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화
텐트에 앉아 식량을 챙기며 나는 머리를 가다듬기 시작했다.
“여기에서 실패하면 올리비에는 다시 베로나 제국의 황도에 콕 박히겠지.”
그럼 다시 제자리걸음이 된다. 방어는 성공했지만, 그것 이상을 노릴 수는 없다.
하지만 여기에서 하이랜더의 무덤을 여는 데 성공하고, 시체들을 일으켜 세운다면 이후에 무슨 일이 일어날까.
그 여자의 목적은 이제 까놓고 말해서 그녀가 몇 년이고 준비했던 계획의 달성이 아닌 것으로 보인다.
“그게 목적이었다면 이런 식으로 싸움을 이끌지 않을 테니까.”
그 여자가 목적달성을 위해 움직이는 중이라면 지금 마련된 다섯 개의 거점을 가지고 투닥거리는 것보다, 추가로 제단을 확보하는 편이 훨씬 쉽다.
“하지만 그거 대신 치열하게 치고받는 공방을 선택했어.”
나를 노리는 거다. 따라서, 하이랜더의 시체들을 일으키는 데 성공한다면 올리비에는 그 시체들을 이용해서 파이크 왕국을 공격할 확률이 높다.
“그렇게 된다면…….”
어디까지 생각을 해둬야 하는 거야? 인생 망할 거, 먹고 살기 힘들다니까.
하지만, 패배를 감수해야 열리는 활로도 있는 법이다.
한참을 고민하던 나는 점점 복잡해지는 머릿속을 급하게 비운 다음, 짐을 정리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밖은 이미 어둠이 깊어 있었다.
텐트 안에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시간이 확 하고 날아가 버렸다.
“짐은 다 싸고 노는 거지?”
밖에서 멍하니 서 있으려니 엘렌이 꽤나 큰 가방을 챙겨 들고 내 쪽으로 다가왔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데. 짐은 다 싸놨어.”
“좋아, 그럼 짐 챙겨. 바로 이동하자고. 바쁘니까.”
짐을 다 챙기자, 엘렌이 자신의 가방에서 뭔가를 꺼내서 보여주었다. 트럼프 카드 비슷한 재질로 보이는 종이 뭉치였다.
“마법진을 새겨넣은 열다섯 장의 종이야. 내 마력에 반응해서 일제히 터질 거야. 이걸 적절한 장소에 박아넣고 나서, 내가 강력한 마법을 행사하면…….”
폭발하는 종이 열다섯, 그리고 엘렌이 때려 박은 마법 한 번. 도합 열여섯 장소에서 동시에 폭발이 일어난다. 눈사태를 일으키기에는 충분한 수준이다.
“좋아, 계획은 이해했어.”
“그럼 다음.”
엘렌이 심호흡을 한 다음 가방에서 뭔가를 꺼내 들어 찢었다.
후우우웅, 하는 소리와 함께 우리 주변에 바람이 몰아치기 시작한다. 불어오는 바람을 확인한 엘렌이 입을 열었다.
“이제 공기가 희박해지지는 않을 거야. 하지만, 추운 건 조금 참아보자고. 계획은 설명해줬으니까, 바로 향할게.”
양손에 박혀있는 연결점을 빛냈다.
“날개 여섯 장. 눈꺼풀이 까뒤집힐 정도로 빠르게 날아라.”
엘렌의 말이 끝나자마자 우리의 몸이 말도 안 되는 속도로 하늘로 솟구쳐 오르고는, 곧장 케스트렐 산머리를 향해 날아가기 시작했다.
쾌속으로 날아가는 와중에 슬쩍 엘렌의 표정을 보니, 꽤 안정되어 있다. 이대로 무사히 케스트렐 산머리에 도착하는 데 성공하면 눈사태를 일으키는 건 큰 문제가 없을 것 같은데.
그렇게 비행이 얼마나 지속되었을까.
“저건.”
하늘에 떠오른 달과, 그 달빛을 받아 새하얗게 빛나는 케스트렐 산머리의 만년설 위에 뭔가 사람의 형체가 꿈지럭거리는 게 보인다. 누군지 모를 녀석의 손에 들려있는 건, 거대한 작살이었다.
“이런 망할, 조심해!”
내 외침과 거의 동시에, 녀석은 손에 들고 있던 거대한 작살을 우리를 향해 집어 던졌다.
“으그그그그그……!”
엘렌의 양손에 박힌 연결점이 확 하고 밝은 빛을 뿜어냈다. 동시에, 누가 멱살을 잡아서 옆으로 패대기치기라도 한 것처럼 우리의 몸이 가까스로 방향을 틀었다.
“또 온다!”
내 말에 엘렌이 파랗게 변한 표정으로 이를 악물었다. 날아오는 작살을 다시 피할 수는 없다. 막아야 한다. 급하게 엘렌이 마력을 쥐어짜 만들어낸 방벽이 우리 몸을 감싸고, 녀석이 집어던진 작살이 방벽을 들이받는다.
유리가 박살나는 것 같은 소리와 함께 방벽이 박살나고, 작살은 힘이 다해 바닥으로 떨어진다.
“우…… 웨웨엑…….”
엘렌은 허공에서 구역질을 하며 땅을 향해 토사물을 쏟아냈다. 엘렌의 코를 타고 흘러내리는 핏자국이 보인다.
하늘을 날던 우리는 땅을 향해 추락하기 시작한다. 엘렌은 몸을 부르르 떨면서 입가를 훔치고 추락하는 와중에 손을 뻗었다. 추락하던 몸의 속도가 서서히 느려진다.
우리는 케스트렐 산머리에서 몇십 미터 떨어지지 않은 곳에 불시착했다.
“몸은 어때, 괜찮아?”
“아니.”
엘렌은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바닥의 눈을 한 움큼 집어 피가 흘러내리는 코를 벅벅 비볐다. 눈을 한 움큼 집어 든 손등은, 과격한 마력 사용으로 인해 연결점 주변의 살갗이 징그럽게 꿈틀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별수 없잖아. 저기, 추락한 사냥감을 보러 사냥꾼이 오고 있어. 마틴, 큰소리를 떵떵 쳤으니 약속을 지킬 거라고 믿을게.”
나는 그 말에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엘렌이 둘러매고 있던 가방 안에서 마법진이 그려져 있는 종이뭉치를 꺼내 품속에 밀어 넣었다.
“모습, 숨길 수 있어?”
“나는 숨길 수 있는데. 미안, 당장은 내가 도움을 주기 힘들 것 같아.”
“그건 괜찮아. 혼자서 어떻게든 벼텨볼 테니 돕지 말고, 충분히 쉰 다음 눈사태를 준비해.”
나는 그렇게 말하고 손에 쥔 종이 뭉치를 한 번 흔들었다.
“이건 내가 적절하게 박아넣을 테니까.”
엘렌은 지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 다음, 주머니에서 반지 하나를 꺼내 자기 손에 끼웠다. 동시에 엘렌의 모습이 확 하고 사라진다.
나는 작게 한숨을 쉬며 중얼거렸다.
“이 거리에서 작살을 던져 맞출 수 있는 놈이라.”
최근에 그런 녀석을 되게 놀려먹었던 기억이 있는데. 나는 저 멀리에서 눈 위를 미끄러져 내려오는 녀석의 실루엣을 확인하고 자세를 바로잡았다.
“드디어.”
녀석의 입이 열렸다. 꽤나 감격에 찬 목소리다. 검을 쥔 손의 손목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나는 녀석을 향해 천천히 나아갔다.
“로베르 그리즈만. 하루 사이에 신수가 훤해졌네.”
어디로 간 건지 행적이 묘연하다고 알버트가 말했었지. 여기에 있었을 줄이야. 그렇다면 올리비에도 지금의 상황을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던 모양이군.
“곱게 죽이지는 않을 거다. 네 녀석이 지금까지 벌인 모든 일을, 영혼 속 깊숙한 곳에서 진심으로 반성하기 전까지 멈추지 않을 고통을 선사해주지.”
업보라는 게 참 무섭다니까. 로베르는 자세를 취하고 있는 나를 향해 곧게 돌진해 시미터를 내려찍었다.
“여긴, 피해를 입을 아군도 없고! 지켜야 하는 제단도 없다!”
그래, 나도 알고 있어. 지금 나를 향해 쏟아내는 로베르의 모든 공격은 죽여버리겠다는 일념이 담겨있는 강력한 한 방 한 방이다.
“네 녀석과 내가 공평한 상황에서 결투한다면 네 녀석 따위는 진작에 씹어먹었다! 알고 있느냐!”
내려찍히는 검을 흘려내는 데 성공한 나는 녀석을 향해 분신과 함께 공격을 밀어 넣었다. 녀석의 배가 찢어지고, 팔이 잘려나간다.
잘려나간 팔이 다시 붙고, 찢어진 배에서 흘러내리던 내장이 다시 몸속으로 쑥 하고 들어간다. 부상과 회복이 쉬지 않고 반복된다.
“이번에야말로 네 녀석의 목을 따서, 올리비에에게 바칠 것이다!”
“그런다고 변할 것 같냐? 이 비루한 인생아.”
그 여자는 너한테 관심 없어. 내 목줄기를 노리고 던져진 스틸레토, 고개를 확 젖혀 피한 다음 나는 옆으로 굴렀다. 구르는 와중에 허공에서 다시 로베르를 향해 돌아가는 스틸레토의 궤적이 보인다.
곧이어 바닥을 구르는 나를 노리고 내려찍히는 시미터를 자리에서 일어나며 막는다. 이렇게 막으면 충격을 흘려 낼 수가 없으니까…….
내 검과 녀석의 시미터가 서로 부딪치기 전에, 내 옆에 만들어진 분신이 양손으로 내 칼을 받쳐 올린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손을 타고 다리까지 퍼져나가는 무식하기 짝이 없는 힘.
분신을 활용해, 실질적으로 두 명이서 한 명의 공격을 막아낸 것인데도 불구하고 양다리가 눈 속에 파묻힐 정도로 강력한 일격이었다.
“아가리 닥쳐라! 닥치고 이제 죽어버려!”
쉬지 않고 몰아치는 공격은 막아내는 것만으로도 뼈가 삐걱거리고, 검을 쥔 살이 찢어질 정도였다.
그 사이에도, 나는 틈틈이 들키지 않게 마법진이 적힌 종이를 박아넣고 있었다.
종이를 한 곳에 너무 몰아넣으면 안 된다. 열다섯 장의 종이 모두가 일정 거리 이상을 유지하고 눈 아래 파묻혀야 한다. 그래야 터졌을 때 눈사태가 극대화된다.
“이걸로…….”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고 바닥을 짚는 척하며 마지막 남은 종이 하나를 눈 속에 깊게 처박았다.
“크읍.”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하자 나를 향해 쇄도하는 시미터와 스틸레토, 나는 어쩔 수 없이 불안정한 자세를 유지한 채 로베르의 공격을 억지로 막아내야 했다.
분신이 나타나서 내 몸을 받쳐줬지만, 그 노력이 무색하게 날카로운 쇳소리와 함께 내 몸이 크게 휘청거린다. 거의 동시에 내 배를 후려 까는 로베르의 발차기에 나는 입에서 피를 토하며 하늘 높이 떠올랐다가, 그대로 눈 바닥 위를 굴렀다.
“하, 고작 이 정도인가? 하이랜더의 공세를 막아내고 카루토스 타카운에게 영면을 선사했다는 녀석이?”
“지랄, 내가 그 삽질을 하는 동안 뭐 하나 해놓은 것도 없는 새끼가.”
첩보국장에게 정보가 없다는 건, 이 자식이 이런 힘을 가지고도 뭔가를 해본 적이 없다는 뜻이다.
로베르는 몸을 한 번 부르르 떨고 나서 나를 향해 검을 겨누고 노발대발하기 시작했다.
“이건 희생이다! 나는 올리비에를 위해서 모든 걸 버렸어!”
“그러시겠지.”
검을 눈 속에 박아넣은 채 억지로 몸을 일으켜 세운 나는 바닥에 피가 섞인 침을 뱉었다.
“가여운 새끼. 짝사랑의 끝은 원래 추하게 끝날 수밖에 없는 법이야. 혹시, 의심해 본 적은 없냐?”
로베르는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내 분신의 머리통을 쪼개며 외쳤다.
“해본 적 있다. 아니, 지금도 하고 있다! 아니, 어쩌면…… 사실은 올리비에는 나 같은 거에는 관심이 없을지도 모른다.”
“관심이 없을지도 모르는 게 아니라, 관심이 없을걸.”
녀석은 내 말에 얼굴을 구긴 다음 눈을 박차고 나를 향해 달려들었다. 이번에는 막아낼 수 있다. 아까처럼 자세가 불안정하지도 않고, 더 이상 눈에 박아넣어야 하는 종이도 없으니까.
분신의 도움을 받아 공격을 흘러낸 나는 뒤로 약간 빠지며 말을 이었다.
“내가 누군가를 좋아하는 만큼, 그 누군가도 나를 좋아해 준다는 보장이 없잖아. 마치 지금처럼. 네가 그 여자를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만큼, 올리비에가 너를 소중하게 여긴다고 생각하냐?”
“그 입.”
로베르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중얼거리고는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봤다. 그 눈은 마침내, 완전히 맛탱이가 가 있었다.
“네 녀석 따위가 내 삶을 평가하지 마라.”
녀석은 그렇게 중얼거리고 양손을 축 늘어뜨린 채 나를 향해 천천히 걸어오기 시작했다. 녀석의 앞에 확 하고 나타난 내 분신이 녀석의 머리통을 반으로 쪼갠다. 하지만, 녀석은 미동도 하지 않고 계속해서 나를 향해 걸어온다.
“평가라,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아는 친구 이야기처럼 꾸며서 한번 물어보지 그래? 여자 하나에 맛탱이가 간 네 녀석의 인생은 누가 봐도 병신같아.”
“사람이 사람을 보고 사랑에 빠지는 건 있을 수 있는 일이야!”
“그럼, 있을 수 있는 일이지.”
서로의 병장기가 쉬지 않고 치고받으며 차갑고 어둡게 가라앉은 밤공기를 뒤흔든다
“하지만, 사랑에 빠진 여자가 부탁했다고 이런 일에 협조하는 건 누가 봐도 또라이거든?”
사랑이라는 게 무슨 짓을 해도 용서해주는 면죄부인 줄 아나.
억지로 녀석의 검을 밀어낸 나는 숨을 한 번 크게 몰아쉬었다. 저 뒤편에서, 반투명하게 모습을 드러낸 엘렌이 자기 손등을 가리키는 모습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