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드우드-153화 (153/275)

153화

내 얼굴을 확인한 병사들이 경례를 하고, 그중 하나가 나를 지휘실로 안내했다.

“큰 도움을 받았습니다. 제때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곧바로 지휘관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내 쪽으로 다가와 양손을 꽉 붙잡는다.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도리어, 너무 늦어서 피해가 커진 것 같은 마음에 미안할 따름입니다.”

내 말에 지휘관이 하하하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있습니까. 이틀 만에 원군이 도착할 수 있다고 해서 귀를 의심했었습니다. 이틀 정도면 어떻게든 버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간부는 물론이고 병사들도 필사적으로 싸웠습니다.”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감사합니다. 아, 간부에게 이야기를 해서 동행한 하이랜더들의 식사를 좀 부탁한다고 했습니다. 혹시 문제가 될까요?”

지휘관은 거절하지 않았다. 하이랜더들이 배를 채우는 사이 우리도 식사를 하고, 이후 병력 운용에 필요한 물자를 보충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와중, 수정구를 살피던 엘렌이 당황한 표정을 짓고 나를 바라봤다.

엘렌의 표정에서 불길함을 느낀 나는 곧바로 질문했다.

“뭐야, 무슨 일이야.”

“코랄린 관문이 뚫렸어.”

“뭐?”

나는 그 말에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코랄린 관문을 따라 만들어진 염전에서는 막대한 양의 소금이 생산된다. 그리고 언데드는 소금에 약하다. 그 점을 고려해보면 코랄린 관문은 파이크 왕국이 지켜야 하는 주요 거점 중에서도 가장 방어가 수월한 곳이었을 텐데.

“도대체 왜?”

내 말에 엘렌이 엄지로 하늘을 가리키며 말했다.

“폭우가 쏟아진 모양이야.”

공격을 대비해서 미리 뿌려두었던 소금이 전부 쓸려나간 사이, 언데드 하이랜더들을 앞세운 제국군의 공격에 무너진 모양이다. 이야기를 듣고 있던 클로에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럴리가, 지금 코랄린 관문 일대는 건기로 알고 있어요. 염전도 이제 막 소금 생산에 들어갔을 텐데.”

염전에서 소금을 생산하기 시작했다는 건, 당분간 비가 올 확률이 말도 안 되게 낮다는 소리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비가 왔다. 그것도 가랑비나 소나기도 아니고 거친 폭우가 내리다니.

클로에의 말대로 그건 대놓고 이상한데.

“마법이야?”

내 말에 엘렌이 애매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기우제라는 표현이 더 적절해.”

나는 그 말에 고개를 갸웃했다. 기우제라니, 그 비가 올 때까지 지내서 적중률 100%를 자랑하는 마법 같은 제사를 말하는 건가. 내 표정을 보고 있던 엘렌이 한숨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단순한 미신이고, 실제 효과는 없는 기우제도 있지만, 정말로 효과를 발휘하는 기우제도 존재해.”

정해진 절차에 따라 의식을 준비하고 수행하면 비가 오는 모양이다.

“그게 그렇게 쉬운 일 같지는 않아 보이는데.”

탁자에 물 한 잔 떠다 놓고 비나이다 비나이다 해서 비가 내려준다면 이 세상에 가뭄 때문에 농사를 망칠 일은 없을 것이다.

“굉장히 많은 사람들이 존귀한 혈통이라고 인정하는 사람의 피가 필요해. 최소한 왕족이나 황족 정도.”

그 분량은 약 1리터다. 비를 내리기 위해 기우제를 지내기 위해서는 비를 내리고 싶은 장소에서 의식을 진행해야 한다. 이전에, 왕권이 약하던 시절에는 비가 오지 않으면 신하나 영주들이 달려들어 왕의 피를 뽑아내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기우제를 함부로 지내지 못할 만하네.”

황족이 죽을 각오를 하고 피를 쏟아내야 비를 부를 수 있다. 아무리 나라에 가뭄이 심하다고 해도 어지간해서는 그런 선택을 하지 않을 것이다. 왕정국가에서는 수만의 백성보다 황족 한 명의 목숨이 더 중요한 법이니까.

“게다가 준비 기간도 필요하니까…….”

“애초부터 그 여자가 노리고 있던 건 여기가 아니라 코랄린 관문이었던 셈이군.”

역사야 어찌 되었건, 비를 부르기 위해 올리비에는 자신의 몸에서 1리터의 피를 쏟아냈다는 뜻이다.

그 여자의 몸무게를 생각해보면 1리터의 피를 뽑아낸다는 건 과다출혈로 인한 사망을 각오한 거다.

여기로 우리를 보내놓고, 큰 탈 없이 오랫동안 버텨줄 거라고 생각했던 관문을 자기 목숨을 저당잡아가면서 뚫어버리다니.

“하나 더.”

엘렌은 그렇게 중얼거리고 나를 바라봤다.

“코랄린 관문을 공격하는 제국군의 최전방에서 로베르 그리즈만의 모습이 확인되었어.”

나는 그 말에 허, 하는 소리를 내고 이마를 짚었다.

“그 눈사태를 얻어맞고도 살아있다고?”

아니, 뭐 그래. 살아있는 거야 그렇다고 치자. 워낙 안 죽는 녀석이었으니까. 근데 거기에서 어떻게 빠져나온 거야. 나로서는 도무지 방법이 보이지 않는데. 잠깐 고민하던 나는 이내 머리를 휘휘 저었다.

“살아난 건 신기하지만, 그것뿐이야.”

당장 중요한 건 그게 아니라 코랄린 관문이 박살났다는 점이다. 당연히 적군은 관문을 넘어 계속 진격할 것이다. 그 뚫린 관문을 향해 무수한 숫자의 제국군과 언데드 하이랜더들이 밀려 들어올 것이라는 점은 말할 필요도 없고.

코랄린 관문이 무너졌다면 패퇴한 병력은 후방에 다시 재집결해야 한다.

그 시간을 벌어줘야 한다.

“쿠르스트 산맥에 머무르고 있는 병력들은?”

내 질문에 클로에가 대답했다.

“채비를 마치고 이동 중이에요. 다만, 움직이는 병력과 장비가 많다 보니, 이동속도가 빠를 수 없어요.”

쿠르스트 산맥을 지키던 국경 수비대는 하이랜더가 아니니까. 우리처럼 기민하게 움직이는 건 불가능하다.

“병력들이 도착하게 된다면 숨통이 조금은 트일 텐데.”

누가 뭐라고 해도 오랜 세월 하이랜더들을 상대했던 병력들이다. 언데드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하이랜더를 지금에서야 처음 보는 병력들보다는 그 대처가 훨씬 더 효율적일 것이다.

“향후 방침은 어때?”

내 말에 엘렌이 대답했다.

“코랄린 관문에서 패퇴한 병력은 관문으로부터 약 80km 떨어진 지점에 재집결해서 휴식을 취하고, 재편성될 예정이야. 코랄린 관문에서 약 50km 떨어진 장소에 위치한 임시 거점의 예비 병력이 버티면서 패퇴한 병력들이 재정비할 시간을 벌어줄 예정이고.”

이후 전달받은 임시 거점의 방어 상태를 확인한 나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이건 관문이나 요새라기보다는 차라리 검문소에 가까운 느낌이잖아.”

“그런 용도로 쓰이던 곳이니까.”

말 그대로 시간을 벌기 위한 발악일 뿐이다. 문제는 그뿐이 아니다.

“우리는 임시 거점의 방어를 도울 수 없어. 하이랜더의 머릿속에는 후퇴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으니까.”

적의 공세를 버티면서 시간을 벌고, 틈을 봐 서서히 후퇴하는 식의 움직임을 해줄 리가 없다.

“미로스 제커빌 기사단장은 우리가 임시 거점의 방어에 조력해주기를 원하는 모양인데.”

“불가능해. 하이랜더들은 전멸하는 한이 있어도 임시 거점에서 후퇴하지 않을 거야.”

그런 용도로 쓸 수 있는 병력이 아니다.

이 보 전진을 위한 일 보 후퇴 같은 건 절대로 용납하지 않는 녀석들이다. 이건 내가 설득해도 마음을 바꾸지 않을 것이다. 나는 하이랜더들이 피난민들을 바라보면서 내뱉었던 경멸 어린 말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하이랜더들의 성격을 고려하면, 차라리 결사 항전에 동원하는 편이 더 어울려.”

전멸하는 한이 있어도 사기를 잃지 않고 싸워서 이겨야 하는 전장. 하이랜더라는 존재는 그런 장소에서 활용되어야 한다. 지도를 살펴보던 나는 클로에에게 질문을 던졌다.

“아리아 장벽이라는 곳은 어때? 지도상으로 보면 굉장한 요충지로 보이는데.”

코랄린 관문, 안타리아 관문, 그리고 블루핸드 성에서 이어지는 세 개의 길은 쭉 이어지다가, 왕도와 직통으로 이어진 파이크 국도의 갈림목에서 하나로 합쳐진다.

그리고, 세 개의 도로가 하나로 합쳐진 국도는 약 1200m 정도 되는 높이의 산 위로 연결된다. 그 산의 정상에 자리 잡고 있는 방어 시설이 바로 아리아 장벽이다.

클로에가 내 질문에 대답을 돌려주었다.

“지금 상황에서는 왕국의 목줄기에요. 그렇기 때문에 장벽의 방어력은 굉장히 견고한 편이지만. 만에 하나 적이 점령에 성공한다면…….”

장벽에서 왕도까지는 멀지 않기 때문에, 점령되는 순간 자연스럽게 왕도까지 위험해지게 된다.

“예비 병력이 공격을 방어하다가 후퇴하기 시작하면…….”

내 말에 엘렌이 대답했다.

“블루핸드 성과 안타리아 요새를 지키던 병력들은 후방으로 쭉 빠질 수밖에 없어.”

아리아 장벽이 자리 잡고 있는 갈림목 앞까지 적병이 밀려오게 되면 블루핸드 성과 안타리아 관문의 보급로가 끊길 테니까. 보급 없이 버티는 건 불가능이고, 애초에 왕도가 위협받고 있는 상황에서는 해당 장소를 지키는 것 자체가 별로 의미 있는 일이 아니니까.

“수정구로, 미로스 제커빌 기사단장님 좀 연결시켜 줘.”

내 말에 엘렌이 곧바로 수정구를 나에게 건네주었다.

― 안타리아로 보낸 원군으로부터 보고가 들어왔다.

내 말에 곧바로 대답이 돌아왔다.

― 사령부에서 전하길, 최대한 빨리 정비를 마치고 코랄린 관문 후방에 마련된 임시 거점으로 향하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따를 수 없는 명령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 사령부에서 그 이유를 궁금해한다.

하이랜더의 특징에 대해서 말하자, 잠시 침묵이 이어지다가 수정구 너머에서 무거운 목소리가 들렸다.

― 사령부에서는 통제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해당 부문에 관한 통제는 불가능하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대신, 이후 작전에 대한 의견이 제시되었다.”

― 사령부에 전달하겠다.

하이랜더들이 임시 거점에 합류하지 못한다면 미로스 제커빌의 예상보다 임시 거점의 후퇴가 빨라질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차라리 임시 거점을 지키는 병력들이 후퇴하는 시점을 당겨서 피해를 최대한 줄이고, 코랄린 관문에서 후퇴한 병력들이 휴식과 재편성을 진행하는 장소를 아리아 장벽으로 바꾼다.

이후, 아리아 장벽 안에서 하이랜더들과 예비 거점의 병력, 그리고 재편성을 마친 코랄린 관문의 병력을 다 끌어모아 버틴다.

버티는 데 성공하면 블루핸드 성과 안타리아 관문을 지키고 있던 병력들이 재빨리 빠져나와 아리아 장벽을 두들기고 있던 적의 뒤를 때려 다시 한번 버텨낸다.

그다음에, 2차로 쿠르스트 산맥에서 이동하고 있는 국경수비대가 아리아 장벽에 도착한다. 머릿수도 막대하고,

그 친구들이 도착한다면 충분히 역으로 밀어낼 수 있다. 수색대라면 하이랜더들을 질릴 정도로 상대했고, 수비대의 장비도 하이랜더를 상대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들이 대부분이다. 장비를 전부 챙긴 국경수비대가 아리아 관문에 진입해서, 성역화 마법이 걸린 아리아 관문에서 언데드 하이랜더를 상대한다면 적의 공격을 막아내고, 더 나아가 반격까지 진행할 수 있다.

― 아리아 관문를 하이랜더가 지킨다면, 제국도 쿠르스트 산맥을 지키는 병력을 빼낼 수 있다는 질문을 한다.

“어차피 우리가 더 빠르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우리가 더 먼저 도착한다. 그거면 된다.

― 적절한 지시를 휘하 부대에 내리겠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말이 길지만 내 제안을 받아들이겠다는 뜻이다. 수정구를 통한 대화는 그걸로 끝났다. 대화를 마친 나는 후우, 하고 숨을 내쉰 다음 엘렌과 클로에를 보며 말했다.

“어차피 사령부에서 지시를 내리기까지는 시간이 좀 필요할 테니까. 그때까지는 쉬자.”

어차피 미리 세워놓았던 계획이 변경된다면 해당 변경점에 대해서 안타리아 관문에도 보고가 들어올 테고, 우리는 그 변경된 계획을 여기에서 새로 받아보면 된다.

내 말을 들은 클로에가 고개를 끄덕이고 한숨을 푹 내쉰 다음 텐트 밖의 하이랜더들을 슥 보고는 다시금 한숨을 내쉬었다.

“저는 삭신이 다 쑤시는데, 하이랜더들은 멀쩡해 보이네요.”

“피해는 제법 심했어.”

언데드라고 하지만 하이랜더와 하이랜더 사이의 싸움이다. 당연히 피해도 있었고, 피로도 쌓였다. 쉴 기회가 있을 때 쉬어둬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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