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드우드-149화 (149/275)

149화

왕도로 들어가는 문 앞에서, 나는 하이랜더들과 함께 서 있었다. 성벽 위에 서 있는 병사들의 바짝 긴장한 얼굴이 보일 정도다. 그들이 품고 있는 감정을 대변이라도 하는 것처럼 성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세자 저하께서 마틴 님을 너무 대놓고 믿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거든요.”

기다림 속에서, 클로에가 뜬금없이 그런 말을 건넸다. 나는 그녀의 말에 희미하게 웃었다.

세자가 아무 보험도 없이 나를 전적으로 믿고 있는 건 아니다.

“왕궁 안에는 내 어머니가 계시잖아.”

내 말에 클로에가 아, 하는 소리를 내고 다소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은 채 나를 바라봤다.

“그러니까…….”

“일종의 볼모인 셈이지.”

내가 나쁜 마음을 먹고 왕도에 온 것이라면 로델린이 위험에 처할 것이다.

“뭐, 그렇다고 해도 단순한 인질 같은 건 절대로 아니야.”

왕궁 안에서 머무르는 동안 만큼은 로델린은 이 세상 부러울 것이 아무것도 없는 대접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럼, 앞으로도 레드우드 부인은 계속 왕궁 안에 사는 건가요?”

“어머니가 원하신다면 그렇게 될 거고. 원하지 않으신다면…….”

빼낼 것이다. 그런 대화를 나누던 와중, 천천히 성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허락이 떨어졌다, 그대들은 속히 성문 안으로 들어올 수 있도록 하라!”

나는 열리기 시작하는 문을 보다가, 걸음을 옮겼다. 곧바로 엘렌과 클로에, 그리고 뒤편에서 기다리고 있던 하이랜더들이 내 뒤를 따라 성문으로 향한다.

아직, 세자는 도착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대신, 세자가 앉을 것으로 보이는 왕좌 앞에는 붉은 융단이 깔려 있었고, 그 융단의 양옆으로 번쩍이는 무장을 갖춘 병사들이 쭉 늘어서 있다. 병사들의 뒤편에는 왕궁 안의 문무대신들이 정자세를 취하고 서 있다.

나를 비롯한 하이랜더들이 모두 성문 안으로 들어오자, 시립해 있던 신하들 몇몇이 서로 눈빛을 교환하더니 이내 한 명이 입을 열었다.

“저 짐승들이 파이크 왕국의 세자 저하를 뵙는 영광을 앞두었는데도 불구하고 그 예를 다하지 않고 있으니, 이를 시정해야 할 것이다.”

저런, 세자가 대충 말해줘서 이 친구들이 나에게 협조적으로 나와주지 않을 예정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생각보다 더 빠른데. 기세 싸움이라, 내가 어디 가서 이런 걸로 밀려 본 적은 없거든. 한번 해보자고.

“저들이 부복하기를 원하는 겁니까.”

내 대답을 듣자마자, 말을 꺼낸 신하가 대답했다.

“마틴 레드우드, 그대는 파이크 왕국의 귀족으로서 하이랜더들을 통제하에 두는데 성공했다 주장하고 있지 않느냐. 그렇다면, 어찌 이 흉물들로 하여금 마땅해 취해야 할 예의를 갖추도록 할 수 있을 터.”

나는 그 말에 히죽 웃고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대신의 뜻이 그러하다면야. 그 말씀은 하이랜더들에게 전해 드리죠.”

말을 마친 나는 뒤편에 서 있는 하이랜더들을 돌아보고, 이내 방금 말을 꺼낸 신하를 가리키며 하이랜더의 언어로 말했다.

“저자가 어째서 그대들이 자신들 앞에서 무릎을 꿇지 않느냐고 물어보는데.”

내 말을 들은 하이랜더의 표정이 방금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험악해졌다. 근처에서 내 이야기를 들은 하이랜더들 모두가 비슷한 표정이었다.

― 그런가? 대답을 돌려주지!

하이랜더는 그런 외침과 함께 앞뒤도 살피지 않고 곧바로 그 신하를 향해 다가가기 시작했다.

“멈춰라!”

병사들이 황급히 움직여 방패와 무기를 치켜들고, 하이랜더의 길을 막는다.

― 저자가 살아서는 할 수 없는 일을 바라고 있다. 그러니, 싸움에서 이겨 나를 죽이고 그 시체를 무릎 꿇려야 할 것이다!

하이랜더는 곧바로 자신의 앞길을 막은 병사들을 향해 몽둥이를 휘둘렀다. 방패가 박살나고, 무기를 들고 있던 병사들이 입에서 피를 토하고, 팔다리가 부러져 바닥을 뒹군다. 그 모습을 확인한 병사들이 황급히 활에 살을 먹이고, 무기를 꺼내 든다.

분위기가 험악해지기 시작하자, 하이랜더들이 모두 일제히 몽둥이를 들었다.

“흐……이이익…….”

나는 그 광경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다가 입을 열었다.

“저자가 아직 하이랜더의 풍습에 대해 잘 몰라서 저런 실수를 한 거야. 내 얼굴을 봐서라도 한 번 정도는 넘어가 줬으면 한다.”

내 말을 들은 하이랜더가 슬쩍 내 얼굴을 확인하고는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몸을 떨고 있는 신하의 코앞에서 몽둥이를 휘둘러 땅을 내려찍었다. 둥, 하는 소리와 함께 흙먼지가 확 하고 일어난 다음, 녀석이 콧김을 한 번 내뿜었다.

― 빈약한 것으로는 모자라 담까지 작구나. 두 번은 없다.

말을 마친 하이랜더가 다시 몽둥이를 둘러매고 터벅터벅 걸어가 내 뒤편에 선다.

“지…… 지금, 이런 무례한 짓을 하고 살아남을 성싶으냐.”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또 다른 신하가 입을 열자. 나는 웃음을 지은 채 대답했다.

“혹시, 그 말도 하이랜더들에게 번역해주기를 원하십니까?”

“…….”

녀석의 입은 굳게 닫혔다. 선인들의 말이 맞았어. 현대인이 원시인보다 무례한 이유는 싸가지 없는 행동을 해도 몽둥이로 대가리가 터질 일이 없기 때문이라지. 말 한마디 잘못하면 대가리가 터질 상황이 되자 나를 잡아먹을 기세로 바라보던 신하들이 수면 마취를 당한 것처럼 얌전해졌다.

“하이랜더들에게 인간의 예의를 바라면 안 됩니다. 그들에게는 그들 나름의 풍습이 있습니다. 저는 그들에게 우리의 문화를 알려주고 싶어서 이들을 데리고 온 게 아닙니다.”

말을 마친 나는 수군거리던 신하들을 대놓고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이 친구들은 용병입니다. 그리고, 까놓고 말해 파이크 왕국은 이 하이랜더라고 하는 용병들의 도움이 절실한 상황이지요.”

인정할 건 인정해. 지금 이 자리에서 아쉬운 건 우리지, 저 하이랜더들이 아니야.

“왕국의 병사들은 강인하고 민첩하며, 장비는 금방 벼려낸 것처럼 날이 서 있다. 왕국의 전력이 베로나 제국을 이겨내지 못할 것이란 뜻이냐!”

자리에 위치해 있던 신하 중 하나의 외침에 나는 얼굴을 보며 혀를 한 번 찬 다음 대답했다.

“우리가 왕도로 향하는 길에 들렀던 고트힐 요새는 어떻게 설명할 겁니까?”

내 말에 방금까지 악을 바락바락 쓰던 신하가 순간적으로 입을 다물었고, 나는 그 틈을 노리고 곧바로 말을 이었다.

“우리의 지원이 없었다면 고트힐 요새에는 주검이 산을 쌓고 흘러내린 피가 도랑을 이룰 정도의 피해를 입었을 겁니다. 대신께서 왕국의 정병들을 믿는 마음을 모르는 바가 아니나, 믿음과 투지만으로는 극복할 수 없는 일도 있는 법입니다.”

투지가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병사들이 길에 널린 잡초를 씹으며 행군할 수는 없는 법이잖아.

“왕국이 보유한 전력만 가지고 베로나 제국의 군세를 막아내기는 힘듭니다. 위로는 나라를 섬기고 아래로는 백성을 살피는 대신께서는 어찌 어린아이처럼 객관적인 사실을 보지 못하시고, 무조건 우리가 할 수 있다고 떼를 쓰십니까?”

말을 길게 했지만, 요약하면 간단하다. 징징거리지 말고 좀 닥쳐.

“네가 기어이 왕국의 힘을 무시하고…….”

녀석이 그래도 뭔가를 더 말하려고 하자, 나는 녀석의 말을 자르고 들어갔다.

“이 망할 늙탱이야. 아직 가는 귀가 먹지 않았으면 잘 들어.”

갑작스럽게 던져진 폭언에 녀석이 할 말을 잃고 멍하니 나를 바라본다. 어차피, 이 녀석들이 나에게 시비를 걸려고 들 때 어떤 것들을 물고 늘어질지는 대충 짐작하고 있었고, 따라서 거기에 대응할 만한 말도 미리 준비를 해두었었다.

“너 같은 놈들이 왕도에서 왕도 경비군의 비호를 받으며 기름진 음식을 씹고 좋은 술을 마시는 와중에도 제국의 군대가 밀려오는 길목을 지키는 병사들은 거친 음식을 씹고 부족한 물을 아껴 마시며 밤낮 구분 없이 개처럼 일하고 있어. 한시바삐 그들의 노고를 덜어주고자 전쟁을 빨리 종식시킬 수단을 강구해도 모자란데, 오히려 이기기 힘든 싸움을 이길 수 있다 주장하며 도움의 손길조차 거부해?”

내 말이 끝나자마자, 옆에 있던 다른 신하가 입을 열었다.

“이 전쟁의 발단은 쿠르스트 산맥에서 일어난 국지전이다. 그리고, 이 국지전의 발단과 과정에 있어 네가 큰 부분을 차지했을 텐데 부끄러움을 알고 고개를 숙이지는 못할지언정 나라의 대신 앞에서 큰소리를 치느냐!”

그래, 니들이 그렇게 나올 것도 알고 있었어. 이 전쟁의 빌미를 내가 주었다고 몰아붙이는 건 가장 좋은 방법이잖아? 당연히 거기에 대한 대답도 준비되어있지.

나는 그 말에 기가 막히다는 듯이 탄식하고 대답했다.

“한 나라를 떠받드는 기둥이랍시고 자리 잡고 있는 녀석들이 국가 간의 전쟁이 정말로 쿠르스트 산맥에서 일어난 국지전이 원인이라 생각하다니. 듣고 있으려니 할 말이 없을 지경이다.”

말을 마친 나는 혀를 차면서 안쓰럽다는 표정을 짓고 그를 바라봤다.

“껍데기를 보지 말고, 알맹이를 봐라. 설마, 정말로 쿠르스트 산맥에서의 국지전이 없었다면 제국이 왕국을 공격하지 않았을 거라 생각하는 거냐?”

나랏일 운영하는 사람치고 되게 순박한 녀석이네. 순박한 거로 치면 거의 돈가스 사준다는 말 듣고 엄마랑 나갔다가 사타구니에 종이컵 쓰는 어린아이 수준인데.

“베로나 제국이 왕국을 공격한 진짜 원인은 두르밀로 산머리의 하이랜더 습격과 언데드의 대량 출몰로 인해 거듭된 병력 소모로 군력이 약해졌기 때문이다. 어차피 제국은 무슨 핑계를 가져다 붙여서라도 왕국을 공격했을걸?”

“지금 너는 나라의 군력을 쇠하게 한 원인인 하이랜더들을 끌고 이 자리에 와 있지 않느냐!”

나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내 뒤에 서 있는 이 거인들이 나라의 힘을 쇠하게 한 원인이지. 하지만, 지금은 나와 뜻을 함께하고 제국을 공격하려 한다. 너 같은 자들은 이리 말하면 쉽게 이해하지 못할 테니, 더 간단하게 말해주마.”

말을 마친 나는 손을 들어 엄지로 내 뒤편을 가리키고 웃으며 말했다.

“이전에는 아니었을지 몰라도, 지금 이 괴물들은 우리 편이다. 녀석들도 제국에 돌려줄 빚이 있거든. 우리와 하이랜더의 적이 같아서 공조하기 위해 개고생을 했어, 알아들어? 다 된 오믈렛에 계란 껍데기 섞어 넣을 생각하지 말라고.”

그렇게 치고받고 있으려니 저 멀리에서 북소리와 함께 나팔 소리가 울렸다.

마침내, 이제 이야기가 좀 통하는 사람이 오는 모양이군. 그 소리를 듣자마자 신하들이 허리를 숙인다. 나와 클로에, 엘렌은 바닥에 깔린 붉은 융단 위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잠시 기다리자, 누군가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세 명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게.”

세자의 목소리가 들리고, 우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곧바로 세자가 양손을 뻗어 내 어깨를 짚었다.

“고생이 많았겠군.”

“그렇지는 않습니다. 더 서두르고 싶었습니다만, 예정보다 늦어져서 죄송할 따름입니다.”

내 말에 세자가 으하하하! 하는 웃음을 터뜨리고는 내 어깨를 몇 번 두들겼다.

“그대가 늦은 것은 나의 지시 때문이니, 내 어찌 그것을 탓하겠는가.”

말을 마친 세자가 손뼉을 한 번 치자, 시종 하나가 은쟁반을 들고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오느라 쌓인 피로가 이런 걸로 누그러질 것이라 생각하지는 않지만, 내 마음이라 생각하고 한 잔씩 들라.”

쟁반을 열자, 얼음이 든 차가운 음료가 세 잔 놓여 있었다. 우리가 그 잔을 들자, 곧바로 뒤편의 하이랜더들을 보고 웃었다.

“저들이 쿠르스트 산맥에서 왕국의 병사들을 고생케 했던 그 하이랜더들인가?”

세자가 눈짓을 하자, 이번에는 하인들이 아예 커다란 나무통을 몇 개나 옮겨 하이랜더들 앞에 두기 시작했다.

“조금 과하게 준비한 게 아닐까 했는데, 저들의 모습을 보니 오히려 부족하지 않을까 걱정이구나.”

아니야. 저 친구들 덩치가 크긴 한데, 가져온 통의 숫자를 보니 부족할 수는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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