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드우드-148화 (148/275)

148화

그 광경을 보던 하이랜더 중 하나가 콧김을 뿜었다. 저건 비웃음인데.

― 돌과 철로 지은 벽이라. 저런 것에 의존하니 나약해지는 거다.

미친 소리 하고 있네.

“저게 없었으면 쿠르스트 산맥에서 니들을 막는 건 불가능했어.”

― 전투 후에는 언제나 배가 고프군. 들판에 먹거리가 널려있으니, 배를 좀 채워야겠군.

뭐? 야 잠깐만. 나는 곧바로 대답했다.

“곧바로 식사를 준비할 테니. 좀 참고 있어 봐.”

안 그래도 애들이 바짝 쫄아 있는데 시체까지 뜯어먹었다간 단체로 지린 오줌에 요새가 누렇게 물들 수도 있다.

― 알았다. 서두르도록.

열린 성문 앞으로 나온 사령관을 향해 나는 곧바로 말했다.

“이런 부탁 갑자기 해서 미안한데, 데려온 하이랜더들이 허기진 모양입니다. 식량을 제공해 줄 수 있을까요?”

당연히 요새의 사령관은 이 협박에 가까운 구걸을 거절할 수 없었다. 곧바로 내어온 식량을 하이랜더들이 해치우는 동안, 나는 사령관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럼 저것들이 쿠르스트 산맥에서 악명을 떨치고 있는…….”

“하이랜더입니다. 지금은 파이크 왕국에 협조하고 있으니,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쏘지마, 아군이야.

내 말에 사령관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아직 마음속 깊은 곳에는 두려움 같은 게 자리 잡고 있긴 한 모양이지만, 일단 도움을 받아서 그런지 꽤나 얌전하다.

“고트힐 요새에 저 하이랜더들을 일부 남겨놓을 수는 없겠습니까?”

나는 그 말에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죄송하지만, 저 이외에는 통제할 수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애초에 하이랜더들과 그렇게 합의한 상황이다. 저 녀석들은 나 이외의 다른 녀석들의 말은 듣지 않을 것이다. 엄밀히 말하면 나도 저들에게 명령을 하는 게 아니라 협조를 구하는 정도이기 때문에, 선을 넘는 행동을 하면 무슨 상황이 펼쳐질지 짐작할 수 없다.

대충 내 말을 알아들은 사령관이 다소 풀 죽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있으면 좋은 친구들이지만, 내가 없어지면 우리에서 풀려난 티라노사우르스 같은 녀석들이니까.

“알겠습니다.”

사령관과 이야기를 마친 다음 나는 성 근처에 앉아 고기를 뜯고 곡물을 삼키는 하이랜더들을 바라봤다. 여기에서 식사를 마치고 나면 바로 다시 왕도로 향해야 한다.

“식사도 전투적으로 하네요.”

하이랜더들의 식사를 보고 있으려니 클로에가 다가와서 말을 걸었다.

“이야, 너는 어떻게 내가 시킬 일이 있을 때마다 이렇게 알아서 찾아오는 거냐?”

내 말에 클로에가 입맛을 다셨다.

“그러게 말이에요. 서글퍼라. 이번에는 무슨 일이에요?”

“세자 전하와 연락이 닿았으면 좋겠는데.”

내 말에 엘렌이 음, 하는 소리를 냈다.

“요새에 비치된 군용 수정구가 있으니 어렵지 않을 거예요. 바로 준비할까요?”

“그래 줘.”

잠시 뒤, 클로에가 수정구 하나를 나에게 내밀었다.

― 꽤나 자주 연락하는군. 이번에는 또 무슨 일인가?

“베로나 제국과의 싸움이 본격화되고 있는 중인데, 총사령관에 누가 임명되었는지 알 수 있겠습니까?”

내 질문에 세자가 바로 대답을 돌려주었다.’

― 미로스 제커빌.

나는 그 말에 작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좋아, 하고 있던 걱정이 괜한 것이었다는 게 밝혀지자 기분이 훨씬 나아진다.

“훌륭한 인선이라고 생각합니다. 왕국의 미래가 밝습니다.”

내 말에 세자가 하! 하는 소리를 냈다.

― 당연한 일을 그렇게 띄울 필요 없지. 미로스 제커빌은 그린모스 늪지대에서 다량 발생한 언데드를 처리한 경험이 있지 않나.

가장 최근에 무지막지할 정도로 많은 언데드를 상대해본 기사단장이다. 언데드 하이랜더의 출몰이 기정사실인 지금, 총사령관으로서 미로스 제커빌은 손색이 없다.

“그럼 당연히 따라붙은 자도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 에단 딘버스. 굳이 말할 필요 있겠나.

두 사람은 이미 나와 함께 합을 맞춰 카루토스 타카운을 상대했었다. 언데드 하이랜더가 출몰한다면, 미로스는 에단 딘버스의 조언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겠지. 사령관이 적극적으로 수용한 의견은 당연히 파이크 왕국 군대 전체에 전달될 것이다.

“괜히 연락해서 시간을 잡아먹은 것 같아서 부끄럽습니다.”

― 그렇게 생각할 필요는 또 없지 않겠나. 고트힐 요새의 포위는 풀렸다고 들었으니, 서둘러 왕도로 오도록. 나도 그 잘난 하이랜더라는 것들의 얼굴을 한번 보고 싶었으니까.

아, 그러고 보니 또 할 말이 있었구나.

“테네스 공국에서 만났던 엔리코라는 자와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 엔리코? 이유를 들어야겠는데.

나는 간단하게 엔리코와 나 사이에 오간 대화를 말해주었다.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세자가 저런, 하는 소리를 냈다.

― 확실히, 테네스 공국으로부터 물자를 받을 수 있다면야 병참 보급에 큰 힘이 되지.

“문제는, 제가 세자 저하의 허락을 받지 않고 단독적으로 좀 큰 미끼를 걸어두었다는 겁니다.”

내 말에 세자가 그래, 라고 짤막하게 대답하고 나서 작게 한숨을 쉬었다.

― 쿠르스트 산맥의 영주라. 너도 이번 기회에 근거지를 하나 마련해 둘 생각인 모양이구나.

“어차피 제가 쿠르스트 산맥 인근에 머무르지 않는다면 왕국은 국경수비대에 계속해서 병력과 물자를 지원해야 하지 않습니까?”

내가 쿠르스트 산맥 일대를 영지 삼아 영주로 부임한다면, 하이랜더의 습격에서 자유로워질 것이다. 게다가, 하이랜더들의 습격이 뜸해지면서 개발되는 쿠르스트 산맥의 광맥과 자원들에는 당연히 왕국의 세금이 매겨지게 된다. 테네스 공국이나 제국으로 수출된다면 당연히 관세도 듬뿍 밀어 넣을 수 있지.

국고도 충당되고, 쓸데없이 방치되는 병력과 거기에서 허비되는 예산까지 줄일 수 있으니 세자 입장에서 좋으면 좋지, 나쁜 일은 절대로 아니다.

― 영주라. 자네가 원래 원하던 자리는 아닌 걸로 아는데.

“상황이 좀 달라지지 않았습니까?’

그냥 영주라면 어차피 중앙에 권력이 집중되어있는 왕국에서는 그렇게까지 큰 자리가 될 수 없다. 하지만, 쿠르스트 산맥과 하이랜더를 옆구리에 끼워놓는 데 성공한다면 그건 더 이상 단순한 영주라고 할 수도 없다.

― 알았네. 자네의 청을 받아들여 적절한 조치를 취하도록 하지.

선조치 후보고는 성공적이었다.

“감사합니다.”

세자의 확답을 들은 나는 감사 인사를 돌려주었다.

― 됐고. 가능하면 왕도로 빨리 돌아오도록. 그래야 나도 자네는 물론이고, 동반한 하이랜더들을 정식으로 인정하고 자네에게 맡길 임무에 상응하는 지휘권을 줄 거 아닌가.

이후, 나는 식사를 마친 하이랜더들과 함께 요새에서 필요한 물자를 보급받은 다음, 왕도로 가는 길을 서둘렀다.

이동하는 와중에, 클로에가 말을 걸었다.

“올리비에 황녀가 왜 아직까지도 자기 카드를 꺼내지 않고 있을까요?”

“내가 준비한 걸 먼저 확인하고 싶었을 테니까.”

올리비에는 내가 살아있다는 점이 기쁜 게 아니다. 아직 더 놀 수 있어서 기쁜 거다. 노래방에서 친구들이랑 노래 부르는데 서비스 시간을 받은 기분에 더 가깝겠지.

내가 그냥 돌아왔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뭘 준비했는지 궁금해서 일부러 언데드 하이랜더는 꺼내지 않았다.

“하지만, 그냥 네가 준비한 게 뭔지 궁금했던 거라면 굳이 그럴 필요 없잖아.”

이야기를 듣고 있던 엘렌이 그렇게 대답하고는 뒤를 슬쩍 돌아봤다.

“천이 넘어가는 하이랜더야. 올리비에의 귓속으로는 진작에 들어갔을걸.”

엘렌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난 다음 대답했다.

“내가 준비한 카드가 하이랜더라는 건 알고 있겠지만, 이 하이랜더들이 어떻게 움직이는지가 궁금했겠지.”

하이랜더들을 다루는 데 있어서 내가 반드시 필요한가, 아니면 나 없이도 하이랜더들은 파이크 왕국을 돕는가. 올리비에가 확인하고 싶었던 건 그거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내가 없다면 하이랜더들도 움직이지 않는다는 건 알게 되었을 거야.”

만약, 나 없이도 하이랜더들이 파이크 왕국을 도울 수 있었다면 나는 왕도로 계속 향하고, 동행하던 하이랜더의 일부만 고트힐 요새로 보냈을 테니까.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 상황이네요.”

“마음에 들지 않아도, 달리 방법이 없잖아.”

저 덩치를 어떻게 숨기겠어. 감출 수 없는 사실을 억지로 감추려 들면 괜히 실수만 생길 뿐이다.

“자, 좀 서두르자고.”

내 말에 하이랜더들이 서로를 바라본 다음, 달리기 시작했다. 우리는 빠른 속도로 왕도를 향해 질주했다.

* * *

세자는 얼굴을 구긴 채 눈앞에 서 있는 자들이 떠드는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누군가 여기에서 개수작을 부리고 있다. 그것만큼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하이랜더는 위험한 괴물입니다. 무수한 정병들이 그 괴물들 앞에서 무너졌습니다. 세자 저하, 그 위험성에 대해서 다시 한번 깊이 헤아려주시기 바랍니다.”

“그렇습니다, 만에 하나 마틴 레드우드가 다른 마음을 품게 될 경우 벌어질 일은 실로 입에 담기조차 끔찍할 정도입니다.”

저런 이야기들, 마틴 레드우드가 고트힐 요새의 포위를 하이랜더를 통해 뚫어버린 다음, 오히려 저런 녀석들의 목소리가 점점 더 커지고 있었다. 마치, 가을철 죽어가는 벌떼가 독을 품은 것처럼.

엔더슨이 처형되기 전, 올리비에의 졸개 중 하나가 아직도 이 왕국 안에 남아있다고 했었다.

증거 없는 추측이지만, 이 일련의 상황은 누군가 뒤에서 사람들에게 개수작을 부리고 있다고밖에 설명할 수 없었다.

“백성들이 불안에 떨고 있습니다. 마틴 레드우드는 물론이고, 그가 이끄는 하이랜더들의 모습을 본 자들은 모두가 하나같이 입을 모아 위험하다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군, 심각한 상황이야. 이를 도대체 어쩌면 좋을까.”

세자의 말에 입을 열었던 신하가 입을 다물었다. 세자는 그를 바라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춤에 차고 있던 검을 뽑아 들고 그 신하에게 다가갔다.

“…….”

세자가 다가오자, 신하는 입을 다물었다. 세자는 그런 신하를 보고 있다가 웃음을 머금었다.

“그대들이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이 실로 이와 같으니, 이 나라는 백세를 이어도 그 위광이 흐려지는 일이 없겠군.”

세자의 말에 신하가 몸을 움찔했다.

“성은이 망극합니다.”

망극같은 소리 하네. 세자는 손에 들고 있던 검의 손잡이를 그 신하에게 내밀었다.

“그대는 실로 나라를 걱정하는, 어두운 밤에 타오르는 등불과도 같은 충신이니. 내 명을 받아, 이 검을 들고 직접 나라의 평안을 위태롭게 하는 마틴 레드우드와 하이랜더들을 주살토록 하라.”

세자의 말에 신하가 멍한 표정으로 자기 앞으로 내밀어진 검을 바라봤다.

“세자 저하…….”

“왜 그러나? 자네의 말대로 마틴 레드우드가 이 나라를 바람 앞의 등불과도 같이 위태롭게 하고 있지 않나. 그래서 목을 놓아 절실히 외치지 않았나. 그 외침이 분명히 내 마음을 움직였으니, 그대는 속히 이 검으로 나라의 역적이 될 씨앗을 파내라.”

세자의 말에 신하의 눈이 이리저리 움직였다. 그 사이, 문이 열리고 병사가 들어와 바닥에 엎드린 채 외쳤다.

“마틴 레드우드와, 하이랜더들이 왕도의 성벽 앞에 도착했습니다! 세자 저하께 허락을 받기 전까지는 성문 안으로 들어가지 않겠다 합니다!”

세자가 그 말에 오호, 하는 소리를 내고 바로 앞의 신하를 향해 눈웃음을 쳤다.

“지금이야말로 그 백옥같이 곱고 곧은 절개가 한 줄기 빛을 발해, 나라의 안녕을 방해하는 자를 참하는 순간이라. 그대는 속히 내 검을 받아 이를 행하게.”

세자의 말에 신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런 신하를 보던 세자가 얼굴을 구기고는 말했다.

“행동하지 않고, 말만 앞서는구나. 스스로 꺼낸 말조차 지키지 못하는 이 머리털 허연 늙은 기생충아. 네놈 같은 버러지들이 나라의 세금을 축내면서도 수치를 모르고 아가리를 놀리느냐.”

말을 마친 세자는 검을 다시 칼집에 밀어 넣으며 말했다.

“바로 성벽 안으로 들이면 백성들이 불안해할 것이다. 내가 직접 성문 앞까지 나갈 것이니. 뭇 신하들은 그 뒤를 따르라.”

그 말을 끝으로 세자는 신하들이 모여있는 장소를 벗어났다. 이내, 신하들이 그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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