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6화
보급품을 제공해 달라는 내 말을 들은 수비대장이 아, 하는 소리를 내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군요. 하지만, 관문에서 공급할 수 있는 보급품의 양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충분한 양을 제공해드리기는 힘들 것 같습니다.”
나는 그 말에 대답했다.
“일단 제공해 주실 수 있는 보급품을 마련해주시고, 연락 체계를 통해 다른 관문들과, 쿠르스트 일대 인근의 영지가 미리 보급품을 준비해 두도록 배려해 주셨으면 합니다.”
내 말에 수비대장이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죄송하지만, 거기까지는 제 역할을 넘어서는 행동입니다.”
나는 그 말에 대답했다.
“수비대장님의 권한을 사용해 달라는 게 아닙니다. 어디까지네 제 의사를 전달해달라는 것뿐이지요. 단순한 의사 전달이 월권행위에 해당되지는 않을 겁니다.”
내 말에 수비대장이 잠깐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마틴 레드우드 님의 의사는 국경 수비대 사령부와 인근 영지에 전달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국경 수비대는 물론이고, 쿠르스트 산맥 일대에 머무르는 영주들도 내 요청을 거절하기는 힘들 것이다. 애초에, 천 마리의 하이랜더를 대동하고 움직이는 녀석의 기분을 나쁘게 할 정도로 간 큰 놈들은 없을 테니까.
대화를 마치고 난 다음,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나섰다.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클로에가 내 쪽으로 따라붙었다.
“일은 잘 처리된 모양이네요.”
“잘못 처리되기가 더 어려운 상황이었어. 테네스 공국에 머무르고 있는 엔리코와 연락하고 싶은데.”
“이동 중 첩보국장님과 연락해서 방안을 찾아볼게요.”
말을 마친 우리는 곧바로 관문의 보급품을 전달받을 수 있었다. 수비대장이 말했던 것처럼, 그렇게 많은 양은 아니었다.
“뭐, 어차피 여기에서 많이 받아낼 거라고는 기대하지도 않았으니.”
보급품을 챙기는 건 병사들을 시킬 필요가 없다. 하이랜더들의 근력이라면 마련된 보급품 정도는 스스로 챙겨서 이동할 수 있다.
필요한 것들을 챙긴 우리는 더 이상 머무르는 대신 곧바로 관문을 벗어났다.
이 이후로 거쳐 지나가는 관문에서는 병력들이 당황하는 일 없이 바로바로 문을 열어주었고, 우리는 각 관문에서 준비해 놓은 보급품을 챙겨 빠르게 산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이틀 정도 지나자, 우리는 완전히 쿠르스트 산맥을 내려와 록밸리 마을의 초입에 도착했다.
“다행인 건 록밸리 마을이 하이랜더들에게 습격당한 적은 없다는 거지.”
내 말에 클로에와 엘렌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국경 수비대라면 모를까, 록밸리 마을로 진입하게 되면 하이랜더라고 하는 존재는 드래곤이나 유니콘과 비슷한 입지다. 실제로 본 적은 없지만 있다고 믿어지는 전설의 동물.
“피해를 입은 사람들이 있었다면 어떻게 해서든지 록벨리로 진입하지 않는 방법을 고려했을 거야.”
내가 여태 동안 쌓아왔던 신뢰도와 업적을 한 방에 다 날려 먹는 것도 충분히 가능했을걸. 이스라엘 대통령이 네오 나치로 밝혀지는 것과 비슷한 충격 아닐까?
어쨌든, 파이크 왕국의 국경 수비대가 눈물겨운 의무를 다한 덕분에 백성들이 하이랜더를 보고 '부모의 원수!' 같은 소리를 하는 상황은 없게 되었다.
공포의 대상이 되는 것과, 원한의 대상이 되는 건 차이가 있으니까.
“으…… 아…….”
평화롭게 일과를 보내던 사람들의 앞에 나타난 천이 넘는 하이랜더. 이야기를 나누며 장작을 패던 사람들은 동작을 멈추고 들고 있던 손도끼를 바닥으로 떨어뜨리고, 이야기를 나누며 빨래하던 사람들은 들고 있던 홍두깨를 물속으로 빠뜨렸다.
눈 앞에 펼쳐진 현실이지만, 너무나도 초현실적인 풍경이라 사실 가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게 하는 광경. 하이랜더들은 그런 사람들의 반응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서 있었다.
“망할, 이 상황을 진정시키는 것도 일이겠군.”
“마틴, 마틴 레드우드 님이시잖아.”
몇몇 사람들이 얼이 빠진 상황에서도 어떻게든 내 얼굴을 알아보는 데 성공한 모양이다.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의 시선이 회색 피부의 하이랜더에게서 떨어져, 내 쪽으로 쏠렸다.
“당황할 필요 없다. 위험하지 않으니 진정해라.”
이 말을 듣고 진정할 수 있으면 그것도 대단한 인물이다. 사람들 대부분은 내 말을 듣고도 그대로 딱 멈춘 채 하이랜더와 나를 번갈아 바라볼 뿐이었다.
더 시간 끌지 말자. 여기서 해야 할 일은 다 끝낸 거나 다름없으니. 나는 시선을 돌려 하이랜더들을 보며 그들의 언어로 말했다.
“이동하자!”
내 말을 들은 하이랜더들이 일제히 내 뒤를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 * *
테네스 공국의 상인 엔리코는 요즘 들어 바쁜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상업이 가장 융성한 테네스 공국에서 상인들 사이의 판도가 변하고 있다는 것은, 나라 전체가 변하고 있다고 생각해도 과언이 아니다.
변화에는 주도하는 자와 끌려다니는 자가 있다. 주도하기 위해서는 먼저, 더 빠르게 움직여야 한다.
“큰 건이 하나 있어야 하는데. 아직까지 보이질 않는단 말이지.”
어느 정도 규모를 갖추는 데 성공하면, 이후에 돈을 얼마나 꾸준히 만질 수 있느냐는 결국 성실함의 유무로 결정된다.
하지만 이미 마련된 규모 자체를 키우는 것은 성실함만 가지고 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기회가 있어야 하고, 그 기회를 미리 알아채거나, 놓치지 않고 잡아내는 것은 재능의 영역이다.
재능이 없는 자는 큰 사업을 물려받아 유지할 수는 있어도, 그 사업을 더 크게 키울 수는 없다. 엔리코가 원하는 건 바로 그 기회였다.
“마틴 레드우드에게서 연락이 왔습니다.”
그렇게, 혹시라도 나타날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잡기 위해 잠까지 줄여가며 노력하던 엔리코에게 날아온 소식.
“…….”
엔리코는 자리에 앉은 채 서류를 검토하며 말했다.
“편지인가?”
엔리코의 말에 하인이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군용 수정구를 통해 날아온 연락입니다. 연락을 받은 곳은 수도 경비대로 알고 있습니다. 지금, 밖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군용 수정구를 통해 연락했다니. 순간적으로, 엔리코의 뺨에 한 줄기 바람이 스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어쩌면, 이게 순풍이 될지도 모르겠다. 엔리코는 그런 생각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로 확인해보겠네.”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나선 엔리코는 수정구를 챙겨 들고 다시 방 안으로 돌아왔다.
“연락받았습니다, 마틴 레드우드 님. 무슨 일이신지요.”
― 투자 한번 해볼 생각 없습니까?
마틴의 말을 들은 엔리코의 머릿속이 빠르게 복잡해지고 정리되기 시작한다.
“투자라니, 갑작스럽게 무슨 이야기를 하시는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
― 베로나 제국과 파이크 왕국의 분위기가 요즘 심상치 않은 건 알고 있겠지요.
“모를 리가 있습니까.”
상인은 돈 냄새를 맡는다. 전쟁은 당사자들에게는 지옥이지만, 옆에서 지켜보는 자들에게는 돈 자루인 법이다.
테네스 공국의 모든 상인들이 신경을 곤두세우고 파이크 왕국과 베로나 제국 사이에 불어닥치기 시작한 흉흉한 바람을 타고 돈을 벌어들일 준비를 하고 있었다.
― 파이크 왕국으로 보급품과 물자를 좀 지원해줬으면 하는데요.
마틴의 말에 엔리코가 잠깐 턱을 쓰다듬었다.
“투자라고 하셨으니, 저에게 돌아오는 것도 있을 거라 기대해도 되겠습니까?”
엔리코의 말에 마틴이 시원하게 대답을 돌려줬다.
― 쿠르스트 산맥에서 산출되는 특산품의 매입 권리.
그 말에 엔리코가 침묵했다. 쿠르스트 산맥.
산출되는 커피의 품질이 뛰어난 것으로 알고 있다.
또한, 산맥에 잠들어 있는 암염은 양도 엄청나고, 그 자체로도 품질과 순도가 굉장히 높은 걸로 알고 있다.
그 이외에도, 몇몇 사람들이 용기를 가지고 나아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산맥 아래에 숨 쉬고 있는 광물 자원들의 품질과 매장량도 비교할 데 없이 뛰어난 것으로 밝혀졌다.
하지만 그 모든 장점에도 불구하고 그 누구도 그 산맥이 상업적인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마틴 레드우드 님이라면 알고 계시겠지만, 쿠르스트 산맥은 하이랜더들의 존재만으로도 그 상업 가치가 없다고 평가되고 있는 실정입니다.”
하이랜더는 그 존재만으로도 너무 위험하다. 암염과 광물의 채굴 여부를 떠나, 가려고 하는 사람도 없고, 간다고 해도 머지않아 싸늘한 시체로 발견될 뿐이다.
커피의 품질은 말할 것도 없이 훌륭하지만, 비슷한 이유로 인해 쿠르스트 산맥에 대규모 농장을 일구는 것은 불가능하다.
“게다가, 이런 말씀을 드리기는 조금 그렇지만…… 마틴 레드우드 님은 쿠르스트 산맥의 소유권이나, 그와 비슷한 권리를 보유하고 계시지 않은 걸로 알고 있습니다.”
마틴 레드우드가 건네주겠다고 해도, 실제로는 아무 의미도 없는 일이다. 쿠르스트 산맥은 왕국과 제국이 나눠 가지고 있지만 영주는 없다.
애초에, 저런 위험한 곳을 영지로 달라고 하는 귀족도 없을 거다.
― 권리라면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머지않아 쿠르스트 산맥에는 영주가 생길 겁니다. 그리고, 그 영주는 제가 될 겁니다.
엔리코가 그 말을 듣고는 잠깐 움찔한 다음 대답했다.
“말씀에 확신이 있으십니다만…… 저는 잘 모르겠군요.”
곧바로 마틴의 입이 열렸다.
― 괜찮습니다. 이해합니다. 어차피 머지않은 시일 안에 테네스 공국에도 전해질 소문이니, 엔리코 씨에게는 미리 말씀드리는 편이 좋겠군요.
그리고 이어진 말을 가만히 듣고 있는 엔리코의 머릿속에서, 금화가 차르륵 하는 소리를 내며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기 시작했다.
이건 바람이다. 그것도 엄청난 순풍이다. 애초에 소금이 돈이 된다는 건 세 살짜리 어린애들도 알 정도고, 쿠르스트 산맥의 커피는 그 품질이 뛰어나지만 바다 너머에서 구해오는 향신료보다 더 구하기 어려워서, 말 그대로 부르는 게 값인 기호품이다.
거기에 더해서 어마어마한 매장량을 자랑할 쿠르스트 산맥의 광맥까지. 엔리코의 머릿속에 주판이 떠오르고, 빠르게 주판알이 이리저리 움직이기 시작한다.
계산이 바짝 섰다. 이 바람을 타면 높이 올라갈 수 있다.
“비축해 놓은 물자를 보낼 준비를 하겠습니다.”
안 그래도 어차피 파이크 왕국과 베로나 제국 사이에 전쟁이 일어난다면 보급품에 속하는 물건들의 가격이 오르는 건 정해져 있기에, 꽤나 많은 물량을 미리 확보해두었다.
“다만, 계약서가 없으면 저로서는 움직이는 게 꺼려집니다.”
― 그렇겠지.
상업이 극도로 발달한 테네스 공국에서는, 법 다음으로 그 힘이 강력한 게 바로 계약서다. 모든 거래는 계약서가 필요하고, 계약서가 없다면 거래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건 마틴과 엔리코 간의 믿음 문제가 아니다. 계약서가 없다면 거래 내역이 없다는 것이다. 물건과 돈을 주고받았다는 증거가 없으면 세금을 먹이는 테네스 공국에서는 자연스럽게 불법행위를 의심하게 된다. 그걸 피하기 위해서라도, 엔리코는 계약서 없이 움직일 수 없다.
“아, 그리고 독점까지는 원하지 않습니다. 우선권 정도가 적절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 어째서? 쿠르스트 산맥에서 나오는 모든 상품을 독점한다면 돈을 무더기로 긁어모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데요.
마틴의 되물음에 엔리코가 대답했다.
“공급을 제한해 물건의 가격을 올리는 행위는 시장을 기형으로 만듭니다.”
상인은 시장에서 형성된 정상적인 가격선 안에서, 받아낼 수 있는 최대의 이문을 남겨야 한다. 엔리코는 언제나 그렇게 생각해왔고, 지금도 그 생각은 변하지 않았다.
“이전에도 비슷한 말을 한 기억이 있는데, 저는 그런 식으로 장사하지 않습니다. 제가 발주한 물량을 우선적으로 처리해주신다면, 이후 누가 그 물건을 사들이건 상관없습니다.”
자신이 소화할 수 있다고 생각해, 요청한 물량만 우선적으로 제공해준다면 그걸로 충분하다. 그리고, 그 정도는 가장 먼저 돈 냄새를 맡고 투자한 사람으로서 가질 자격이 있다.
― 엔리코 씨의 생각이 그렇다면, 보내드리는 계약서는 요청한 내용에 맞게 수정해서 보내드리지요.
“감사합니다.”
그걸로 두 사람의 대화는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