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화
엔리코와의 대화를 마치고 수정구의 연결을 끊은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주변에 어쩐지 이상한 녀석들만 꼬이는 느낌이야.”
독과점 싫다 하는 상인을 내가 직접 보는 날이 올 줄이야. 물론, 이전에 나눴던 대화를 생각해보면 저렇게 행동하는 것도 영 이상한 건 아니지만, 애초에 그 대화 자체도 좀 이상했지.
“왜요, 싫다고 했나요?”
클로에의 말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일 자체는 잘 풀렸어.”
그냥, 생각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들어서 약간 놀란 것뿐이다.
“엔리코 그 자식, 난 인물은 난 인물이야.”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해라.
눈앞에 아무것도 없다면 누구나 최영 장군이 될 수 있다. 하지만, 막상 눈앞에 돈더미가 쌓여있을 때도 최영 장군이 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앞으로 얼마나 더 남았지?”
내 말에 클로에가 대답했다.
“한 일주일 정도 더 걸어가면 왕도에 도착해요. 영주성에서 보급받은 물자가 제법 되니까, 여유는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나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 사이, 수정구를 살피던 엘렌이 내 쪽으로 수정구를 내밀었다.
“세자 저하께서 연락하신 거야. 받아봐야 할 것 같은데.”
나는 그 말에 수정구를 받아들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 지금 위치가 어떻게 되지? 왕도로 오기 전에 먼저 들렀으면 하는 장소가 있는데.
나는 그 말을 듣고 음, 하는 소리를 낸 다음 대답했다.
“제국군이 국경을 넘었습니까?”
― 그래. 고트힐 요새 부근의 국경인데, 규모가 제법 크다. 정병 2만에 기사단 하나.
요새 안에 머무르는 병력은 삼천에, 기사단은 따로 없는 모양이다. 지금은 해당 요새가 포위된 상태로 항전을 이어가고 있다.
― 이미 제국의 병력들이 국경을 넘고 있는데, 아무래도 해당 요새 부근은 주둔한 병력으로 막아내는 데 무리가 있다는 판단이 섰어.
이야기를 들으면서 지도를 확인했다. 고트힐 요새는 여기에서 그렇게 멀지 않은 편이다. 하이랜더들을 재촉해 움직인다면 기병보다 빠르게 이동할 수 있을 테니, 이틀 안에 도착할 것 같은데.
아직 언데드 하이랜더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있다. 상황을 봐서, 투입 여부를 결정할 모양인가보다.
“알겠습니다. 바로 해당 장소로 향하겠습니다.”
― 자네가 큰 성과를 거두면 국경 수비대에서도 병력을 적극적으로 빼낼 수 있을 거야.
이 싸움의 결과를 확인한다면, 더 이상 하이랜더가 파이크 왕국을 적대하지 않는다는 게 증명될 테니까.
― 그리고, 여기에서 하루가 멀다고 짹짹거리는 잡것들도 입을 좀 다물겠지.
나는 그 말에 웃음을 흘리며 대답했다.
“그냥 싹 다 단두대로 보내버리지 그러십니까?”
― 그럼 누구한테 일을 시키겠나. 필요한 피라면 흘려야겠지만, 그것도 적절한 시기가 있는 법이야. 고생하라고.
그걸로 대화는 끝났다. 나는 뒤로 시선을 돌려 엘렌과 클로에를 바라봤다.
“중간 경유지가 하나 생겼어.”
상황 설명을 들은 두 사람이 고개를 끄덕였고, 나는 하이랜더들에게 상황을 설명했다.
― 그곳으로 향하면, 우리의 자랑스러운 조상들을 꼭두각시로 부리는 녀석들이 있는 건가?
나는 그 말에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는 않다. 하지만, 그 개자식에게로 가는 길을 막는 장애물이지. 복수를 하기 위해서는 꼭 처리할 필요가 있어.”
내 말을 들은 하이랜더들이 잠깐 자기들끼리 시선을 주고받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 그들은 우리 앞에 부서질 것이다.
하이랜더들은 내 말을 받아주었다. 좋아, 데뷔전 한번 화려하게 조져주자고.
우리는 곧바로 고트힐 요새로 향하기 시작했다.
* * *
고트힐 요새에서 사령관이 목이 터져라 외치며 적들의 공격을 막아내고 있었다. 쏟아지는 화살과 투석기가 날려 보내는 돌덩이 앞에, 오랜 세월 이 땅에 자리 잡고 있던 요새의 성벽이 서서히 깎여나가기 시작한다.
“버텨라!”
어차피 도망갈 수는 없다. 베로나 제국군의 병력은 성을 포위한 지 오래다.
“사령관, 지원군은 멀었습니까!”
병사들의 눈에 피로와 절망이 자리 잡은 것은 벌써 오래전이다. 그 외침을 들은 사령관이 대답했다.
“조금만 더 버티면 된다!”
공성추가 성의 동문을 때리자, 굉음이 울려 퍼진다. 문 앞에 자리 잡은 병사들의 몸이 공포로 떨린다.
“동문으로 병력을 더 보내라!”
“사령관님, 이 이상으로 병력을 빼낼 수는 없습니다!”
사령관은 지도를 꽉 움켜쥔 채, 저 멀리 보이는 적의 군세를 살핀다. 문이 열리면, 즉시 밀어닥칠 준비가 되어있는 기사단의 병사들과 기사. 그리고, 계속해서 사다리를 걸고, 벽을 기어오르는 병사들.
“적병이 서쪽 벽을 올랐습니다! 병력을 뒤로 물리고 있습니다!”
결국, 무수한 사상자를 내며 기어이 사다리를 오르는 데 성공한 베로나 제국의 병사들이 서서히 성벽 위를 잠식하기 시작한다.
“잘 들어라, 여기서 개죽음당하지 않으려면 하나뿐이다. 지원군은 반드시 온다. 그때까지 버텨야 한다!”
분명히 올 것이라는 대답을 들었다. 지금, 포위된 요새 안에 머무는 사령관으로서는 그 말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사령관은 들어라! 이 이상 무고한 피를 흘리지 말고 항복하라! 그러면 그대들의 목숨은 보장될 것이다!”
적의 외침에 병사들이 동요하기 시작했다. 꼼짝없이 죽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되던 상황에 나타난 배신이라는 이름의 활로. 그 외침을 듣자마자 병사들은 물론이고, 사령관과 함께 전황을 살피던 간부들의 표정에도 동요가 내려앉는다.
“그럴 수 없다. 전쟁에 있어, 전선의 유지는 필수다. 이 요새를 내준다면 요새 하나를 잃는 걸로 끝이 아니다. 파이크 왕국은 전선 전체를 아래로 내려야 한다.”
“사령관님, 이렇게 된 상황에서는 차라리 항복하는 게…….”
조심스럽게 말을 꺼낸 간부의 목이 사령관의 검에 의해 잘려나가 바닥을 구른다. 사령관은 살벌한 표정을 하고 간부들을 바라봤다.
“들어라, 지원군이 오지 않는다면 우리는 여기에서 죽을 뿐이다. 다른 길은 없다! 명심해라. 항복이라는 단어가 그 입 위에 올려지는 순간, 구차하게 목숨을 잇기 위해 꺼낸 그 말이 그대들의 숨통을 끊는 칼날이 되어 머리 위로 떨어질 것이다!”
울려 퍼지는 사람들의 고함과 비명. 타오르는 화염과 연기. 투석기에 얻어맞아 무너지기 시작하는 벽과 때려 박힌 공성추에 구겨지는 성문. 사기를 잃은 병사들의 발악과도 같은 공격.
패배의 징조가 요새 안에 진하게 퍼지기 시작한다.
“수정구로, 연락이 왔습니다.”
그 말에 사령관이 수정구를 붙잡았다.
― 아아, 들립니까? 지원군이 필요하다고 들었는데.
“그대는 누구인가, 신분을 밝혀라.”
사령관의 말에 곧바로 대답이 돌아왔다.
― 마틴 레드우드, 고트힐 요새를 포위한 베로나 제국군을 몰아내라는 세자 저하의 명을 받았습니다.
마틴 레드우드, 아는 이름이다. 베로나 제국과 파이크 왕국 사이에 발생한 전면전의 원흉이라고 알려진 자다.
“네가 지원군이라고?”
― 그렇습니다만. 어쩐지 별로 달갑지 않으신 모양입니다? 짐작 가지 않는 건 아니지만. 뭐, 상관없겠죠.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하는 편이 좋겠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수정구의 연락은 끊어졌다. 그리고, 저 멀리에서 날카로운 피리 소리가 울려 퍼졌다.
저물어 가는 석양을 등지고 서 있는 것들을 확인한 사령관은 할 말을 잃었다.
― 으아아아아아아!
석양을 등지고, 3m가 넘어가는 회색의 거인들이 요새를 향해 질주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제일 앞에는 무기를 든 마틴 레드우드가 보인다.
“쓸어버려라!”
마틴 레드우드와 함께 몰려오는 하이랜더를 확인한 베로나 제국군은 곧바로 대응을 시작했다.
“전 병력, 진형을 갖춰라!”
창과 방패를 앞세운 병력으로 벽을 형성하고, 궁수들과 마법사들이 그 뒤에서 화살과 마법을 쏟아내기 시작한다. 그 사이, 기사단은 옆으로 돌아 적의 뒤를 칠 준비를 하기 시작한다.
“전원, 발사!”
수천이 넘어가는 화살이 질주하는 회색의 거인을 향해 쏟아지기 시작한다.
“갑주 하나 걸치지 않은 녀석들이라니. 제아무리 덩치가 크다 해도…….”
베로나 제국의 병력을 통솔하던 장군이 이후에 이어지는 풍경을 보고 할 말을 잃었다. 쏘아붙인 화살들이 잿빛의 피부에 닿자, 그대로 튕겨 나간다. 제대로 박히는 화살이 없었다.
“마법사! 마법사들!”
사령관의 외침에, 곧바로 마법사들이 마법을 준비해, 질주하는 회색의 거인을 향해 쏟아내기 시작한다. 얼음으로 빚어낸 창, 폭발하는 화염과 하늘에서 바닥으로 내리 찍히는 벼락 따위가 회색의 거인들을 향해 쏟아진다. 이번만큼은 결과가 다를 것이다.
마법이 휩쓸고 지나간 대지 위를, 여전히 달리고 있는 회색의 괴물들을 보기 전까지는 그런 생각을 했었다.
“효과가 없습니다!”
화살은 박히지 않고, 마법도 통하지 않는다. 그리고 마침내, 괴물과도 같은 회색의 거인들이 창과 방패를 앞세운 전열에 도착했다. 두부 위에 워해머가 때려 박힌 것처럼 창과 방패를 든 병사들이 삽시간에 무너지기 시작한다. 휘둘러지는 몽둥이질 한 번에 박살난 병사들의 시체가 무수히 하늘을 날아간다.
멈추지 않고 질주하는 회색의 괴물들 앞에서는, 인간을 상대로 훌륭한 결과를 보장하던 모든 것이 무력했다.
― 으아아아아아아아!
꿈틀거리는 근육, 충혈된 눈동자와 입에서 뿜어져 나오는 거친 호흡. 광기와도 같은 분노를 품고 돌진하는 악마들은 순식간에 전열의 보병을 뚫고 화살을 쏘아붙이던 궁수들과 마법사들을 덮쳤다.
박살나고 으깨진 시체들이 땅을 메운다.
* * *
하이랜더들의 돌진을 바라보던 나는 입맛을 다셨다.
이건, 완전히 탱크네. 화살도 안 통하고, 마법도 엘렌 정도 수준의 마법사가 아니라면 피해를 줄 수 없다. 창과 칼 따위를 들고 백병전에 들어가면, 병사들이 뭘 해보기도 전에 주변이 쓸려나간다.
십자군 전쟁에 현대의 전차대대가 투입되었다면 이 정도의 위력을 발휘할 수 있었을까? 적은 볼링공에 얻어맞은 볼링핀처럼 쓸려나가고 있었다.
그 위력이 너무나도 강력해서, 딱히 내가 직접 뭘 할 필요도 없었다. 이걸 뭐라고 해야 할까.
‘이건 망치와 모루라는 거야. 무장한 보병이 정면에서 적의 공세를 버티는 동안 기병이 기동력을 이용해서 적의 배후를 쳐 승리하는 전술이지.’
‘그래? 이건 하이랜더야. 적을 이기지.’
이딴 식으로 전개되는 싸움이었다.
백병전의 기본이라고 칭해지는 전술은 하이랜더 앞에서 그 의미를 잃었다. 망치가 뭘 해보기도 전에 모루가 물에 푹 젖은 미농지처럼 찢어지는데 망치와 모루는 무슨 망치와 모루.
이건 전투라고 부르기도 힘들다. 30분 뒤, 적이 후퇴하기 시작했고 요새는 포위를 벗어나는 데 성공했다.
2만의 병사와 기사단 하나가 개작살나서 꼬리 말고 도망가는 데 걸린 시간이 혼자 국밥에 소주 한잔 걸치는 시간과 비슷했다.
“……얼추 끝난 모양이네요.”
클로에가 입을 벌리고 그 광경을 보다가 정신을 차리고 나에게 말을 건넸다.
“그래, 사령관과 이야기를 나눠야지.”
우리는 요새로 향했다. 가장 먼저 우리를 맞이한 건, 성벽 위에서 공포에 질린 표정으로 우리를 바라보고 있는 병사들이었다.
“세자 저하의 명에 따라, 고트힐 요새의 포위를 풀기 위해 파견된 마틴 레드우드다! 적이 아니니, 성문을 열어라!”
병사들은 움찔했다. 그리고, 잠시 뒤 사령관이 성벽 위에 모습을 드러냈다.
“……지원군에 감사한다. 덕분에 요새가 적의 공세를 막아낼 수 있었다.”
그럼 문이라도 좀 열어주지 그래? 괜찮아, 안 잡아먹으니까 얼렁 열어봐. 공성무기에 의해 구겨진 성문이 삐걱이는 소리를 내며 힘겹게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