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드우드-139화 (139/275)

139화

한동안 화풀이를 하던 여성 하이랜더가 나를 슥 훑어본다.

“……왜요?”

방금 그 등짝 스매싱, 지금의 몸 상태로는 감히 받아낼 엄두가 나지 않는다. 나를 잠깐 훑어보던 암컷 하이랜더가 갑자기 푸성귀를 주섬주섬 꺼내더니 바닥에 굴러다니던 거대한 돌덩이로 마구 내려찍기 시작한다. 쿵,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돌덩이에 얻어맞은 푸성귀가 순식간에 곤죽이 된다.

“파스?”

동굴 안을 확 뒤덮은 냄새는 분명히 알싸한 파스 냄새를 닮아있었다.

녹즙이 줄줄 흘러내리는 짓이겨진 풀 뭉치를 든 하이랜더 암컷이 내 쪽으로 그 뭉치를 휙 던졌다. 어디에 쓰라는 건지 대충 알 것 같다. 나는 풀 뭉치를 몸에 비비기 시작했다.

“크으.”

풀 뭉치를 비빈 곳에 확 퍼지는 차가운 느낌은 이내 화끈거리는 느낌으로 변한다. 정말로 파스와 비슷한 성분인 모양이네. 몸뚱어리가 망가졌을 때는 역시 일단 파스질부터 하는 게 최고지. 그사이 다른 하이랜더 네 마리가 더 동굴 안으로 기어들어 온다.

하나는 암컷, 나머지 셋은 수컷이다. 이건 구분이 어려울 수가 없어. 딱 보면 알겠는걸.

표현을 조금 바꾸자면 하이랜더 수컷은 진짜 수컷이라는 단어가 어울리는데, 암컷은 암컷이라는 단어보다 여자라는 단어가 더 어울리는 외양이다.

수컷들은 잘 모르겠는데, 새로 들어온 암컷은 확실히 다른 암컷보다 젊어 보인다.

애초에 내가 수색대에서 상대했던 녀석들은 죄다 수컷이었던 게 확실하다. 이렇게 다섯 마리가 하나로 뭉쳐 클랜인 건가. 녀석들 중 몇 녀석은 어깨 위에 거대한 짐승들을 짊어지고 있었다.

저게 오늘 이 친구들의 저녁거리인가.

“흠, 오멘티오.”

방금 자기 남편으로 보이는 하이랜더에게 등짝 스매싱을 날렸던 하이랜더가 그 녀석을 잠깐 바라보고는 뭐라고 말을 쏴붙이기 시작한다.

앉아있던 하이랜더가 짜증 난다는 표정으로 뭐라고 하자, 그 꼴을 지켜보고 있던 다른 하이랜더가 와서 녀석의 머리통을 한 번 후려치고,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다른 젊은 암컷 하이랜더가 키들거리고 웃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웃음소리를 듣고, 한 대 맞은 뒤통수를 쓰다듬던 하이랜더가 뭐라고 성질을 낸다.

“……음.”

대충 관계도를 알겠네. 아빠 하나, 엄마 하나, 아들 둘에 딸 하나군. 녀석들 중 딸로 보이는 하이랜더가 잠깐 내 쪽으로 시선을 던지다가 나를 향해 뭐라고 중얼거린다.

“미안한데, 못 알아듣겠어.”

내 말을 들은 딸이 눈살을 찌푸리고 있다가 몇 마디 더 한다.

“아니, 못 알아듣는다고.”

그리고 갑자기 녀석이 픽 웃는다. 왜 쪼개고 있는 거야. 안 그래도 지금 이 자리, 굉장히 불편하다. 일단 이 녀석들이 당장 나를 해칠 생각이 없다는 건 알겠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당장일 뿐이잖아. 이 녀석들이 조금만 생각을 달리 먹으면 나는 하이랜더 다섯 마리를 동시에 상대해야 한다. 아니지, 그건 상대하는 게 아니라 그냥 다섯 마리한테 쥐어 터지는 거지.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딸이 뭐라 뭐라 말하고 있는 걸 보고 있던 와중 오빠로 보이는 하이랜더가 혀를 쯔, 하고 찼다. 그 사이에 동굴 안에 불이 피워진 모양이다.

“이제 어떻게 되는 거지.”

설마 나를 저 거대한 모닥불 위에 올리려는 건 아닐 거야. 그러고 있는 와중에 다시 식사가 준비되었다. 역시, 먹는다는 행위 자체에 집중하기 때문인지 별로 맛에는 신경 쓰지 않은 게 확실하다. 냄새가 아까 내가 뜯어먹은 고기랑 비슷하거든.

식사를 마치고 나서, 아들로 보이는 하이랜더 하나가 거대한 나뭇가지를 하나 집어 들더니 바닥에 뭔가를 끄적거리기 시작한다. 문자 같은 건가. 공부하는 모양이네. 나는 바닥에 쓰인 문자를 확인하고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봤던 건데.”

그 돌기둥 안에 가죽에 쓰여 있던 문자와 같다. 역시 이 녀석들이 사용하는 문자였구나. 내 중얼거림에 녀석이 고개를 들어 나를 보고는 바닥을 본다. 그리고 잠깐 있다가 바닥을 손으로 몇 번 쓸고는 글자 하나를 커다랗게 쓴다.

“칸도르.”

녀석은 그렇게 중얼거리고 나를 바라본다.

“칸도르?”

내 말에 녀석이 고개를 끄덕이고 구워지는 고기를 가리킨다. 나는 그 행동을 보고 곧바로 따라 했다.

“칸도르.”

내 말에 녀석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흐, 하는 웃음소리를 흘린다. 아직 바닥에 죽은 짐승들이 더 있다. 나는 그것들 중 하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칸도르.”

내 말에 녀석이 고개를 끄덕인다. 모닥불에 구워지는 짐승은 내가 가리킨 짐승과 다르다. 그럼 동물 이름을 말해준 게 아니라 그냥 고기라는 단어를 말해준 모양이다. 나는 잠깐 녀석이 바닥에 써놓은 걸 보다가 따라 써봤다.

“아무래도 표어문자 같은데.”

한자처럼. 그렇다면 차라리 익히는 게 그렇게 어렵지 않을 수도 있다. 물론, 문법까지 통달하기는 힘들겠지만…… 실제로 표의문자를 사용하는 문화권에서는 자주 사용하는 문자 1000개 정도를 외워놓으면 의사소통은 힘들어도, 어설프게나마 의미는 이해할 수 있는 경우가 많다.

그 와중, 녀석이 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오멘티오.”

녀석이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바닥에 문자 두 개를 썼다. 역시, 표의문자라는 추측이 맞는 것 같다. 나는 그걸 확인하고 나서 따라 쓴 다음 스스로를 가리키며 대답했다.

“오멘티오.”

그런 식으로 시간이 지나가고 있었다. 녀석은 나름대로 나에게 이것저것 알려주는 일에 흥미를 느낀 모양이었다. 뒤늦게 식사를 마치고 근처로 다가온 하이랜더들도 내가 이러는 모습에 흥미를 느낀 모양이다.

“으윽.”

그러던 와중, 마찬가지로 털가죽을 덮고 있던 엘렌이 마침내 정신을 차렸다.

“흐어으익…….”

정신을 차린 엘렌은 주변을 살펴보다가 하이랜더를 확인하고는 굉장히 기괴한 소리를 흘렸다. 그 소리를 들은 하이랜더들이 고개를 돌려 엘렌을 한 번 바라보고는 마찬가지로 고기를 건넨다.

엘렌이 파랗게 질린 표정으로 하이랜더와 바닥에 놓인 고기를 번갈아 바라본다.

“왜, 급작스러운 상황 변화에 적응이 안 되냐?”

내 목소리를 들은 엘렌이 지옥에서 예수님을 본 표정으로 말했다.

“마틴! 지금 이 상황이 뭐야. 어떻게 된 거야?”

엘렌의 말에 나는 작게 한숨을 쉬고 말했다.

“눈사태 이후, 너와 내가 사이좋게 추락한 다음 얼어 죽을 뻔했지. 하이랜더 몇 녀석이 다가왔는데, 정신을 잃었다가 다시 차려보니 여기더라.”

내 말을 들은 엘렌이 눈을 크게 뜨고 아직 식사를 하고 있는 하이랜더들을 보다가 다시 나를 바라본다.

“그럼, 하이랜더가 우리를 구한 거야?”

“그런 셈이지. 그것보다, 만약을 대비해서 연락용 수정구를 가지고 있었지?”

내 말에 엘렌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수정구를 꺼내 들었다.

“이건 왜?”

“우리가 살아있다는 사실을 알려야 할 거 아니야. 거기에 덤으로, 도움을 받을 녀석이 하나 있어. 도리안이 머무르는 거점으로 연결해줘.”

내 말에 엘렌이 고개를 끄덕이고 수정구에 마력을 연결했다. 하이랜더들은 그런 우리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갑자기 우리가 뭔가를 하니, 다소 긴장한 모양이다.

나는 하하하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그런 표정 짓지 말아주세요. 무섭단 말이에요.”

그러는 동안 엘렌도 슬쩍 하이랜더들의 눈치를 보며 수정구를 연결했다.

― 마틴? 자네 맞나? 살아있는 건가?!

도리안의 외침이었다. 큰 소리를 듣자마자, 곧바로 하이랜더들이 움찔하고는 몽둥이를 손에 쥔다.

“아니야, 그러지 마. 진정해. 워이.”

나는 그런 소리를 내며 양손을 내밀고 손을 휘휘 저었다. 제발, 그러지 말아 주세요. 어차피 한 번 살다 죽는 인생이라지만 오해 때문에 하이랜더의 몽둥이에 대가리가 터져 죽는 건 싫다.

“네, 마틴입니다. 저 아직 살아있습니다. 그것보다, 빨리 카일 블랙매도우를 불러주세요.”

- 그게 갑자기 무슨…….

“급합니다. 빨리 서둘러 주세요. 안 그러면 제가 지금은 살아있지만, 잠시 뒤에는 죽을 수도 있어요.”

그 사이에도 점점 더 하이랜더들의 눈빛에는 의심과 불신이 시시각각 자라나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수정구 너머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 마틴 레드우드 님…… 그, 저기, 부르셨다고 들었습니다.

“하이랜더의 말로, 안심하라는 게 뭐야.”

― 네?

“빨리.”

내 말에 수정구 너머에서 잠깐의 침묵이 이어지다가 이내 목소리가 들렸다. 수정구를 통해 전달되는 언어를 들은 하이랜더들이 동작을 멈추고는 자기들끼리 서로를 바라보기 시작한다.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은 바로바로 하이랜더의 말로 통역해줘.”

내 말에 수정구 너머에서 다소 어벙한 대답이 돌아왔다.

― 네…… 일단 알겠습니다.

나는 곧바로 입을 열었다.

“구해줘서 고맙다.”

수정구에서 카일이 곧바로 그 말을 하이랜더의 언어로 바꿔주고. 그 이야기를 들은 하이랜더 중 아빠로 보이는 녀석이 훅, 하고 콧김을 내뿜고는 입을 열어 뭐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 소리를 들은 카일의 목소리가 급작스럽게 흥분하기 시작했다.

― 잠깐, 지금 혹시?

“그래, 하이랜더들과 같이 있다.”

― 세상에, 맙소사. 이건……!

카일의 목소리가 흥분으로 덜덜 떨리는 게 보일 지경이었다.

“진정하고, 저 친구가 뭐라고 한 건지 해석해줘.”

― 해야 할 일을 했다. 건강해졌으면 네 반려를 데리고 나가라.

나는 그 말에 침을 삼켰다. 좋아, 일단 방금 말을 통해 하이랜더가 나에게 적대적이지 않다는 사실은 명확해졌군. 반려라. 엘렌과 나 사이의 관계를 오해한 모양이다.

“반려?”

옆에서 엘렌이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저 친구들이 그렇게 오해하지 않았으면 나는 몰라도 너는 거기서 얼어 죽었어.”

“그렇겠네. 오해해줘서 다행이다.”

일단, 상황이 어느 정도 진정된 모양이다.

“도리안, 옆에 있습니까?”

― 그래, 대화는 듣고 있었다.

나는 그 말에 작게 한숨을 쉬고 말했다.

“제가 얼마나 기절해 있었죠?”

“이틀.”

나는 그 말에 눈을 질끈 감았다. 망할, 생각보다 더 오래 지났는데.

“현 상황은 어떻습니까?”

내 말에 도리안이 침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현재, 거점 하나만을 가까스로 유지하고 있는 상황이야.”

역시, 상황이 안 좋다. 나와 엘렌이 여기에 있다는 건 지금 동원된 병력들 중에서 가장 잘 싸우는 녀석과 가장 마법을 잘 쓰는 녀석이 자리를 비웠다는 소리니까.

― 계산이 맞다면, 오늘 밤 중으로 하이랜더의 무덤으로 가는 문이 열릴 거야.

나는 그 말에 작게 한탄하는 동시에 속으로 히죽 웃었다.

보자, 이렇게 되었다면…….

복잡하게 휘몰아치던 생각이 빠르게 정리되기 시작한다.

“죄송합니다. 지금 저와 엘렌 리버플로우 양의 몸 상태는 매우 좋지 않아요. 합류한다고 해도 오늘 밤 중으로 뭘 하는 건 불가능합니다.”

― 마틴 레드우드, 그럼 우리 조국은 끝이야! 힘든 건 충분히 이해하지만…… 부탁하네, 지금 무리하지 않으면 다음이 없어.

다소 격양된 도리안의 외침이었다.

“아니요, 끝은 아닙니다. 방법이 있어요.”

방법이 생겼다. 아니, 오히려 이런 상황이 되어서 생긴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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