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화
오멘티오라는 단어는 본질적으로 예외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나는 녀석의 앞에 서서 입을 열었다.
“선조들의 쉼터를 열어젖히고, 그들의 안식을 방해해 억지로 부리려고 하는 이 상황 자체가 오멘티오다.”
물론, 내 말은 곧바로 카일이 번역해서 엘렌의 마법을 통해 증폭되어 하이랜더들에게 전달되었다.
“지금 이 상황은 모든 것이 오멘티오다. 하늘받침의 북을 울린 자도 예외적으로 하이랜더가 아니었지. 오멘티오가 수도 없이 겹치고 있다.”
말을 마친 나는 그들을 한 번 훑어봤다.
“이건 단순한 전투가 아니라 보복이다. 죽음을 맞이한 선조들의 이름이 적힌 비석이 강탈당했을 때, 너희가 어떻게 움직였는지 생각해라.”
하이랜더들은 단체행동을 하지 않는다. 철저하게 가족 단위로 구분된 생활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석이 강탈당하자, 그 상황의 특수성 때문에 모두가 함께 움직였다.
“이번에 유린당하는 건 선조의 이름이 적힌 비석이 아니다. 선조들이 쉬고 있는 안식처 그 자체이고, 더 나아가 그들의 안식을 깨워 저지르는 행위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모독적이다.”
내 말에 하이랜더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이 상황의 타개를 위해서 더 큰 예외를 감수해야 하지 않겠나? 나는 그자가 누군지 알고 있고, 꽤 오랜 시간 상대해왔다.”
말을 마친 나는 내 가슴을 한 번 때렸다.
“그대들의 적은 내 적이고, 나는 우리의 적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 우리가 함께 협조할 수 있다면 복수의 시간은 더 빨리 다가온다.”
내 말을 들은 하이랜더가 이내 고개를 끄덕인 다음 뭐라고 말했다.
― 말에 힘이 있다고 합니다. 설득력이 있다는 뜻입니다. 다만, 자기들끼리 더 이야기를 해봐야 하니 기다리라고 합니다.
카일의 번역을 들은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뒤로 약간 물러났다. 이내, 하이랜더들이 서로 우렁찬 목소리로 거칠게 의사를 교환하기 시작한다.
한두 시간 정도가 지난 다음, 하이랜더가 다가왔다. 겨울걸음이다. 아무래도 나와의 접점이 있다 보니 말을 전달하는 역할을 담당한 모양이다.
카일이 바로 하이랜더의 말을 번역해주기 시작했다.
― 너는 오멘티오로 인정받을 만한 일을 두 번이나 해냈고, 우리 모두로부터 전사라 인정받았다.
그 이야기를 들은 나는 작게 한숨을 쉰 다음 말했다.
“끌지 말고, 바로 할 말을 하는 건 어때.”
이 정도 문장은 나도 어떻게든 하이랜더의 언어로 말할 수 있다. 내 말을 들은 하이랜더가 대답했다.
― 많은 의견이 오갔다. 그러나 모두가 합의한 내용은 단 두 가지다.
말을 마친 겨울걸음이 잠깐 나를 바라보다가 말을 이었다.
― 앞으로, 모든 하이랜더는 지금 이 자리에 있는 네 말을 최대한 존중해 줄 것이다.
좋아, 첫 번째 말을 들은 것만으로도 벌써 만족스러운 느낌인데. 하지만, 그다음에 이어질 두 번째 이야기도 중요하지. 감자탕이 아무리 맛있어도 볶음밥이 개판이면 그 식사를 잡쳐버릴 수도 있잖아.
나는 차분하게 이어지는 말을 들었다.
― 우리는 네 피를 받은 혈육에게 기회를 줄 것이다. 네 후손이 이 하늘받침에 올라 북을 두들기면 모든 하이랜더들이 모일 것이고, 북을 울린 네 후손은 네가 방금 전 해낸 일을 따라 할 것이다.
나는 그 말에 움찔했다.
― 네가 이 자리에서 보여준 위용을 네 혈육이 다시 한번 우리 앞에 펼쳐 보인다면, 우리는 그자를 너처럼 존중할 것이다.
이야, 이건 생각해보지도 못한 수확인데. 근데, 내가 만약 아이를 낳았는데 그 녀석이 미쳐가지고 '나도 하이랜더 16마리를 때려잡겠습니다!'라고 말하면서 벤부르그 산머리로 향한다면 아마 나는 반대하지 않을까?
사람 할 짓이 아니긴 하잖아.
― 명심해라, 우리는 네 말을 존중하지만 이는 굴종이 아니다. 우리의 존중과 인내에는 한계가 있다. 그 한계를 넘어서는 요구를 한다면 그 뒤에 이어질 사태는 끔찍할 것이다.
어디까지나, 내가 말하면 긍정적으로 고려해본다는 정도다. 그리고, 이 정도로도 나에게는 충분하다. 애초에, 하이랜더가 다른 종족의 말을 듣기라도 해주는 것 자체가 엄청난 일이라고 생각하니까.
겨울걸음의 이야기를 들은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이랜더들이 나를 존중한 만큼, 나 또한 하이랜더를 존중할 것이다.”
― 그래야 할 것이다. 태초의 하이랜더부터 지금의 하이랜더에 이르기까지, 이런 사례는 단 한 번도 없었으니. 이 최초가 최후가 되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
말을 마친 겨울걸음이 뒤로 돌아 다른 하이랜더들을 바라보며 무기를 든 손을 번쩍 들고 고함을 한 번 내질렀다. 그리고, 다른 하이랜더들이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며 무기를 치켜들고 마찬가지로 큰 고함을 내질렀다.
천이 넘어가는 하이랜더들의 외침은, 그것만으로도 벤부르그 산머리 전체를 뒤흔들 정도로 강렬했다.
그 모습을 보던 엘렌이 내 옆에 서서 한마디 했다.
“잘 풀렸네. 나는 꼼짝없이 오늘 하이랜더들의 저녁 식사에 우리를 으깨 만든 미트볼이 올라갈 줄 알았는데.”
“말 한 번 이쁘게 한다. 생각만 해도 끔찍하네.”
잠깐 키들거리던 엘렌이 내 등짝을 한 번 툭 친다. 나는 으윽, 하는 소리를 냈다. 그 모습을 본 엘렌이 순간적으로 움찔했다.
“미안, 몸 상태가 좋지 않을 텐데.”
나는 고개를 저은 다음 잠깐 서 있다가 그대로 벌러덩 드러누웠다. 화끈화끈, 싸움 끝에 욱신거리는 뜨거운 몸이 눈 속에 퍽 하고 파묻히더니 그대로 얼음찜질을 하는 것처럼 차갑게 식어가기 시작했다.
그 뭐냐, 야구선수들이 중간중간 아이스팩 하는 것도 이와 비슷한 느낌이 아닐까? 아니면 말고.
한동안 그러고 누워있으려니, 엘렌이 입을 열었다.
“지금부터는 마법을 사용해도 괜찮은 거지? 쉬고 있는 동안, 몰래 올리비에가 차지하고 있던 거점을 한번 확인해보고 올게.”
나는 그 말에 대답했다.
“조심해서 움직여, 나 없이 창 맞으면 너 꼼짝없이 죽는다.”
내 말에 엘렌이 응? 하는 소리를 냈다.
“로베르 그리즈만 말하는 거야? 눈사태에 휩쓸렸잖아. 살아있을 거라고 생각하기는 힘든데.”
나는 그 말에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살아남았을 거라고 생각하기는 많이 힘들지만, 그래도 가능성은 있어.”
사실, 살아있다고 해도 눈사태에 휩쓸린 녀석이 빠져나오는 데 성공했을 가능성은 그렇게까지 높은 편이 아니다. 눈보라와 눈사태는 둘 다 위험하지만, 위험한 이유가 다르니까.
눈보라는 시야를 가리고 체온을 빼앗지만, 눈사태는 쌓여있는 눈의 무지막지한 무게로 사람을 후려치고, 그대로 파묻어버리는 거다. 살아남는다고 해도 몸 위에 쌓인 눈의 무게 때문에 벗어나지 못하고 그대로 죽는 경우가 더 많다.
“어쩌면 로베르도 그런 최후를 맞이했을지도 모르지만, 아닐 수도 있어. 조심해서 나쁠 건 없잖아.”
내 말에 엘렌이 고개를 끄덕였다.
“각별히 주의할게. 혹시나 올리비에 황녀가 남아있다면 마법사들도 남아있을 테니, 마력 사용도 최대한 줄이고.”
말을 마친 엘렌이 하늘로 떠오르더니, 그대로 멀어졌다.
그녀가 다시 돌아온 건 저녁이 다 되어서였다. 돌아온 엘렌의 표정이 그닥 밝지 않다.
“없었나 보네.”
내 말에 엘렌이 고개를 끄덕였다.
“머물던 흔적까지도 거의 다 사라질 지경이었으니까. 자리를 떠난 지 시간이 꽤 지났나 봐.”
말을 마친 엘렌은 푸후, 하고 숨을 내쉬더니 팔을 꼰 채 말을 이었다.
“그래도 완전히 성과가 없는 건 아니야. 하이랜더의 무덤을 열어젖힌 다음, 시체를 되살리기 위해 사용된 마력의 흔적이 남아있었어.”
나는 그 말에 오호, 하는 소리를 내고 엘렌을 바라봤다.
“그래서, 그걸로 알아낼 수 있는 건?”
“얼마나 많은 하이랜더를 되살리는 데 성공했는지 대충은 알 수 있었어.”
되살려낸 하이랜더는 만 명을 넘지만, 만 오천을 넘지는 않을 것이라는 게 엘렌의 예상이었다. 그 이야기를 들은 나는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쉽네. 하이랜더 하나가 15마리의 언데드 하이랜더를 죽이면 되는 거잖아?”
그리고,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나와 엘렌의 입에서 동시에 한숨이 흘러나왔다.
“하이랜더들은 네 말이 아니면 귓등으로도 듣지 않겠지?”
나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하이랜더들의 자존심이 굉장하다는 건 충분히 알게 되었으니까.
이게 좋은 일인지, 아니면 나쁜 일인지는 잘 모르겠다. 쉽게 비유하자면 내 말이 아니면 움직이지 않는 탱크가 갑자기 사병으로 쥐어진 거나 마찬가지다.
“일단, 왕도로 돌아가는 게 우선이야.”
“가는 길에 꽤 많은 사람들의 방광이 활짝 열리겠네.”
천 마리가 넘어가는 하이랜더의 행렬이다. 쿠르스트 산맥에서 왕도까지 향하는 길에 지나쳐야 하는 영지들뿐이 아니라, 국경 수비대부터가 문제일 것 같다.
“뭐, 지금은 차라리 위협적으로 보이는 게 좋은 상황이야.”
잘나가는 사람이 있다면, 어떻게 해서든지 간에 끌어내리는 게 인간의 미덕이니까.
게다가 마침맞게 이 어려운 판국에 제국과의 전쟁을 촉발했다고 하는 좋은 핑곗거리도 있으니.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하이랜더들에게로 향했다.
“오래 기다리게 했다. 이동하자.”
내 말을 들은 하이랜더들이 슬쩍 나를 보고는 이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겨울걸음이 입을 열었다.
― 어디로 향하는 건가?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 거지. 나는 잠깐 고민하다가 수정구를 손에 쥔 채 입을 열어 우리가 넘어야 하는 과정에 대해 설명했다. 물론, 이 과정에서 개고생을 하는 건 이번에도 역시나 번역 역할을 담당한 카일이었다.
― 그 국왕이라고 하는 녀석은 너보다 강한 건가?
나는 그 말에 음, 하는 소리를 냈다. 그럴 리가 있나. 나이를 엄청 먹은 할아버지인데. 왕국 기사단장인 핀들턴이라면 모를까.
내가 고개를 젓자 겨울걸음이 콧김을 한 번 뿜었다.
―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군. 약자는 강자의 말에 저항하지 않는다. 강한 자가 약자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니. 하이랜더의 사회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나는 그 말에 음, 하는 소리를 냈다.
“이해하기 힘들다면 억지로 할 필요는 없어. 우리도 너희들의 사회를 이해하기는 굉장히 힘드니까.”
내 말에 녀석이 슥 나를 훑어보고는 대답했다.
― 우리는 훨씬 간단하다. 건방진 녀석을 보면 무기를 휘두른다. 상대의 무기가 내 머리통을 부순다면 녀석이 내 앞에서 건방지게 굴 자격이 있었던 거다. 상대가 내 무기에 머리통이 박살난다면, 건방지게 굴 자격이 없었던 거다.
간단하지만, 역시 사람의 머리로는 이해하기 힘든 문화다. 저런 문화를 가진 녀석들이 잘도 여태 동안 멸종하지 않고 살아남았구나, 하고 감탄하는 수밖에.
― 어쨌든, 그 국왕이라는 자를 찾아가는 일이 끝난다면 전장으로 향하나?
그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가기 싫어도 가게 될 거다.
― 그렇다면 상관없겠지. 늦어지지 않도록 해라.
화법 자체는 명령어지만, 이 녀석들 행동 패턴을 생각해보면 애초에 명령문이 디폴트 같은 느낌이니까.
“알았으니까, 따라오기나 해. 빨리 끝내고 싶은 건 나도 마찬가지야.”
말을 마친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곧바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동시에 하이랜더들이 모두 일어나서 내 뒤를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근데, 이 하이랜더들의 식사는 어떻게 하지?”
엘렌의 질문은 일리가 있었다. 저 덩치에 저 근육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연비가 나쁠 수밖에 없는데.
“별수 있나. 일단은 수비대에서 식량을 공급받고…….”
이후에 산맥을 나서게 되면 지나가는 영지에서 좀 달라고 해야겠지.
“달라고 하면 줄까?”
나는 그 말에 뒤를 가리켰다.
“저걸 봐.”
이런 우락부락한 3m 크기의 거인들을 천 명이나 끌고 가서 '죄송한데, 적선 좀 해주세요.'라고 하면 그 말을 듣는 사람이 내 대사를 구걸로 들을까, 협박으로 들을까? 내가 아무리 찌질하고 구차하게 애원하는 형식을 취해도 영주들은 협박으로 알아들을걸.
주지 않고는 배길 수 없을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