기까지 확인한 다음, 나는 종이를 구겨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딱 봐도 올리비에가 해놓은 장난질로 보이는데, 내가 저거에 어울려줘야 할 이유는 하나도 없다.
“……그래도 되는 건가?”
“네, 상관없습니다.”
알버트는 꽤 당황했던 모양이지만, 나는 무심한 표정으로 대답을 돌려주었다.
“무슨 내용이었나?”
나는 그 말에 방금 떠올랐던 문장들에 대해서 알버트에게 공유해주었다. 그 이야기를 들은 알버트가 고개를 갸웃했다.
“거 이상한 취미로군.”
“해야 할 일이 많은데, 그 마녀 같은 여자 장단에 맞춰 놀아줄 생각은 없습니다.”
시간도 없고, 설사 시간이 있다고 해도 그 여자 장단에 맞춰서 펜팔 놀이를 할 생각은 없다.
말을 마친 나는 지도를 펼쳐놓고 살펴보다가 입을 열었다.
“도리안이 지키고 있는 거점으로 보급품과 보충 병력이 도착할 예정입니다. 사람을 보내서, 도착한 보충 병력을 바로 이 거점으로 보내라고 전달해주세요.”
“두 군데가 남았고, 우리가 두 군데를 먹었어. 아직까지는 반반이라고 부를 수 있겠군.”
어차피 올리비에는 마지막 남은 하나를 더 만들 생각을 하고 있을 거다. 그게 아니라면…….
“어쨌든 오각형의 변 하나는 완성된 셈이잖아요?”
“우리가 먹은 거점들을 다시 차지할 생각을 버리고, 지금 가지고 있는 두 개의 꼭짓점을 하나의 변으로 삼아 뒤편에 새로 오각형을 만들려 들 수도 있겠지. 사람을 보내 확인해봐야겠군.”
어차피 올리비에가 자신이 차지한 변을 기반 삼아 오각형을 다시 그릴 생각이라면 이후 제단이 만들어질 지점은 정해져 있으니까, 보내야 할 장소는 정해져 있다.
이야기를 마치고 나서, 자리에서 일어났던 나는 순간적으로 휘청거리다가 억지로 자세를 바로잡았다.
“자네 괜찮나?”
억지로 자세를 바로잡은 채 현기증을 참으며 심호흡을 하던 나는 고개를 저었다. 갑자기 온몸이 욱신거린다.
“안 괜찮은 것 같습니다.”
로베르와의 싸움에서 몸에 쌓였던 충격이 뒤늦게 몸을 덮친 것 같다. 힘 하나는 정말 무식하게 강한 녀석이었으니까.
물론 하이랜더나 카루토스 타카운 같은 녀석들과 싸우면서 힘으로 밀어붙이는 멧돼지 같은 녀석들과의 싸움에는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에 이 정도로 끝났다고 생각한다.
요령껏 흘려내지 않고 공격을 정면으로 받아냈으면 어디 하나는 부러지고도 남았을 거다.
“부축해줄 테니, 일단 돌아가서 쉬게.”
나는 알버트의 말에 두말없이 그의 부축을 받아 급하게 만들어진 텐트 안에 누웠다. 잠시 뒤에, 꽤 쌩쌩해 보이는 클로에가 나를 확인하러 와서는 히죽 웃었다.
“자기 몸은 자기가 관리해야 한다고 말하고 나서 얼마 지나지도 않아 픽 하고 쓰러지시다니. 엄청 쪽팔리시겠네요.”
“시끄러 인마.”
솔직히 쪽팔리긴 하다. 몇 분 지나지 않아서 이런 꼴이 되다니.
“설마, 그냥 상사 놀려보고 싶어서 피곤한 몸을 이끌고 여기까지 찾아온 건 아니겠지?”
내 말에 클로에가 뭔가를 내밀었다. 뜨거운 김을 피워올리는 검은 액체가 담겨있는 컵이었다.
“진통 및 소염 효과가 있다고 하던데요. 저도 먹었어요. 미리 말씀드리지만, 더럽게 써요.”
나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내용물을 들이키고 얼굴을 구겼다.
“망할, 더럽게 쓰네.”
“말했잖아요.”
그리고는 곧바로 건네준 건 바깥 온도에 딱딱하게 굳은 벌꿀 조각이었다. 입으로 던져넣고 잠깐 있으니 꿀이 녹으면서 혀에 남아 있던 쓴맛을 지운다.
“한 시간 정도 쉬어야 할 것 같으니. 그 사이에 거점 정리를 비롯해서 해야 할 일들은 알버트와 함께 처리해줘.”
“그럴게요.”
대답을 들은 나는 곧바로 눈을 감았다. 클로에는 잠깐 나를 바라보나 싶더니, 이내 밖으로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