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드우드-154화 (154/275)

154화

침대에 누워있던 올리비에는 자리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손목을 휘감고 있는 붕대의 피는 검게 말라붙어있었다. 최소한 지혈은 제대로 성공했다는 뜻이다.

창백하게 질린 피부와 파랗게 변한 입술을 살피던 그녀는 옆에 놓여있던 유리병 안의 액체를 잔에 따랐다.

생시금치를 갈아놓은 주스다. 천천히 들이키고, 곧바로 옆에 선반에 놓여있던 브로콜리를 씹어먹기 시작한다. 둘 다 피가 부족할 때는 큰 도움이 되는 음식들이다. 얼마나 도움이 될지 확신은 없지만, 안 먹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다.

옆을 지키고 있던 의사가 곧바로 올리비에에게 말을 걸었다.

“황녀 전하, 몸 상태는 조금 어떠신지요.”

올리비에는 그 말에 대답했다.

“그건 의사인 당신이 나에게 말해줘야 하는 게 아닐까 싶은데요.”

그 말에 의사가 흠칫했다. 침대에 상체만을 일으킨 채 의사를 바라보고 있는 황녀는 며칠 전,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의 손목을 칼로 쑤셔 동맥을 끊었다. 지독할 정도로 깔끔했다. 조금의 고민도 없었다는 걸 증명이라도 하는 것처럼 손목에 새겨진 상처는 깔끔했다.

“치료는 성공했습니다. 하지만, 과도한 출혈로 인한 부작용에 시달리시는 건 각오하셔야 할 것으로 사료됩니다. 또한, 왼손은 당분간 사용하지 않으셔야 합니다.”

“그런가요. 어쩔 수 없죠.”

대답을 마친 올리비에는 기억해두고 있던 정보들을 떠올려보기 시작했다. 피를 너무 많이 잃으면 머리에 손상이 생기는 경우도 있는데, 다행히도 올리비에는 그런 상황은 피하는 데 성공한 모양이다.

“밖에서, 로베르 그리즈만 경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황녀 전하께서 쓰러지신 이후로 삼일이나 계속 머무르고 있었습니다.”

“들여보내세요.”

의사가 돌아가고, 로베르 그리즈만이 들어왔다. 그는 살아 돌아오는 데 성공했다. 정확히 말하면, 올리비에가 하이랜더의 무덤을 열어젖혔을 떄 그 무덤 안에 로베르가 머무르고 있었다.

도리안이 휘몰아치는 눈보라 속에서 얼어 죽을 뻔하다 하이랜더의 무덤에 들어가는 데 성공했을 때와 비슷하게, 하이랜더의 무덤 안에 들어갈 수 있는 조건을 충족하는 데 성공했던 모양이다. 덕분에 로베르는 죽지 않을 수 있었고, 결국 구조되었다.

“올리비에.”

“당분간 왼손은 쓰지 못하는 모양이에요.”

약간 지친 것 같은 올리비에의 말에 로베르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의사에게 이야기는 들었어.”

“당분간 왼손 역할을 부탁할게요.”

올리비에의 말에 로베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필요한 게 있으면 말해줘.”

하이랜더의 무덤을 여는 데 성공한 올리비에의 모습은 전에 없이 수척했고, 피로에 찌들어 있었다.

올리비에는 무덤의 시체들 사이에 서 있는 로베르를 발견하자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었고, 구조된 다음 로베르가 머무르는 텐트 안에 찾아와 그를 끌어안고 울었다.

그 장면은 로베르의 마음속에 아직도 깊게 박혀있었다. 마틴 레드우드가 뭐라고 해도 올리비에는 자신을 사랑한다. 그런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그래도, 로베르가 실종되었을 때보다는 덜 힘들어요.”

“그렇게 말하지 마. 정말로 목숨이 위험한 일이었다고 들었어.”

사실, 올리비에가 그토록 잠을 자지 못하고 수척해진 이유는 로베르 때문이 아니다. 그저, 우연의 일치다.

올리비에는 마틴 레드우드가 하이랜더들에게 구조받은 다음 올리비에에게 답장을 돌려준 시점부터 서서히 컨디션을 되찾고 있었다. 로베르를 발견했을 당시에는 이미 어느 정도 몸 상태가 나아진 상황이었다.

“그래도 잘 풀렸잖아요? 덕분에 코랄린 관문을 뚫는 데 성공했으니까.”

“네 목숨을 걸 가치가 있는 일은 아니었다고 생각해.”

올리비에가 로베르의 대답을 듣고 작게 웃었다.

하지만, 최소한 로베르는 올리비에가 자신을 걱정하다가 수척해졌다 믿고 있었고, 올리비에도 로베르의 그런 믿음을 짐작하고 있었기에 적절히 활용하는 중이다.

살아있다면 큰 전력이 될 수 있는 남자니까. 올리비에를 바라보던 로베르의 눈에 뜨거운 감정이 일렁이기 시작한다.

올리비에는 짜증이 약간 솟는 걸 느꼈다. 이제 조용히 머리를 좀 굴리고 싶은데, 눈앞에 있는 저게 자꾸 짖고 있으면 방해된다. 우선 저거부터 얌전히 있게 하는 게 우선이다.

“그런 눈 하지 말라고 했던 것 같은데요.”

로베르가 그 말에 퍼뜩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아래로 푹 숙였다.

“심심해요, 뭔가 재밌는 걸 해줄 수 있나요?”

“내가 뭘 하면…….”

올리비에가 그 말에 웃으며 손을 뻗어 로베르의 턱 아래를 몇 번 긁었다. 마치, 강아지의 턱을 쓰다듬는 것 같은 손놀림이었다.

“예전에 한 번 크게 웃었던 적이 있었는데.”

올리비에의 말에 로베르가 침을 삼켰다.

“올리비에, 아무리 그래도 그건.”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절대로 하지 않을 일이죠, 알아요. 하지만 날 위해서는 해줄 수 있잖아요?”

한동안 고민하던 로베르가 천천히 옷을 벗고, 입고 있던 속옷을 모자 대신 자기 머리에 뒤집어쓴다. 그 모습을 보며 올리비에는 미소를 띤 채 웃는 시늉을 하며 다른 생각을 하기 시작한다.

마틴 레드우드는 코랄린 관문이 뚫릴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을 거다.

하이랜더라니, 확실히 올리비에로서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수였기에 굉장히 놀랐다.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었기에 다소의 위험을 감수할 필요가 있었다. 결국 마틴 레드우드는 올리비에의 몸에서 치사량에 가까운 피를 뽑아내는 데 성공했다.

어떻게 생각해보면, 올리비에를 가장 죽음에 가까운 장소까지 밀어 넣는 데 성공한 셈이다.

“문제는 그다음이지.”

올리비에의 중얼거림을 들은 로베르가 응? 하는 소리를 냈다. 올리비에는 손을 살짝 저으며 웃었다.

“혼잣말이에요. 조금만 더 힘내줄 수 있어요?”

그런 말과 함께 밤이 깊어가고 있었고, 올리비에는 눈앞에서 재롱부리는 웃긴 걸 바라보며 빈혈 기운이 도는 머릿속을 정돈하기 시작했다.

* * *

휴식을 마친 우리는 지시에 따라 아리아 방벽을 향해 행군을 계속하고 있었다. 이동하던 와중, 옆으로 다가온 겨울걸음이 입을 열었다.

“우리는 지금 뒤로 가고 있다. 싸움을 위해서라면 전진해야 하지 않나.”

하이랜더들의 표정이 별로 밝지 않다. 적지로 향하지 않는 지금의 상황이 썩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다. 싸우다가 후퇴하는 것도 아니고, 단순히 이동 경로가 전장에서 멀어지는 것뿐인데도 불구하고 하이랜더들 대부분은 불만을 토로하고 있다.

“싸우는 장소를 선택하기 위해서 이동하는 중이다.”

“적이 있고 내가 있으면 거기가 싸우는 장소다.”

그래, 틀린 말은 아닌데 그렇게 되면 니들은 후퇴하지 않겠지. 그렇게 둘 수는 없다.

“조금만 더 이동하자고. 적이 도착하게 되면 둘 중 하나는 끝장날 테니까.”

내 말에 겨울걸음이 어이없다는 듯한 대꾸를 했다.

“둘 다 살아나가는 싸움 같은 건 원래 없다. 당연한 말을 하지 마라.”

더 이상 할 말은 없는지, 겨울걸음은 대화를 마치고 다시 약간 떨어져서 걷기 시작했다. 수정구를 들고 있던 엘렌이 입을 열었다.

“코랄린 관문 뒤편의 예비거점, 뒤로 빠진 모양이야.”

“그래, 확실히 물러나는 속도가 좀 빠르긴 하네.”

10km에서 20km 정도. 매 싸움에서 피해가 발생할 것 같으면 예비거점의 아군 병력은 조금씩 후퇴를 거듭하는 중이었다.

“올리비에 황녀가 우리의 생각을 눈치채지 않을까?”

나는 그 말에 어깨를 으쓱했다.

“눈치챈다고 해도 방법이 없어. 녀석들은 결국 아리아 장벽으로 올 수밖에 없으니까.”

결국 베로나 제국의 군세가 왕도를 공격하기 위해 진군하면 아리아 장벽에는 부딪칠 수밖에 없다. 애초에 이 나라에서 아리아 장벽을 만든 목적 자체가 바로 그거니까.

베로나 제국은 결국 파이크 왕국의 입장에서는 잠재적인 적국이나 다름없었다.

그 경계심이 오랜 세월에 걸쳐 만들어낸 작품이 바로 왕도로 향하는 길목을 틀어막고 있는 최후의 보루인 아리아 장벽이다.

방호 마법이 걸린 세 개의 튼튼한 성벽과 너비가 15m, 깊이가 5m에 달하는 세 개의 공호가 파여있다.

성문은 반원형의 성벽으로 감싸놓은 소위 옹성이라고 불리는 방식이다. 그 이외에도 성벽에 사각이 없도록 일부분을 반원형으로 돌출시켜 두었고, 성벽 곳곳에는 탑이 세워져 있다.

거기에 더해 식수를 공급할 수 있는 우물도 다수 존재하기에 산에 자리 잡은 성이지만 급수에 문제가 없고,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왕도를 통해 빠른 속도로 보급품을 받을 수도 있다.

“아리아 장벽을 건설할 예산을 확보하는 와중에, 파이크 왕국의 경제가 통째로 휘청한 적이 있다고 들었어요.”

클로에의 말에 나는 혀를 한 번 쳤다.

“국가를 지키기 위한 성벽을 짓다가 나라 경제의 뿌리가 뽑혀 망했었다면 그것만 한 모순도 없긴 하겠네.”

다행히도 파이크 왕국은 망하지 않았고, 결과적으로 아리아 장벽은 우리가 유용하게 쓸 수 있게 되었다.

마침내, 저 멀리 산 위에 위치한 거대한 아리아 방벽이 눈에 들어온다. 보고 있으려니 기가 막히긴 하네. 왕국이 왜 저걸 짓다가 나라 경제를 말아먹을 뻔했는지 알 것 같은 느낌이다.

이 자식들 진짜, 제국을 엄청 무서워하긴 했던 모양이구나. 이 정도면 쿠르스트 산맥에 자리 잡고 있던 관문들은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다.

“아리아 방벽에 도착하게 되면, 바로 성역화 마법을 준비해줘.”

“문제없어. 맡겨두라고.”

꼭 엘렌이 필요한 건 아니지만, 실력 있는 마법사가 걸어놓은 성역화 마법이 더 효과가 좋다는 건 굳이 공부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사실이다. 미로스 제커빌 또한 엘렌이 도착한 다음 성역화 마법을 걸 예정이었고.

“돌조각과 철 쪼가리도 저 정도로 쌓아놓으면 제법 볼폼이 나는군.”

성을 바라보던 겨울걸음이 다소나마 인정하는 것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볼폼이라.

“우리가 싸우게 될 장소다. 여기가 밀리면 끝이니까, 모두 죽을 각오를 해야 할 거야.”

“나는 언제나 죽을 각오로 싸운다.”

대화를 하는 사이, 우리는 세 갈래의 길이 합쳐지는 산 아래의 국도에 도착했고, 그대로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깃발.”

내 말에 클로에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챙겨온 깃발을 양손으로 거머쥐고 높게 들어 올린 채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깃대에는 두 개의 깃발이 걸려 있다. 첫 번째 깃발은 당연히 왕국군을 상징하는 깃발이었고, 두 번째 깃발은 레드우드 가문의 문장이었다.

성문 근처에 다가간 나는 큰 목소리로 외쳤다.

“왕국 별동대의 마틴 레드우드다! 총사령관 미로스 제커빌 기사단장의 지시에 따라 아리아 장벽에 도착했으니, 성문을 열어라!”

그 말에 성벽 위에서 경계를 서던 병사들이 내 얼굴을 확인한 다음 외쳤다.

“마틴 레드우드 님, 잠시 기다려주시기 바랍니다!”

잠시 뒤, 병사들이 간부 한 명을 데려왔고, 내 얼굴을 확인한 간부가 크게 외쳤다.

“왕국의 방패 아리아 장벽에 온 것을 환영합니다, 마틴 레드우드! 다리를 내리고 성문을 열어라!”

곧바로, 강철로 빚어진 거대한 철문이 둔중한 소리를 내며 열리고 깊고 넓게 파인 공호를 지나가는 다리가 연결되었다.

“마틴 레드우드.”

여기가 무너지면 바로 왕도가 위험해진다. 당연히, 현재 왕국군의 총사령부 또한 여기에 자리 잡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성문이 열리자 그 너머에서 미로스 제커빌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미로스의 얼굴을 보고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미로스 제커빌 기사단장님. 오랜만입니다.”

“마음 같아서는 사사로운 이야기를 좀 나누고 싶지만, 상황이 그렇지 못하다 보니 어쩔 수 없네.”

미로스는 그런 말을 하면서 내 등 뒤에 쭉 서 있는 하이랜더들을 바라보고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세자 저하께서 국왕 폐하를 대신해 원군으로서 지위를 인정할 만한 위용이군. 이미 그 활약상은 보고로 들었지만, 종이 위에 써진 먹물로 아는 것과 직접 마주 보는 건 또 느낌이 틀려. 전부 안으로 들이게. 세자저하께서 승낙하신 이상 저들 또한 우리와 함께 싸워야 할 전우들이니.”

말을 마친 미로스가 앞장서 이동하고, 우리는 그 뒤를 따라 아리아 관문 안으로 진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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