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화
그래, 시간은 충분히 끌었다 이거군. 그럼 이제…….
녀석이 내 쪽으로 검을 들고 질주한다. 나도 녀석을 향해 마주 달리다가, 검이 휘둘러지는 순간, 나는 공격을 흘려내며 녀석을 끌어안았다.
“무슨?!”
녀석의 어깨를 양손으로 꽉 잡은 다음, 녀석의 배에 양발을 가져다 댄 나는 뒤로 드러누우며, 분신을 만들어 녀석의 등을 확 떠밀었다. 녀석이 앞으로 넘어지며, 내 등에 차가운 눈 바닥이 닿는다.
“날아가, 이 개새끼야.”
나는 양발에 힘을 힘껏 주어 녀석의 몸을 밀어냈다.
녀석의 몸이 허공으로 확 떠오르며 뒤쪽으로 날아간다. 발로 밀어낸 여력을 이용해 뒤구르기로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허공에 떠 날아가는 녀석을 향해 반복적으로 분신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공격이 목적이 아니다, 녀석이 허공에 떠 있는 동안, 최대한 멀리 날려 보내는 게 목적이다. 분신이 나타나고 사라지기를 반복하며, 녀석의 몸을 계속 올려쳐 체공 시간을 길게 만든다.
녀석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분신을 만들어내며, 나는 모습을 드러낸 엘렌 쪽으로 달려가며 외쳤다.
“터뜨려!”
엘렌이 고개를 끄덕이고 양손을 땅으로 가져갔다. 손등에 박힌 두 개의 연결점이 막대한 빛을 뿜어내기 시작한다. 엘렌의 옆에 도착한 나는 구역질과 현기증을 느끼며 순간적으로 휘청였다. 마력이 다 털렸다.
“더 이상은 못 버텨, 아직 멀었어?!”
“보채지 마. 거의 다 끝났어.”
허공에 뜬 채 분신에게 얻어맞고 있던 로베르의 몸이 땅으로 추락한다.
“지금.”
엘렌의 말과 동시에 케스트렐 산머리가 크게 한 번 뒤흔들렸다 동시에, 내가 박아넣었던 종이가 자리 잡은 장소도 마찬가지로 커다란 폭발이 일어났다.
구그그그그긍, 하는 소리와 함께, 산머리에 쌓여있던 만년설이 몸부림치며 비탈길을 타고 무너져내리기 시작한다.
엘렌은 내 허리를 팔로 휘감은 다음 하늘로 날아올랐다.
“마틴, 레드우드으으으으!”
추락하고 나서 다시 나를 향해 질주하고 있던 로베르는 밀려오는 눈사태를 보고 절망적인 목소리로 외쳤다. 그리고, 녀석의 몸이 눈사태에 휩쓸리는 장면이 보였다.
“…….”
난폭하게 날뛰며, 막대한 양의 눈사태는 케스트렐 산머리에서 시작되어 계속해서 그 규모를 불리며 비탈을 타고 쏟아져 내린다.
그 과정에서 휘날린 구름처럼 하얀 눈가루는, 하늘 높이 떠 있는 나와 엘렌의 시야조차 순간적으로 가려버릴 정도였다.
“닿았나?”
내 말에 엘렌이 약간 더 고도를 높였다. 사방을 휘감은 눈구름을 벗어나는 데 성공한 나는 저 멀리 올리비에의 거점을 확인하고 쓰게 웃었다.
“더 이상 거점이 아니네.”
거점이었던 것. 그 표현이 가장 적절하지 않을까 싶다. 쏟아진 눈사태는 공평하게 모든 것을 먹어치웠다. 로베르도, 거점도, 그리고 그 거점에 만들어져 있던 제단까지도. 모두 다 새하얀 눈 속에 파묻혀버렸다.
“괜히 천재지변이라고 부르는 게…….”
엘렌은 그렇게 말을 이어가다가 순간적으로 몸을 휘청거렸다. 그리고, 우리는 바닥을 향해 추락하기 시작했다.
“잘 풀린다 싶었지.”
퍼억, 하는 소리와 함께 우리는 눈더미 속에 처박혔고, 나는 순간적으로 정신을 잃었다.
“허억!”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몸을 부르르 떨었다.
“젠…… 장맞을…….”
몸이 바짝 식었다. 얼어 죽기 일보 직전인데. 얼마나 정신을 잃었던 거지? 아직 밤인 걸 보니 정신을 오래 잃고 있었던 건 아니다. 나는 얼어붙은 몸을 덜덜 떨면서 주변을 살폈다.
“망할, 저기 있네.”
눈에 절반 정도 파묻힌 엘렌을 찾아낸 나는 그녀를 억지로 끌어냈다.
“허억, 허억.”
마력은 거의 다 고갈되었고, 엘렌은 아직 정신을 못 차리고 있다. 여기에서 클로에가 머무르고 있는 거점까지의 거리를 생각해보면, 걸어서 갈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이런 씨팔, 정신 차려 엘렌 리버플로우!”
너 안 깨어나면 우리 둘이 세트로 얼어 죽게 생겼단 말이다! 나는 제대로 움직이지도 않는 손으로 그녀의 뺨을 한 번 때려봤다. 일어날 기미가 없다. 살아는 있는 건가 싶어서 확인해보니, 맥은 뛰고 있다.
나도 엘렌도 살아있긴 한데, 이대로 있으면 조만간 죽을 거다.
그때였다. 저 멀리에서 진동음이 들리기 시작한 건.
“하이랜더?”
저 발걸음 소리는 알고 있다. 걸음 소리가 점점 더 이쪽으로 가까워지는 중이다.
걸음걸이를 타고 퍼져나가는 진동음이 느리다. 눈사태 때문에 놀라서 다가오는 것 같다.
“음.”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녀석들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내가 기억하고 있는 모습 그대로다. 강철보다 단단해 보이는 회색의 피부, 하반신을 가린 거적때기 한 장과 무식하게 거대한 무기. 그리고 살벌해 보이는 근육덩어리와 무지막지한 사이즈까지.
“안녕?”
입술까지 퍼렇게 변해서 덜덜 떠는 와중에 억지로 입을 움직여 내뱉은 한마디였다. 녀석 중 하나가 손에 쥐고 있던 몽둥이를 들어 올리다가 멈추고 나를 훑어본다. 손등의 흉터와 허리춤의 검을 확인한 녀석의 코에서 새하얀 콧김이 확 뿜어진다.
“그…… 뭐냐. 사냥하고 오는 길인가 보네.”
녀석들 중 하나는 어깨에 무지막지하게 거대한 엘크 두 마리를 둘러매고 있었다. 아직 살아있는 녀석들이다. 싱싱한 걸 좋아하는 건가. 녀석들이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가 갑자기 지들끼리 뭐라고 구시렁거리기 시작한다.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은 하나였다. 오멘티오. 그리고, 나는 머리가 핑 도는 걸 느끼고 그대로 퍽 하고 엘렌 옆에 쓰러졌다.
* * *
다시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축축하게 젖어있는 동굴의 천장이었다. 몸이 무거워서 살펴보니, 내 몸을 덮고 있는 거대한 털가죽이 보인다.
고개를 돌려보니, 엘렌도 나와 마찬가지로 털가죽을 덮은 채 누워 있었다.
“동굴곰 가죽이잖아.”
냄새는 좀 나지만, 더럽게 따뜻하네. 나는 멍하니 그 묵직한 털가죽을 바라보고 있다가 비척비척 자리에서 일어나 머리를 몇 번 흔들었다.
얼마나 쓰러져 있었던 거고, 나를 이 동굴로 끌고 와서 털가죽을 덮어놓은 녀석은 누구지.
“흐익…….”
시선을 옆으로 돌리자, 곧바로 눈에 들어오는 건 3미터가 넘어가는 키를 자랑하는 하이랜더의 우람한 몸집과, 그 옆에 기대져 있는 큼직한 쇠몽둥이였다. 아까 봤던 그 녀석이다.
나도 모르게 기괴한 소리를 내자, 녀석이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본다. 살벌한 안광과 눈이 마주치자, 저절로 몸에 힘이 들어간다. 그런 나를 보고 있던 녀석이 훅, 하고 콧김을 한 번 뿜어내고는 뭐라고 중얼거린다. 여전히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다.
녀석이 나를 한 번 훑어보더니 이내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도대체 뭐지.”
내가 왜 여기에 있는가. 그리고 저 하이랜더는 왜 나를 보고는 별다른 해코지를 하지 않고 그냥 나간 건가. 그런 고민을 하던 와중 밖으로 나갔던 녀석이 다시 돌아와 뭔가를 턱 하고 바닥에 내려놓았다.
“이건…….”
뜨거운 김이 마구 피어오르는 엘크의 고기다. 접시도 없이 동굴 바닥에 떡하니 놓인 고기는 제대로 손질하지 않아서 누린내가 지독했다. 하지만, 못 먹을 만한 물건은 아니다. 사실, 이것보다 더 역겨운 물건도 먹어본 기억이 있으니까. 녀석이 뭐라고 중얼거리고는 툭 하고 손으로 고깃덩어리를 내 쪽으로 밀었다.
“먹으라고?”
내 중얼거림을 들은 녀석이 잠깐 있다가 대답했다.
“머으라고.”
얼마나 기절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허기가 몸을 덮치고 있었다. 나는 군말 없이 바닥에 떨어진 누린내 나는 고기를 들고 뜯어먹었다. 식사인지 뭔지 모를 행위를 마치고 입가에 묻은 누린내 나는 기름을 훔치고 있으려니, 녀석이 손을 들어 동굴 안쪽을 가리켰다.
“카'ㅤㅅㅡㅍ.”
나는 그 말에 고개를 갸웃하고는 중얼거렸다.
“카ㅤㅅㅡㅍ?”
녀석이 확 인상을 쓰더니 입을 열었다.
“카'ㅤㅅㅡㅍ.”
뭐 인마. 발음이 마음에 들지 않는 건가. 나는 잠깐 녀석의 눈치를 살피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카'ㅤㅅㅡㅍ.”
녀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카'ㅤㅅㅡㅍ.”
그리고는 손을 휘휘 젓는다. 나는 일단 녀석이 시킨 대로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뜻은 알겠네.”
물이라는 뜻이군. 동굴 안에는 암반수 비슷하게 물이 솟아나는 곳이 있었다. 물의 때깔을 확인하고 냄새를 맡아보니, 전혀 문제가 없어 보인다. 고기는 누린내가 지독하지만, 물 하나만큼은 맑고 신선한 녀석을 마시는 모양이다. 나는 솟아나는 물을 퍼서 마시고, 겸사겸사 물에 젖은 손으로 얼굴을 비볐다.
“후우.”
도대체 저 녀석들은 왜 나를 살려두는가? 그냥 살려두는 것뿐이 아니다. 밥과 물을 주었다. 그냥 개무시하고 끝날 일이었다면 이럴 리 없다. 다시 돌아온 나는 후우, 하고 심호흡을 한 다음에 나를 지키고 있는 하이랜더를 향해 말했다.
“카'ㅤㅅㅡㅍ.”
내 말을 듣자 녀석이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본다. 역시, 저 눈을 보고 있으면 절로 근육에 힘이 들어간다. 녀석은 별다른 말 없이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보자, 어차피 말은 통하지 않지.
그럼 이건 어때. 나는 오른손을 말아쥐고 따봉을 했다. 녀석이 그런 나를 위아래로 훑어본다. 나는 몇 번 같은 행동을 반복했다.
카'숲이라는 단어를 말하고 따봉을 한다. 그렇게 세 번 정도 하자 녀석이 내 손 모양을 한 번 따라했다. 그리고는 잠시 뒤 턱짓으로 바닥에 놓인 고깃덩어리의 잔해를 가리킨 다음 나를 보고 따봉을 한다.
글쎄다. 저건 엄지까지 올릴 정도로 맛있는 음식은 아니지 않아? 내 표정을 보고 있던 녀석이 프후, 하는 소리를 낸다. 그러고 있는 와중에 동굴 입구 쪽에서 무슨 소리가 들린다.
“뭐야 저건.”
하이랜더 암컷 같은 건가? 수컷이 길게 기른 더러운 머리카락과 수염으로 잿빛의 얼굴을 온통 가리고 있다면, 암컷 쪽은 짙은 구리색 피부에 마찬가지로 잿빛의 머리카락을 기르고 있었다.
덩치는 똑같이 크다. 몸은 대충 가죽 같은 걸로 가리고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다르게 암컷은 수컷과 다르게 굉장히 미형이었다.
크기만 좀 축소시켜 놓으면 야생미가 넘치는 구릿빛 피부의 은발 미녀라고 해도 될 정도다. 하이랜더들은 수컷 이외에는 밖을 나돌아다니는 경우가 별로 없는 모양이다.
어쨌든, 동굴 안으로 들어온 암컷 하이랜더가 수컷 하이랜더를 이리저리 훑어보고 나를 한 번 바라본다.
“으아!”
그리고 이내 표정이 변해 갑자기 발로 하이랜더의 엉덩이를 확 걷어차며 화를 내기 시작한다.
수컷 하이랜더가 고개를 약간 숙이고 별다른 말을 하지 않는다. 그 사이에도 암컷 하이랜더의 분노는 멈추지 않고 있었다. 시선을 옆으로 돌린 수컷 하이랜더의 등짝에 암컷 하이랜더의 손바닥이 휘둘러진다.
쩌억, 이라는 굉장한 소리와 함께 동굴의 공기가 통째로 진동한다. 저 등짝 스매싱, 사람이 맞았으면 하반신은 동쪽에서 찾고 상반신은 서쪽에서 찾아야 했을 거다.
역시, 미형이고 나발이고 하이랜더는 하이랜더인 모양이다. 힘이 뭐 저래.
“쿠란테노, 쿠란테노…….”
등짝을 얻어맞던 수컷이 암컷을 향해 뭐라고 중얼거린다. 뭐야 이거…… 설마 바가지 긁히는 중인 거냐? 니들도 참 가지가지 하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