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화
내가 직접 해야 하는 일이라. 하이랜더들은 기본적으로 '누구한테 들었는데……'라는 식으로 진행되는 이야기를 극도로 싫어하는 모양이다. 그런 식으로 다리 건너 들은 이야기는 신뢰도도 떨어질 뿐 아니라, 이야기를 꺼낸 녀석도 자기 말에 책임을 지지 않는다는 이유 때문이다.
고로, 내가 전한 이 이야기를 다른 하이랜더들에게 알리고 싶다면 내가 직접 하이랜더들 앞에서 말해야 한다는 거다. 상황은 충분히 인지했고, 까놓고 말해서 이해하지 못할 만한 행위도 아니다. 건너들은 말에 낚인 사람들이 세상에 얼마나 많은데.
“구체적으로 뭘 해야 하는데?”
― 하이랜더들이 하늘받침이라 부르는 장소가 있다고 합니다. 쿠르스트 산맥에서 가장 높은 장소입니다.
나는 그 말에 잠깐 멍해졌다. 쿠르스트 산맥에서 가장 높은 장소라. 당연히 이 산맥에 존재하는 산머리 중 하나일 것이다. 그리고, 수색대에서 근무했던 이상 쿠르스트 산맥의 산머리 정도는 상식으로 알게 된다.
“그거 혹시.”
― 네, 아마도 벤부르그 산머리를 말하는 것 같습니다.
벤부르그 산머리. 그 고도는 정말로 기가 막히게도 최소 10,000m로 추정된다. 그 유명하기 짝이 없는 지구의 에베레스트보다 더 높은 고도에 위치한, 이 세상 사람 중 아무도 올라가 본 적 없는 걸로 유명하다. 언제나 구름이 산머리를 휘감아 가리고 있어서, 그 끝의 형태가 어떤지 아는 사람도 없다.
옆에서 이야기를 듣고 있던 엘렌이 기가 막히다는 표정을 지었다.
“가서 뭘 해야 한다는 거야.”
― 산머리에 올라가면 거대한 북이 있다고 합니다. 하이랜더가 북채를 있는 힘껏 휘둘러 북을 울리면, 산머리를 가리고 있는 구름이 하루 정도 사라진다고…….
그럼, 하이랜더들이 그 모습을 보고 해당 장소에 모이는 모양이다. 그 이야기를 들은 엘렌이 턱을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확실히, 벤부르그 산머리를 감싸고 있는 구름의 부자연스러움에 대해서는 이전에 논문을 읽었던 기억이 있어. 저자는 고대에 존재하던 마법 중 하나가 아닐까 하는 가설을 내놓았지만, 증명할 길이 없어서 폐기된 걸로 아는데.”
비운의 천재였네. 안타깝기도 하지.
“어쨌든, 또 등산이라는 건가.”
기가 막힌 운명이다 진짜. 내가 등산을 하다가 죽은 것도 아닌데 왜 이런 일이 끊이지 않는 걸까.
― 길 안내와 북을 치는 것 정도는 하이랜더들이 도와줄 수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산을 오르다가 죽는 일이 생겨도 그것까지 도와줄 수는 없다는군요.
쉽게 말해서 살아 움직이는 엄청 무섭게 생긴 내비게이션 같은 거다. 뭐, 길도 제대로 모르고 올라가는 것보다는 나은 상황이긴 하네.
나는 시선을 돌려 엘렌에게 말을 걸었다.
“대충 상황은 이해했지?”
“모르겠어, 꿈꾸는 것 같아.”
엘렌은 아직도 조금 정신이 없는 모양이다.
정신을 차려보니 얼어 죽을 뻔한 자신이 하이랜더의 도움을 받아서 죽다가 살아났다. 살아난 다음에 이야기를 듣고 보니 갑자기 쿠르스트 산맥에서 제일 높은 산머리로 향해야 한다. 이걸 바로 납득하고 좋았어, 역시 주말에는 등산이지! 같은 소리를 하면 그게 대단한 거 아닐까.
잠깐 멍하니 있던 엘렌이 손을 휘둘러 자기 싸대기를 굉장한 힘으로 한 방 후려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좋아, 이렇게 된 이상 서두르자! 벤부르그 산머리다 그거지? 날아가면 순식간이니까 그렇게 오래 걸리지 않을 거야.”
나는 그 말에 대답했다.
“하이랜더도 들어 올릴 수 있어?”
내 말에 엘렌이 순간적으로 움찔했다. 북을 쳐 산머리를 가린 구름을 치울 수 있는 건 하이랜더뿐이다. 따라서, 우리는 하이랜더와 동행해야 한다. 날아갈 생각이라면 하이랜더도 함께 날아가야 한다.
저 덩치의 무게를 생각해본다면, 제아무리 엘렌이라고 해도 함께 비행하는 건 불가능해 보이는데.
“이런 망할. 어쩔 수 없지. 산을 타자. 기압을 유지하기 위해 만들어낸 도구는 아직도 작동하니까, 고산병을 걱정할 필요는 없을 거야.”
말을 마친 우리는 하이랜더에게 의사를 전달하고, 바로 벤부르그 산머리로 향하기 시작했다. 동굴 안에 머무르고 있던 하이랜더들이 모두 우리와 함께 움직인다. 어차피 벤부르그 산머리의 구름이 개면 자신들도 거기로 향해야 하니까. 전원 동행하는 편이 확실히 좋지.
그렇게 하이랜더들과 함께 쌓여있는 만년설과 몰아치는 바람을 극복하며 앞으로 나아가던 와중, 나는 엘렌에게 질문을 던졌다.
“올리비에 황녀가 하이랜더의 무덤을 열고 시체를 되살리는데 시간이 얼마나 걸릴까?”
내 말에 엘렌이 팔을 꼰 채 한동안 생각에 잠기더니 이내 대답을 돌려주었다.
“하이랜더의 무덤에 시체가 얼마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걸 다 살려내기 위해서는 시간이 꽤 많이 필요할걸.”
“……그럼 그냥 열었을 때 습격하는 방법도 있지 않을까?”
내 말에 엘렌이 고개를 저었다.
“어디까지나 전부 살리는 데 필요한 시간이야. 시체와 마력만 충분하다면 하루에 100-150마리 정도는 어렵지 않게 언데드로 되살릴 수 있을걸.”
말을 마친 엘렌은 아, 하는 소리를 내고 나를 바라봤다.
“칠색 내각과 네가 처음 마주했던 장소가 로티샤 호수라고 했었던 것 같은데, 맞아?’
나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녀석들이 거기에 간 목적이 뭐였는데?”
“로티샤 호수 아래에 묻혀 있는 붉은 가지를 회수해 손에 넣기 위해서였지.”
내 말에 엘렌이 아, 하는 소리를 내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걸 실패한 게 꽤 큰 영향을 준 모양이네. 붉은 가지에 담겨있는 마력을 사용했다면 잘은 몰라도 무덤 안의 하이랜더를 전부 살려낼 수 있었을 거야.”
“확실해? 적게 잡아도 수만 마리가 넘을 텐데.”
내 말에 엘렌이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붉은 가지의 설화는 유명해. 드라이어드 에린실이 레드우드의 선조에게 남기고 간 목검이잖아? 드라이어드의 마력이 담겨있다면야 당연히 그 방향성이 생명력 부여와 관련이 있겠지. 고로, 죽은 시체를 살려내기 위해서 드라이어드의 마력을 사용하는 건 궁합이 아주 좋아. 가성비가 엄청나거든.”
그렇군. 결국, 내가 로티샤 호수에서 선빵을 쳤던 스노우볼이 구르고 굴러 이런 결과를 만들어낸 모양이다. 하긴, 그 긴 세월 동안 호수의 물을 단 한 번도 마르지 않게 할 정도의 마력이었으니까, 하이랜더 시체 수만 마리라는 숫자가 제법 많기는 하지만 꼭 불가능한 일도 아니었을 것 같다.
“현 상황에서는 올리비에도 하이랜더의 무덤에 있는 시체를 전부 살려낼 수는 없을 거야.”
“다행이네.”
수만 마리의 언데드 하이랜더는 생각만 해도 아득하다.
“문제는, 올리비에가 하이랜더의 시체를 언데드로 되살려낸 다음 곧바로 왕국의 국경수비대를 덮치는 경우인데.”
엘렌의 말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는 없어. 스스로 싸움을 어렵게 만드는 거니까.”
쿠르스트 산맥이 아닌 다른 장소에서 싸운다면 하이랜더를 막아내야 하는 국경수비대의 병력을 파이크 왕국에서 동원할 길이 없다. 하지만 올리비에가 하이랜더의 언데드와 함께 파이크 왕국의 국경수비대를 덮친다면, 국경수비대는 자연스럽게 제국과 왕국의 싸움에 가담할 수 있게 된다. 애초에 자신들이 머무르며 지키던 땅이니까.
“게다가, 파이크 왕국의 수색대는 하이랜더와의 전투 경험이 풍부하고, 단순히 관문을 지키는 수비대라고 해도 주기적으로 하이랜더에 대응하는 훈련을 받고 있어.”
하이랜더를 잡기 위해서 특별히 육성된 병력들이다. 언데드 하이랜더라고 해도 하이랜더인 이상, 굳이 상대하는 방법을 잘 알고 있는 녀석들과 싸우는 건 바보 같은 일이다.
“올리비에는 되살려낸 하이랜더 언데드와 함께 황도로 돌아갈 거야. 그리고 왕국과의 전쟁을 준비하겠지.”
“전쟁을 일으킬 대의명분은?”
나는 그 말에 혀를 찼다.
“우리는 이미 제국군과 여기에서 전쟁을 치렀어. 그리고, 그 와중에 올리비에 황녀를 위험에 처하게 만들었지.”
전면전을 걸기에는 충분한 명분이 있다.
“……그렇네. 결국 비밀리에 진행되었던 국지전이 전면전으로 번지는 거구나.”
국지전으로 촉발된 전면전. 꽤나 많은 전쟁이 그런 식으로 시작된다.
“하지만, 올리비에도 하이랜더들의 참전을 예상하지는 못했겠지.”
그리고, 그게 이 싸움의 큰 변수 중 하나가 되는 거다. 뿌득거리며 부스러지는 쌓인 눈 위를 걸으며, 우리는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고, 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속력을 좀 내고 싶은데.”
내 말에 엘렌이 내 말을 알아듣고 고개를 끄덕인 다음 한마디 했다.
“옆구리에 끼면 나도 불편하고 너도 불편해. 업어.”
말을 마친 다음 엘렌이 내 등에 업히고, 뒤편의 하이랜더들에게 의사를 전달한 나는 곧바로 눈 덮인 비탈길을 질주해 올라가기 시작했다. 하이랜더들이 내 뒤를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쉬이이익, 하는 바람 소리와 함께 주변을 둘러싼 풍경이 굉장한 속도로 스쳐 지나가기 시작한다.
“그러고 보니, 로베르 그리즈만은 어떻게 되었을까, 죽었을까?”
등에 업힌 엘렌의 질문에 나는 음, 하는 소리를 냈다.
“그게 죽을 수 있는 물건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눈사태에 휩쓸렸잖아.”
살아남는 데 성공했다고 해도 자신의 몸을 짓누르는 눈의 무게를 밀어내고 밖으로 빠져나올 수 있을까? 내가 봤을 때는 빙하에 갇힌 둘리 신세 같아 보이는데.
게다가, 녀석의 지독한 회복력은 결국 마력을 근원으로 삼아 가능한 일이다. 눈사태에 휩쓸렸으니 산소도 부족할 테고, 시시각각 체온도 식어가고 있을 테니까. 그걸 극복하고 살아남으려면 마력을 사용해야 한다. 그게 다 떨어지면 녀석도 죽을 수밖에 없다.
“모습을 드러내기 전까지는 죽었다고 생각하는 편이 좋아.”
“그렇겠네.”
얼마나 가야 하는 걸까. 엘렌이 내 등에 업힌 채 달리던 와중에 해가 지고 떠오른 다음, 다시 한번 저물었다.
“힘들다.”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고 나서 수정구를 손에 쥐었다. 이 정도로 거리가 멀어졌으면 슬슬 이 녀석도…….
― 아, 무슨 일 있으십니까?
수정구 너머로 들리는 목소리가 내 예상보다 더 또렷하다.
“거리가 꽤 멀어진 것 같은데. 여전히 통신 상태가 좋군요.”
내 말에 카일 블랙매도우가 아하하, 하는 소리를 내고 말을 이었다.
― 다른 분들은 모두 철수했지만, 수정구 연결을 도와줄 마법사 한 분과 저는 지금 두르밀로 산머리 정상에 숨어있는 중입니다. 물론 벤부르그 산머리 인근까지 가게 된다면 잡음이 굉장히 많이 생기겠지만, 여기도 꽤 고지대이기 때문에 어떻게든 연락이 될 거라고 하더군요.
이야, 그것도 개고생이긴 할 텐데.
“고생이 많으시네요.”
― 아닙니다. 오히려 감사하고 싶습니다. 하이랜더의 생활상에 대해서 이제껏 이렇게 접근성 좋은 환경에서 연구할 수 있었던 적이 없습니다.
고맙다면야 나로서도 할 말이 없긴 하네. 하지만 카일 옆에 붙어있는 마법사 입장에서는 얼마나 거지 같을까. 나는 혀를 차고 나서 말을 이었다.
“나도 하이랜더의 언어를 배워야 할 것 같아요. 부탁 좀 드려도 될까요.”
― 아무렴요. 문제없습니다! 바로 시작할까요?
불을 피워놓고 앉아서 하품하던 하이랜더들이 내가 수정구와 나누는 대화를 듣고 있다가 자기들끼리 키들거린다. 그 와중에 큰아들로 보이는 하이랜더가 나를 향해 뭐라고 한다.
― 발음을 교정해 줄 생각인 모양입니다.
그렇게 2-3시간 정도의 하이랜더 언어 수업이 끝나고 나서, 나는 나무에 기댄 채 중얼거렸다.
“의외로 그렇게 무시무시한 녀석들은 아닌데.”
― 그건 마틴 님이 특수한 상황에 처해있기 때문입니다. 엘렌 리버플로우 양도 마찬가지지요.
그래, 그건 알고 있다. 나에게는 이렇게 대해주고 있지만, 다른 녀석들이 찾아온다면 그 즉시 그 사람의 머리통을 박살내고 살점을 뜯어먹으려 들 거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이랜더의 도움이 필요한 상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