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드우드-142화 (142/275)

142화

벤부르그 산머리로 향한 지 벌써 일주일이 지났다. 그 말은 안 씻은 지도 일주일이 지났다는 소리고, 내가 엘렌을 업고 달리기 시작한 것도 일주일이 지났다는 뜻이다.

우리는 하이랜더 가족과 동행하고 있었다. 이 산맥을 돌아다니는 온갖 짐승 중에 하이랜더를 무서워하지 않는 짐승은 없다. 대부분 그 냄새를 확인하는 즉시 꼬리를 말고 오줌을 지리며 도망가기 마련이다.

덕분에 우리는 습격과 같은 위협에서는 자유로울 수 있었다.

“크으…… 앞이 안 보여.”

문제는 벤부르그 산머리에 도착하고, 어느 정도 고도가 올라간 뒤였다. 엘렌의 말에 따르면 이미 고도 8700m 정도는 넘어간 상황이라고 한다. 마법을 통해 기압을 조절해주는 장치 덕분에 호흡이 곤란하지는 않았지만, 그 도구가 날씨까지 조절해주지는 않았다.

불어닥치는 바람은 잘못하면 사람이 통째로 바람에 휘날려 날아가도 이상하지 않을 강풍. 그 강풍을 타고 전해지는 냉기는 이전까지 경험하지 못했을 정도다. 얼음으로 빚어낸 면도칼이 살갗을 저며내는 것 같은 느낌이다.

그 와중에 또 비탈길의 경사는 60도에서 75도 사이를 오가고 있다. 이 정도면 비탈길이 아니라 절벽이다! 실제로 나는 검을 비탈길에 박아넣고 거기에 몸을 지탱해서 산을 오르는 중이었다.

“미안.”

당연한 말이지만, 이런 극한의 상황에서 엘렌의 육체 능력은 기대할 구석이 없을 정도로 형편없다. 당연히 엘렌은 내 등에 매달린 상황이었다. 미칠 듯한 추위 속에서 침까지 질질 흘려가며, 나는 산을 오르고 있다.

“지독해. 망할 놈의 산맥.”

이 산에 사는 모든 생물들의 최정상에 군림하는 건 누가 뭐라고 해도 하이랜더다. 하지만, 그런 하이랜더라고 해도 이 산맥의 왕은 아니다.

도리안의 말이 맞다. 쿠르스트 산맥의 주인은 쿠르스트 산맥이다. 여기까지 와서야 나는 그 말을 온몸으로 체험하고 있었다.

입에서 흘러내린 침은 순식간에 얼어붙어 입가에 엉겨 붙고, 나는 손으로 입가에 얼어붙은 침을 털어낸다.

“흐으…… 흐으…….”

호흡할 때마다 폐 속에 얼음이 차오르는 기분이다. 그리고, 그런 나를 보며 하이랜더들은 손가락을 비탈길에 박아넣은 채 부지런히 내 뒤를 따라 산을 오르고 있었다.

저 하이랜더들은 길을 안내해줄 뿐이다. 내가 여기를 오르다가 떨어지면, 저 녀석들은 도와주지 않을 거다. 그걸 알고 있는 나는 얼어 붙어가는 몸속에 둔해지는 생각을 억지로 붙든 채 쉬지 않고 나아가고 있었다.

더 높게, 조금만 더. 복잡한 생각을 모두 지우고 밀어닥치는 칼바람과 엉겨 붙은 눈과 얼음을 손과 발로 움켜쥐고, 돌에 검을 박아넣으며, 몇 시간이고 쉬지 않고 계속해서 움직인다.

이 비탈길이 끝나기 전까지는 쉴 수 있는 곳이 없다. 올라가다가 힘이 다하면, 그대로 끝이다. 고개를 돌려 아래를 바라보면, 지나가는 구름 뭉치들이 한가득 눈에 들어온다.

“으아아아아아!”

마침내, 이 절벽의 끝이 보인다. 양팔로 절벽의 턱을 잡은 나는 양손에 힘을 빡 넣고 그대로 몸을 끌어올렸다. 지옥과도 같은 등반이 마침내 그 끝을 보였다. 엘렌이 내 등에서 재빨리 내려, 나를 부축한 채 버드나무 껍질과 눈을 뒤섞어 끓여 뜨거운 차를 만든 다음, 나에게 건네준다.

“고생 많았어. 미안해.”

“미안할 것까지 있나.”

나는 그렇게 중얼거린 다음 엘렌이 건네준 뜨거운 차를 한 모금 마셨다.

“하, 경치는 죽이네.”

절벽의 끝에 걸쳐 앉은 채 펼쳐진 광경을 보고 있으면, 감탄밖에 나오지 않는다. 저 아래로 지나가는 구름들, 그리고 그 구름 뭉치의 사이사이로 보이는 거친 산맥들까지.

“해냈군.”

내 뒤를 따라 올라온 하이랜더들 중, 아버지로 보이는 하이랜더가 나에게 그런 말을 건넸다. 나는 히죽 웃으며 대꾸했다.

“별거 아니던데.”

일주일 정도 매일 2-3시간 정도. 오랜 시간을 들여 배운 건 아니다. 하지만 어떻게든 그 시간 만큼은 최선을 다해 시간을 때려 박은 결과, 짤막하고 간단한 대화 정도는 조금이나마 흉내 낼 수 있게 되었다. 따라붙었던 하이랜더들도 나에게 말을 걸 때는 어려운 단어를 사용하지 않았다.

“저기다.”

하이랜더가 손을 들어 올려 가리킨 곳 위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겨울걸음, 저기 아무것도 없는데?”

이 하이랜더 가족의 가장 이름은 겨울걸음이었다.

내 표정을 보던 하이랜더가 웃음을 터뜨리고는 손을 들어 올렸고, 나는 자연스럽게 마력을 끌어올렸다. 녀석이 내 등짝을 퍽 하고 치자 쩌어억, 하는 소리와 함께 온몸을 타고 충격이 퍼졌다. 나는 그 충격에 몸이 앞으로 기우는 걸 막기 위해 한 발 앞으로 내디뎠다.

이런 망할, 웃으면서 때린다고 안 아픈 줄 아나?

“가면, 안다.”

잠깐 눈 위에 주저앉아서 뜨신 차를 마시던 나는 다시 자리에서 일어나며 엘렌에게 말했다.

“업혀.”

“여기부터는 걸어갈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계속 업혀있는 게 아무래도 미안한 모양이다. 나는 그 말에 대답했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내 말에 엘렌은 고개를 끄덕이고 업혔다. 그리고, 다시 우리는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아까 넘어야 했던 그 고비만큼 힘들지는 않았고, 오래지 않아 우리는 겨울걸음이 가리켰던 장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역시 눈뿐인데.”

주변을 둘러봐도 아무것도 없다. 새하얀 산머리에 올라앉은 눈과 얼음뿐이다. 주변을 살피던 겨울걸음이 가족들과 함께 어딘가를 손으로 파내기 시작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 파낸 눈이 한쪽 구석에 쌓이고, 마침내 거대한 북이 모습을 드러낸다.

애들 10명 정도는 올라가서 트램펄린 놀이를 할 수 있을 것 같은 거대한 사이즈다.

겨울걸음은 손을 뻗어, 바로 옆에 손잡이 부분을 드러내 놓고 있는 거대한 북채를 들어 올렸다. 말이 북채지, 저 정도 크기면 하이랜더들이 휘두르는 몽둥이보다 조금 더 클 정도다. 나는 그걸 보다가 입을 열었다.

“엘렌, 카일에게 붙어있는 마법사와 협조해서 수정구를 조금이라도 더 안정시켜줘.”

이제는 카일과 연락해야 한다. 내 말을 들은 엘렌이 고개를 끄덕이고 수정구를 손에 잡았다.

그리고, 겨울걸음이 손에 쥔 북채가 휘둘러져 북을 때렸다. 두웅, 하는 울림이 퍼져나간다. 그냥 북소리가 아니다. 북채와 북이 서로 부딪치는 순간, 뭔가 기묘한 감각이 몸을 휩쓸었다.

겨울걸음은 계속해서 북채를 휘둘러 북을 때리기 시작했다. 둥, 둥, 둥. 하는 울림이 이어지고, 산머리 아래를 휘감고 있던 짙은 구름들이 서서히 흩어지기 시작한다. 얼마나 북을 두들겼을까. 마침내 산머리 아래를 휘감고 있던 구름이 모두 사라졌다.

“끝이다. 남은 건 네 몫.”

겨울걸음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하이랜더들이 모두 여기에 오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할 테니까. 그동안은 조금이나마 쉴 수 있겠지.

“쉬고 있는 중에 미안한데.”

나는 그 말에 엘렌을 바라봤다.

“왜, 무슨 일 있어?”

“세자 저하야.”

나는 그 말에 놀란 표정을 지었다.

“무슨 소리야. 여기에서 왕궁까지 거리가 얼마나 되는데 세자 저하께서 연락을 해.”

내 말에 엘렌이 대답했다.

“수정구 두 개를 같은 장소에 놓은 거야.”

수정구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그 공간 안에 울려 퍼진다. 따라서, 수정구 두 개를 한 자리에 놓으면 일종의 중계 같은 형식으로 더 멀리 떨어진 사람과도 교신할 수 있다.

“그런 식으로 중계하면 음질이 급격히 떨어지고, 서로 간의 대화가 전달되는 데 시간이 많이 소요될 거야. 음질은 내가 어떻게든 들을 수 있는 정도로 조절해볼게. 꽤 급한 이야기 같아.”

나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내, 잡음이 뒤섞인 목소리가 들렸다.

― 아아, 들리나?

어떻게든 들리긴 한다. 나는 헛기침을 한 번 하고 말했다.

“들립니다.”

― 다행이군. 음질이 좋지 않으니, 본론을 바로 말하지. 이번에 쿠르스트 산맥에서 일어난 국지전. 아무래도 제국이 전면전을 준비하는 모양이다.

……여기까지는 예상한 바다. 언데드 하이랜더라고 하는 카드도 손에 쥐었고, 안 그래도 파이크 왕국의 군력도 많이 감퇴된 상황이니. 제국 입장에서는 놓치기 힘든 기회겠지.

“제가 하는 일에 대해서는 전해 들으셨습니까?”

― 그래, 그리고 지금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의 판단이라는 데에는 나도 동의하고 있어.

그렇다면 뭐 때문에 세자가 나에게 연락을 했을까. 이내 나는 입을 열었다.

“책임소재 때문이겠군요.”

어쩌다가 이런 일이 벌어졌는가? 제국에서는 왜 왕국을 공격하려 하는가. 제국에서 왕국에게 선전포고를 하면서 가져다 붙였을 빌미는 뻔하다.

― 그래, 귀족들은 이 상황의 해결을 위해서 자네에게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주장하더군.

“망할 자식들. 알고 있지 않습니까? 제가 움직이지 않았다면 왕국은 아무것도 모른 채 이 상황을 맞이했을 겁니다!”

막아보려고 개고생을 한 사람한테 책임을 물어? 물에 빠진 사람 구해놓았더니 보따리 내놓으라고 하는 것도 정도와 한계가 있어야지. 다소 격양된 내 말에 세자가 바로 대답을 돌려주었다.

― 나도 알고 있네. 일단, 내가 억누르고 있지만, 그들의 주장에 일리가 없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한계가 있어. 제국이 전쟁을 준비한다는 이야기에 백성들까지 동요할 정도니까.

내가 산맥에 있는 동안 파이크 왕국에서도 난리가 난 모양이긴 하다.

― 솔직히 말하자, 이대로는 제국에게 화평을 주장하면서 자네의 신변을 양도하기라도 할 기세야. 실제로, 제국에서도 그리한다면 일련의 사태에 대해 왕국의 책임을 묻지 않겠다고 하더군.

이건 올리비에의 입김이다. 그 여자가 원하는 건 나니까.

“그래서, 저를 넘길 생각입니까?”

― 나는 이 나라의 왕이 될 거다. 이 나라는 나의 것이지. 그리고, 나는 이 나라가 온전히 내 것이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어. 제국에 조공을 바치면서 친선 관계를 유지해야 하는 그런 나라 말고.

이렇게 된 이상 제국과 싸워서 완전히 관계를 정리하고 싶다. 세자는 그게 목적인 모양이다.

“세자 저하의 의도는 알겠습니다. 조금은 안심이 되는군요.”

― 그런 의미에서, 자네가 연극을 한번 해줘야 할 것 같아.

연극? 갑자기 무슨 연극. 그런 생각이 머리를 스치기 무섭게 곧이어 나는 세자의 의도를 알아차렸다.

“제가 이 산맥을 싸돌아다니는 목적을 완벽하게 달성하고 나서, 함께하는 하이랜더 전원을 이끌고 왕도로 찾아가겠습니다.”

― 그래, 바로 그거야. 무력시위가 필요한 순간이네. 쿠르스트 산맥의 하이랜더 전원과 함께 자네가 왕도에 도착한다면…….

그 모습을 본 귀족들이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괜찮겠습니까? 어떻게 보면 세자 저하의 권력을 위협하는 모습으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간단하게 말해서, 왕궁 안으로 무수한 하이랜더들과 함께 밀려 들어가서 무력시위를 하라는 뜻이다.

내가 마음을 나쁘게 먹으면 세자는 물론이고 현 파이크 국왕의 권위까지 얼마든지 위협할 수 있다.

― 이건 내 판단이야. 만약, 자네가 이 기회를 이용해 내 위신을 깎아내린다면, 그건 내가 사람을 잘못 보았다는 뜻이겠지. 판단을 잘못했다면, 그 책임 또한 내 몫이라고 생각하네.

자신의 왕권이 위협받을 각오를 무릅쓰고 제국으로 내가 팔려가는 걸 막겠다는 뜻이다. 이건 뭐라고 해야 할까. 그래, 솔직히 말해서 상당히 감동인데.

“보내주시는 신뢰에 감사를 표합니다. 세자 저하의 신뢰는 분명히 보답받으실 겁니다.”

동아줄을 고르는 중이었다면, 당신이 잡은 동아줄은 황금으로 되어있고, 그 끝에는 부귀영화가 기다리고 있을 거야. 내 대답을 들은 세자가 잠깐 침묵하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 그랬으면 좋겠군. 단순히 하이랜더들을 분노케 해서 제국을 공격하게 하는 걸로는 부족해. 명심하게, 자네가 하이랜더들을 통제할 수 있는 상황이 되지 않는다면…… 이 이상으로는 나도 어쩔 수 없어.

하이랜더를 파이크 왕국에 협조하도록, 정확히 말하면 내가 통제할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 그렇지 못한다면 나는 제국으로 팔려가게 될 것이다. 세자도 이것까지는 어떻게 할 수 없는 모양이다.

“이해했습니다. 기대한 결과를 가져오겠습니다.”

― 그래 주게. 내가 보낸 신뢰에 제대로 응해달라고.

그 말을 끝으로 세자와 나 사이의 대화는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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