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화
도리안에게는 내 몸 상태가 정상이 아니라고 했지만, 사실은 휴식 덕분에 어느 정도 멀쩡해진 상황이긴 하다. 하지만, 더 이상 쿠르스트 산맥 심부에서 싸움을 이어갈 생각은 없다.
― 방법이 있다니, 자세히 말해보게.
“첩보국장님과 클로에 로니세라 경도 불러주세요. 다 모이면 이야기하겠습니다.”
내 말에 도리안이 잠시 기다리게, 라는 말과 함께 자리를 비웠다. 잠시 뒤, 클로에와 알버트도 이 대화에 참여하게 되었다.
― 방법이 있다고 들었는데, 구체적으로 듣고 싶군.
― 저도요.
두 사람 모두 굉장히 지친 목소리였다. 그렇겠지, 이틀 사이에 이어진 공세를 막아내기 위해서 분주히 돌아다녔을 테니.
“이 싸움은 졌습니다. 인정해야죠.”
내 말을 듣자마자, 세 명의 한숨 소리가 수정구 너머로 들렸다. 어쩔 수 없어, 받아들여. 그래야 다음을 생각할 수 있으니까.
“적은 하이랜더의 무덤으로 향하는 문을 열고, 그 시체들을 언데드로 일으킬 생각입니다.”
당연히, 그 시체를 가지고 할 일은 정해져 있다. 나와 엘렌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저 녀석들의 진격 속도는 느린 편이었다.
까놓고 말해서, 나와 엘렌이 없다면 거점 다섯 개는 순식간에 먹을 수 있었을 텐데. 올리비에가 그러지 않고 있는 거다. 내가 진짜 죽었는지 불안한 모양이지.
주머니에 구겨 넣었던 종이를 펼쳐보자, 거기에는 금색의 글씨로 뭐가 잔뜩 쓰여 있었다. 이전에 올리비에가 남겨놓은 편지였다.
내 생사를 확인하는 내용이 한가득이었다. 나는 손끝을 칼로 살짝 베서 피를 낸 다음 그 위에 글을 썼다.
[이번 싸움에서는 네가 이겼군. 축하한다.]
내가 그 글을 쓰자마자 곧바로 금색의 글씨가 다시 써진다.
[살아있었구나!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 다행이다!]
[옘병하고 있네.]
반응 속도를 보니 아주 목을 빼놓고 소식을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 말을 끝으로 나는 종이를 다시 주머니에 집어넣고, 수정구를 향해 말했다.
“올리비에는 제가 살아있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죽은 하이랜더를 시체로 일으킨 다음, 파이크 왕국을 공격하겠죠.”
― 우리도 그걸 걱정하고 있었어요. 여기에서 물러나지 못하고 있는 이유도 그것 때문이었고.
클로에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대답했다.
“적은 하이랜더의 시체를 일으키려고 합니다. 그리고, 살아있는 하이랜더는 저에게 꽤 우호적입니다.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카일 블랙매도우에게 듣길 바랍니다.”
― ……그래서, 하이랜더가 자네에게 호의적인 게 지금 상황과 무슨 관련이 있다는 거지?
알버트의 말에 나는 입가에 웃음을 띤 채 말했다.
“죽은 선조의 이름이 적혀있는 대리석 기둥 하나 때문에 수백에 달하는 하이랜더들이 두르밀로 국경수비대 쪽으로 몰려올 정도입니다.”
그 정도면 하이랜더가 선조를 중요하게 여긴다는 건 충분히 증명되었다.
“하다못해, 이름이 적힌 대리석만 건드려도 그 지랄을 할 정도인데, 언데드로 일으켜 부리는 녀석들이 있다는 소식을 들으면 하이랜더들이 어떻게 반응할까요?”
내 말에 모두가 침묵했다. 심지어, 옆에서 뭐 마려운 것처럼 꿈틀거리고 있던 엘렌도 움직임을 딱 멈췄다. 먼저 입을 연 건 도리안이었다.
― 엄청 화나겠군. 이전의 두르밀로 국경수비대 사건은 장난으로 여겨질 정도로.
“그겁니다. 그리고, 우연의 일치긴 하지만 지금 저는 하이랜더들과 같이 있습니다. 게다가 카일 블랙매도우는 하이랜더의 말을 알고 있지요.”
나는 이 이야기를 하이랜더들에게 전할 수 있다. 그럴 수 있는 상황과 자격이 갖춰져 있다. 시체를 일으켜서 부리는 건 고인 능욕 중에서도 아주 상능욕인데, 그걸 하이랜더가 그냥 넘기지는 않을 거다.
“적이 죽은 하이랜더를 언데드로 되살려 뭔가를 하려고 든다면, 우리는 살아있는 하이랜더와 함께 대응할 수 있습니다.”
― 하지만, 하이랜더의 무덤에는 무지막지하게 많은 시체가 쌓여있을 거야. 그게 전부 언데드가 된다면…….
옆에서 이야기를 듣고 있던 엘렌이 대답했다.
“되살아난 하이랜더의 시체는 여전히 강력하겠지만, 살아있는 하이랜더만큼 강하지는 않을 거예요. 언데드의 장점은 보급이 필요 없고, 지치지 않는다는 거지. 산 자보다 더 강한 건 아니니까.”
엘렌의 말을 받아서 나는 다시 말을 이었다.
“게다가 언데드는 약점도 제법 있습니다.”
이미 그린모스 늪지대에서 카루토스 타카운을 상대하면서 언데드의 약점은 충분히 인지했다. 성역화 마법부터 시작해서 순철, 소금, 밀가루 같은 것들.
언데드가 된 시체는 장점만큼이나 단점도 많다.
거기에 더해서 나에게는 아직도 헤로스의 문양이 있지. 언데드는 이 문양 앞에서는 제대로 힘을 쓰지 못한다. 카루토스 타카운 정도 되는 강력한 언데드도 전력을 발휘하지 못할 정도였으니까.
하이랜더의 시체들이라고 해도 예외는 아니다.
“최소한, 쿠르스트 산맥에서 억지로 버티는 것보다는 이편이 더 승산이 높습니다.”
쿠르스트 산맥의 하이랜더들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협조를 구한다.
― 그래, 일리가 있군. 하지만, 단순히 성나서 몰려가는 것 정도로는 부족할 거야.
“제가 하이랜더들을 설득하겠습니다. 단순히 성나서 몰려가는 게 아니라, 제대로 왕국 병력과 긴밀한 공조를 할 수 있도록 만들어 보겠습니다.”
여기에서 하이랜더들이 나에게 보여주었던 호의라면, 설득을 할 수 있는 기회는 주어져 있다.
― 실패한다면 어떻게 되는 거죠?
클로에의 말에 나는 간단하게 대답했다.
“끝이지. 어차피 지금 상황에서 올리비에 황녀가 하이랜더의 무덤을 여는 걸 막을 수는 없어. 우리가 준비해야 하는 건 무덤을 연 다음이야.”
― 하지만, 지금 우리 조국은 두 번의 큰 사건을 겪어서 병력이 상당히 축난 상황이야. 알지 않나?
알버트의 말에 나는 간단한 대답을 돌려주었다.
“제가 하이랜더의 협조를 구하는 데 성공한다면, 쿠르스트 산맥에 묶여있던 병력을 거의 전부 빼낼 수 있습니다.”
쿠르스트 국경수비대가 산을 지키고 있을 이유가 없어지는 거다. 여기에 묶여있는 병력들 대다수를 빼내서 동원할 수 있다면, 그동안의 병력 손실은 충분히 메꿀 수 있다.
― 제국도 그럴 수 있어.
“그럴 수 없을 겁니다. 제국이 쿠르스트 산맥의 병력을 빼서 전쟁에 사용하는 순간, 저는 하이랜더들과 함께 쿠르스트 산맥의 심부를 건너 제국으로 들이닥칠 테니까.”
하이랜더들은 이 산을 넘어 다니는 데 아무런 제약이 없다. 애초에, 자기들 삶의 터전이잖아. 산을 넘어서 제국으로 향하는 건 일도 아니다. 굳이 한니발이 아니어도 할 수 있는 일이다. 제국에서 눈치채고 병력을 다시 쿠르스트 산맥으로 되돌린다고 해도 우리가 쿠르스트 산맥을 넘어 제국 안으로 들이닥치는 속도가 훨씬 더 빠를 것이다.
최소한, 올리비에라면 그걸 모르지는 않을걸.
즉, 제국은 쿠르스트 산맥을 수비하는 병력을 빼내지 못한다. 한동안 침묵이 이어지다가, 마침내 알버트가 입을 열었다.
― 확실히, 그 방법 말고는 길이 보이지 않는군. 국왕 폐하와 세자 저하께는 그렇게 말을 전해두겠네.
“카일 블랙매도우의 통역이 필요하기 때문에, 이 수정구는 계속 유지될 겁니다. 진행 정도가 궁금하시다면 이 수정구를 통해 보고드리겠습니다.”
말을 마친 나는 후우, 하고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상황이 위험해진 만큼, 이겼을 때 얻을 수 있는 것도 많습니다. 제국과의 싸움에서 승리를 거두면, 전쟁 보상금과 함께 올리비에 황녀의 신변 양도를 요구하는 겁니다.”
베로나 제국이 패전국이 된다면 받아들일 수밖에 없을 거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마침내 그 지긋지긋한 쌍년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병신 신세로 만들 수 있다.
어쨌든 포로니까 죽여버릴 수는 없겠지만, 마음먹으면 탑 안에 가둬버리고 사람 한 명 만나지 못하게 하는 것도 가능하니까.
마침내 그 여자가 판돈으로 올라가는 거다. 알버트가 차분한 어조로 대꾸했다.
― 그 반대의 경우도 가능하다는 걸 잊지 말게.
“저 하나 제국에 바쳐서 왕국의 위기를 모면할 수 있다면 그것도 파이크 왕국에서는 이득 되는 장사 아닙니까?”
― 뭐, 부인하지는 않겠네. 대충 의도는 알았어. 결국 자네 하기에 따라 달라지겠군그래. 고생하게. 우리는 바로 철수 준비를 하겠네.
그걸로 회의는 끝나고, 다시 카일 블랙매도우가 수정구를 잡게 되었다.
“이야기는 듣고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 그럼요. 잠시만 기다려주시겠습니까? 지금…… 너무 흥분해서.
나는 그 말에 쯔, 하고 혀를 찼다. 카일 입장에서는 정신을 놓치기 일보 직전이긴 하겠지.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나와 엘렌을 응시하던 하이랜더들 중 한 명이 입을 열었다.
― 무슨 이야기를 한 건지 묻고 있습니다.
이야, 딱 좋네. 안 그래도 내 쪽에서 꺼내고 싶은 대화 주제였는데, 먼저 꺼내주면 내 쪽에서 대화를 이어가기 훨씬 쉬워진다. 딱 눈치를 보아하니 방금 전 물어본 하이랜더가 대표로 질문을 던진 것뿐이지, 여기에 있는 하이랜더들은 모두 내가 수정구를 통해 나눈 대화에 관심이 있는 모양이다.
나는 잠깐 헛기침을 했다.
“선조들의 무덤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게 있습니까?”
― ……하이랜더의 말에는 존댓말이 없으니, 적당히 번역하겠습니다.
그 말 다음에 곧바로 수정구에서 하이랜더의 언어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카일의 번역이 끝나자마자 하이랜더 중 하나가 얼굴을 구기고 콧김을 확 뿜는다.
별로 마음에 드는 대화 주제가 아닌 건가? 녀석이 몽둥이를 들어 나를 가리키며 뭐라고 말한다.
―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 물어봤는데, 자랑스러운 선조의 무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 이유를 묻고 있습니다.
뭐야, 이 자식들 내가 생각한 것보다 더 논리적이잖아. 싸움에만 들어가면 눈깔이 확 돌아버리는 건가? 나는 차분하게 말을 이어갔다. 내가 이야기를 마치고 나자, 곧바로 하이랜더들의 눈이 수정구로 향한다. 이 녀석들도 대충 내가 손에 들고 있는 구슬이 무슨 용도로 쓰이는 건지 알아먹은 모양이다.
카일의 설명이 이어질수록, 녀석들의 표정이 점점 더 굳어가기 시작한다. 그리고, 가만히 서 있는데도 불구하고 남성 하이랜더들의 근육이 울룩불룩거리고, 이마나 팔뚝에 핏줄이 팍팍 돋아나기 시작한다.
500kg짜리 아령 두 개로 덤벨컬을 할 수 있을 것 같은 근육들이 꿈틀거리는 모습은, 그 분노가 우리를 향하고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지독하도록 살벌했다.
- 마틴 님이 하신 말의 진위 여부를 묻습니다.
“어떻게 하면 신뢰를 줄 수 있을까?”
내 말에 카일이 잠깐 고민하나 싶더니 대답했다.
“무기를 들어 올리시고, 따라 하십시오.”
그다음, 카일이 어떤 문장을 말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나서 되물었다.
“뜻 정도는 알고 싶은데.”
― 내 말에 틀림 있다면 죽는 그 날까지, 이 손은 무기를 쥐는 일 다시 없으리. 라는 뜻입니다. 하이랜더들에게 있어서는 목숨을 거는 것보다 더 강한 맹세입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나서 후우, 하고 심호흡을 한 다음 입을 열어 카일이 한 말을 따라 했다. 그 모습을 보던 하이랜더들이 일제히 무기를 집어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모두가 동시에 들고 있던 무기로 땅을 강하게 내려찍고 하나의 문장을 말했다.
― 말에 무게 있으니, 스스로 내려놓지 않는다면 우리가 힘줄을 으깨고 뼈를 부숴 그 무게를 이루리.
굉장히 살벌한 대응이었다. 하이랜더들 중 엄마로 보이는 하이랜더가 심각한 표정을 짓고 팔을 꼰 채로 남편 하이랜더에게 뭐라고 말하는 게 보였다. 그리고, 이야기를 듣고 있던 남자 하이랜더도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 이건 처음 듣는 이야기입니다. 아무래도, 하이랜더들 사이에 이런 상황을 대비해서 마련해 놓은 연락책이 있는 모양이군요.
그거야 당연하겠지. 그런 수단이 없었다면 하이랜더들이 어떻게 대리석 기둥이 털렸을 때 두르밀로 국경수비대의 방어선으로 쏟아져 들어왔겠어. 그리고, 아내와 심각한 표정으로 이야기하던 남편 하이랜더가 내 쪽으로 시선을 던진 채 말을 건넸다.
― 아무래도 이건 마틴 님이 직접 해야 하는 모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