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드우드-151화 (151/275)

151화

깊은 밤, 산 위 관측소에 자리 잡고 경계를 서는 병사들이 어둠 너머를 응시하고 있었다. 평상시라면 이런 경계를 설 때 이런저런 잡담을 나누곤 하지만, 지금은 병사들의 눈에 긴장이 바짝 어려 있었다.

저 멀리 평야에 보이는 희미한 불꽃들은, 베로나 제국의 병력들이 야영하면서 피워올린 조명이다. 적 병력과의 접경지역에서, 사소한 잡담을 나누며 떠들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이길 수 있을까요?”

후임으로 보이는 병사의 긴장한 것 같은 질문에, 옆에 서 있던 선임병이 대답했다.

“글쎄다. 우리 같은 것들이 어떻게 알겠냐.”

병사들로서는 알 수 있는 정보가 너무 적다. 지금 아군이 이기고 있는지, 지고 있는지. 단순히 대치하고 있는 상황 속에서는 판단하기 어렵다. 화톳불 옆에 놓아둔 초는 칼집이 새겨져 있었다. 녹아내린 초가 칼집에 닿기 직전이 되자, 선임병이 입을 열었다.

“시간 되었다. 가서 다음 근무자 깨워.”

“알겠습니다.”

후임병이 재빠르게 무기를 챙겨, 텐트 안으로 향했다. 그 사이, 눈을 가늘게 뜨고 어두운 평야를 바라보던 선임병이 고개를 갸웃했다. 뭔가, 어둠 속에서 움직이는 것 같은 느낌이다. 잠깐 동안 어둠 속을 노려보던 선임병 옆으로 다시 후임병이 다가왔다.

“이야기하고 왔습니다.”

“너, 지금 바로 마법사님께 찾아가서 깨워.”

뭔가 이상하다. 굳어있는 선임병의 표정을 본 후임병이 어벙한 표정을 지었다.

“새끼야, 귀먹었냐? 가서 마법사님 불러오라고. 최대한 빨리.”

욕이 섞인 말에 후임병이 움찔하고는 다시 마법사의 텐트 쪽으로 달려갔다. 잠시 뒤, 마법사가 귀찮다는 표정을 짓고는 머리를 긁으며 경계를 서고 있는 선임병 쪽으로 다가왔다.

“왜, 뭐야.”

“적진이 이상합니다.”

마법사가 그 말에 뚱한 표정을 짓고 어둠 속을 바라보다가 하품을 한 번 했다.

“뭔 소리를 하는 거야.”

“방금 전까지, 저기에 화톳불 조명들이 보였었는데. 갑자기 사라졌습니다. 게다가, 희미하게 뭔가 썩는 냄새도 나는 것 같습니다.”

선임병의 말에 마법사가 음? 하는 소리를 내고 입맛을 다셨다. 확실히, 코끝을 타고 희미하게 썩은 내가 맡아진다.

“경계 중에 갑자기 화톳불을 껐을 리가 없는데. 잠깐만.”

마법사가 눈을 감고 영창을 시작하자, 그의 손 위에 하얀 빛뭉치가 만들어졌다.

“가라.’

마법사가 손을 앞으로 뻗자, 새하얀 빛뭉치가 빠른 속도로 날아가더니, 펼쳐진 평원 한가운데에 멈춰 강렬한 빛을 뿌리며 주변을 밝힌다.

“저건…….”

그리고, 그 조명 아래에 드러난 광경을 확인하자. 세 명은 모두 할 말을 잃었다.

거대한 거인의 시체 수백 구가, 천천히 왕국의 병력이 주둔하는 거점을 향해 움직이는 광경이었다.

“보고, 보고를…….”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것은 선임병이었고, 그는 떨리는 손으로 연락을 위해 마련된 비상용 수정구를 들었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마법사가 수정구의 마력을 활용해 거점에 상황을 보고했다.

“수백이 넘어가는 거대 언데드들이 거점을 향해 이동 중입니다.”

―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너 이 새끼, 헛것이라도 본 거냐?

거점에 머무르고 있는 마법사의 퉁명스러운 한 마디에 수정구를 들고 있던 마법사가 외쳤다.

“헛것 아닙니다! 수백입니다. 수백의 언데드가 지금 해당 거점을 향해 진격하고 있습니다. 하나하나의 크기가 엄청납니다. 제국이, 제국이 언데드를 병사로 부리고 있습니다!”

* * *

다음 날 새벽, 해가 밝아오는 와중에 우리는 왕도를 떠날 준비를 서둘렀다. 서류를 들고 보급받은 물건들을 확인하던 나는 클로에를 향해 외쳤다.

“전략 지도는?”

내 말에 클로에가 휙 하고 손에 들린 지도를 흔들었다.

“여기, 챙겼어요!”

현재 총사령관을 담당하고 있는 미로스의 작전 계획이 담긴 지도다. 우리가 비록 독자적으로 움직이는 부대라고 하지만, 아군의 계획도 모른 채 돌아다닐 수는 없으니까.

앞으로도 주기적으로 수정구를 통한 교신으로 지도의 최신화를 유지해야 한다.

“수정구 연결 상태 확인했어?”

내 말에 엘렌이 고개를 끄덕이며 외쳤다.

“문제없어!”

좋아, 물자도 전부 챙겼고 하이랜더들도 출발 준비를 마쳤다. 우리는 바로 출발해야 한다. 어차피 해가 뜰 무렵에는 왕도를 벗어날 생각이었지만, 어슴푸레한 새벽 수정구를 통해 미로스가 전해준 소식은 우리를 더 서두르게 만들었다.

적의 움직임을 파악하기 위해 마련해두었던 관측소 다섯 곳에서 언데드 하이랜더들의 움직임을 발견했다고 한다. 마침내, 제국이 숨겨두었던 에이스를 꺼내 든 것이다.

우리가 우선적으로 향하는 장소는, 그중에서도 가장 많은 언데드가 향하는 것으로 알려진 거점이었다.

최소 이천에 달하는 언데드 하이랜더들이 제국군과 함께 향하는 해당 거점은, 방어에 성공한 이후 역습 작전의 주공을 담당해야 하는 중요한 부대였다. 그들이 무너질 경우, 전선에 큰 구멍이 생기는 걸로 끝이 아니라, 이후 작전의 전개에도 심각한 타격을 입는다.

“끝, 서둘러 출발한다!”

하이랜더들이 그 말을 듣고는 기다렸다는 듯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번에야말로.”

하이랜더 중 하나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내가 한 말이 사실인지 거짓인지 이번 전장에서 확인할 수 있을 거다.”

내 말에 하이랜더가 몽둥이를 들어 올리고 근육을 꿈틀거리며 외쳤다.

“몰아치는 눈보라처럼 나아가자!”

곧바로, 아침 댓바람부터 천에 달하는 하이랜더의 분노로 가득한 외침이 왕도 안에 울려 퍼졌다.

“기세는 좋네.”

덕분에 자다가 놀란 왕도의 백성들이 꽤 많을 것 같긴 하지만. 우리는 곧바로 왕도의 성문을 지나, 목적지를 향해 이동하기 시작했다. 하이랜더들은 열정이 넘쳤고, 우리의 이동속도는 자연스럽게 어지간한 기병 부대 이상으로 빨라졌다.

말 위를 달리면서 나는 기억해두고 있던 지도 안의 내용을 되짚어 봤다. 베로나 제국의 병력은 현재 세 갈래로 나뉘어 파이크 왕국의 국경을 넘고 있었다.

“안타리아 관문, 블루핸드 성, 코랄린 관문. 베로나 제국에서 노리고 있는 장소는 이 세 곳이에요. 세 곳 모두 대규모의 병력이 무리 없이 움직일 수 있는 길목에 자리 잡은 방어 시설이죠.”

클로에의 말을 들은 엘렌이 혀를 찼다.

“세 곳 모두 잘 닦인 도로를 끼고 있는 주요한 방어거점이야.”

대규모의 병력이 이동하기 위한 길목이다. 쳐들어오는 입장인 베로나 제국은 자연스럽게 보급로를 신경 써야 했을 테고, 그렇기에 해당 장소들로 진격 방향이 결정 난 모양이다.

“제국이 보내는 병력의 규모 자체는 비슷비슷한데, 굳이 안타리아 관문이 가장 급한 이유가 뭘까?”

내 말을 들은 클로에가 대답했다.

“코랄린 관문은 해안가를 따라 만들어진 도로에 자리 잡고 있는데, 그 도로 옆을 따라서 대규모의 염전이 자리 잡고 있어요.”

염전이라, 그럼 언데드에게 뿌릴 소금이 부족할 일은 없겠네. 물론, 제아무리 언데드라고 해도 하이랜더가 소금 좀 뿌렸다고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도 언데드를 상대하는 입장에서 바로 옆에 천일염이 펑펑 솟아나는 염전을 끼고 있다는 건 굉장한 힘이 될 거다.

“코랄린 관문은 그렇다고 쳐, 블루핸드 성은?”

내 말에 엘렌이 대답했다.

“핀들턴 가문의 영주성이야.”

핀들턴이라. 나는 그 말에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하, 모리스 핀들턴 기사단장님.”

내 말을 들은 클로에가 고개를 끄덕였다.

“핀들턴 기사단장님은 워낙 이름이 높으신 분이라서, 평상시에도 그분을 존경하는 실력자들이 꽤 많이 머무르고 있다 들었어요.”

즉, 언데드로 변한 하이랜더를 상대로도 어느 정도 버텨 줄 수 있는 유능한 인재들이 모여있는 장소라는 뜻이다.

“그에 비해 안타리아 관문은…….”

엘렌은 그렇게 중얼거리고 입맛을 다셨다. 미로스의 지휘에 따라 병력이 지키고 있는 중이긴 하지만, 코랄린 관문이나 블루핸드 성처럼 특별한 강점은 없는 모양이다.

“다섯 대의 마차가 나란히 달려도 문제가 없을 정도로 넓고, 한 달을 내리 달려도 바퀴를 갈아 끼울 필요가 없을 정도로 잘 관리되어있지.”

그런 주제에 도로의 너비나 관리 정도는 세 장소 중 가장 뛰어난 모양이다. 우리가 가장 먼저 안타리아 관문으로 향하게 된 건 필연이었겠군.

― 현 시간부로 제2거점 인근에 적 부대 다수 출현이 확인되었다. 확인된 적병 규모를 보고한다. 보병 약 오만 칠천. 기사단 넷. 70명 이상 85명 이하의 마법사. 하이랜더로 밝혀진 언데드가 약 이천 오백. 공성추 셋. 투석기 열다섯. 발리스타 서른둘.

수정구를 통해 들리는 목소리는, 만약을 대비해서인지 변조되어 있었다. 군용 수정구 자체에 그런 기능이 탑재되어 있는 모양이다.

제2거점은, 우리가 향하고 있는 안타리아 관문이다. 그 이야기를 들은 우리는 침을 삼켰다.

“규모부터 다르네.”

저건 절대로 국지전의 규모가 아니다.

― 해당 거점에 주둔하는 병력이 적병을 상대로 방어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할 확률은 현저히 낮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원군으로 계획된 부대는 이 보고를 확인하고, 즉각 응답하도록.

그 수정구의 보고를 들은 나는 곧바로 엘렌에게 수정구를 넘겨받아 말했다.

“응답을 받았다. 안타리아 관문에 도착하기까지는 최소 이틀의 시간이 더 필요하다는 내용을 전달받았다.”

일부러 서로가 서로를 밝히지 않고 있다. 지금 내가 수정구를 통해서 교신하는 곳은 미로스 제커빌이 머무르는 총사령부일 수도 있고, 아니면 안타리아 관문의 지휘관일 수도 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이 이상 빠르게 이동할 수 없다. 라고 대답하지 않고 그런 보고가 들어왔다는 식으로 대답을 얼버무렸다.

― 현지 주둔병력으로 수행하는 방어작전에는 그 한계가 분명한 것으로 사령부가 판단했다. 더 서두르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불가능한 모양이다. 이 이상 빠르게 이동할 수는 없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이틀 만에 도착하는 것도 하이랜더들이라 가능한 거다. 더 빨리 움직이는 방법은 없다. 우리도 지금 발바닥이 찢어지라 움직이고 있는 거니까 보채지 말아줘. 사정이 급한 걸 우리라고 모르겠냐.

― 알았다. 거점 주둔 병력에게 전달하라고 사령부에 보고하겠다.

그걸로 수정구의 연락은 끝났다. 우리는 계속해서 말을 달렸고, 그런 우리의 뒤를 하이랜더들이 부지런히 쫓아 걸었다. 그렇게 얼마나 달렸을까.

“피난 행렬이네요.”

저 멀리 보이는 수많은 사람들의 행렬이 보인다. 남녀노소의 구분 없이 지친 표정이었고, 각자 등에는 물건을 한 아름 이고 진 채 이동하는 중이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을 만약의 사태에서 보호하기 위해 따라붙은 소수의 병력이 보였다.

“정지! 마주한 군대는 그 신분을 밝…….”

피난민 행렬을 통제하던 간부가 우리를 보고 무기를 뽑아든 채 외치다가 뒤편에 보에는 하이랜더들을 확인하고 이내 말을 멈췄다. 곧바로, 피난하던 백성들이 동요하기 시작한다.

더 늦기 전에 나는 곧바로 세자에게 받은 도끼를 들어 올리고 말했다.

“안타리아 관문으로 향하는 원군이다!”

손도끼를 확인한 간부가 움찔하고는 이내 경례하며 대답했다.

“현재 피난민들을 통제하고 있는 옥스혼입니다! 바로 길을 열어드리겠습니다!”

말을 마친 간부가 곧바로 휘하의 병사들을 통제해 피난민들을 통제해 길을 열어주었다. 우리는 열린 길을 통해 이동하기 시작했고, 피난 가던 백성들은 하이랜더들의 이동을 보고 몸을 살짝 떨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