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화
음료가 담긴 통이 다 쌓이자, 세자는 시선을 내 쪽으로 던지며 말했다.
“너는 저들로 하여금 준비한 음료를 마시며 편히 쉬라는 내 뜻을 전하라.”
“그리하겠습니다.”
세자의 지시를 들은 나는 몸을 돌려, 하이랜더를 향해 말했다.
“이자가 줬다. 마시면서 쉬고 있으라 하는군.”
그 말에 하이랜더들이 흠, 하는 소리를 내고는 쌓여있는 통을 가져가더니 그대로 바닥에 앉아서 커다란 잔에 음료를 따라 마신 다음 꽤나 놀란 표정을 짓고는 세자를 한 번 바라봤다.
“마음에 든 모양이군.”
세자는 그런 하이랜더들을 한 번 훑어보고는 턱을 쓰다듬은 다음 나를 바라봤다.
“우선, 너에게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다. 이는 현재 총사령관으로 있는 미로스 제커빌의 말을 전하는 것이다.”
이어진 세자의 질문은 정석적이었다. 이 하이랜더들을 여러 부대로 찢어서 운용할 수 있는가? 라고 하는 질문이다.
“죄송하지만, 그것은 어렵습니다. 저는 하이랜더들에게 두 번의 도움을 준 적이 있고, 거기에 더해 나름의 시험을 통과했기에 하이랜더들이 제가 하는 말을 존중하는 것입니다.”
내 말을 들은 세자가 음, 하는 소리를 냈다.
“존중이라 함은…….”
“저는 저들의 위에서 명령을 내리는 입장이 아닙니다. 방금 왕궁의 대신들 중 하나가 실언을 하는 바람에 분노한 하이랜더에 의해 병사들이 피해를 봤습니다. 가까스로 하이랜더들을 진정시킬 수 있었지만…… 또다시 비슷한 일이 일어나게 되면 제가 말한다고 해도 듣지 않을 겁니다.”
저들은 일단 내 말을 듣고 나서 가능하면 내 부탁을 들어주려고 하지만, 그 부탁이 도를 넘게 될 경우에는 그대로 무시해버릴 수도 있다. 내 말에 세자가 혀를 찼다.
나와 세자 사이의 대화를 듣고 있던 문제의 그 신하가 몸을 움찔했다. 일종의 경고 같은 거다. 더 이상 깝치지 말고 알아서 몸을 사리라는 뜻이다.
“그건 아쉬운 일이구나. 결국, 지금 이 자리에 모여있는 하이랜더들을 여러 부대로 편성해 운용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뜻으로 알아듣겠다.”
“천상, 급한 불을 끄고, 꼭 이겨야 하는 전투에 동원하는 별동대 형식으로 운용해야 할 것 같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나눠서 운용하려고 하면 못 운용할 건 없다. 어쨌든 내 지시는 따르고, 내가 저기 가서 어떻게 행동하라고 말하면 하이랜더들은 따를 것이다.
하지만, 그러다가 현지에 주둔하고 있는 병력들과 마찰이 생기거나, 하이랜더와 인간 사이에 오해가 생겨서 문제가 발생하면 그 책임의 화살은 나에게 전부 쏟아진다는 점이다. 하이랜더를 동원한 건 나니까.
안 그래도 왕도에 머무르는 귀족들 중 일부가 나를 잡아먹으려고 기회를 노리고 있는 와중에, 문제가 발생할 만한 일을 벌일 수는 없다.
세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들의 움직임이 기민하고, 하나하나가 기사 한 명 이상의 힘을 발휘할 수 있으니 제국과의 전쟁에서 승기를 잡는 데 힘을 보탤 수 있을 것이다.”
말을 마친 세자가 옆으로 손을 뻗자, 시종이 금과 옥으로 장식된 손도끼 한 자루와, 수정구를 비단 위에 올려 세자 앞으로 가져갔다. 세자는 나에게 수정구를 건네주며 말했다.
“총사령관 미로스 제커빌은 물론이고, 나에게도 최대한 빨리 연락할 수 있도록 조치를 해두었다. 너는 이를 받아 쉬지 않고 급변하는 전황을 파악해 올바르게 군대를 이끌어 나라에 봉사하라.”
말을 마친 세자가 다음으로 금과 옥으로 장식된 손도끼를 나에게 하사하며 말했다.
“너는 나의 뜻을 받들어 별동대로서 왕국의 적을 칠 것이니. 이는 내가 너에게 위임한 권한을 뜻한다. 너는 이를 받들어 전장에서 받을 수 있는 최대한의 도움을 받고, 왕국의 땅을 침략한 적병을 쳐라. 또한, 파이크 왕국의 전쟁을 돕기 위해 참여한 하이랜더는 이 전쟁 종결 전까지 외국의 지원군과 같은 지위를 누리게 될 것이다.”
저 말, 저 말 한마디를 제대로 모두가 보는 앞에서 듣기 위해서 우리는 여기까지 와야 했다.
세자의 인정과 함께, 나와 동행하고 있는 하이랜더들은 나라의 명을 받아 움직이는 정규군이지 멋대로 날뛰는 자경단 같은 게 아니게 되었다.
“그리하겠습니다.”
작은 도끼를 받아든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세자가 말을 이었다.
“마련해둔 장소가 있으니, 금일은 하이랜더들과 함께 휴식을 취하고, 내일 해가 밝으면 떠나라. 먼 길을 오가며 고생한 네 노고를 생각하면 며칠 더 유예를 주는 것이 합당하나. 급변하는 전황을 생각하면 차마 그럴 수가 없구나. 너는 부디 섭섭히 여기지 말거라.”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하루라, 오래 머무르게 할 수는 없었겠지. 백성들이 불안해할 테니까. 이미 신하들의 입은 어느 정도 틀어막아 놓았으니, 가능한 빨리 전장으로 가는 편이 좋다.
하이랜더들도 그걸 원할 뿐 아니라, 내 생각이 맞다면 이제 슬슬 베로나 제국에서도 언데드 하이랜더라는 카드를 꺼내 들 시간이 다가왔으니까.
마련된 장소에 도착한 나는 음, 하는 소리를 내고 하이랜더들을 향해 설명을 시작했다.
“여기에 지어진 건물들의 크기는 아무래도 우리를 기준으로 지어져 있어서…….”
하이랜더들의 크기를 고려해보면, 이 친구들이 모두 들어가서 편하게 쉴 수 있는 건물은 거의 없다고 봐도 좋다. 어쩔 수 없이 우리를 위해 마련된 곳은 커다란 공터였고, 거기에 야영을 위한 준비가 되어있었다.
“날이 춥지 않다. 굳이 동굴 속으로 기어들어 갈 이유는 없다.”
녀석들은 별다른 불만이 없는 모양이었다. 오히려, 바닥에 퍼질러 앉아 주변의 건축물들을 살피다가 하품을 한 번 한다.
“부디, 별다른 문제를 일으키지 않아 줬으면 좋겠어.”
내 말에 바닥에 주저앉아있던 하이랜더가 대답했다.
“우리는 네 말을 존중하고 있다. 저 너절이들이 먼저 우리의 신경을 건드리지 않는다면 그들은 안전할 것이다.”
이 주변에 사람들이 돌아다니지 못하게 해야겠군. 애초에 주변에 얼씬거릴 녀석들이 있을지 의문이긴 하다만. 나는 녀석들의 대답을 듣고 나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쉬고 있으라고.”
말을 마친 내가 어딘가 가려는 기색을 보이자, 클로에가 다가왔다.
“어디 가시나요?”
“어머니.”
내 말에 클로에가 고개를 끄덕이고 인사를 했다. 클로에의 배웅을 받으며 나는 하이랜더들이 머무르는 장소를 나와 왕궁의 내궁으로 향했다.
“어머니를 뵈러 왔다.”
내궁을 지키던 병사들이 내 얼굴을 확인하고 문을 X자로 교차해 막고 있던 창을 치웠다.
“들어가셔도 좋습니다.”
대답을 들은 나는 내궁 안에 어머니가 머무르고 있는 방으로 찾아갔다.
“오랜만이구나.”
꽤나 오랫동안 보지 못한 것 같은데, 로델린은 이전에 봤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다만, 얼굴에는 걱정이 자리 잡고 있었다.
“잘 지내셨나요.”
인사를 하자 로델린이 나에게 의자를 내어주고, 시종에게 차를 내오게 했다.
“궁 안에, 너의 험담을 하는 자들이 많더구나.”
로델린의 말에 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쩔 수 없는 노릇 아니겠습니까.”
대신들 입장에서는 갑자기 세자의 총애를 받고, 여기저기에서 공을 세우고 있는 내가 굉장히 마음에 들지 않았을 테니까.
“제국과 왕국 사이에 발발한 전쟁, 그 책임이 너에게 있다고 하던데…… 사실이니?”
걱정어린 로델린의 말에 나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건 절대로 아닙니다.”
어차피 일어날 전쟁이었고, 오히려 나는 그 전쟁이 일어나는 걸 늦춘 사람이다. 자세한 내막을 모른 채, 그냥 내가 마음에 들지 않는 녀석들이 보기에는 내가 이 전쟁을 일으킨 것으로 보이겠지만…… 진실은 다른 법이다.
“나도 참. 중요한 질문은 따로 있었지.”
로델린은 그렇게 말하고 나서 양손으로 내 오른손을 포개 잡았다.
“폐하와 세자 저하께서는 네가 이 전쟁의 원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계시니?”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로델린이 비로소 표정을 풀고 웃었다.
“다행이다.”
시종이 차와 다과를 테이블 위에 올려두고, 인사를 하고 떠나갔다. 나는 찻물을 한 모금 마신 다음 입을 열었다.
“내궁 안에서의 생활은 조금 어떠세요?”
내 말에 로델린이 대답했다.
“분에 넘치는 대우를 받으며 살려니 다소 부담되기는 하지만, 그것 이외에는 별 탈 없이 잘 지내고 있단다.”
대답을 들은 나는 잠깐 고민하다가 대답했다.
“이번에 제국과 왕국 사이의 전쟁이 잘 마무리되면 저는 쿠르스트 산맥으로 향할 것 같습니다.”
내 말을 들은 로델린이 찻잔을 손에 든 채 대답했다.
“나는 상관없다.”
로델린의 말에 나는 그녀를 살펴봤다. 로델린은 찻물이 담긴 잔을 살펴보다가 말을 이었다.
“네가 왕도로 하이랜더들과 함께 왔다는 이야기는 이미 들어서 알고 있다. 폐하는 물론이고 세자 저하께서도 내가 내궁 안에 머무르는 걸 원하실 거야.”
나는 그 말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사실이었으니까.
“어머니가 내궁에서의 생활을 원하지 않으신다면 제가 책임지고 쿠르스트 산맥에서 함께 살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해 볼게요.”
내 말에 로델린이 고개를 저었다.
“그럴 필요 없다.”
로델린이 찻잔을 내려놓고 나를 보며 웃었다.
“폐하와 세자 저하께서, 내가 내궁 안에 머무르는 것만으로 너를 믿어주신다면 그걸로 충분하다.”
“하지만…….”
내가 뭔가 더 말을 하려고 하자 로델린이 내 말을 자르고 들어왔다.
“내가 내궁에 머무르는 길이 너에게 도움이 된다면, 나는 그리할 거다.”
로델린의 단호한 말에 나는 하려던 말을 삼키고, 대신 다른 말을 했다.
“어머니의 뜻이 그러시다면…… 머무르시면서 도움을 좀 받을 수 있을까요.”
내 말에 로델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듣고 있단다.”
“지금은 저를 견제하는 귀족들의 목소리가 크지만, 왕도 안의 귀족들 전부가 저에게 적대적이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해요.”
내 말에 로델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뭘 해줬으면 하는지, 알 것 같구나.”
로델린은 나와 함께 전장에서 피를 흘리고 싸우지는 않았지만, 알게 모르게 도움을 많이 주었다. 그리고 그 도움들은 주로 인맥의 형성과 관리 쪽에 쏠려 있었다.
그 말인즉슨, 로델린은 해당 분야에 대해서는 상당한 수완을 발휘하는 편이라는 뜻이다.
그녀라면 왕도에 머무르면서 나에게 긍정적인 시선을 가지고 있는 귀족들을 규합하고, 관리해 줄 수 있을 거다.
“크게 어려운 일은 아닐 것 같구나. 아들이 워낙 잘 자라지 않았니?”
로델린은 희미하게 웃음을 흘리며 그런 말을 하고는 잠깐 나를 바라보다가 말했다.
“미안해할 필요 없다.”
“하지만, 결국 이렇게 저렇게 포장해도…….”
내 말에 로델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볼모라. 나는 그런 취급을 받는 것도 사실 섭섭하지 않단다.”
로델린의 대답을 들은 나는 고개를 갸웃하고 로델린을 바라봤다.
“어찌 보면 섭섭할 일이 전혀 아니지 않니? 내 아들이, 그동안 내가 저지른 실수에도 불구하고 이 어미를 중히 여기고 있다는 뜻이니.”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면 볼모가 될 수 없다. 로델린이 한 말은 그런 뜻을 품고 있었다.
“최대한 자주 왕도로 올게요.”
내 말에 로델린이 대답했다.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다. 하지만, 결국 그건 제국과 왕국 사이의 전쟁이 끝난 다음의 이야기지 않니.”
그래, 이건 이기고 난 다음의 이야기다.
“내일 떠나는 걸로 알고 있다. 네가 없는 동안 왕도의 귀족들 중에 너를 질시하는 자들은 쉬지 않고 뭔가를 할 거야. 나는 왕도에 머무르면서 그런 움직임을 최대한 주시하고, 막아야겠구나.”
“……내궁에 머무르시는 것도 불편하실 텐데, 거기에 더해서 부탁까지 하려니 염치가 없어요.”
내 말에 로델린이 손을 휘휘 저었다.
“괜찮다. 나도 할 일이 있는 편이 좋지 않겠니. 방 안에 앉아서 책 읽고, 십자수 두는 것도 질리던 참이라 할 일이 생겨서 다행이다. 걱정하지 말고, 너는 당면한 과제에 집중하렴.”
로델린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대답했다.
“어차피 바빠지는 건 내일부터니까, 조금 있다 함께 저녁을 먹죠.”
로델린이 내 말에 음, 하는 소리를 내고 대답했다.
“나도 그러고 싶다만, 하이랜더들과 함께 식사를 하는 편이 어떨까 싶다. 어쨌든, 이후에 함께 전장으로 나서지 않니.”
“그럼, 어머니는?”
내 말에 로델린이 대답했다.
“아들이 어미에게 부탁한 일을 어찌 내일부터 하겠다고 미루겠니.”
로델린은 바로 작업에 착수할 생각인 모양이다. 종이를 꺼내 펜으로 편지를 쓰기 시작하면서 로델린이 입을 열었다.
“안 그래도 내궁에 머무르면서 너를 험담하는 자들 때문에 마음이 불편하기 그지없었단다. 혹여 내가 가볍게 움직였다가 너에게 해가 되지는 않을까 걱정돼서 가만히 있었지만.”
내가 직접 부탁했으니, 그럴 걱정은 없어졌다.
“그럼,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내 말에 로델린이 펜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나 나를 안아주었다.
“건강하렴.”
“어머니도, 몸 건강히 계세요. 너무 무리하지 마시고.”
포옹을 푼 로델린이 다시 테이블 앞에 앉았다. 나는 잠깐 로델린을 보고 있다가 다시 인사를 하고 문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